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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에서 배운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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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3 ㅣ No.510

[교회사에서 배운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설립


유럽이 형성되어 그리스도교 문화의 중심이 된 역사적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가운데 가톨릭 교회가 가장 많은 신자 수(2008년 말 현재 11억 6천5백만 명)를 자랑하고, 특히 타 교파들과 달리 현대사회의 문제들과 교회와 영성적 요구에 다양한 수도회들을 통해 응답하고 있는 교회사적 기원에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역사적 활동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성 베네딕토 시대의 역사적 배경

베네딕토 성인(Benedictus, 480년경-547년경)은 게르만 민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이 추락하고, 윤리도 퇴락해 가던 고대 말기인 동시에 중세의 여명기에 살았다.

고대의 로마 민족을 대신하여 새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는 게르만 민족의 패권을 장악하려던 동고트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게르만 부족들은, 아리우스주의에 물든 이단적인 신앙이나 이교에 빠져있었다.

비록, 게르만 민족의 패권을 잡게 되는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가 496년에 세례를 받고 그 백성들이 정통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후에도 이교적 관습은 지속되고 있었고, 아리우스주의도 5-6세기 이탈리아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전반적인 분열과 침체의 파괴 시대에 베네딕토는 일치와 조화의 건설자로 활동한다.


베네딕토의 생애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에서 태어난 베네딕토는,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 왕(Theodoricus, 454?-526년)이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사라진 로마 고전문화 부흥에 열의를 보이던 시기에 로마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로마의 타락을 목격하고, 당시 교회의 아카키우스 분열(484-519년), 그리고 교황좌의 분리(498-506년)가 일어나는 즈음,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고자 496년경 로마 근교 엔피데로 물러난다.

그 뒤 수비아코에 있는 아니에네 계곡의 동굴에서 3년간 은수생활을 했다. 그의 명성이 퍼지면서 인근 비코바로의 한 수도원의 아빠스가 되었고, 수도원을 쇄신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베네딕토는 수비아코로 되돌아와 계속해서 덕행에 나아갔는데, 제자들이 몰려오자 각각 12명의 수도승들로 이루어진 12개의 작은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은 중심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으면서 다른 11개의 수도원들을 간접적으로 지도했다.

그러나 인근 본당의 한 사제가 시샘하여, 베네딕토는 529년경 몬테카시노(Monte Cassino)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베네딕토는 한 원장 아래 있는 수도승들이 수도원 안에서 완전히 공동 수도생활을 하면서 고독한 관상보다는 공동의 성무와 노동에 종사해서 영적, 물질적으로 자급자족하는 큰 수도원을 설립한다.

이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베네딕토회의 요람으로서, 오늘날까지 베네딕토회의 총모원으로 존재하고 있다. 베네딕토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 이교도들이었던 그 지역주민의 대다수를 개종시킨다.

547년경 열병에 걸려 쇠약해진 베네딕토는 제대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성인은 자신의 온 삶을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사랑으로 인도하였다.


베네딕토 수도규칙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설립한 것보다 더 큰 베네딕토의 역사적 공헌은, 생애 후반기(530-540년)에, 앞으로 서방수도승 생활의 규범이 될 자신의 유일한 저서 「베네딕토 수도규칙」을 저술한 것이다.

이 규칙서는 베네딕토 이전의 수도승 생활의 긍정적인 면을 수용하면서도 동방 수도승 생활의 과격함과 오류들을 수정함으로써 수도생활 이론과 규율을 잘 조화시켰다. 또한, 수도생활과 세상이 분리되지 않고 대화하게 하였기에, 모든 시대 모든 이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렇게 교육학적 지혜와 중용의 정신을 지닌 수덕주의와 적응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 규칙서는, 그 내용의 우월성과 더불어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후원과 수도승들의 선교 열정으로 점차 서방 수도승 생활의 보편적 규범이 된다.

베네딕토의 아니에네 수도승 생활 개혁 이후, 서방의 수도승들은 오직 베네딕토의 규칙만을 독점적으로 지키게 되어 수도승은 곧 베네딕토회 수도승과 동일시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등장하는 13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베네딕토 수도규칙은 이후에 생겨난 서방교회 대부분의 규칙서들에도 영향을 주었고, 현대교회에서도 대표적인 수도규칙으로 인정받고 있기에 베네딕토를 ‘서방 수도승 생활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베네딕토회 수도승 생활과 그 역사적 의미

중세 유럽 문화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명’, 로마 제국을 침입한 ‘게르만 민족’ 그리고 구원 신비의 전달자일 뿐만 아니라 고대 문명의 보존자인 ‘교회’란 세 요소들이 수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던 대화의 열매였다.

베네딕토회 수도승들은 고대 말엽과 중세 초기에 게르만 민족의 개종, 교육과 문화의 전수, 보급, 창달에 크게 이바지함으로써 교회와 그리스도교 중세 유럽 형성의 숨은 주역들이 된다.

은수자들이나 독수도승들처럼 ‘홀로’가 아닌 ‘함께’ 사는 공동 수도생활을 강조한 베네딕토는 공동생활을 위해 한 수도원 안에 머무는 ‘정주’(Stabilitas)를 요구했다.

