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몸의 신학11: 성경에 나타난 몸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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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0 ㅣ No.798

[몸의 신학] 성경에 나타난 몸의 언어


몸과 혼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11)

 

 

시작하며

 

내연관계는 그 특성상 ‘의사소통’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범죄로 이어지는 경향이 높다고 합니다.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모 신경정신과의원 원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연관계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결속력이 각별한데, 일단 배신을 당하거나 관계가 어긋나면 복수심을 자제하지 못한다. 특히 무의식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게 돼 범행 대상도 불특정적이고 광범위하다.”

 

4년 전 8명의 사망자와 12명의 부상자를 낸 서울 잠실의 고시원 내 노래방 방화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기혼자들이라고 다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 봉헌된 독신을 사는 이들이 직접 맛볼 수 없는 것은 부부끼리 나누는 사랑의 밀어(蜜語)이며 배타적인 밀어일 것입니다.

 

요즈음 언론 방송은 부부 강간을 가볍게 취급하고 내연관계를 연속극의 기본 소재로 그리고 유명인들의 간통행위를 ‘가십’거리로 너무 자주 노출시키며, 상호적인 이중 간통행위를 ‘스와핑’이라는 외래어로 깔끔하게 포장함으로써 고의로 부부관계를 탈윤리화시키고 있지는 않는지요? 점점 왜곡되고 색깔이 바래가는 부부들의 내밀한 언어, 그것의 본향(本香)이나 원색(原色)을 과연 신세대 부부는 제대로 맛보고 있을까요? 기성세대 부부는 기억이라도 하고 있을까요?

 

이번 호에서는 부부 사랑의 밀어가 지닌 바로 그 본향과 원색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아가와 토빗기 속에서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몸의 언어가 전례의 언어로 새롭게 승화하게 되는 원리를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아가’에서 ‘몸의 언어’에 대해 읽어낸 것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1950주년을 기념하는 성년을 1983년에 거행하시느라 약 15개월 동안 교리교육을 쉬셨는데, 이제 막 ‘신성한 계획 속에서 인간적인 사랑’에 관련한 그 절정을 아가에서 읽어내십니다. 교황님에 따르면, 아가의 구절들은 외견상 ‘세속적인’ 내용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최고의 신비가들을 이끌어준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교황님께서 읽어내시는 첫 번째 메시지는 바로 남녀 몸이 경험한 ‘아름다움’입니다. 아가에서 노래하는 신랑과 신부의 이중창의 원형을 그리스도께서 일깨워주신 창세기의 “처음”(마태 19,4) 속에서 발견해 내십니다.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3-25).

 

바로 자신에게 “적합한 협력자”임을 표현해 주는 그 여자의 ‘몸’에 대해 그 남자는 자신의 몸이 내는 탄성의 말로써 화답한 것입니다.

 

“갈비”는 신랑의 몸이며 그의 ‘마음’으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그 “갈비”에서 나온 신부의 몸은 경이로움, 찬양, 황홀감을 자아냅니다. 한 인격인 몸이 또 다른 인격인 몸을 향해 ‘상호적인 이끌림’을 내적 충동으로서 감지하고 아름다움[美]을 경험함으로써 서로를 향한 ‘사랑’이 발생됩니다. 그 사랑은 상호적인 만족을 상승시켜 줍니다.

‘나’인 신부는 “여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아가 1,8)이며 “나 비록 가뭇하지만 어여쁘답니다.”(아가 1,5)라고 ‘또 다른 나’인 신랑의 반응을 대신해 줍니다. 상호적인 몸으로 느낀 그런 아름다움은 모든 은유와 비유를 뛰어넘어 직설적으로 ‘흠이 없다.’고 선언됩니다.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아가 4,7).

 

두 번째 메시지는 몸의 언어를 통해 남녀간에 느끼는 ‘평화’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아가 4,9.10)라고 애인이 지닌 이중적인 신분이 소개되는데, 이중적인 호칭은 성(性)으로 결합하는 존재로만이 아니라 인격으로 존재하는 존재로도 드러납니다.

 

교황님에 따르면, 인격은 곧 ‘주체’이며 ‘관계’로 존재하고, 두 인격은 동일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공통의 과거와 공통의 소속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타인들의 부정적인 시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에 형제자매와 같은 친밀감을 서로 간에 가지고 평화롭게 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인 인간으로서 상호적으로 성실하게 선물해 주는 평화스러운 만남 속에서 “그이 앞에서는 화평을 청하는 여자”(아가 8,10)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메시지는 몸의 언어를 통해 남녀간에 느끼는 ‘소속감’입니다. 교황님에 따르면, “그대는 닫혀진 정원, 봉해진 우물”(아가 4,12)의 은유는, ‘신비’에 찬 자신들을 내적으로 상호 침해할 수 없으며 동시에 상호 소속되고 전폭적으로 상호 위임했음을 드러내주기에, 서로가 “나의 연인은 나의 것”이며 서로에게 “내가 나 자신을 맡기는 그 사람”이 됨을 의미합니다. 인격적인 존엄성도 몸의 언어를 통해 읽어내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 메시지는 몸의 언어를 통해 남녀가 서로를 향해가는 ‘접근성’입니다. “그이가 떠나버려 나는 넋이 나갔네. …나의 연인을 만나거든 내가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 제발 그이에게 말해주어요”(아가 5,6.8). 이런 상호 접근하려는 성향과 그런 경험 속에서 교황님께서는 ‘에로스’의 성질을 읽어내십니다.

