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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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장일순 안의 가톨리시즘, 1953~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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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0-22 ㅣ No.1452

장일순 안의 가톨리시즘, 1953~1980

 

 

국문 초록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는 전래 초기부터 자발적으로 사목에 참여하고 능동적으로 사회변혁을 지향했던 평신도들의 실천적 영성의 전통이 존재한다. 이러한 평신도 영성의 유산은 1970년대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 정치적 참여에서도 드러난다. 장일순(張壹淳)은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지학순(池學淳) 주교와 함께 1960년대 중반부터 교회 안에서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과 정치적 저항의 배후에서 활동한 실천 지향의 평신도 사상가이다.

 

최근까지 다수의 연구가 장일순의 말년의 사유와 활동에 드러나는 동양철학과의 관계라는 단일한 입장으로 그를 조망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장일순 이해를 재고해야 한다. 본고의 목적은 기존의 연구가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전쟁 이후 장일순의 활동과 생각이 전개된 과정을 가톨리시즘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원주라는 제한된 공간과 역사적 맥락에서 가톨릭 신자 장일순이 개인을 둘러싼 상황을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하였고, 어떻게 역사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고유한 생각을 창조하고 실현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인식과 이해의 재조정은 논쟁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장일순의 활동에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과 그의 사상에서 가톨리시즘의 중심성은 그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장일순이 지학순 주교를 만난 1965년 이전부터, 원주로만 귀속되기 어려운 시·공간적 배경에서 지적·실천적으로 축적되어 온 가톨리시즘의 영향은 1970년대 본격적으로 교회의 사회참여와 저항의 과정을 통해 장일순에게 ‘가톨릭적 저항’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1. 머리말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들 가운데 종교인구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나라에 속한다.1) 이러한 사실과는 별개로,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를 포함한 주요 종교들의 교세는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범박하게 말해, 교세 하락의 근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 사회의 다양한 층 위에서 이루어진 변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외부 환경이 천주교회에 불리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수동적인 진단은 문제 해결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천주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사목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성찰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사목의 방향과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사목의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사회복음화를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바티칸과 내부의 보수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왜소화되었다. 역사적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1970년대 태동하던 민중운동의 중요한 한 축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일선에 서 있었다. 다양한 사회적 층위에서 교회는 자신이 가진 자원을 자발적으로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참여하고 저항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역사 속에서 교회가 현재를 진단할 수 있는 함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5년 바티칸을 방문한 한국 주교단에게 “역사적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평신도들에게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라.”고 말했던 것처럼,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의 자발성에 기초하여 사회변혁을 지향했던 실천적 평신도 영성의 전통 위에 서 있다.2) 그리고 이러한 평신도 영성은 1970년대 한국 천주교회의 정치적 저항과 사회참여의 배경에도 존재하고 있다.

 

장일순(張壹淳, 요한, 1928~1994)은 1928년 원주에서 부유한 집안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역에서 두루 인심을 얻었던 그의 조부 장경호(張慶浩)는 장일순이 평생 스승으로 생각했던 인물로, 서울을 오가며 독립 운동가들과도 교분이 있었다.3) 장일순은 어려서부터 이 집안의 식객이었던 차강 박기정(朴基正, 1874~1949)에게 서화를 배웠다. 불교를 신앙하는 집안이었지만 장일순이 아홉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난 형의 유언에 따라 그의 가족은 차례로 천주교로 개종하였고 장일순 역시 평생을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장일순은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투쟁에 참여하여 제적되었고, 1947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다시 입학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그는 고향 원주로 돌아와 대성학교 설립에 힘을 모았고, 1958년 무소속으로,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1961년 5월 장일순은 과거 정치참여 전력과 중립화통일론(中立化統一論) 주장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의해 구속되었고, 3년여 만에 출옥하여 원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1921~1993) 주교와의 만남을 계기로 협동조합운동, 평신도 사도직 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농민운동, 생명운동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을 배후에서 이끌다가 1994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까지 장일순에 관한 연구들은 동양사상의 관점에서 그의 활동과 생각을 읽고 재구성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4) 동양철학자 전호근(田好根)이 한국 현대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장일순을 소개하며 언급한 내용은 장일순에 대한 기존 연구의 큰 틀을 규정하는 것 같다.5) 한국 현대사에서 사회정치적 상황이나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장일순의 생각을 구분하여 검토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실제로 그와 가까웠던 이들이 바라보는 시각과는 차이가 있다. 일례로 그의 삼남 장동천은 장일순의 생각을 이론화하거나 시기를 구분하고 체계화하여 정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6)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가 사료적 빈곤을 포함하여 다양한 이유로 놓치고 있던 한국전쟁 이후 장일순의 활동과 생각의 변화 과정을 가톨리시즘이라는 특정한 관점에서 검토하려고 한다.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에서 제기하는 ‘가톨리시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히 정의하려고 한다.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가톨리시즘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되고 세상 끝까지 존속토록 정해진 역사적 현실로서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믿음, 전례, 도덕”을 아우르는 천주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의미한다.7)

 

따라서 본고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의 원주라는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가톨릭 신자 장일순이 ‘하느님의 신비’이며 세상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해야 할 의무와 권리를 지닌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어떠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통해 그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였는지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그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지학순 주교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1965년을 기점으로 시간을 구분하여, 가톨릭 신자 장일순의 활동과 사유 안에서 가톨리시즘의 특징과 요소들이 어떻게 태동하였고 또한 변용되었는지 추적하였다.

 

 

2. 장일순 안의 가톨리시즘의 태동(1953~1965)


1) 정치적 도전과 실패

 

정전협정이 난항을 거듭하던 시기, 거제도에서 군속으로 복무하던 장일순은 1953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원주에서 중등 교육을 받을 여유가 없는 초등학교 졸업생들을 위한 비인가 학교인 성육고등공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공부한 학생들은 졸업장을 받을 수도 없었고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도 없었다. 장일순은 기존의 교장이 학교를 떠나자 교사들과 함께 학교를 인수하여, 1954년 3월 대성학교로 이름을 고치고 직접 운영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교명은 아마도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침략과 식민지배의 마수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던 시기, 1908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한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무실(務實)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는 국권 회복과 민족을 위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기반을 둔 교육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하였다.8) 대성학교는 종립 학교도 아니었고 종교교육을 실시하지도 않았다. 장일순은 교회에 충실한 신자였고 주변의 많은 친구와 제자들이 그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지만, 실제로 그는 평생 전교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9) 장일순의 개인적 신앙과는 별개로 대성학교의 교시를 ‘참되자’로 정한 것도 안창호의 민족교육론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장일순은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는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민족주의 운동 단체인 흥사단에 대해 학생들에게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10) 이런 점에서 전후 고향에 돌아온 장일순은 안창호의 전인교육, 교육구국, 민족교육과 같은 당위에 크게 공감했던 것으로 보인다.11)

