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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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아프리카의 꽃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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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3-13 ㅣ No.901

''아프리카의 꽃'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를 아십니까?

 

 

노예 출신의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삶을 비관하는 사람이라면 이 여인의 극적인 삶을 들여다보라.

 

2월 8일이 축일인 아프리카 출신 성 요세피나 바키타(Josephina Bakhita, 1869~1947)다.

 

그는 수단의 노예시장에서 5번이나 팔려다닌 노예였다. 주인들에게 매일 매질을 당한 탓에 몸에 144개나 되는 흉터를 지니고 살았다. 그런데도 그 깊은 절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주인'을 만나 성인이 됐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성 바키타의 삶에 감동했다. 그래서 두 번째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서두에서 이 여인을 희망의 증인으로 소개했다.

 

"(그녀는) 그때까지 자신을 소유해 왔던 무시무시한 주인들 말고 전혀 다른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덜 잔인한 주인을 만나기 바라는 소박한 희망이 아니라 위대한 희망입니다. 이러한 희망을 알게 되어 그녀는 구원되었습니다."(12~13쪽)

 

 

희망을 둘 곳이 없던 청소년기

 

수단 다르푸르에서 태어난 바키타는 9살 때 아랍 노예상인에게 납치됐다. 그때부터 노예시장에서 팔리고 되팔리는 '물건'이 되어 고통과 치욕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바키타라는 이름도 납치 당시 공포에 질려 이름을 대지 못하자 노예상들이 지어준 것이다. '운명아'라는 뜻이다. 그는 특히 한 장군의 어머니와 부인의 몸종으로 일하는 동안 매일 피가 나도록 매를 맞았다. 매질과 학대, 고된 노동과 감시…. 그가 희망을 둘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키타의 운명은 이탈리아 공사(公使) 칼리스테 레가니의 소유가 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공사의 가족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채찍질을 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인간 대접, 바키타는 주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도 눈물을 흘렸다.

 

이어 그는 공사의 친구인 아우구스토 미치엘리의 손에 넘겨졌다. 그리고 14살 되던 해 미치엘리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땅을 밟았다. 얼마 후 미치엘리는 근무지를 옮기게 되자 큰딸과 유모 바키타를 베니스에 있는 카노싸(Canossa) 수녀원에 맡겼다.

 

바키타는 바로 그 수녀원에서 그동안 섬겨왔던 주인들보다 더 높은 주인, 즉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세례를 받으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태양, 달, 별들을 보면서 홀로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분을 보고 싶고, 알고 싶고, 그분께 나의 모든 찬사를 드리고 싶은 갈망을 느꼈어요."

 

그는 매일매일 하느님을 새롭게 알아갔다. 하느님은 그런 그를 신비로운 길로 인도했다. 마침내 1896년 카노싸의 성녀 막달레나 수녀원에서 "나의 주인이시여" 하고 노래하며 수도복을 입었다.

 

바키타는 시호(Schio)라는 도시에서 50년 동안 하느님의 겸손한 딸로 살았다. 학식이 없는 터라 소임지는 주로 부엌과 빨래방이었다. 수녀원 문지기로도 오랫동안 일했다.

 

바키타는 마을 어린이들과 마주치면 그들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줬다. 시호 주민들은 차츰 그의 겸손과 단순함, 한결같은 미소에 매료됐다. 특히 주민들은 천상(天上)의 행복을 만끽하는 듯한 그의 평온한 미소 속에서 위로와 평화를 느꼈다. 사람들은 그를 '작은 흑인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받고 있어 행복합니다"

 

바키타는 어린이나 주민들을 만나면 늘 똑같은 말을 했다. "착하게 사세요. 주님을 사랑하세요. 주님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세요. 하느님을 아는 이 커다란 은총을 잊지 마세요."

 

또 "저는 분명히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이 사랑이 저를 기다려 줄 거예요.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는 말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바키타는 말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사람들이 근황을 물어오면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요"하고 대답했다. 그가 선종하자 추모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선종 12년후부터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된 것만봐도 그의 겸손과 덕행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92년 복자품에 오르고, 2000년에 성인 반열에 들었다.

 

성 바키타에 대한 아프리카 교회의 현양 열기는 대단하다. 성당과 교회시설 곳곳에 그의 사진이 '희망의 표징'처럼 걸려 있다. 그래서 그는 '아프리카의 꽃'이라고도 불린다.

 

[평화신문, 2011년 2월 27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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