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자료

2018-03-31.....부활성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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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8-04-28 ㅣ No.2199

부활성야 (復活聖夜)

1: 창세기 1,1-2,2        3: 탈출기 14,15-15,1      5: 이사 55,1-11

7: 에제키엘 36,16-17.18-28      신약독서: 로마 6,3-11   복음: 마르코 16,1-7

2018. 3. 31. (). 이태원

 

주제 : 나는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고,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는 실현되지 않은 특별한 일을 기억하는 밤입니다. 우리에게 아직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보이신 부활을 우리도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기를 청하면서 그 일을 기념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신앙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표현은 부활신앙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바에 따라서 성탄의 의미를 중요하게 말할 자유는 있지만, 신앙에서는 부활의 의미가 더 크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의도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미사시간을 통해서 읽는 말씀의 길이도 성탄의 때보다 부활을 기억하는 날에 읽는 내용이 더 많고 그 길이도 깁니다. 성탄에 읽는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로마제국에 편입돼 있던, 베들레헴에서 로마황제가 다스리던 때에 태어나셨다는 것이 전체의 큰 골격이지만, 부활을 기념하는 오늘 들은 말씀은 천지창조와 히브리사람들에게 실현된 파스카와 그들의 삶에 다가온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선포와 예수님의 탄생을 거쳐 부활에 이르기까지 <전체 구세사의 얘기>를 통할(統轄,=모두 거느려서 다스림)합니다.

 

신앙에서는 부활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지만, 그 말씀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기념하는 때는, 산과 들로 또 바다건너로 놀러 가기가 좋을 때이고, 부활을 기념하는 날짜가 앞뒤로 이동하고 고정돼 있지 않아서 그럴까요? 사람들이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좋은 의도를 말한다고 해도 삶의 효과를 체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탄생을 기념하는 때는 한 해의 끝에 가깝고 추워지는 때라서 움직임도 적고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때이지만, 죽음과 그 이후에 연결되는 부활에 대한 것은 사람이 자기의 삶으로 체험한 일도 없고, 받아들여야만 올바른 모양을 이룰 수 있는 믿음과 신앙의 이야기라서 감흥이 달라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부활은 여러분의 삶에 어떤 모양으로 드러나는 일입니까? 신앙의 내용이라서 해석이 어렵습니다만,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 일을 삶으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높은 하늘, 창공을 구름이 지나가는 일에 비교할 일이고, 나의 삶에 온다고 해도 흔적은 남기지 못할 일이라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심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옳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삶의 모양새를 바꿔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몸으로 부활을 표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내 몸으로 무엇을 또 어떻게 표현하면, 내가 부활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가능하겠습니까?

 

부활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은 숨을 쉬고 움직이는 현실에서,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끝나고 난 다음의 세상에 연결될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부활은 내가 사는 현실과 멀리 떨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부활이라고 여기면 진짜 부활은 나의 삶에 실현될 가능성은 없는 딴 나라의 일이 되고 말 일입니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에서, 경험하지도 못했고 경험이전의 일인데, 우리가 그것을 아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제아무리 인간의 머리가 좋다고 해도, 사람이 삶에서 경험과 체험으로 알아듣지 못한 일은 신앙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니면, 알아들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게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말하는 존재인 사람이 가진 능력의 한계입니다.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열한 명의 사도였고, 예수님을 그림자처럼 따랐던 몇 명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고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난 일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마르코복음이 전하는 얘기에는 예수님이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무덤에 있었던 젊은이, 시신이 놓였던 곳의 오른쪽에 앉았던 젊은이가 전하는 소리가 전부입니다. 전하는 내용은 부활에 대한 것이지만, 부활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지도 않고, 제자들과 베드로사도를 만날 곳을 말하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은 믿고 따라야 하는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날, 우리가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기를 청할 시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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