 

여기서 교육가로서의 장일순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제하에서 민족교육에 헌신하여 그 필요성을 강조했던 다수의 보수적 민족주의자 그룹이 해방 이후 한민당에 참여했지만, 장일순은 교육에 대한 그들의 주장에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장일순은 1958년 제4대 민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낙선하였다. 1960년 7·29 총선에서는 4월 혁명 이후 혁신 세력을 망라하여 창당한 사회대중당이 내세운 121명의 후보 중 한 명으로 중립화통일론을 주장하며 원주에서 출마하였지만 다시 낙선하였다.12) 앞서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부정으로 얼룩졌고 전국적 시위로 이어졌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13) 한국 사회는 이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열린 공간이 되었고 이승만 정권 아래 어떠한 헤게모니도 획득하지 못했던 세력들에게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보수적 양당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회대중당은 이러한 정치적 조건에서 만들어졌고 좌파적 급진주의에서 민족주의에 이르기까지 이념과 노선이 다른 다양한 세력들로 구성되었다.14) 사회대중당은 1951년 7월 발표된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따라 민주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영세 중립화를 위한 통일운동에 매진할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4·19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극에 달하는 상황에서도 대중에게는 혁신 정당의 통일론은 위험하고 급진적이며 심지어는 반역적인 주장으로까지 간주되었다. 중립화통일론과 남북 협상론을 주장했던 혁신 세력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팽배했던 한국 사회에서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장일순의 동생 장화순은 1950년대 장일순의 행보에 대해 가족들 안에서 강한 우려와 반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장일순의 낙선과 5·16 쿠데타 이후 그의 가족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직면하였고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15)

 

장일순이 사회대중당 후보로 입후보하게 된 동기는 단순히 사회대중당 간사장이었던 윤길중과의 친분 때문만이 아니었다. 1950년대 말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 소유 언론인 『경향신문』을 통해 야당인 민주당을 전반적으로 지지하였다.16) 4월 혁명 이후 장면 정부의 등장과 정치적 변화를 감안하면 천주교 신자였던 장일순에게는 민주당 후보가 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장화순도 장일순의 친구 중 한 명이 그에게 민주당에 합류하라고 조언했다고 전하지만, 김지하는 장일순이 해방 이후 여운형과 조봉암 같은 민족주의자들이나 지역의 혁신계열 인물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사실을 언급한다.17) 실제로 감리교 목사인 이현주 역시 장일순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형당한 조봉암의 이야기를 하며 애읍하였다고 말한다.18) 반면 장일순과 원주에서 다양한 사회운동을 함께 했던 이들은 장일순과 조봉암을 비롯한 혁신 정당과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어떠한 자료도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그 연관성을 현재까지 부정하고 있다.19) 여기서 분명한 건 장일순이 1950년대 이승만 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이다.20) 당시 정권은 학원의 운영과 교육에 대해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바탕으로 학교교육을 종속화·도구화하려 시도하였기에, 학교를 운영하는 교육가 장일순의 입장에서는 출마의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했을 것이다.21) 또한 정치적으로 1958년 5·2 총선을 앞둔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을 구속하고 진보당 등록을 취소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장일순도 첫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김용우가 지적하듯이, 이승만 정권을 지나며 장일순은 한국 사회와 기존 정치세력에 대해 사뭇 비판적이었고, 중립화통일론을 주장할 정도로 이념적으로는 진보적이었다.22)

 

끝으로, 만일 장일순이 통일운동을 제외하고도 사회대중당의 이념 노선에 부분적으로 동의했다면, 1970년대 말 장일순의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진 동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대중당은 소련식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반대하였다. 장일순 역시 1980년대 초부터 이념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계급투쟁 논의에 경도된 학생운동을 비판하였다.23) 물론 장일순이 극단의 이념 갈등이 초래한 한국전쟁을 실제로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가 20세기 내내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교회의 태도와 신학적 입장을 동일선상에서 바라보았는지는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2) 실패가 가져온 변화

 

장일순의 정치적 도전은 짧은 시간에 그와 그의 주변에 상상하지 못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절차적·정치적 정당성이 부족했던 군부 세력은 장면(張勉) 정권하에서도 실현되지 못한 사회개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알고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혁명 공약을 발표하여 기존의 부패한 정치 세력과 혁신 세력을 묶어 제거를 시도했다. 쿠데타 3일 만에 장일순은 사회대중당 참여 전력과 중립화통일론을 공공연히 설파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24) 이 일로 장일순의 가족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버지도 그가 석방된 직후 질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25) 부모가 구몰하고 주변 환경이 적대적으로 바뀌면서 장일순의 삶에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아내 이인숙은, “잘 우시는 편이었어요. 시내에 나가셨다가 술에 취해서 돌아오시면 우시는 일이 종종 있었어요. [중략]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할 때, 자주 우셨어요.”라고 회고했다.26) 이렇게 장일순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27) 한때는 강직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청년 신자 장일순은 저항과 도전에서 떠밀리듯 멀어지자 방에서 먹물을 갈았고 밭에서 포도를 키웠다. 장동천은 그 시절부터 그의 아버지가 스스로를 농부로 여겼다고 기억한다.28)

 

여기서 한국전쟁 이후 원주로 돌아온 가톨릭 신자 장일순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그가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의 단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장일순은 결혼을 앞둔 1956년부터 레지오 마리애 주간 회합에 참석했다. 또한 원동 본당 쁘레시디움의 초대 단장으로 원주교구 최초의 레지오 마리애 평신도 지도자이기도 하였다.29) 레지오 마리애는 1921년 아일랜드에서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설립되었고 1953년 한국 교회에 소개되었다. 장일순이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국가 평의회인 세나투스가 승인된 1958년 이전부터 평신도 운동의 최전선에서 봉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다소 모호한 점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은 세상과 단원들의 성화를 통해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그리스도교가 윤리나 성사보다 한 사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기초한 종교라는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나아가 이들의 영성은 단원들이 만나는 개개인에게서 그리스도의 표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하고 있다.30) 이처럼 초기의 레지오 마리애는 신자로서의 정체성과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논쟁적일 수 있지만, 이러한 의미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초기 리더로 봉사하며 전후 교육자로 학교를 운영하였던 장일순이, 이승만 정권의 도구로 전락하기 시작한 교육 현실을 개탄하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는 점은, 초기 레지오 마리애의 사회적 지향과 연관하여 사회변혁의 희망과 책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그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상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정치적 도전은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실패로 끝나게 된다. 장일순은 자신의 실패하고 무의미했던 도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렇게 정치에 참여했으면 3년도 못 가 도둑놈이 됐을 겁니다. 정치구조가 그렇게 돼 있어요. 그렇게 되면 소망했던 일을 할 수 없고. 또 하나는 나와 함께 가는 분들, 가르쳤던 학생들에 대한 배신이지요. 그것은 내가 생활해오며 만난 사람들에 대한 배신일 뿐만 아니라 겨레에 대한 배신입니다.31)

