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수도 ㅣ 봉헌생활

봉헌 생활의 기쁨: 죄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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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9 ㅣ No.502

[봉헌 생활의 기쁨] 죄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어언 27년, 봉헌생활을 하는 동안 기쁨과 희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슬픔과 고뇌도 많았고 좌절, 어두운 밤, 한없는 무력함을 경험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크게 남은 것은, 나의 죄의 역사를 날마다 은총과 구원의 역사로 바꿔주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대한 감사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나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내 삶 안으로 들어오시어 모든 속박에서 나를 해방시키려 하신 구원과 자비의 역사이다.


나의 과거시절

나는 태어나자마자, 열심인 할머니의 손에 안겨서 세례를 받고 좋으신 부모님의 사랑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꼬마 때는 장난이 너무 심해서 사촌형들은 다 하는 미사복사를 하지 못하게 되어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 하셨다.

중학교 때는 아파서 한 달씩 결석을 하고도 반에서 1등을 해내는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그러나 노력 없이 머리 좋은 것은 한계가 있어서 중학교 3학년 말부터 성적이 떨어져 고2 때는 뒤에서 세면 빠를 정도였다. 그러다가 고2 여름방학 때 학교 보충수업을 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수학 참고서를 잡고 씨름하여, 2학기 때는 상위권에 다시 진입하였다.

그때부터 수학과 화학에 흥미를 느껴 대학도 공대 화학공학과를 가게 되었다. 당시 나라 상황이 어수선하다보니 몰려다니면서 술을 참 많이도 마셨다. 대학 서클 간부를 맡으면서는 더더욱 활동과 술에 빠져 살았다. 몸도 많이 축났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중학교에서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신앙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다.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집에 자주 오셨지만 이리저리 피하고 마주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신 분이라 신앙생활도 간섭을 안 하셔서 내 마음대로 살았다.


회심으로 부르심

대학 3학년 때였다. 학군사관후보로 등록하여 군부대로 병영훈련을 갔는데 하느님의 첫 부르심을 느끼는 사건이 생겼다. 어느 날 현재 모교에서 건축학과 교수로 있는 친구가 같이 훈련을 받다가 성당에 가자고 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고 그날따라 미사에 가고 싶었다.

오랜만에 참여한 미사여서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가톨릭 성가 510번을 부르는 순간,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경직되었다. “주님께 올리는 기도 분향 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제사 같게 하시옵소서. 주여, 이 몸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어서 빨리 구하러 오시옵소서.”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세례를 받는 듯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했다. 거기서 교리공부를 하다가 또 한 번 전율을 일으키는 성가를 만났다. “천지 생기기전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 창조하시고, 어두움 비추는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 밝히셨도다.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생활하고 계시니 그 말씀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진리의 구세주라.”

이런 연이은 사건이 있고 나서 삶에 많은 변화가 왔다. 더 이상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지 않고 「교부들의 신앙」 등 신앙서적을 탐독하며 인생에 대해 숙고하였다. 그 무렵 외할머니까지 돌아가셔서 죽음도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수도원으로 부르심

회심은 있었지만 수도생활에 대한 부르심은 받지 못했다. 1982년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했는데, 특수미사일부대로 배치되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앳된 장교였지만 부대 여건상 직책은 높아서 많은 책임과 과중한 업무가 주어져 연애도 한 번 못하고 일에 파묻혀 지냈다. 강력했던 첫 부르심의 전율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무렵 같은 사령부의 행정과장이 군종성당을 위해 병력과 차량 지원, 장소 대여 등을 부탁했다. 부담도 되고 성가셨지만 차츰 자발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대와 군인성당 두 군데서 장교 레지오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신앙에 의문이 생겨 군인 신학생들과 토론하며 많은 질문을 하였으나 신통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나 자신의 도덕이나 윤리관이 형편없어서 나의 생각이 이끄는 대로 살고 있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의문이 사라지고 ‘하느님과 오로지 함께 있을 수 있는 고요한 수도원에 가야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그때부터 3년을 밤낮없이 그 생각만 하였다. 장교로 근무하면서 수사였던 부하의 도움으로 한 수도원에 성소자로 1년 정도 다녔는데, 활동이 너무 많아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기도했다. ‘주님, 제가 살기를 원하시는 수도원을 선택해 주십시오!’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당시에는 한국에 진출하지 않은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회를 알게 되어 이태리 본원에 지원서를 냈는데, 제대를 하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당시는 장군이 되려고 장기복무를 신청한 상태였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국방부장관에게 사유서를 써주신 다음에야 겨우 제대를 하고, 1987년 7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너그러우신 하느님

하느님은 당신을 등진 자를 위해서도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었다. 전혀 경건하지 않았고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도, 그런 나를 불러주셨기 때문이다. 대구 신학교를 다니고 이태리 본원에 가서 서원을 하고 공부하다 다시 한국으로 와 대학원을 다니고, 총아빠스님의 배려로 이태리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에서 교회일치신학 전문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이렇게 양성과 학업을 위해 이태리와 한국을 오가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곳이 위험하면 저곳으로, 저곳이 위험하면 다시 이곳으로 옮겨놓으시며 보호해주셨다. 엄하게 꾸짖지 않으시고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고치게 하시어 당신의 인내와 자비를 느끼게 해주셨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확신

나는 확신한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나의 능력, 노력 덕분은 손톱만큼도 아니고 오로지 주님의 자비였음을. 수도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엇 하나 잘한 것이 없다. 쌓아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태산 같은 죄와 실수뿐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다고 했는데, 나는 이런 하느님의 자비를 날마다 체험하고 살아가는 행운아다.

어떤 분은 수도생활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조롭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섭리의 역사로 얼마나 역동적이며 신비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봉헌생활을 통해 발견한 하느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명백한 확신이 있다. 바로 성직자, 수도자들의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안 계시다면 누가 그들을 불렀겠는가? 또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유덕현 야고보 - 신부. 1998년 사제로 수품, 경남 고성에 있는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수도회 원장을 맡고 있다.
* 하삼두 스테파노 - 부산교구 삼랑진본당 신자로 현재 명상그림과 전례미술을 연구하고 있다. 교회 간행물에 연재한 적이 있으며, 두 권의 묵상그림집을 발간하였고, 최근에는 「알로이시오 신부」 그림전기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5년 1월호, 글 유덕현 · 그림 하삼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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