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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내 삶을 흔든 작품: A.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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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01 ㅣ No.112

[내 삶을 흔든 작품] 악행에 저항하고 바르게 살아야

A.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초등학교에 가기 전 어머니는 나를 서당에 넣으셨다. 천자문을 배우며 글을 읽혀 지금까지도 책은 나의 스승이고 벗이 되고 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시골 공소에서 주일첨례에도 나가고, 공소회장님께서 커다란 상본을 가지고 교리를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악마를 응징하시는 무서운 하느님을 연상하기도 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의 물건을 내다가 딱지치기로 모두 잃었다. 그러고는 언제나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시치미를 뗐다. 어머니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면서 “거짓말을 하는 녀석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꾸짖으시고 하루 동안 산에 가서 나무를 하라고 하셨다.

저녁에 어머니는 나에게 “다시는 거짓말하지 말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타이르시고 다음 날부터 다시 학교에 보내주셨다. 어린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의 사랑의 매는 나의 일생을 지배하고 있음을 깊이 느끼고 지금도 어머니를 그리며 감사한다.

해방 후 중학교에 다니면서 내 손에 들어오는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페스탈로치의 전기를 읽으면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스승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고,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애쓰신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와 같은 선각자를 높이 사기도 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마라.” 하는 도산의 가르침은 바오로 사도께서 “거짓을 벗어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에페 4,25),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콜로 3,9)라고 신앙공동체에 분부하신 말씀과 연관이 되고, 이것은 우리 삶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다. 특히 정치권력이 타락하여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더욱 그러하다. 세상이 공포 분위기에서 언론도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겪으면서 나는 보이티우스(Boetius)의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정의채 역, 바오로딸, 1964년)을 만났다.

보이티우스는 510년에 약관으로 로마의 집정관에 오른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곧은 성품 때문에 간신들의 모함으로 황제의 미움을 샀고 파비아라는 유배지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처형을 기다리며 시와 산문으로 이어지는 이 책을 남겼다. 자신의 내적 갈등을 그리면서 철학의 여신의 입을 통해 의롭게 살다가 가는 사람이 결코 외롭지 않다고 설파한 것이다. 그리고 권력은 본래 선한 것이 못되고 선용함으로써만 좋은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제2서 산문6 참조).

1982년 8월 대한변호사협회 창립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나는 “분쟁예방과 변호사의 직능”이란 주제로 발표하는 자리에서 변호사법 제1조에 따라 변호사회가 기본적 인권의 보호와 사회정의 실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나의 문제제기에 어떤 변호사는 “양 교수는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라고 반응하였다. 나는 변호사가 개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변호사 단체인 변호사협회가 중심이 되어 인권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보이티우스의 다음 시를 인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대답한 일이 있다.

“가련한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 하잘것없이 횡포하기만 한 폭군들을 / 무서워 떤단 말이냐. /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 너, 폭군의 진노를 무력케 하리로다. / 그렇지만 무서워 떨거나 / 항구치도 합당치도 못한 것만을 탐하는 자는 / 방패를 버리고 제자리를 떠남과 같으니 / 자기를 묶을 쇠사슬을 / 마련하는 것이니라”(제1서 시4에서).

폭압정치에 맞서 싸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의 타락은 부패로 얼룩지고 사회병리 현상을 깊게 한다. 보이티우스는 “배덕의 악한들이 / 높은 자리에 앉아 / 의인들을 불의하게 해치며 유린하니 / 덕망의 빛은 암흑 속에 감추어지고 / 악인들의 죄악을 의인들이 짊어지는도다.”(제1서 시5에서)라고 적고 있다.

1974년 인혁당재건위사건은 박정희와 그 하수인들이 간첩으로 조작하여 군법회의를 거쳐 1975년 4월 8일 대법원 판결로 확정한 다음 날 새벽에 억울한 8명을 사형시킨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이다. 우리 역사는 이러한 끔찍한 범죄들을 바르게 기록하여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그 박정희를 미화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상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이성과 양심을 지닌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른 동물과는 달리 하늘나라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

보이티우스는 철학의 여신을 통해서 “얼굴을 들어 하늘을 향하고, / 눈으로 드높은 곳을 우러르는 너, / 육신은 높은 곳을 향해 바로 섰으나 / 정신은 아래로 가라앉지 않게 / 네 정신을 천상에로 들어 올리라.”(제5서 시5에서)라고 한다.

또 그는 이 책의 끝자락에서 “너희는 악행에 항거하고 덕행을 닦으라. 올바른 희망에 마음을 들어 올리라. 하늘로 겸손된 기도를 올리라. 너희가 스스로를 속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바르게 살아야 할 크나큰 필연성을 지니고 있으니 곧 너희는 모든 것을 투시하는 재판관의 눈앞에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니라.”라고 적어 우리에게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악행에 저항하며 떳떳하고 바르게 살 것을 가르치고 있다.

6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보이티우스가 로마의 집정관이고 궁중장관을 지내면서 언제나 정의에 입각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 때문에 반대파의 무고로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고통과 부활, 그리고 순교자들의 피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굳건하게 살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권력의 타락은 참으로 심각하다. 이런 속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유혹이 뒤따른다. 역대 대통령이나 측근들 가운데 부패에 연루되지 않은 자가 거의 없다.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고 국민을 섬기기보다는 군림하려는 자세를 버리지 못한 탓이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10).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이권에 눈이 멀어 뇌물을 챙기고 문제가 되면 잡아떼는 권력의 실세들을 보면서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라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도 깊이 묵상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떳떳하고 바르게 살겠다는 마음가짐을 되새기자. 공동선의 실현이 공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임을 일깨우고, 하느님께 공손하게 기도하며 욕심을 버리고 올곧게 살도록 힘써야 하지 않을까.

* 양승규 시몬 - 서울대학교 법학과 명예교수.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과 세종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2년 6월호, 양승규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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