정주는 당시의 동방 수도승들과 적지 않은 서방 수도승들의 무분별한 원외 외출과 떠돌이 생활을 근절한 결정적인 개혁이었다. 중세 유럽의 장원제와 문명화도 정주한 베네딕토회 수도원들의 자급자족생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 따른 유랑생활의 불안이 특징적이었던 당시에, 떠돌아다니지 않는 정주 수도승들의 존재와 행위는 당시 사회를 반성하게 하는 귀감이었듯, 핵가족들의 파편화된 개인적 일상이 보편화된 현대 가족관계에서 공동체적 가치와 관계 형성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베네딕토회 생활은 현대에 더욱 귀중하다고 볼 수 있다.

529년 아테네의 마지막 플라톤 철학학교가 유스티니아누스1세 황제(Iustinianus, 527-565년)에 의해 문을 닫았다. 그 직후(529/530년경)에 베네딕토가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이란 새로운 그리스도교 학교를 열어 새로운 교육이 시작된 것은 그 의미가 매우 지대하다.

수도승 생활 전통에 따라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인 베네딕토회 수도승들의 삶의 궁극목적은 ‘하느님께서 모든 일에서 찬미받으시도록 하는 것’(ut in omnibus glorificetur Deus)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학원’(schola Dominici servitii)이다. 이 학원에서 수도승들은 형제를 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평생 배우고 익힌다.

엄격한 계급 구별(자유인과 노예)과 로마와 게르만이란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갈등이 있던 시대에 베네딕토 수도원은 이런 차별과 분리를 없애 평화를 이루려고 애썼다.

수도승들이 한 수도원에서 한 형제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자 분투하는 삶의 형태를 건설한 그의 업적은, 일치를 필요로 하는 현대사회에 더욱 요청된다.

고전 인문학교들을 대신하여 세워진 수도원 학교들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고, 수도승들은 여러 문헌들을 필사, 번역, 보존한다. 느리지만 점차 문화적인 담론이 새롭게 형성되어 간다.

이렇게 해서 베네딕토회 수도승들은 민족 대이동에 따른 참화로부터 교부시대와 고전고대의 값진 유산을 구출해 냄으로써, 고대와 중세, 동방과 서방을 잇는 고리가 되었다.

한편, 베네딕토회 수도승들은 ‘공동 전례 기도’(Opus Dei, 하느님의 일)와 ‘노동’과 개인 기도인 ‘성독’(lectio divina)을 통해 하느님을 섬긴다.

‘기도’와 ‘일’과 ‘독서’란 세 요소를 조직적으로 연관시키는 동시에 영혼과 육체와 정신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한 베네딕토의 통찰은, 영육의 부조화 속에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과 신앙인들에게 시사하는 것이 많다.

베네딕토회 수도승들은 유럽의 미개한 주민들에게 경작방법을 가르쳐 경제적인 번영과 물질적 진보를 가져오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노동을 천시하고 일하기 싫어하던 당시 사회에서 노동을 성화의 도구, 기쁨의 원천으로 삼은 것은 로마인들의 태만과 게르만인들의 호전성에 대한 도전적 응답이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승들의 업적은 세 가지 상징들로 요약할 수 있다.

곧 “십자가(그리스도교 신앙 전파), 책(서방 문화의 개척과 보존), 쟁기(문명과 새 정착지의 발굴)가 그것들이다.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베네딕토 수도원 하나가 지식운동에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합해놓은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정도이다”(독일 신학자 알프레트 라플레).


맺는말

베네딕토는 평생 이탈리아 중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베네딕토 수도규칙을 따르는 수도승들이 중세 때 많은 유럽 국가들을 복음화하고 문명화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고려해 바오로 6세 교황은 1964년 베네딕토를 ‘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후 약 50여 년이 흐른 지금, 베네딕토와 그 수도회의 역사적 의미가 퇴색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다. 2005년 제265대 교황으로 선출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베네딕토’란 교황명을 선택한 사실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오늘의 유럽연합을 이루고 있는 서유럽의 게르만인들과 라틴인들과 동유럽 슬라브인들 사이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서, 사회와 교회에 필요한 이민족 사이의 형제애가 실현되었던 베네딕토 규칙서의 평화정신이 귀감이 되기 때문에 현 교황은 ‘베네딕토’란 교황명을 선택한 것이다.

유럽은 오늘날 5대륙 가운데 유일하게 1.17%로 신자 증가세가 미미하고, 사제와 수도자 수도 급감하고 있으며, 신자들의 주일 준수도 매우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 유럽의 그리스도교화에 큰 영향을 미친 베네딕토와 그 수도승들은, 유럽의 재복음화를 위한 가장 큰 모범이라 하겠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던 유럽에 종교적, 영적 응집력을 창조해 낸 베네딕토 성인과 그 수도회는, 특별히 또다시 정체성과 문화적 위기에 봉착한 오늘의 유럽이 절실히 배워야 할,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역사적 현실이다.

* 오윤교 아브라함 - 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원 신부.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회사를 전공했으며, 성베네딕도왜관 피정의집 책임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4월호, 오윤교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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