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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가르침: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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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4-14 ㅣ No.546

[현대교회의 가르침] (12) '구원에 이르는 고통’ (1)


“고통 받는 인간 구원 위해 친히 수난하시는 하느님”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가 1984년 발표한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은 1983년 전 세계의 교회에 특별히 반포된 ‘구원의 성년’을 기념하여 작성, 발표된 문헌이다. 여기에는 인간 고통의 그리스도교적 의미에 대한 깊고 진지한 신학적 성찰이 담겨져 있다. 이는 오늘날 여러 가지 차원에서 발생하는 인간 고통의 실존적 이유를 묻는 심각한 질문에 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신학적 답변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고통 속의 인간 실존 

 

고통은 인간의 현세적 실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즉,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연속적인 고통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 안에서 고통은 여러 한계 체험을 통해 매우 다양한 양상과 차원으로 나타난다.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인생의 중대한 고비에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고민하게 되고, 때로는 깊이 낙담하여 좌절하기도 한다. 어찌해볼 수 없는 시련의 상황 속에 슬픔과 아픔을 느끼고 깊은 상실감에 젖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속세의 인생을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부른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풍랑이 이는 광대한 바다에서 한 작은 배에 몸을 싣고서 물결치는 대로 아슬아슬하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살이인지도 모른다. 폭풍우가 다가오면 강한 바람과 높이 솟은 파도에 두려워하고, 살아남기 위해 온통 물에 젖은 상태로 안간힘을 다해 노를 저어가는 그런 고통스러운 여정이 바로 우리네 인생살이라는 비유에 공감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이들이 모인 교회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성사로서의 교회는 고통 속의 사람들을 만나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현세 생활의 여정을 통과하면서 인간이 어떤 모양으로든 머나먼 고통의 길을 걷고 있기에, 바로 이 길에서 교회는 언제나 인간을 만나야 한다”(3항)는 것이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의 생각인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자비와 돌봄의 마음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인의 당연한 실존이자 사명이다.

 

 

인간 고통의 성서적 의미 

 

어떤 의미에서, 성경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6항)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는 다양한 인간 고통이 묘사된다. 자신이 마주하게 되는 병고와 죽음의 위협,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사별의 아픔, 특히 외아들과 맏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부모의 비통한 심정, 주변 사람들에 의한 박해와 위협,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조롱과 경멸, 처절한 외로움과 소외감, 왜 악인이 번성하고 착한 사람이 고통당해야 하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로움 등이 신구약 성경의 곳곳에서 표현된다. 

 

특히 구약성경의 시편과 욥기에는 이러한 고통에 대한 직접적 묘사가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시편 137장에서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강 기슭 거기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는” 고통이 생생히 묘사된다. 욥기에서는 “선을 기다렸는데 악이 닥쳐오고 빛을 바랐는데 어둠이 닥쳐오기에, 속은 쉴 새 없이 끓어오르고 고통의 나날은 다가오네”(30,26-27)라는 절규가 나온다. 사실, 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처럼 의인들의 고통을 허락하시고 악인들이 위세 부리며 살아가게끔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지 우리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시편과 욥기의 저자가 그토록 처절하게 질문했던 내용의 핵심이다. 

 

우리는 인간 고통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고자 하지만, 그 궁극적 의미를 지금 온전히 알 수는 없다. 때로는 나의 잘못과 죄 때문에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고통의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는 그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이 너무도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통의 의미를 설명할 수만 있다면, 이미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아직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하나의 신비인지도 모른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미몽과 어둠 속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기”(1코린 13,12) 때문에 그 고통의 의미를 아주 부분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오직 하느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때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할 뿐이다. 언젠가는 하느님 친히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눈에서 그동안 이 세상에 살며 흘려야 했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때가 오리라고, 그래서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때가 오게 되리라 믿고 희망할 뿐이다(묵시 21,3-4 참조).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지금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아픔에 관해서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고통을 모른 척 외면하거나 즐겨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너무도 지극히 사랑하시어 오히려 인간과 함께 깊이 마음 아파하신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아드님의 신비,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통 받는 우리와 함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친히 수난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의하면, 그 어떤 대답도 인간 고통을 자아내는 악의 기원과 존재 문제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라 말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악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실 수도 있었지만,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궁극적 완성을 향해 가는 ‘진행’의 상태로서 자유로이 세상을 창조하셨다(309-310항 참조). 그리고 그 진행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 스스로 아픔을 겪으시는 것이다.

