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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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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생태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 3장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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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26 ㅣ No.714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3. 제3장 - 생태적 재앙의 근원들


① 이정표 없는 십자로에 선 인류



가야 할 목적지와 경로를 분명히 알면 그 걸음이 편안하다. 새삼 무수히 많은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비록 거친 도시 환경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간판 속에서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다. 지나치는 사람의 얼굴도 찬찬히 바라볼 수 있다. 도로 위의 위험스러운 장애물을 볼 수도 있다. 비도시의 한적한 길이라도 길가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도 새삼 눈길을 줄 수 있으며,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몸만 편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가야 할 목적지와 경로를 모른다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은 불편하고, 마음은 불안하다. 그러다가 십자로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불편과 불안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정표마저 없다면….

회칙은 이 시대를 그렇게 이정표 없는 ‘십자로’에 비유하고 있다(102항). 그 ‘십자로’ 앞에 서 있는 인류의 당혹감(불안)의 심각함을, 제3장의 제목처럼, ‘생태적 재앙’으로 기술하며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여기서 거듭 확인해야겠다. 회칙에서 말하는 ‘생태’(ecology)는 ‘자연환경’만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필자의 짧은 경험에서 볼 때,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자연’과 ‘생태’를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야말로 회칙이 오늘날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진단한 ‘환원(축소)주의’라 할 수 있다. 그 같은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지구촌 체계가 안고 있는 진짜 문제들과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못 보게) 가리는 것”(111항)이라 할 수 있다. 회칙 1장에서 밝힌 것처럼, 생태는 하나의 ‘공동 가정’이다. 그 가정에는 대기, 물, 땅과 다양한 생물, 사람, 사회, 그리고 지구촌 자체가 서로 결합하여 상호 의존 및 상호 작용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실재(reality)다.

그러니 오늘날 공동 가정이 직면한 ‘생태적 재앙’이란 자연환경의 훼손 정도로 축소해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위험에 빠진 것이 아니라, 모든 가족이 공멸의 위기에, 곧 가정 자체가 파멸될 위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칙은 묻는다. 어쩌다가 이 ‘공동의 가정’이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회칙은 그 직접적 원인을 “지난 2세기” 동안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하나인 인간이 감행한 “기술적 무모함”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무모함을 감행하게 된 ‘근본적인 무엇’을 제3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오해해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이 있다. 회칙 1장과 마찬가지로 3장은 생태적 재앙(증후군, symptoms)과 그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기술적 무모함’(102항)과 ‘무차별적이며 일차원적인 기술주의의 패러다임’ 추종(106항)을, 그리고 근본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왜곡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고발하고 폭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회칙이 밝히고 있듯이, 교종은 소극적으로는 “변화의 (급)속도”를 줄이자고,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실재들’(realities)을 보자”(114항, 116항)고 제안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회칙은 “윤리적 함의에 관심을 기울이는”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폭넓은 토론”을 촉구하고 있다. 그 토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다음의 인용은 분명히 보여준다. “생태의 문화가 오염, 환경적 부패와 천연자원들의 고갈이라는 당장의 문제들에 대처하는 일련의 부분적 응급 대응들쯤으로 환원(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태의 문화에는 사물을 보는 차별화된 방식, 차별화된 사고방식, 차별화된 정책들, 차별화된 교육 프로그램, 차별화된 생활방식과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111항). 교종은 “과감한 문화적 혁명의 길”로 나서자고 호소한다(114항). [평화신문, 2015년 9월 27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4. 제3장 - 생태적 재앙의 근원들