 

정치적으로 장일순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교육가로서 그는 자신이 품었던 사회적·종교적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실패의 경험을 통해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에 새삼 충실할 수 있었고 신앙적 의심과 외부의 비판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통해 원주교구 안에서 “소망했던 일”과 이상을 추구할 이유를 찾았다.32) 이런 의미에서 젊은 시절 낙선의 경험은 그가 말년까지도 정치적 환경과 사회적 조건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원주에 남아 넓은 의미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정리하자면, 1950년대 장일순은 스스로를 교육가로 생각했으며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앞서 검토한 것처럼, 이 시기 그의 정치적 도전은 특정한 종교적 자의식에서 출발하였고, 이념적 지향에서 어느 한쪽으로 편향된 엘리트 집단이 이끄는 정치 현실의 한계를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요컨대 그가 경험한 정치적 실패는, 단정하기에는 이르지만, 장일순이 평생을 통해 ‘정치적 참여 행위자(engaged political actor)’가 아닌 종교성과 영성에 대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참여적 관찰자(participative observer)’의 역할에 보다 충실하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33)

 

(장일순) 선생은, 무엇보다도 진인이었다. 속류 과학주의와 속류 유물론과 유사종교적이고 혹세무민적이며 종교적 신비주의에 그리고 추상적 형이상학만이 어지럽게 춤추는 판에서 대중성 · 민중성 · 소박성 · 일상성 속에 들어있는 거룩함을 되찾아내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한 몸뚱어리의 두 이름으로 더불어 함께 영적 진보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 길밖에 길이 없다는 것을, 순평한 입말로 남겨준 선생이시다.34)

 

 

3. 장일순의 가톨릭시즘 내면화(1965~1980)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위시한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총리 장면은 천주교 서울대교구로 피신했다.35) 이튿날 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다. 이어 전국에서 반체제인사들의 분류와 검거가 시작되었다. 장일순은 쿠데타 주도 세력인 군사혁명위원회의 용공세력 색출 지시에 따라 사회대중당에 참여했던 전력과 중립화통일론을 공공연하게 주장했다는 이유로 쿠데타 사흘 만에 수감되어 8년 형을 선고받은 후 서대문과 춘천에서 복역하고 1963년 출소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포도 농사를 짓고 서예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 이인숙의 회고처럼 물을 거슬러 오르기보다 물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36)

 

이런 장일순에게 삶의 전환점이 된 사건은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하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가 한창이던 시기 천주교 원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지학순 주교와의 만남이었다. 이후 원주교구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장일순은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사건의 개입과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37) 그리고 1977년을 기점으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시기를 지나며 기존 사회운동의 방향과 성격에 대해 재고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과 교류하며 그를 곡비(曲庇)하였고 장일순의 사상은 교회의 가르침과 상호작용하며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앞서 나열한 사실들은 19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며 장일순의 사상이 가톨릭시즘, 더욱 엄밀히 말해 공의회가 가져온 현대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38)의 전개와 발전 과정과 연관되어 변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장에 본격적으로 논의하겠지만 1970년대 한국 천주교회의 정치적 저항은 공의회의 신학적 · 사목적 유산과 깊이 관련이 되어 있다. 이 시기 교회의 저항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가는 과정에서 직면한 사회정치적 억압에 대한 실천적 응답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현대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교회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포함하는 사회정치적 참여를 장일순의 ‘가톨릭적 저항’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1) 장일순과 지학순 주교의 만남

 

1965년 장일순은 그의 인생에서 전기(轉機)를 마련한 인물인 지학순 주교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 이후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사목적 협업(pastoral collaboration)’은 어떻게 지방 소도시의 ‘용공인사’에 불과했던 장일순이 지학순 주교와 같은 공의회 이후 교회 내부 개혁 세력의 지지를 받고, 1970년대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 그룹의 하나였던 이른바 원주그룹의 배후 지도자가 되었는지 설명해 준다.39) 1965년 3월 22일 바티칸은 한반도에서 14번째 교구로 원주교구를 설정하고 지학순을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였다.40) 당시 지학순은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에 참석하고 있었고 공의회 정신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에 기초하여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혁을 사목의 방향으로 삼았다.41) 장일순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원주교구에서 지학순 주교의 사목 활동을 도울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추천되었다고 한다.

 

60년대 중반이 좀 넘어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군사정권의 횡포를 상대해서 그것을 대적할 만한 힘을 어떻게 구축해내야 할까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불교는 회중이 자주 모이지 못하고, 천주교나 개신교나 이런 예수를 믿는 교파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니까 예수의 건전한 말씀의 뜻을 따르는 생활 유도를 하면 삶의 에너지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략]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그 무렵에 천주교 원주교구가 준비 중이었고 지학순 주교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던 와중에 물색하고 물색하다가 나를 만나게 된 거죠. 그때 지학순 주교가 교회를 제 모습으로 이끌어가야 할 텐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그러데요. [중략] 그래서 이제는 교회가 하느님을 믿는, 예수를 믿는 사람 모두의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려면 교육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또 하나는 교회 자체가 자치의 틀로 질서가 바뀌어야 될 것이라고.42)

 

장일순은 1950년대 교육가로 활동하면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때처럼 여전히 교육에 대한 열의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학순 주교에게 평신도들의 교육을 중시하는 사목 활동이 필요하다고 조언하였다. 한살림을 창립한 박재일에 따르면 장일순에게 교육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나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선생이 학생이 되기도 하고 학생이 선생이 되기도 하는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였다고 한다.43) 이러한 장일순의 교육관은 교육과 운동을 병행하여 실천했던 원주의 초기 협동조합운동과 원주교구가 주도한 사회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44)

 

