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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의 대가들: 성 도미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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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09 ㅣ No.336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도미니코 (상)

 

 

성 도미니코는 여러 이설의 등장과 복음 정신의 와해로 혼란에 빠져 있던 13세기 교회 상황에서 설교를 통하여 복음화와 구원의 봉사를 수행해야 할 소명감을 갖고 「설교자의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지향한 설교는 단순히 말씀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교회의 진리를 열심히 공부하고 관상한 것을 선포하는 인간 구원 활동이었다. 그 카리스마는 당시뿐 아니라 역사 안에서 교회의 쇄신과 교회의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하여왔다. 그러므로 성 도미니코는 「설교자의 사부」또는 「교회 진리의 수호자」라 불린다. 

 

 

1. 생애와 인품

 

도미니코는 1170년 스페인의 카스틸랴 지방의 칼래루에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주(城主)였던 펠릭스 구즈만과 사회적, 신앙적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 요안나로부터 좋은 가정교육,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도미니코가 태어났을 때 그의 두 형은 이미 사제로 수품되어 교회에 봉사하고 있었다. 그는 7세에 구미엘드이산 지방의 삼촌 신부에게 보내져 거기서 읽기, 쓰기, 산수, 라틴어 등을 배우게 되는데 그 때에 복사 소년으로 전례를 도우면서 성당 주변 생활에 친숙해졌다. 이때 그의 마음 안에 사제 성소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14세에 그는 학문의 중심지인 팔렌시아대학에 가서 논리학, 수사학, 철학 등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신학 공부를 마친 뒤 25세 되던 1195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곧 오스마 교구의 참사회에 들어갔고 젊은 나이에 참가회의 부원장이 되었다. 참사회는 교구 사제들이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따르면서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고 신자들에게 사도직 봉사를 수행하면서 공동생활을 하던 단체였다.

 

1201년 도미니코가 오스마 교구장 돈 디에고 주교와 특수 사명을 띠고 프랑스 남부 지방을 여행하게 되는데 알비크와 파 이단에 의해 활폐화된 교회의 모습을 직접 보고 체험하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도미니코 일행이 툴루즈를 지나다가 한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그 주인이 알비즈와 파 이단에 몰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도미니코는 밤 새워 그와 토론하면서 가톨릭 진리를 설파하였다. 다음날 아침 여관 주인은 오류를 버리고 진리를 믿기로 약속하면서 기쁜 표정으로 그들을 배웅하였다. 이 계기로 도미니코는 그 사람처럼 무지로 인해 오류에 빠져있을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통해 교회의 진리와 신앙을 수호하는데 헌신하는 설교가들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러한 사명을 수행할 수도회를 설립할 뜻을 마음에 두기 시작하였다.

 

도미니코는 뜻을 같이 하던 동료들과 복음적 청빈 자세로 복음을 선포하며 생활하던 중 1215년 「설교자들의 수도회」설립 계획을 가지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찾아갔다. 교황은 도미니코의 인품과 시낭자세 그리고 사도직 수행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살펴보면서 감명을 받았고 그가 세울 새 수도회가 기존 규칙들 중 하나에 기초를 두고 회헌을 작성하면 인가해주기로 약속하였다.

 

도미니코와 동료들은 설교수도회에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채택하고 성직 수도 참사회인 프레몽트레회의 관습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하였으며, 1216년 12월 22일 그의 수도회는 결국 신임 교황 호노리오로부터 인준되었다.

 

그가 설립을 준비해온 기간에 비하면 너무 짧은 기간인 5년 동안 수도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놀라울만큼 단단한 기반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훌륭하고 유능한 인물들을 많이 공동체에 입회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도미니코는 수도회의 첫 총회를 마친 얼마 후인 1221년 8월 6일 이태리 볼로냐에서 51세로 생애를 마쳤다. 성 도미니코가 그의 주변에서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남긴 소중한 마지막 예언은 이러하다. 『서로서로 형제들간에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가도록 하라』.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 이미 서유럽의 8관구에 60여 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 500여 수사들이 있었다. 1300년 경에는 500여 수도원에 회원들이 1만 여명으로 증가하였다. 도미니코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도미니코의 저술로는 프레몽트레회의 관례에 기초한 「관습서」, 「성 식스토 수녀들을 위한 규칙」그리고 세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뒷날 「도미니코회」라 불리게 되는 설교자들의 수도회는 사제, 수사, 수녀, 재속회원들로 구성되어 교회 안에 가장 영향력있는 수도회 중 하나로 성장하였으며 아퀴노의 성 토마스, 성 대 알베르토, 성 빈첸시오 페레르, 교황 비오 5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리마의 성녀 로사, 성 마르틴 데 포레스 등 다수의 성인들을 배출하였다. 

