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수도 ㅣ 봉헌생활

봉헌 생활의 해, 완전한 사랑5: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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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13 ㅣ No.498

[봉헌 생활의 해 - 완전한 사랑] (5)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 성 빈센트 드뽈 자비의 수녀회 수녀들은 빈센트의원에서 환자 접수부터 진료, 상담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한다. 한 수녀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진료 차례를 말해주고 있다. 수녀회 제공.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가 150만 명이 넘었다. 국민 100명 중 3명꼴로 외국인인 셈이다. 이 중 절반 정도가 취업을 목적으로 한국에 온다.

이주 노동자의 90%는 단순 기능 인력이다. 건설업, 제조업 분야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이들은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경기도 안산에 있는 빈센트의원은 몸이 아프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한 이주 여성의 이야기

“엄마가 한국에 가서 돈 많이 벌어올게. 잠깐만 떨어져 사는 거야.”

세 자녀만 남겨 두고 나는 4년 전 우즈베키스탄을 떠났다. 1인당 국민소득이 우즈베키스탄의 10배인 한국에 가서 일하면 아이들과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한국에 가서 몇 년만 고생하자.’ 그렇게 나는 친척들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도착한 한국에서의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인력시장에 들어오는 일 중에서 한국 사람들도 하기 힘들어 비어 있는 자리에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사무치는 외로움이었다. 고향에 두고 온 자녀들 생각에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웠다.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진 것도 그때 즈음이다.

“머리가 뜨겁고, 숨쉬기가 힘들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병원 한 번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던 내가 찾아간 곳은 안산의 빈센트의원이다. 수녀님들은 처음 보는 내 손을 꼭 잡고 어디가 아픈지 물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기침과 고열, 숨쉬기가 힘들던 내 병명은 폐렴이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수원 성빈센트병원으로 옮겨 중환자실에서 한참 동안 사경을 헤맸다.

“마리아, 꼭 살아야 해. 자식들 보러 가야지.”

잠깐씩 의식이 돌아올 때면 눈앞에 수녀님들이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꼭 일어나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병실에 찾아와 기도를 해주었다.

뜨거운 눈물과 함께 살아갈 희망을 다졌다. ‘한국에도 나를 걱정해주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수녀님들을 통해 나는 살아갈 힘을 얻었다.
 
- 우즈베키스탄 이주 노동자 마리아(가명, 43)씨 사연 재구성


빈센트의원의 수녀들

- 12월 30일 경기도 안산 빈센트의원 앞에서 수녀들과 봉사자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하얀 머릿수건을 쓴 수녀들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이쪽으로 와서 혈압부터 재요.” 환자의 차트를 작성하고 약을 짓고, 운동 방법을 알려 주는 이들이 모두 수녀다. 간호사로, 혹은 약사로 수십 년 동안 일해온 수녀도 있다.


“감기는 이제 다 나았어? 열은 안 나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이들은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수녀들.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들의 말에 온 신경을 기울인다.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타국에서 몸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언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제대로 표현도 못 하니….”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안산 빈센트의원은 의료보험이 없는 이주 노동자나 행려인들에게 무료로 진료해준다. 10년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생명을 준 곳이다. 수녀회의 한국 진출 40주년을 기념해 경기도 안산시 사동에 2004년 처음 문을 연 빈센트의원에는 현재 수녀 6명이 원장, 약사, 간호사, 행정 업무를 맡아 소임을 다하고 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곳

원장 다니엘라 수녀는 병원을 찾는 이들을 하느님으로 여긴다고 했다. ‘가난한 이들 중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라’는 빈첸시오 성인의 가르침대로, 가난한 모습으로 오는 환자들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아픈 사람들이에요.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라면 국적이나 종교를 가리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 저희의 사명입니다.”

빈센트 의원은 단순히 아픈 사람의 병을 치료해주는 곳이 아니다.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음의 병이 몸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요. 여기 오시는 분들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누구 하나 관심 가져주지 않는 분들이죠.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들어드리고,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도록 해요. 그리고 그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정성껏 기도를 바칩니다.”

평일에는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주말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수녀들은 아침과 저녁 시간에는 여느 수녀회 수녀들과 마찬가지로 기도와 묵상을 하며 보낸다. 의료 사도직을 수행하는 수녀들의 삶이 다른 수도회보다 버겁진 않을까 했는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 수 있어 행복하단다.

“우리 사회의 가장 소외되고 어려운 분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게 해 드리고 싶어요. 아플 때 위로해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1841년 3월 25일 독일 파다본교구장 프레드릭 클레멘스 주교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1581~1660) 성인의 영성을 따라 ‘파다본 성 빈센트 수녀회’를 설립한다. 1581년 프랑스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빈첸시오 성인은 사제품을 받은 뒤 평생을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살았다. 그는 1737년 6월 16일 성인품에 오른 뒤 1885년 5월 18일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모든 자선사업 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됐다.

1965년 1월 8일 한국에 진출한 수녀회는 1967년 수원교구에 성 빈센트 병원을 개원하면서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고유의 사도직을 이어왔다. 관구 제도가 없는 수녀회는 1990년 6월 21일 독일 모원으로부터 독립해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로 교황청 인가를 받았다.

수녀회는 한국 진출 40주년을 기념해 2004년 7월 5일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환자들을 돕는 무료진료소 ‘빈센트의원’을 개원했다. 현재 6명의 수녀와 1명의 상근의사가 근무하며, 20여 개의 진료과를 담당하는 의사 50명을 비롯해 자원봉사자 300여 명이 돌아가면서 봉사를 하고 있다.

수녀회는 복지 사각 지대에 있는 이들에게 더 나은 의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지난해 빈센트의원을 재건축했다. 2014년은 빈센트의원 개원 10주년을 지낸 수녀회는 8일 한국 진출 50주년을 맞았다.

[평화신문, 2015년 1월 11일,
김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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