두 번에 걸친 정치적 도전이 실패한 후 장일순은 지학순 주교를 통해 천주교회가 가진 신학적 개방성과 잠재력, 신앙에서 비롯된 실존적 안정감 모두를 경험할 기회를 얻게 된다.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모든 사회활동을 금지당한 장일순이 사회 개혁과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그의 오랜 목표에 다시금 헌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지학순 주교가 원주에 가져온 공의회의 새로운 사회적·사목적 이상을 공유하면서 장일순은 가톨릭시즘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원주교구에서는 1965년부터 지학순의 사목을 도울 평신도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장일순은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초창기 리더로 공의회 문건을 공부하기 위한 그룹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평신도들에게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강의하였다.45) 실제로 지학순 주교는 일본에서 공의회 문서를 들여와서 장일순에게 번역을 의뢰하기도 하였다.46) 원주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이들의 다수가 외국인 사제였음에도 평신도에게 공의회 문서의 번역과 연구, 나아가 교육을 맡기는 일은 결코 통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이 현대 교회의 현실에 대한 적실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장일순이 공의회 문건의 배경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는 지역에서 드물게 장일순이 평신도로서 가진 교회에 대한 이해, 역사 인식과 개혁에 대한 의지, 교육에 대한 열정을 높이 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지학순은 장일순이 침체된 천주교회에 변화를 가져오고 공의회의 이상을 실현할 자신의 사목 활동을 도울 평신도 지도자로 준비되길 원했다.47)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장일순의 말년의 활동과 생각이 동양사상에 대한 그의 관심과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는 주장은 많지는 않아도 남겨진 기록들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장일순의 생각을 재구성하고 그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가톨릭시즘, 특별히 공의회가 새롭게 제시했던 사회교리와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가르침과 성찰이 원주교구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장일순에게 어떻게 내면화되었는지 뒷받침하는 사료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또한 장일순이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지도자로서 교회 내부에서 어떻게 봉사했는지 주변인들의 증언을 제외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공식적이고 세부적인 교회의 기록은 현재로서는 찾을 수가 없다. 이 연구의 논의를 벗어나기는 하지만 개인의 기억에 의존한 기존의 이해를 넘어서는 연구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사료의 발굴과 보완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장일순의 사상을 시기적으로 구분하고 그 적합성을 비판적으로 논하는 것에서부터 그의 사상의 발전, 내적 변용까지 검토하여 비로소 학문적 보편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주어진 사료를 통해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장일순이 그의 가톨릭적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교구에서 주어진 그의 역할과 활동을 통해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실천적 성찰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2) 장일순과 평신도 사도직 운동

 

장일순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꾸르실료(Cursillo)가 1967년 한국 천주교회에 소개된 초기에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48) 꾸르실료 운동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자부심, 그리스도교 영성의 실천적 지향, 동시대에 대한 명확한 인식,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확신 등이 혼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꾸르실료는 초기부터 교회보다는 교회 외부를 향한 복음적 관심이 컸다.49) 장일순은 원주교구에서 조직된 첫 번째 꾸르실료의 지도자가 되어 1967년 서울에서 영어로 진행된 제2차 전국 꾸르실료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활동은 꾸르실료 운동이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된 1970년 6월 이전에 이루어졌다.50) 일반적으로 꾸르실료의 정착 초기 개별 본당이 꾸르실료에 참여할 평신도를 추천하며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교육 수준 등을 고려했다는 점에서, 장일순은 지역에서 이미 평신도 지도자로 그 역할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도 한국 꾸르실료는 1974년 7월 지학순 주교가 체포되자 10월 3일 대전에서 열린 제4차 전국 울뜨레야 대회에서 천주교회가 주도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로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51) 지학순 주교와의 개인적인 인연과 별개로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장일순이 당시의 교회 내부 분위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다. 물론 공의회가 가져온 신학적 제안과 사목적 변화에 자극을 받은 지학순 주교는 교구장으로서 평신도 지도자 장일순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그가 평신도 사도직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도록 도왔다.52) 지학순 주교는 초기부터 교회가 재정적·신학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사목적 지향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사제들보다는 평신도들과 일하는 것을 선호했고, 결과적으로 장일순과 같은 꾸르실리스타들이 1960년대 말부터 원주에서 평신도 사도직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대내외적 사목 활동에 비중 있게 참여했다.53)

 

1969년 장일순은 원주교구 청년회를 구성하기 위해 가톨릭 청년들에게 먼저 지역 본당 가톨릭 청년회의 상황을 조사하게 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독재 연장을 계획하였고 정치적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장일순은 사회적 변화와 관련하여 천주교회 차원의 실천적이고 조직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 청년회의 정비는 머지않아 시작될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위한 준비의 일환이었다. 1971년 전국 가톨릭 청년회 회장을 역임했던 이창복에 따르면 장일순은 단계적으로 청년들에게 조언하면서 천주교회의 조직적인 사회운동을 준비하였다고 한다.54) 정권이 독재 권력 연장에 반대하는 이들을 향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가던 1970년대 초반 가톨릭 청년운동의 배경에는 이처럼 장일순의 의미 있는 역할이 있었다.

 

장일순에게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교회 안에서 주어졌다. 그가 평신도들과 함께 공의회 문헌을 학습하고 사회 개혁을 위한 사상적 동력을 얻었던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장일순은 가톨릭 청년회나 꾸르실료와 같은 평신도 사도직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동시에 정치적·사회적 조건의 변화를 보며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였다. 현대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교종 레오 13세(1810~1903) 이후로 세속 권력과 동시대인들에 대한 바티칸의 변화된 태도에서 시작되었고 공의회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제안되었다.55) 19세기 말부터 천주교회는 공동선의 가치를 고양하기 위해 호혜의 원칙에 입각한 세속 권력의 정치적 자율성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오랜 시간 사회적으로 현상 유지를 선호하면서 보수적인 국가의 역할을 지지했던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도그마를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였다.56) 그리고 실제 이러한 태도 변화는 1970년대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 전 세계적으로 불공정하고 반동적인 독재 사회정치 권력과 대립하고 저항하는 과정을 통해 본격화, 합리화, 그리고 토착화의 길을 걸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운동의 배경이 된 사회교리의 신학적 의미를 간단히 부연하면,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읽고,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은총의 교리를 재해석해야 할 책임을 갖게 되었다. 특별히 정의와 사랑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교회의 사회운동과 사회참여를 이끌어 갈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되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러한 개념들이 그리스도의 사목에 비추어 재해석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광의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재정의하였다.57) 은유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몸인 인류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신학적 이해에 비추어, 하느님의 백성이 사회적 구원의 주체이며 동시에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를 구원의 주체로 보고 인류를 구원의 대상으로 보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구원론에 입각한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 현대 세계에서 더는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급진적인 해석이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확산되었다.

 

지학순 주교는 1973년 발표한 사목 교서에서 공의회 이후 교회의 이러한 태도 변화를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이 문서는 역사적으로 원주교구가 참여한 민주화운동의 배경이 되는 중요한 문서이다. 지학순 주교는 교회의 사랑은 민중들에 대한 조건 없는 관심에서 찾아야 하고, 교회의 정의는 이웃을 섬기고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파했다.58) 장일순도 지학순 주교의 사목 지침에 포함된 의도를 이해하고 지지했다. 장일순은 지학순 주교가 강조했던 것처럼, 냉혹한 현실에 놓인 하느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조건 없는 사랑과 타협하지 않는 정의를 바탕으로 종교의 벽을 넘어서는 사회적 연대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일순은 교계제도라는 현실의 벽에도 불구하고 지학순 주교의 “영혼의 동반자”로 기억되고 있다.59) 결국 공의회 이후 현대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의 상황화와 발전은 원주교구에서 이루어진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사이의 사목적 협력을 통해 공의회가 주창한 연대에 기반을 둔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운동으로 실현되었다.