 

 

2.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1) 도미니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의 주요 임무인 설교가 지나친 신중성으로 인해 제한 받던 상황에서 혁신적 운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 당시 설교는 엄격히 주교에게 주어진 권한이었으며 따라서 주교들만이 일반적으로 설교하였다. 라테란공의회는 설교과 주교의 권한이며 그를 대신하여 그 임무를 수행할 경우 심사숙고하여 적절한 인물을 선택하도록 권고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미니코는 처음으로 설교사명을 위한 수도회를 구상하고 교회의 인준을 요청하여 얻어낸 것이다.

 

교회의 주요한 임무중 하나이면서도 제대로 실시될 수 없을 만큼 제한받던 설교가 복음화와 성화를 위하여 빛을 비추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임을 상기시켰고 그것이 사도직 활동에서 주요 위치를 차지하는 것임을 실증한 것이 도미니코의 큰 공헌이라 할 수 있다.

 

2) 도미니코는 그가 세운 「설교자들의 수도회」의 영성을 열렬한 기도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사도직 활동을 병행하는 생활, 즉 관상과 활동이 통합된 생활로 규정하였다. 그는 옛 수도원 제도의 전통 중 이상적인 것들을 그의 수도회에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모범을 프레몽트레회에서 취하여 발전시켰다. 프레몽트레회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채택하여 사제와 평신도들이 청빈을 지키는 단체를 이루며 기도와 노동의 봉쇄생활과 성직 생활을 결합시키고자 하던 의전 사제단이었다.

 

도미니코 회헌의 특성은 수도회의 카리스마 실현을 위하여 신축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는 불변적으로 고정되는 규칙을 만들려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모든 것은 추후에 수정될 수 있도록 열려있으며 설교 수도회의 본 사명을 방해하는 것이면 어떠한 규칙도 참 규칙일 수 없는 것이다.

 

3) 도미니코는 「진리」(veritas)를 수도회의 기본 모토로 삼았는데 그것은 그의 수도회의 목적과 카리스마에 따른 사도직 영역을 잘 표현한다. 그는 단순히 수도원 제도의 발전이나 수덕생활의 쇄신에 머물지 않고 거시적 차원에서 사회와 교회의 요구에 응하고자 하였다. 회원들이 복음서에 나타나는 사도적 생활로 돌아가야 하고 청빈의 자세를 쇄신해야할 뿐 아니라 열심히 참된 진리를 공부하여 스스로 지적 수준을 향상시켜 당시 교회의 삶에 위협을 주던 이단을 퇴치시키고 설교를 통하여 선교하며 신자들을 성화시키는데 봉사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성직자들이었다. 평수사들의 부차적 기능을 인정하면서도 13세기에 유일한 성직자 회로 설립된 것이다. 도미니코가 당시 성직자들에게 쇄신요청되었던 영성의 아주 새롭고 주목할만한 측면으로 강조한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러한 전망에 의해 그의 수도회는 학문을 진보시켰으며 뒷날 스콜라 철학을 육성하여 교회에 크게 기여한다. [가톨릭신문, 1999년 11월 28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도미니코 (하)

 

 

3. 도미니코의 영성

 

성 도미니코는 설교 수도자들의 영성의 기초를 무엇보다 관상에 둔다. 그 관상은 세상과 격리된 채 이루어지는 은수적 성격을 띤 것이 아니고 사도직 활동과 조화를 이루는 선교적 차원의 것이다. 설교는 관상의 결실을 전하는 것이며 공부는 설교준비를 위한 관상의 방편이다. 그리고 성인은 설교자들의 삶의 전형을 사도들의 선교활동에서 찾고자 한다.

 

3. 1. 관상과 활동의 조화와 균형

 

도미니코는 열렬한 기도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사도직 활동을 병행하는 수도회, 즉 관상과 설교활동이 조화롭게 통합된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수도회가 설립되던 13세기 초에는 두 가지 유형의 수도회들이 있었다. 한 유형은 봉쇄적 관상수도회이고 다른 한 유형은 활동에 전념하던 수도회였다. 물론 그 전에도 시토회 등 일부 수도회에서 관상과 활동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소극적 자세에 머물렀던 데에 비해 도미니코는 그 두 측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룬 수도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관상하라. 그리고 관상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 설립자의 정신을 요약하는 이 모토는 관상의 중요성과 사도직의 소명을 통합하는 수도회의 사명과 목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과연 첫 회헌(1505)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 수도회는 시초부터 관상한 것을 알리고 설교하며 가르치는 것을 특별히 본질적이고 원칙적인 목적으로 삼아왔다.'

 

3. 2. 사도시대의 선교 영성에 복귀

 

도미니코는 복음화 영성의 근원과 모범을 예수께서 제시하셨고 사도들이 실천한 선교활동 모습에서(마르 6, 7~12 참조) 찾고자 하였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두 명씩 제자 파견, 식량자루와 금전을 지니고 다니지 말 것, 필요한 음식을 구걸하는 것 등이다.