 

 

인간 고통의 연대적 차원 

 

우리는 오늘날 인간의 실존적 고통이 분쟁과 전쟁의 상황과도 같이 집단적 차원에서 많이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이 곧 인간의 보편적 죄악성과 연결되어 있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고통이라는 현실은 악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제기”(7항)하게끔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인간 죄악의 역사적 보편성’이란 측면에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즉, 특정한 인간의 죄과는 다른 인간이 지닌 자유로운 상황에 연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류는 곧 하나이고, 인간은 매우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많은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여 죄짓게 만들고 고통을 겪게 하는 집단적인 ‘구조악’의 개념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 고통의 연대적 차원에 대하여 말한다. 죄악의 보편성에서 비롯된 인간 고통을 연대적으로 묵상하고 교회 공동체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고통의 세계는 많은, 매우 많은 주체들 속으로 나누어져 들어가서 이를테면 ‘산재’하고 있습니다. 각 개인이 각자의 고통을 통하여 이 ‘세계’의 작은 일부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세계’가 그 사람 안에 하나의 무한하고도 둘도 없이 유일한 실체로서 현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인간 상호 간의 사회적 차원도 있습니다. 고통의 세계는 이를테면 그 ‘고유한 연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통의 세계는 ‘산재’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 안에 ‘소통과 연대’라는 단일한 요청을 내포하고 있습니다.”(8항) 

 

오늘의 그리스도교 신학은 온 인류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보편적 죄악성에 대해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한 형제자매의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 헌장’은 이처럼 고통과 악의 실재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보편적 실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인간이 제 마음을 살펴볼 때, 선하신 자기 창조주에게서는 올 수 없는 악에 기울어져 있고 수많은 죄악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흔히 하느님을 자기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궁극 목적을 지향하는 당연한 질서마저 무너뜨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조화를 깨트려 버렸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삶은 개인 생활이든 사회 생활이든 참으로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극적인 투쟁으로 드러난다. 더욱이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악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이겨 낼 수 없음을 깨닫고, 또 누구든지 저마다 사슬에 묶여 있는 것처럼 느낀다. 죄는 인간을 위축시켜 완성을 추구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13항)

 

*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박준양 신부는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4월 13일, 박준양 신부]

 

 

[현대교회의 가르침] (13) ‘구원에 이르는 고통’ (2)


고통 함께 나누는 ‘공동체 영성’으로 구원 동참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년)는 1984년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을 통해 인간 고통의 의미에 대하여 말한다. 특히 현대의 보편적 고통에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현대 문명의 과오와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의 자멸조차 초래할 수 있을 만큼 유례없는 고통의 축적”이 이루어졌음을 지적한다. 이는 “고통의 세계가 우리네 시대에 있어서는 아마도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하나의 특별한 세계로 변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유례가 없이 인간의 노력을 통한 진보에 의해 변형되어 온 세계인 동시에, 역시 유례가 없이 인간의 과오와 범죄로 말미암아 위험에 처해 있는 세계”라는 진단을 내린다(8항 참조).