 

3) 가톨릭적 저항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는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강제로 연행되었다. 1974년 1월 8일 이미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표했던 정권은 그해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추가로 발표하면서 북한의 자금을 받아 유신을 반대하고 국가전복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로 대학생들을 포함한 235명을 구속 기소하였다. 지학순 주교는 이 사건과 관련된 대학생들에게 재정 지원을 했다는 의심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장일순의 제자 중 하나였던 김지하가 사형을 선고받았다.60) 장일순은 김지하의 사형선고와 지학순 주교의 수감으로 충격을 받아 자주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61) 가톨릭 주교의 전례 없는 투옥은 그동안 천주교회 내부에서 사회참여에 소극적이었던 사제들과 신자들의 반독재 민주화운동 참여를 가속화시켰다. 지학순 주교는 김지하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원주로 돌아왔다. 장동천은 다음과 같이 당시를 기억한다.

 

지학순 주교 석방됐을 때도 어머니랑 같이 환영하러 나갔는데 (지학순 주교가) 원주역에서부터 걸어서 오시는데 신자들이 전부 다 옷을 벗어 가지고 길에 깔아주고 그랬다. 그게 감동과 억눌림을 풀어내는 그런 자리였던 거 같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나이에 엄마 옆에서 봤던 정경을.62)

 

지학순 주교의 수감 이후 원주교구에서 시작된 천주교회의 일련의 저항 배경에 있어, 논쟁적인 일화이지만 장일순이 지학순 주교에게 순교자의 심정으로 정권에 저항하라고 종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63) 장동천에 따르면, 평신도 지도자 장일순이 지학순 주교에게 신앙이 아니라 사회정의를 위해 순교자가 되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가 현실의 운동과 저항을 위해 장일순이 건의하는 내용을 나름의 혜안을 가지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64) 당시 정권에 저항하려는 장일순의 의도는 정치에 다시 발을 들이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폭압적인 정권이 거짓으로 고발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의도였다. 다시 말해 1971년부터 원주교구에서 진행되어 온 사회정의 운동을 원주를 넘어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의미였다. 따라서 1970년대 들어 장일순이 참여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치적 목적을 지닌 운동이 아니라 지학순 주교가 강조해 온 사회정의라는 사목의 지향을 재확인하고 ‘시대의 징표’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가톨릭적 저항’이었다.65)

 

이처럼 1970년대 원주에서 천주교회의 이미지와 역할은 사회학자들이 흔히 묘사하듯 19세기 말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벽”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66) 무엇보다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이 원주에서 만들어낸 사목적·사회적 시너지는 반동적(reactionary)이기보다 혁명적(revolutionary)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16세기 유럽의 오래된 사회구조에 저항하려 했던 것처럼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은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가 초래한 불평등에 기반을 둔 유사 근대적 사회구조에 사회기층에서부터 저항하고자 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산업화의 망령은 불평등, 인간성 상실, 공동체 해체와 같은 사회문제들을 한국 사회에 가져왔다. 이 시기 장일순은 하느님의 백성을 재정의했던 공의회의 가르침과 공동선을 회복하기 위한 천주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67) 따라서 장일순에게 ‘가톨릭적 저항’은 교회의 전통 위에 입각한 공동체주의와 사회적 연대에 기반을 둔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시대의 징표’를 읽고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구현되어야 했다. 공의회의 유산에 영향을 받은 장일순의 ‘가톨릭적 저항’은 이처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작은’ 교구에서 발현되고 실현되어 갔다.68)

 

4) 내적 갈등과 새로운 저항

 

지학순 주교가 수감되면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회의 사회참여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교회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교종 요한 23세의 회칙들과 공의회 문헌들은 시위의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낭독되었다.69) 장일순이 이끈 지역의 사회운동 그룹인 소위 원주그룹은 1965년부터 이미 신학적·조직적으로 준비를 시작했기에 본격적인 저항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장일순의 원주그룹은 공의회 문헌에 관한 학습과 내면화를 통해 신학적 고민과 결단의 과정을 빠르게 생략하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철저하고 조직적인 준비가 처음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가톨릭 사회운동가 장일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자 사상적 도약을 가져온 저항에 대한 내적 갈등과 운동에 대한 회의와 성찰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 개발독재 아래에서 신음하며 순응해야 했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비판의식이 고취되고 자주적으로 저항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중 지향의 투쟁은 점차 사회운동의 주를 이루게 되었다. 교회 역시 노동자운동과 농민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면서 점차 민중이 운동의 주체로 인정받게 되었고, 1970년대 들어 개신교와 천주교 각각의 저항 신학도 등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일순은 기존 운동에 내포된 갈등과 대립의 위험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공의회가 가져온 사회문제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접근과 교회의 전통적 교리 사이의 갈등은 교회의 사회참여가 확대되면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의회 문헌을 번역했고 학습했던 장일순은 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파급력이 교회에 미치게 될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최장집의 지적처럼 사회운동은 정치적 민주화가 중요한 쟁점이 될 때 시민사회에서 수용성이 높아지지만 반대로 특정 이슈, 즉 노동이나 계급처럼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문제로 이동하게 되면 정치적으로 동력을 잃거나 실패하고 외부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70) 당시 원주그룹 내부에서 제기된 변화의 요청은 이러한 사회운동의 과정의 관점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민주화운동의 성격이 변해 가는 과정에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사회적 영향력은 확대되었고 신학적 연대의 요구도 늘어갔지만 교회 내·외부에서 이러한 신학에 대한 수용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천주교회의 민주화 운동은 점차 기존 운동과의 조우를 통해 계급투쟁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특정한 이념적 측면에 경도되기 시작하였다. 장일순의 원주그룹 내부에서도 유사한 갈등이 불거졌다.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좌파 민중운동 내부의 갈등이 1980년대 전반부에서야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미루어보면 1970년대 중후반 원주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내부적 성찰은 시대를 앞서 간 것이었다.

 

기존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내재된 한계와 계급투쟁에 대한 장일순의 우려는 현대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서도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교종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1891)가 발표되고 천주교회는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이 어떠한 식으로든 내포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적 공동체주의라는 사회경제적 양극단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배척해 왔다.71) 이러한 사회정치적 우려에 더해 역사적으로 교회가 사회주의에 대해 일방적인 반대의 태도를 표했던 것은 사유재산의 원칙을 절대 불가침의 영역에 두어 지키고자 했던 경제적 이유도 실재한다.

