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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동양고전산책: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 위령성월에 생각해 보는 삶과 죽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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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12 ㅣ No.264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 위령성월에 생각해 보는 삶과 죽음의 의미



위령성월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시기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죽음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묵상하게 됩니다. 가을은 더욱 깊어져 찬바람이 불고 가로수도 잎사귀를 물들이더니 하나둘씩 잎을 떨어뜨립니다. 나뭇잎을 떨어뜨려야 추운 겨울을 무사히 나고 다시 봄이 되면 새로 잎을 틔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무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를 이야기하면서 흔히 ‘몸 중심’의 사회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실 ‘몸’과 ‘마음’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몸 중심’의 사회와 ‘마음 중심’의 사회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는 ‘몸 중심’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모의 아름다움, 멋진 자동차, 화려한 집, 명품 옷과 가방으로 치장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멋있게 보이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하고 돈이 최고의 힘을 발휘하지요. 그리고 이 돈을 쟁취하기 위한 무한 경쟁이 시작됩니다. 타인과의 관계보다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반면에, ‘마음 중심’의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마음의 평화, 소통과 배려, 용서와 사랑과 같은 것들입니다. 여기서는 관계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서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져,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됩니다.

‘몸 중심’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몸이 망가지면 모든 게 무너집니다. 눈에 보이는 몸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병이 들고, 늙어 가는 것은 너무나 큰 불행이고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이란 절망의 정점이지요. 하지만 ‘마음 중심’의 사회에서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최고의 가치이기에 늙어 가는 것이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삶의 지혜가 쌓여 가며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죽음마저도 절망으로 귀결되는 끝이 아니라 영원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여지지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너무 ‘몸 중심’의 가치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은 무섭고 피하고 싶은 대상일 뿐입니다.

성현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자연스러웠습니다. 봄이 되면 다시 새싹이 피어날 것을 알고 죽음과도 같은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가을부터 잎을 떨어뜨릴 줄 알았습니다. 죽음은 마치 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특히 도가(道家) 사상가들은 인생의 모든 지혜를 자연(自然)에서 보고 배웠지요. 그 가운데 장자(莊子)가 단연 압권입니다.

장자의 아내가 죽자, 혜시가 조문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말했다. “자네는 저 사람과 함께 살면서 자식을 낳아 기르고 같이 늙어 왔네. 그런 그녀가 죽었으면 슬피 곡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자네는 오히려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이거 너무 심하지 않는가!”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네. 그녀가 죽었을 때는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런데 그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을 살펴보니, 본래 삶이란 없었던 것일세.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던 것일세.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氣)조차도 없었던 것일세. 흐릿하고 어두운 곳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氣)가 생기고, 그 기가 변해서 형체가 있게 되었으며, 형체의 변화로 삶을 갖추게 된 것일세. 그리고 이제 다시 변해서 죽음으로 간 것이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되풀이하여 운행하는 것과 같지. 아내는 지금 우주라는 커다란 방에 누워 편안히 자고 있는데, 내가 크게 소리 내어 곡을 한다면 그것은 하늘의 명(命)을 모르는 것일세. 그래서 곡을 멈춘 것이라네.”1)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이를 초월하는 장자의 경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마치 사계절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듯이 삶과 죽음도 기(氣)가 모였다 흩어지는 대자연의 운행과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장자는 자기 부인의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장자가 막 임종하려 하자, 제자들이 성대하게 장사 지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나의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알며, 밤하늘의 별들을 구슬로 삼고,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 정도면 내 장례 도구는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니겠느냐? 무엇을 더 보태려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했다. “저희는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파먹을까 걱정되는 것입니다.” 장자가 말했다.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에게 먹히고, 아래에 있으면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먹히는 법이다. 저쪽 것을 빼앗아다가 이쪽에만 주면 불공평하지 않겠느냐?”2)

사실 이 정도 경지라면 나는 육신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온 우주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경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는 ‘삶’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죽음이 닥치는 순간까지 오히려 삶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충실히 산 이들은 영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한 발을 성큼 내디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가(儒家) 철학자들은 삶에 더욱 충실했습니다. 『논어(論語)』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계로(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사람 섬기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또 죽음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3)

공자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 중심이었습니다. 삶을 더 충실히 살기 위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몸 중심’의 가치를 추구하며 끝없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질주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제동장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폭주하는 기관차를 멈출 수 없다면 나 혼자만이라도 멈춰 서서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는 다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이 늘 곁에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를 더욱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1) 『장자(莊子)』 「지락(至樂)」 4장.
2)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 11장.
3) 『논어(論語)』 「선진(先進)」 12장. 季路問事鬼神. 子曰,”未能事人, 焉能事鬼?”曰,”敢問死.”曰, “未知生, 焉知死?”

* 최성준 신부는 북경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5년 11월호,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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