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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나가사키 성지 순례기 (상) 히라도와 이키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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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11-15 ㅣ No.741

일본 나가사키 성지 순례기 (상) 히라도와 이키츠키


동양의 로마에 맺힌 '순교의 피'

 

 

타비라 성당. 히라도 해안가에 자리잡은 벽돌조 타비라 성당은 일본에서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는 성당이다. 성당 바로 옆자리에 조성된 신자들의 공동묘지가 소담한 성당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난 해 순교복자 188위를 탄생시킨 일본 나가사키대교구는 시복 1주년을 기념해 나가사키현과 함께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지로 등록한 29개 성당 홍보에 주력하고 있다. '동양의 로마'에서 '순교의 땅'으로 이미지를 새롭게 부각시켜 세계의 순례자들을 유치하려는 나가사키대교구의 노력이 대단하다.  나가사키대교구가 시복 1주년 기념으로 홍보에 매진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 후보 등록지를 3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신앙의 애환 서린 히라도(平戶)

 

일본에 그리스도 복음이 전해진 것은 1549년 예수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신부에 의해서이다.

 

일본 큐슈(九州) 남부 가고시마에서 복음을 선포한 하비에르는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와 불승들의 박해가 있자 1550년 9월 나가사키현 남서해 지역에 위치한 히라도(平戶)로 옮겨 복음을 선포했다.

 

당시 히라도는 국제 교류 도시였다. 히라도는 16세기부터 유럽 문물을 많이 받아들여 아시아와 유럽이 혼연일체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또 히라도는 임진왜란 당시 많은 병사를 파견했고, 이곳 다이묘 마츠우라는 귀국 때 조선 도공 100여 명을 끌고와 '히라도야키'라는 도자기 문화를 열기도 했다.

 

하비에르 신부는 히라도에서 약 한 달간 머무는 동안 다이묘 마츠우라 타카노부(1529~1599)의 가신들과 키무라 집안 사람 1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 후손들 중 키무라 세바스티아노는 일본인 최초의 예수회 신부가 됐다. 임진왜란 때 끌려와 세례를 받은 조선인 코라이 안토니오가 히라도에서 순교했다.

 

- 히라도 성당.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의 히라도 선교를 기념해 지은 이 성당은 독일식 비대칭 고딕양식으로 정면에서 볼때 왼쪽 첨탑만 보이는 특이한 구조로 돼 있다.

 

 

지금도 히라도는 동서 문화의 이국적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울러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잇따른 가톨릭 금교령에 의해 300여년 동안 박해를 당하면서 순교자들과 신분을 감춘 채 숨어 살았던 가톨릭 신자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 타비라(田平)성당

 

히라도 해안가 언덕에 자리잡은 타비라 성당역사는 메이지(明治) 19년(1886년)에 라게 신부가 구로시마(黑島)에서, 드로 신부가 데즈에서 숨어지내던 가톨릭 신자 몇가족을 타비라 요코타데로 이주시키면서 시작됐다.

 

나카타 도우키치 신부가 1914년 주임으로 부임한 후 1916년 성당 건축 공사를 착공, 1918년 5월 14일 완공해 일본 26위 순교자에게 헌당했다. 타비라 성당 건립 공사는 쉽지 않았다. 프랑스인 독지가에게서 기부를 받아 착공했지만 자금부족으로 나카타 신부와 신자들이 노력 봉사를 해야만 했다. 석회를 구입할 돈이 없어 히라도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조개 껍데기를 구워 갈아 석회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후기 벽돌조 양식의 타비라 성당은 일본의 저명한 건축가 데쓰카와 요스케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종탑에는 1931년 프랑스에서 도입한 '천사의 종'이 설치돼 있으며 성당 좌우측 창에는 성경 내용을 주제로 한 색유리화가 장식돼 있다.