 

70년대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또 반독재운동을 계속하다 보니까 종전의 마르크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 가지고는 문제의 해결은 말할 것도 없고 악순환이 계속되겠더란 말입니다.72)

 

장일순은 저항을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만 이해하는 마르크시즘에 기반한 사회주의 운동이 계급 갈등의 고착, 체제 순응의 강요와 같은 비인간적 · 파괴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톨릭적 저항’은 근본적으로 사회정의와 인간 본성의 회복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저항의 특질은 1970년대 지학순 주교의 사목 교서와 강론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점이다. 장일순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박정희의 독재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삶이 지속 가능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73) 반면에 그의 일부 제자들은 장일순이 1973년부터 가톨릭농민회에 참여했던 박재일과 함께 1977년을 기점으로 생각의 전환과 운동의 변화된 지향을 논의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례로 장일순이 경기침체를 근거로 원주그룹 안에서 이루어진 농민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태도의 적합성을 따졌다는 사실에서 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당시 통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1970년대 이농으로 농가 인구가 줄고 농가의 생산 의욕이 감퇴하면서 농업 생산액의 절대 비중은 꾸준히 감소하였다.74) 1974년부터 박정희 정권은 강원도에서도 강제이주를 시작하였고, 농촌 공동체는 빠르게 해체되었다. 이 시기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농민운동에 모두 참여하고 있던 장일순은 농촌 공동체의 무기력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내면의 갈등이 증폭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일순과 오랜 시간 교분을 쌓았던 김지하의 회고처럼 1977년 즈음부터 장일순에게 본격적인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은 다분하다.75) 물론 이러한 논의가 원주에서 심화되던 시기, 김지하가 수감생활 중이었다는 점은 그의 주장을 여전히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가능성이 존재함에도 1970년대 말 한국 사회의 사회정치적 환경이 급변하면서 장일순의 내적 갈등이 보다 심화되었으리라는 점은 앞서 논의한 내용으로 미루어 타당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진 1980년 5월의 비극을 보면서 장일순이 기존의 저항 방식과 운동의 지향이 갖는 시대적 적실성과 현실적 유효성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에서 행동했다는 사실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되고 재야를 포함한 기존 운동그룹들은 일순간 저항의 대상과 운동의 동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전두환과 신군부는 그해 12월 미리 계획했던 쿠데타를 실행에 옮겼다. 신군부는 민주화를 위한 시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1980년 5월 18일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했다. 광주에서도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계엄령의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였고, 군부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격렬한 저항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25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사망하였고, 3,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76) 정교회 신부인 강태용은 1980년 5월 당시 원주의 상황과 장일순의 반응을 아래와 같이 회고하였다.

 

그해 5월 18일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고 아주 비참한 소식이 전해졌어요. [중략] 저는 무위당 선생님을 찾아뵙고 원주 가농 형제들의 의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원주에서는 안 된다. 어떠한 소요도 발생해서는 안 된다. 내 말뜻 알겠는가?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어떠한 모임도 교육원에서 해서는 안 된다. 자네가 목숨 걸고 막아야 하네. 알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77)

 

장일순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던 군부 정권의 파괴적 속성을 간파했고, 계엄령이 선포되자 무자비한 폭력으로부터 원주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영주는 1980년대 초반 장일순의 태도가 이념적 전향이나 개량주의적 태도와는 관계없이, 현실과 주변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새로운 차원의 저항의 발현이었다고 주장한다.78) 장동천 역시 1970년대 불안정했던 장일순의 사회적 조건이 달라지면서 안정을 되찾은 장일순의 생각이 다른 차원으로 “도약”한 것으로 이해한다.79) 이들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장일순에게 다른 차원의 저항이란 독재정권의 폭압에 대항하여 인간의 본성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거나, ‘가톨릭적 저항’의 현실적용(contextualisation)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견 타당할 것이다.

 

그건 예수하고 빌라도의 대화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빌라도가 예수더러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라고 물으니까 예수가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바로 차원이 다르면 선과 악에 대한 조건이 달라지는 겁니다. 옛날에 잘못한 것을 재차 또 저지른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지만, 옛날에 살던 방식으로는 새로운 문화 속에선 살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차원이 다르니까.80)

 

 

4. 맺음말

 

장일순의 생각과 활동을 특정 종교나 담론의 영향으로 환원시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을 고려하면서 기존의 일반화된 이해를 넘어 보다 선명하게 장일순을 바라보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요약하자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장일순의 생각이 발전하고 변용된 배경에는 천주교 신자 장일순과 교회의 관계가 실재한다. 장일순은 한국전쟁 이후 원주로 돌아와 교육가로 살았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에 도전하였다. 동시에 그는 교회에 충실한 신자였고 평신도 지도자였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의 가치에 부합하는 신실한 신자였고, 동시에 정치적 측면에서는 급진적 운동그룹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교회의 관습과 전통 안에서 운동의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여 실현시킨 가톨릭 활동가였다. 물론 이러한 역사는 군부에 의해 수감되어 3년을 복역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평신도 장일순 요한과 지학순 다니엘 주교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본격화되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장일순은 원주교구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1970년대 교회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참여를 준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1974년 지학순 주교를 겨냥한 정권의 노골적인 탄압에 맞서 원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배후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장일순은 1960년대 중반부터 학습을 통해 이상으로 품고 있던 가톨릭 사회교리에 뿌리를 둔 ‘가톨릭적 저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백처럼 1977년을 즈음하여 그동안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회운동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내적 갈등이 발생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서 권위주의의 망령이 사회정치적 공간을 다시 배회하고, 논쟁적이지만 천주교회의 보수화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그는 저항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성찰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에 반대한다고 나를 잡아넣었지만, 나 박정희 씨를 사랑했어. 전두환 씨도 사랑했어. 이것 봐, 난폭한 지배자일수록 달래면서 가는 거야.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하면서 말이지. 5공화국 때 사람들은 내가 나설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았다고 장일순이 욕들 많이 했을 거여. 자네라서 하는 얘기네만 말이야. 나 참으로 못난 사람일세. 훌륭한 양반들 많은데 내가 나설 필요가 있는가. 여보게, 나 노태우 씨도 사랑하네.81)

 