 

도미니코가 살던 12, 13세기 교회의 상황은 사도시대 및 초기교회의 것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받을 만큼 변형되어 있었다. 그는 그러한 상황의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사도들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심했으며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동참을 바라면서 초대하였다. 그의 그러한 삶의 결단은 복음적 매력을 과시하여 설교의 효과를 높이려는 데 있지 않았다. 그 동기는 보다 단순했으며 깊었다. 그는 사도들의 삶의 모범에서 올바른 영적 가치를 보았고 그러한 모방에서 자신이 설교하는 그리스도의 삶과 보다 긴밀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복음적 영감이 일으킨 결과는 탁발(托鉢:수도승이 돌아다니며 동냥하는 일)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난한 삶과 충만한 그리스도인 생활의 쇄신이었다. 도미니코는 참된 설교가는 '걸인'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전하려는 말씀은 기도로써 하느님께 청하고 육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은 사람들에게 겸손되이 동냥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설교가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가 설교가로서 일을 시작할 때 채택한 탁발제도는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 줄 사람들의 관대함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지원받을 '권리'를 찾지 않았다. 그는 자유로운 지원을 받고 싶었다. 

 

도미니코와 그의 동료들은 매우 단순한 자세로 규칙을 지키고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육화한 사도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미니코가 지향하고 따르고자했던 사도들의 본질적 전형은 머리누일 자리조차 없이 떠돌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셨다.

 

3. 3. 설교 : 관상의 결실 선포

 

도미니코가 설립한 수도회의 카리스마의 첫째가는 본질적인 요소는 설교이다. 이 설교는 하느님의 말씀·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용서와 화해,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는 궁극적 목적인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봉사의 방편이다. 도미니코와 그 동료들은 설교를 통해 모든 믿는 이들이 복음화 되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깨닫도록 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러나 설교자들 자신이 먼저 복음화 될 때에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음을 잘 알았다. 도미니코가 지향하는 설교 영성의 특징은 이러하다.

 

1) 설교는 항구하고 지속적이야 한다. 2) 설교는 공동체적이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 전체가 설교하는 것이고 이로써 지속성과 항구성이 유지될 수 있다. 3) 설교는 성령의 이끄심과 하느님 말씀의 풍요로움으로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의 영적 자세에 관한 것이다. 설교자는 권력을 지닌 자가 아니라 카리스마를 지닌 영적 스승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관리나 행정직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4) 설교는 교의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이란 뜻이 아니고 초기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5) 설교는 긍정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윤리적 권고나 보속에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선물임을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선하심을 알리는 것이다. 6)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수도자의 삶의 교본이고 하느님 사랑에 관한 책이다. 바로 그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7) 설교는 예언적이어야 한다. 설교는 깊은 관상과 하느님 말씀의 빛 안에서 해석될 수 있는 미래를 비추어 줌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밝히고 역사 안에 존재하는 시대의 징표를 알려야 한다.

 

3. 4. 공부 : 관상의 방편

 

도미니코는 그의 수도자의 생활에서 또 하나의 중요 요소로 공부를 채택하였다. 그에게 공부는 진리에 대한 관상이고 성화되는 길이며 사도직 준비를 위한 필수적 수단이다. 다른 수도회들도 공부의 필요성을 간과하지 않았지만, 도미니코 수도회가 역설하는 공부의 독특성은 사도적이라는 것이다. 도미니코 가족은 공부를 통하여 마음으로 하느님의 다양한 지혜를 묵상하고 교회와 모든 이를 위한 복음화의 방편으로 설교 봉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사도적인 공부란 공부 자체에 대한 정신적 만족감에 빠질 수 있는 지식에 대한 심미적 추구라는 유혹을 벗어나 머리 뿐 아니라 기도의 마음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식별을 위한 빛을 받고 식별된 진리를 전하려는 마음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과 함께 프레몽트레회의 관습을 따르던 도미니코와 그 동료들은 1216년의 제 1차 참사회 및 220년의 총 참사회에서 그들의 카리스마 및 영성의 특성을 부기하였다. 그 중에서 수도회 제일의 목적인 인간구원을 위한 설교에 필히 요청되는 공부에 관한 사항이 부각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독서(lectio divina) 및 육체 노동 대신 거룩한 진리에 대한 면밀한 공부의 필요성, 공부에 도움되는 침묵 강조, 거룩한 진리를 공부하는 데에 방해되지 않도록 간결하고 경쾌한 합창일도를 바침, 병고 뿐 아니라 공부와 사도직의 이유로도 관면을 주는 것 등이 그것이다. 

 

도미니코가 엄격히 부과한 거룩한 진리에 대한 공부는 설교수도자들로 하여금 관상적 태도를 갖추게 했고 그 관상의 결실을 설교를 통해 전하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성서 말씀 안에서 뿐 아니라 역사 안에서 뜻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표지를 또한 관상하고 식별하고자 했다. 그들에게 공부가 카리스마 식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며 사도적인 것이라는 것이 최초의 회헌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우리는 주로 이웃의 영혼에게 유익이 되게 할 목적으로 열심히 또 최고의 열성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서론) '형제들이 신심을 잃지 않고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공부하도록 교회에서 바치는 모든 시간경은 간결해야 한다.(4절). [가톨릭신문, 1999년 12월 5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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