 

카쿠레 키리시탄의 관음 성모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톨릭 금지령 이후 일본 가톨릭 신자들은 250여년간 숨어 지내며 그들만의 신앙을 유지했다. 카쿠레 키리시탄이라 불리는 이들 신자들은 불교도로 가장해 성모자상을 관음보살상처럼 그려 기도때 사용했다.

 

 

▲ 히라도 성당

 

히라도의 상징인 히라도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히라도 선교를 기념해 1931년에 건립한 성당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주첨탑을 작은 첨탑들이 둘러싸고 있는 독일식 고딕양식 건축물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고딕양식으로는 보기 드문 비대칭 건물로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만 팔각 탑이 보여 불가사의한 매력을 준다.

 

 

숨은 신자들의 마을 이키츠키(生月)

 

이키츠키(生月)는 히라도에서 자동차로 약 30여분 거리에 있는 나가사키현 귀퉁이에 붙은 마지막 섬이다. 16세기 중엽 신자 수가 1300여 명에 달했던 이키츠키는 일본 최초 서양 음악이 시작된 곳이다.

 

1587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가톨릭 금교령으로 박해가 시작되자 1599년 코테다 일가는 신자 600명을 데리고 나가사키로 망명했다. 코테다의 남은 가신들 집안은 '마츠우라가의 서쪽 문'이라 불리는 서해안 이키츠키와 시시코, 네시고로 들어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 마을들은 주민 거의가 숨어지낸 가톨릭 신자 즉 '카쿠레 키리시탄' 동네로 유명하다.

 

이키츠키 순교자들 가운데 니시 겐카 가족의 순교는 큰 감동을 준다. 2살 때 세례를 받고 미망인 우술라와 결혼한 니시 겐카는 3남 1녀를 두었다. 딸 마리아의 시아버지 고발로 체포된 니시는 배교 강요에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버리는 것조차 아깝지 않다. 나는 정말 행복하다"며 대형 십자가에서 예수님처럼 못박히길 원했으나 거절당하고 참수형을 당했다. 남편이 처형되는 시각, 아내 우술라와 장남 요한도 차례로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순교했다. 니시 3가족 순교자의 돌무덤은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하나의 치장도 없이 보존되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24일 시복됐다.

 

이키츠키 순교지. 일본 188위 순교 복자 가운데 1609년 이키츠키 순교자들의 처형지.

 

 

이키츠키의 많은 순교지 가운데 잠복시기를 거치면서 마을의 수호신이 되거나 신사가 된 곳도 있다. 특히 이곳에는 아직도 숨어 있는 200여 명의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있다. 이들은 가톨릭 교회로 들어오지 않고 잠복시대 신앙생활을 그대로 고수, 현재의 가톨릭 전례나 수계생활과는 변형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키츠키에는 카쿠레 키리시탄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관과 유네스코 문화재 후보지인 야마다성당이 있다.

 

 

▲ 카쿠레 키리시탄 공동체 카레마스(枯松)신사

 

'숨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의 '카쿠레 키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은 일본 가톨릭교회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일본 가톨릭교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금교령(1614년) 이후 250년간 긴 잠복 기간을 거친다. 1865년 3월 17일, 나가사키 오우라성당에서 우라카미의 신자들과 푸티잔 신부의 조우가 이뤄질 때까지 250년 동안 카쿠레 키리시탄들은 비밀교회를 만들어 그들만의 신앙을 유지해 왔다.

 

지난 11월 3일 카쿠레 키리시탄의 비밀교회인 카레마스 신사에서는 나카사키대교구장 타카미 미츠아키 대주교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카쿠레 키리시탄과의 뜻깊은 만남이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가톨릭 미사와 카쿠레 키리시탄의 '오라시오'(기도)가 봉헌됐다. 1999년부터 해마다 한차례씩 열리는 이 행사를 통해 몇몇 카쿠레 키리시탄이 가톨릭 교회로 되돌아 왔다.

 

[평화신문, 2009년 11월 1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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