주지하다시피 장일순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고통을 주었던 박정희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삼남 장동천은 아버지 장일순의 박정희에 대한 이러한 언명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82) 개인의 상황과 역사적 조건에 대한 장일순의 양가적 태도를 고려하면, 그에게 일관성을 지닌 체계화된 철학이 존재하는가는 여전히 논쟁적일 수 있다. 따라서 장일순의 생각과 신앙에 비추어 그의 ‘사랑’의 개념은 단순한 용서를 넘어 저항의 ‘다른 차원’에서 재정의되어야 한다. 앞서 검토했던 것처럼, 그의 삶은 사회정치적 차원을 넘어 내적으로도 저항으로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말년의 그는 저항의 대상들마저 포용하는 ‘다른 차원’의 저항을 시작하였고, 그러한 변화의 상당 부분은 그가 가진 신앙과 종교성, 그리고 말년에 관심을 보였던 다른 종교의 영향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50년대 교육과 정치의 영역에서 표출된 장일순의 사회개혁에 대한 열망은 그의 활동과 그의 주변에 갈등과 제약으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65년 이후로 장일순에게 지학순 주교와 교회는 정치적, 이념적, 사회적, 나아가 정서적 한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교회 안에서 장일순은 공의회의 유산인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학습하여 내면화하였고, 평신도 사도직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따라서 1970년대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사회의 기층에서부터 지역의 농민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결국 장일순에게 ‘가톨릭적 저항’이란 공의회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교회의 우산 아래 모여든 이들과 사회정치적 공간의 기층에서부터 가톨리시즘을 실현하려 했던 실천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일순의 장례미사에서 불린 성가의 노랫말처럼 그는 ‘암흑에 헤매는 한 마리 양’으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살아낸 가톨릭 신자 장일순 요한으로 기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1. 1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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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_____ 18, 2006c. 12. 3.

____________________ 49, 2014. 11. 1.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남긴 정신」,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11일 자.

 

2. 교회 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965년 12월 7일.

레오 13세,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1891년 5월 15일.

 

3. 단행본

 

김삼웅, 『장일순 평전』, 두레, 2019

김소남, 『협동조합과 생명운동의 역사』, 소명출판, 2017.

김영민, 『중국정치사상사』, 사회평론아카데미, 2021.

리영희, 『대화』, 한길사, 200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2, 돌베개, 2009.

무위당사람들 편,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무위당사람들, 2019.

_______________,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무위당사람들, 2020.

원주시역사박물관, 『빛의 시간들 : 지학순 주교 善終 25주기 추모 기획 전시회』 도록, 2018.

이용포, 『무위당 장일순 : 생명사상의 큰 스승』, 작은씨앗, 2011.

전호근, 『한국철학사』, 메멘토, 2015.

정해구,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역사비평사, 2011.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역사비평사, 2007.

지학순, 『정의가 강물처럼』, 형성사, 1983.

지학순정의평화기금 편, 『그이는 나무를 심었다』, 공동선, 2000.

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2004.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0.

홍석률·박태균·정창현, 『한국현대사』 2, 푸른역사, 2018.

Beal, Rose, Mystery of the Church, People of God,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14.

Congar, Yves, Lay People in the Church, 2nd rev. ed., London, Geoffrey Chapman, 1965.

Cumings, Bruce, Korea’s Place in the Sun : A Modern History, Rev. ed., New York, Norton, W.W. & Company, 2005.

Dorr, Donal, Option for the Poor and for the Earth : Catholic Social Teaching, Maryknoll, NY, Orbis Books, 2012.

Greeley, Andrew, The Catholic Imaginatio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O’Brien, David and Thomas Shannon eds., Catholic Social Thought : The Documentary Heritage, Maryknoll, NY, Orbis Books, 2010.

 

4. 논문

 

김소남, 「조한알 장일순의 삶과 운동론」, 『내일을 여는 역사』 68, 2017, 90~99쪽.

유수철, 「꾸르실료란 무엇인가」, 『사목』 29, 1973. 3, 13~20쪽.

황경훈,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 운동의 영성 : 그 가능성의 탐색과 제안」, 『누리와 말씀』 37, 2015, 18~224쪽.

이미영, 「평신도 운동의 영성을 찾아서」, 『가톨릭평론』, http://review.wti.or.kr/?p=202, (2020년 12월 14일 접속).

전명혁, 「1960년대 1차 인혁당 연구」, 『역사비평』 95, 2011, 289~322쪽.

이만열, 「도산 안창호와 기독교 신앙」, 『한국근현대사연구』 2, 2002.

 

5. 인터넷 자료

 

「가톨리시즘」, 『한국가톨릭대사전』,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34&keyword=&gubun=01(2020년 11월 20일 접속).

“6 facts about South Korea’s growing Christian population”, Pew Research Center, https://www.pewresearch.org/fact-tank/2014/08/12/6-facts-about-christianity-in-south-korea/ (2021년 1월 11일 접속).

 

……………………………………………………………………………………

 

1) 이에 관해서는 “6 facts about South Korea’s growing Christian population”, Pew Research Center, https://www.pewresearch.org/fact-tank/2014/08/12/6-facts-about-christianity-in-south-korea/ (2021년 1월 11일 접속) 참조.

 

2) 황경훈,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 운동의 영성」, 『누리와 말씀』 37, 2015, 186~187쪽.

3) 김삼웅, 『장일순 평전』, 두레, 2019, 35쪽.

 

4) 이와 관련된 최근의 연구는 정홍규, 「한국 가톨릭교회의 생태의식과 실천모델 연구」,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4 ; 박맹수,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모시는 사람들, 2014 ; 전호근, 「장일순의 평화사상 : 한국 전통불교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통일과 평화』 8-2, 2016, 80~109쪽 ; 김소남, 「조한알 장일순의 삶과 운동론」, 『내일을 여는 역사』 68, 2017, 90~99쪽 ; 이나미, 「1980년 비판과 대안의 한국정치사상 : 리영희, 박현채, 문익환, 장일순을 중심으로」, 『정치사상연구』 25-1, 2019, 38~66쪽 ; 김재익, 「장일순의 생태철학 : 전일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종교연구』 80-2, 2020, 37~62쪽 참조.

 

5) 전호근, 『한국철학사』, 메멘토, 2015, 801쪽.

6) 김영주와 저자의 인터뷰, 2014년 6월 11일 ; 장동천과 저자의 인터뷰, 2014년 7월 24일.

 

7) 「가톨리시즘」, 한국가톨릭대사전,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34&keyword=&gubun=01 (2020년 11월 20일 접속).

 

8) 이만열, 「도산 안창호와 기독교 신앙」, 『한국근현대사연구』 22, 2002, 57~58쪽.

 

9) 장화순과 저자의 인터뷰, 2014년 6월 11일. “신실한 천주교 신자였어요. 근데 자기 믿음을 드러내거나 전교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곧은 길, 좁은 길로 가려고 했죠. 그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존경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닮고자 노력했어요. 형님은 (자기 믿음을) 과시하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 이경국과 저자의 인터뷰, 2014년 6월 10일.