 

 

고통의 의미 문제에 대한 해답의 추구 

 

오늘날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깊이 체험하고 있는 까닭에, 그러한 고통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해답의 추구 역시 매우 절실해진다. 그래서 먼저 성경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로서, 죄에 대한 벌로서의 고통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구약 성경에는 고통이 우리의 죄에 대한 벌로서 찾아오게 되었다는 해석이 나오지만, 동시에 벌로서의 고통이 지닌 교육적 가치를 또한 강조하기도 한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택된 백성에게 내리시는 고통들 속에는 그들을 회개시켜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자애로운 섭리와 초대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벌은 범죄라는 객관적 악을 또 다른 악으로써 응징하는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인간 주체 안에 선을 재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성해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주어지는 벌을 통해 죄를 뉘우치는 회개에로의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고,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게 된다(12항 참조). 즉,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정의로 인간의 죄를 벌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잘못한 인간을 내치지 않고 회개에로 인도하는 자비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하지만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원천인 하느님 사랑에 주목해야만 한다. 사랑은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모든 고통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근본적 원천이라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한다. 즉, 사랑은 고통의 의미 문제에 대한 해답의 가장 충만한 원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비를 통해 그 직접적인 해답이 주어졌다고 설명한다(13항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유를 주셨으나, 인간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의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사랑 때문에 당신 아드님의 고통을 허락하셨고, 이로써 인간을 파멸시키는 결정적 악에 대항하여 그 결정적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하고자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고통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에 도달하였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고통을 정복하였기에, 이제 인간의 고통은 온전히 새로운 차원과 질서에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18항 참조).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고통의 심연을 겪으시며, 고통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셨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신비를 통해, “인간 누구나가 구속 사업에 있어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 모두가 구속 사업이 성취하게 한 그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한다. 즉, 모든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고통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19항 참조). 

 

바로 이러한 새로운 고통관, 역설적인 구원의 고통관을 사도 바오로가 힘차게 증언한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코린 4,8-11.14)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성장하여 굳세어진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받게 되는 고통과 연결된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2테살 1,3-5)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라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실현을 위해 투신하다가 고통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느님의 눈에는,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고통을 통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지닌 무한한 값을 어떤 의미에서 다시 치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지닌 값은 우리를 구원하는 속전(贖錢)이 되었습니다. 즉, 이 값이 치러짐으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새로이 공고해지게 되었으며, 지상에서의 인간 실존에 결정적인 전망이 펼쳐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이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에 감싸인 사람들도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하게 됩니다.”(21항) 

 

그러므로 고통은 인간의 정신적 위대함과 영적인 성숙을 드러내라는 하나의 초대일 수 있다. 이러한 영적 성장의 모범이 세세대대를 통해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에 의해 드러난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베풀어진 하느님 구원능력의 역사하심에 특별히 ‘민감해진다’는 것, 특별히 거기에 ‘마음을 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23항)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한다. 시련과 고초 속에서 성령을 받아 인간이 영적으로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소명이자 특권인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특권적 소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29-37 참조)는 ‘고통의 복음’, 즉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강도들을 만나 폭행을 당하고 길에 쓰러져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서 사마리아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멈추어 선다.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서 마음이 움직이는 사마리아인의 ‘자비심’이다. 우리 모두 이 자비심, 즉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길러야 한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강조한다. 바로 이 자비심으로부터 자신의 시간과 재물,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구체적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비참한 인간 고통의 세계는 역설적으로, 인간 본연의 사랑의 세계에로 우리를 인도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 덕분에 인간은 마음과 행동을 자극하는 몰아적인 사랑을 얻기”(29항) 때문이다. 고통을 직접 겪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서 ‘멈추어 설’ 줄 알아야 하며, ‘가엾은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영적 민감성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영적 감수성은 자신 스스로의 고통 체험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 즉 영적 민감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교회의 역할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들과 특별히 결합하여 살아야 한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강조한다. 현대 세계가 드러내고 있는 선과 악의 극심한 교차와 투쟁 속에서 우리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합하여 마침내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축원으로 ‘구원에 이르는 고통’(1984)은 끝을 맺는다. 이러한 요한 바오로 2세의 간절한 축원은 30년이 지난 지금 2014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어쩌면 더욱 빛을 발하는 축원인 듯하다. [가톨릭신문, 2014년 4월 20일, 박준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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