 

상대방을 향해 열망하고 상대방에 대해 탐구하려는 인간적 사랑인 에로스는 “마음이 깨어있는” 상태로 모든 흠으로부터 자유로운 순결을 향해, 곧 영혼과 몸의 완전한 미를 향해 완벽함을 추구하고 발휘하는 가운데 자체의 역동성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상대를 향해 “죽음만큼 강력한 것”(아가 8,6)으로 있기에 그래서 자기-통제가 요구되기도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자기-통제된 그런 에로스의 모습을 바오로의 ‘사랑의 송가’에서 읽어내시면서, “시기하지 않고… 언제까지 스러지지 않는”(1코린 13,4-8) 사랑이며 부부가 맺는 새로운 친교의 모습으로서 ‘정화된 에로스’ 곧 ‘아가페’를 제안해 주시는 것입니다.

 

 

‘토빗기’에서 ‘몸의 언어’에 대해 읽어낸 것

 

아가에 이어 토빗기에서 발견되는 공통 주제는 “누이”와 “죽음만큼 강한 사랑”입니다. 교황님께서는 토비야에게는 사라가 혼인한 ‘신부’이며 동시에 혈족으로서 ‘누이’라는 점, 그리고 “이미 일곱 남자와 혼인했던” 사라와의 혼인행위가 악마의 술수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랑’이 요구되고 있음을 읽어내십니다.

 

토비야의 사랑은 혼인 초야 때부터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시험당하며 부부는 혼인의 의미를 살아가는 중에 선과 악의 세력이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상황에 떨어지게도 됩니다. 그래서 다음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토빗 8,7).

 

바로 여기 토빗기에서 고유한 주제, 몸으로 표현되는 그런 ‘전례적인 언어’에 관한 주제를 읽어내십니다. 교황님에 따르면, 배우자 남편 또는 “아내로 맞아들입니다.”라는 전례적인 혼인 선언과 그리고 몸을 결합시킴으로써 “맞아들이는” 행위를 완결 짓는 실천은 완전한 혼인성사를 구성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교황님은 에페소서가 전해준 그리스도-교회의 관계를 다시금 언급하시고는, 부부간의 몸의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는” 그런 약속에 대해 상기시켜 주십니다.

 

전례의 언어를 통한 약속과 몸의 언어를 통한 실천이 상호 연계됨으로써 그리고 그렇게 “죽을 때까지” 지속해 감으로써 비로소 혼인성사가 지닌 부부의 일치성과 불가해소성이 구현됩니다. 다시 말해, 전례의 언어를 통해 “속량된 몸”으로서 할 의무들(에토스)을 실천함으로써 성령의 열매인 ‘효경’을 발휘할 힘과 동시에 성령을 따르는 삶인 ‘정결’의 덕도 얻게 됩니다. 마침내는 “큰 신비”(에페 5,32)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두 사람도 동거를 시작하였지만 자신들의 옛 배우자들끼리 맺은 부부처럼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때문일까….” 21년 경력의 이혼 · 가사 전문변호사가 어느 여성잡지에 소개한 사연의 일부입니다.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부인이 상대방 여자를 남편과 떼어놓으려고 알아낸 주소로 그 여자의 남편을 찾아가 알렸습니다. 그러고는 간통죄 고발을 위한 공동 작전을 펼치다가 그만 애정이 깊어져 각자의 배우자와 서둘러 이혼해 버리고는 재혼했답니다. 자연스럽게 동거하게 된 두 내연 남녀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 때문일까요? 자신들의 나누는 몸의 언어가 더 이상 밀어(密語)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작은 부부생활 시인’ 이응윤의 ‘내가 달라졌습니다’를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난 건 / 하늘이 내린 선물이며 행운입니다 / 어디 간들, 당신 같은 사람 있을까 / 보고 듣지도 못한 좋은 사람 / 어딜 보아도 / 언제나 흠 하나 없는 당신 / 잘난 것 하나 없는 내게 / 당신은 아까운 사람입니다 / 하지만, 당신을 만난 후 / 말 못할 만큼 내가 달라졌습니다 //  내가 나를 놀래켰습니다 / 모른다 하던 사랑을 / 굳어 버린 가슴 속 / 아픈 사랑으로 알 까고 있습니다 / 언제나 변치 않으며/ 위하여 목숨도 아깝지 않을 / 사랑이 자라고 있습니다 // 당신을 만나 /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 웃음으로 기쁨을 찾았고 / 사랑으로 행복을 알았습니다 / 당신을 만난 건 / 다시 없을 하늘이 맺은 인연입니다.”

 

마지막이 될 다음 호에서는 책임 있는 부모가 할 수 있는 수태조절, 몸의 언어를 왜곡시키는 피임 그리고 혼인 영성의 전체적인 윤곽에 대해 소개하고는 총정리를 해볼까 합니다.

 

[경향잡지, 2010년 11월호, 이동호 프란치스코 신부(가톨릭 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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