 

10) 계간 『무위당 사람들』 15, 2006a, 7쪽. “그 당시 저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학 시간에 무위당 선생님께서 그분(도산)의 민족 사랑의 정신과 준비 없는 해방투쟁이나 실력 없는 독립운동만으로는 우리 국민이 원하는 해방과 독립을 성취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보다 원대한 목표와 경륜으로 진정한 민족 자주독립을 위한 독창적이고 조직적인 사회운동을 하기 위하여 흥사단을 창립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1) 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2004, 24쪽. 장일순은 아들보다 학교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12) 김삼웅, 같은 책, 61~80쪽.

13) 홍석률·박태균·정창현, 『한국현대사』 2, 푸른역사, 2018, 50~57쪽.

14) 전명혁, 「1960년대 1차 인혁당 연구」, 『역사비평』, 2011, 291쪽.

15) 장화순과 저자의 인터뷰.

1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2, 돌베개, 2009, 380쪽.

17) 장화순과 저자의 인터뷰 ; 무위당을기리는모임 편,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녹색평론사, 2004, 188쪽.

18) 최성현, 같은 책, 160~161쪽.

19) 무위당을기리는모임 편, 같은 책, 171쪽 ; 김영주와 저자의 인터뷰.

20)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2009, 119~121쪽.

21) 홍석률·박태균·정창현, 같은 책, 71쪽.

22) 김용우와 저자의 인터뷰, 2014년 6월 13일.

23) 장동천과 저자의 인터뷰.

24)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역사비평사, 2007, 24~29쪽 ; 홍석률·박태균·정창현, 같은 책, 83~86쪽.

25) 장동천과 저자의 인터뷰.

26) 무위당사람들 편,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스토리한마당, 2019, 143쪽.

27) 최성현, 같은 책, 28쪽.

28) 장동천과 저자의 인터뷰.

29) 지학순정의평화기금, 『그이는 나무를 심었다』, 공동선, 2000, 127~128쪽.

 

30) 레지오 마리애 활동과 신심의 교리적 기반은 마태오 복음 25장 40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31) 장일순, 같은 책, 185쪽.

32) 장일순, 같은 책, 185~186쪽.

 

33) 장자에 나타난 ‘참여적 정치 행위자’와 ‘초연한 관객’에 대한 개념적 대비는 김영민, 『중국정치사상사』, 사회평론아카데미, 2021, 217~228쪽을 참조.

 

34) 무위당을기리는모임 편, 같은 책, 37쪽.

35)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New York, Norton&Company, 2005, p. 352.

36) 최성현, 같은 책, 28쪽.

37)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남긴 정신」,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11일 자 8면.

38) 이 글에서는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과 가톨릭 사회교리를 동일한 의미로 혼용하여 사용한다.

39) 김영주와 저자의 인터뷰.

40) 원주시역사박물관, 『빛의 시간들 : 지학순 주교 善終 25주기 추모 기획 전시회』 도록, 2018, 10쪽.

41) 지학순정의평화기금, 같은 책, 70~81쪽.

42) 무위당을기리는모임 편, 같은 책, 114~115쪽.

43) 무위당을기리는모임 편, 같은 책, 166쪽.

44) 이에 대해서는 김소남, 『협동조합과 생명운동의 역사』, 소명출판, 2017 참조.

45) 계간 『무위당 사람들』 12, 2005, 10~11쪽 ; 18, 2006c, 9쪽.

46) 김영주와 저자의 인터뷰 ; 무위당을기리는모임 편, 같은 책, 152쪽.

47) 지학순정의평화기금, 같은 책, 80~82쪽.

48) 지학순정의평화기금, 같은 책, 82쪽.

49) 유수철, 「꾸르실료란 무엇인가」, 『사목』 29, 1973. 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3~20쪽.

50) 계간 『무위당 사람들』 12, 2005, 13쪽.

5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같은 책, 388~389쪽.

52) 김영주와 저자의 인터뷰.

53) 계간 『무위당 사람들』 18, 2006c, 9쪽.

54) 지학순, 같은 책, 76쪽 ; 계간 『무위당 사람들』 15, 2006a, 8~9쪽.

55) 이에 대해서는 Donal Dorr, Option for the Poor and for the Earth, Maryknoll, NY: Orbis Books, 2012 참조.

 

56) David O’Brien and Thomas Shannon eds., Catholic Social Thought, Maryknoll, NY: Orbis Books, 2010, p. 8 ;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74·76항.

 

57) 「기쁨과 희망」 32항.

58) 지학순, 『정의가 강물처럼』, 형성사, 1983, 77~78쪽.

59) 정인재와 저자의 인터뷰, 2014년 6월 10일.

60)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역사비평사, 2007, 157~159쪽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같은 책, 381쪽.

61) 최성현, 같은 책, 34쪽 ; 이용포, 『무위당 장일순』, 작은씨앗, 2011, 129쪽.

62) 장동천과 저자의 인터뷰.

63) 최성현, 같은 책, 34쪽.

64) 장동천과 저자의 인터뷰.

65) 장일순, 같은 책, 184쪽.

66) Andrew Greeley, The Catholic Imaginatio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p. 123.

67) 「기쁨과 희망」 11·24·26·32·45항.

68) 마태오 복음 25,31-46 참조.

6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같은 책, 404~407쪽.

70) 이에 관해서는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0 참조.

71) 「새로운 사태」 11·12항.

72) 장일순, 같은 책, 155쪽.

73) 계간 『무위당 사람들』 49, 2014, 27쪽.

7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같은 책, 626~627쪽.

75) 무위당을기리는모임 편, 같은 책, 173~177쪽, 198쪽.

76) 정해구,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역사비평사, 2011, 50~75쪽.

77) 계간 『무위당 사람들』 17, 2006b, 16쪽.

78) 김영주와 저자의 인터뷰.

 

79) 장동천과 저자의 인터뷰. “현실적으로 아버지가 더 안정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거 같다. 80년대 초에 광주항쟁이 있고 작은 집으로 피해 계셨고 80년대 초반에는 사회적으로 뒤숭숭했고 70년대와 80년대는 전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대학에서는 80년대가 더 좌경화된 시기이고 70년대가 더 원시적으로 저항운동을 했던 거 같다. 근데 아버지는 반대였다. 오히려 광주항쟁 이후로 현실 정치에 대해서 그런 차원이 아닌 조금 더 깊은 세계로의 사고가 필요하다고 저항을 하셨던 것 같다. 70년대에는 현실 운동에 훨씬 더 가까이 계셨는데 80년대 이후에는 더 큰 부분으로 옮겨간 듯. [중략] 가족으로 볼 때는 차라리 5공화국 때가 박정희 때보다는 훨씬 안정되었다고 보인다.”

 

80) 장일순, 같은 책, 163쪽.

81) 장일순, 같은 책, 278쪽

82) 장동천과 저자의 인터뷰. 

 

[교회사 연구 제58집, 2021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백효민(상지대학교 교양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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