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종교철학ㅣ사상

동양고전산책: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배려하는 삶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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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7-14 ㅣ No.255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배려하는 삶의 즐거움

 

 

찜통 같은 더위가 계속되는 여름입니다. 이런 날씨에는 불쾌지수도 높아 괜히 옆 사람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지요. 이렇게 곁에 있는 사람의 체온마저 싫은 더운 날에는 신영복 선생의 글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신영복 선생은 과거 통혁당 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20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분입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아 펴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여름의 감옥살이처럼 내 옆의 존재를 힘들어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히려 겨울처럼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고 고맙게 여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와 너의 관계를 바르게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立場)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며 남을 배려하지 않을 때, 흔히 “입장 바꿔서 한번 생각해 봐.”라고 말합니다.

“입장(立場)” - ‘내가 서 있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처지(處地)’라는 말로 바꿔 쓰곤 하지만 같은 뜻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의 나이게 하는 곳, 내 존재 자체가 현존하는 장소입니다. 입장을 바꾼다는 것은 내가 있는 자리를 떠나서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 가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장이 바뀜에 따라서 바라보는 관점(觀點)도 바뀌고 시각(視角)도 달라집니다. 당신의 자리에 서서, 당신의 입장에서 보고, 당신의 마음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지난달에 말씀드린 “서(恕)”를 기억하십니까? 인(仁)을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이었지요. 『논어』의 다른 곳에서 공자는 이런 말도 합니다.

“무릇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기가 달성하고자 하면 남도 달성하게 해 준다.”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있지요. ‘자리를 바꿔 생각해 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도 ‘자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결국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곳,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내가 있는 ‘자리’가 결국 나를 결정합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나의 입장이 정해지고, 관점이 서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타인과 참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나, 타인이 서 있는 곳으로 가 봐야 합니다. 거기 서서 그 사람의 입장이 어떤지, 그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사람의 마음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恕) 이러한 전형을 보여 주신 분이 계십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리를 떠나 우리 인간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강생의 신비는 사랑의 절정이요, 사랑의 완벽한 구현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나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서 보는 건 어떨까요? 박노해 시인의 <발바닥 사랑>이란 시는 우리의 사랑이 머리나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직접 찾아가야 하는 사랑임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발바닥이다. //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 //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 발바닥이 이어 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 그 영혼의 낙인이 바로 나이니 //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일단 불편합니다. 그래서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기 싫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게 편하지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것 자체가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도해 봄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게 됩니다. 입장을 바꾸지 않으려 하고 자기 자리만 고집하며 그 안에서 혼자 편안히 살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2) 낡은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는 자기가 사는 우물 안이 너무 좋습니다. 물도 깊지 않고 안전합니다. 그 안에서 개구리는 자신만의 왕국을 이루어 행복해하며 동해에서 온 거북이에게 자랑을 합니다. 하지만 그 좁은 우물에 거북이가 들어가다가 발이 걸려 꼼짝도 못했지요. 거북이는 ‘바다’라는 것에 대해 개구리에게 이야기해줍니다. 천 리 거리로도 그 크기를 말할 수 없고 천 길 길이로도 그 깊이를 말할 수 없는 바다. 홍수가 나도 넘치지 않고 가뭄이 들어도 줄어드는 법이 없는 엄청난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만 우물 안의 개구리는 알아듣지도 못하지요.

쓰러져 가는 우물 안에 갇혀 지내지만 말고 과감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나 타인의 자리로 옮겨 가 봅시다. 나보다 더 낮은 자리, 더 불편한 자리로 옮겨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 서 보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입장에, 부모는 자식의 입장에 서 봅시다.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장애인의 자리에도 가보고 혼자 외로이 사는 이웃의 노인, 사고로 자식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의 처지에 들어가 봅시다. 먼저 그들의 자리에 서 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일 것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고 배려하는 작은 행동에서 우리는 성덕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입장만 고집할 때는 느껴 보지 못한 참 행복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논어(論語)』, 〈옹야(雍也)〉, 30장.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能近取譬, 可謂仁 之方也已.”
2) 『장자(莊子)』, 〈추수(秋水)〉, 2장, 14장 참조.

* 최성준 신부는 북경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5년 7월호,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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