② 과학과 과학기술 : 창의성과 권력 기쁨과 흥분, 위험과 공포와 극단의 모험 사이에서



대중매체가 특정 기업들의 새로운 상품이 출시될 것이라는 예고 기사를 내보내고, 출시일이 되면 전날부터 매장 앞에서 밤을 새워 기다린 이들을 화면으로 내보내고, 그다음에는 전 세계에 걸쳐 그 신상품이 얼마나 팔렸는지를 생생하게 강조하며 보도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 상품에 담긴 새로운 기능들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다. 이 자리에서는 언론사인가 특정 기업의 홍보실인가를 따지는 일은 제쳐놓자. 하여튼 그렇게 ‘신상품’ 곧 ‘변화’는 세상을 휩쓸 기세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일부 사람들은 열광한다. 사실 기뻐하고 흥분할 만한 변화가 얼마나 많은가? 그 변화의 영역과 규모와 속도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앞에 소개한 사례는 ‘정보통신’ 분야의 ‘휴대용 단말기’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경우, ‘국민건강보험제도’ 덕분에 쉽게 병원을 찾는다. 대도시의 대형 병원에는 ‘여기 아픈 사람은 죄다 모였네!’할 정도다. 그곳에서도 붐비는 정도로 절대 뒤처지지 않을 곳이 아마 ‘진단방사선과’가 아닐까 한다. 핵 기술을 ‘의료’ 분야에 적용한 결과다. 전국 어디에서나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발달한 대중교통수단 덕분일 터이다. 특히 고속전철과 지하철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속도에 대해서 어르신들의 놀라움은 혀를 내두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핵 기술을 ‘전력 생산’ 곧 ‘산업’ 분야에 적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인류는 핵 기술을 ‘평화롭게’ 이용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교종은 이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오늘날 우리는 무수히 많은 변화 물결이 일어난 지난 2세기의 수혜자입니다.… 우리가 이런 발전을 기뻐하고 그 발전이 우리 앞에 계속해서 펼쳐놓고 있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에 흥분하는 것은 정당합니다”(102항). 물론 과학과 기술이 “제대로 된 지도를 받을 때”(103항)와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105항)이 있을 때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렇게 기뻐하고 흥분할 수만 있을까? 정보통신 분야와 핵 산업 분야를 예로 들었으니, 그 ‘치명적 부작용(?)’을 살펴보자. 공교롭게도 다른 대형 사건으로 묻혔지만 한동안 온 사회를 흔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우리나라 막강 권력기구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그것이다. 이때 개입 수단으로 채택한 것이 ‘정보통신기술’이었다. 심지어 이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사람들은 ‘권력’으로부터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다룬 책까지 나왔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감시사회’라고 부른다. 교회는 ‘뉴스 미디어’를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거나, 여기에 통치활동과 금융, 정보기관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가르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전 지구를 공포에 몰아넣었고, 사람들은 잊고 지내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며 그 악영향을 예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건이 있다. 바로 이웃 나라 일본 어느 기업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건이다. 그때 언론에 ‘안전 신화’라는 말은 빠짐없이 등장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건이, 더 거슬러 올라가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도시 상공 500m에서 폭발시켜 한꺼번에 무려 20여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핵폭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인류를 ‘공포’로 내몰았다는 점이다.

정보통신기술이든 핵 기술이든 인간의 창의성으로 만들어낸 과학과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산물”(102)이다. 그런데 “이 분야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그 지식과 재능을 이용할 경제적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막강한 권력”이 “극소수”의 손에만 쥐어졌다면, 게다가 그 “막강한 권력을 현명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보장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면, 그래도 마냥 기뻐하고 흥분할 수 있을까? 교종은 인류가 과학과 과학기술을 갖고 이처럼 “극단의 모험”을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104항). [평화신문, 2015년 10월 11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5. 제3장 - 생태적 재앙의 근원들


③ 기술주의 패러다임의 세계화 - 자연, 사람과 사회, 경제와 정치를 무차별적으로 지배하는 기술주의



“세계화된 과학기술의 정신에 굴복하지 맙시다. 모든 것의 의미와 목적에 의문을 품읍시다”(113항).

지난 호에서 다룬 회칙의 내용은, 인류가 그 고유의 창의력과 그것으로 발전시킨 과학과 과학기술 덕분에 마침내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과, 역설적이게도 인류는 ‘기쁨과 흥분’ 그리고 ‘위험과 공포’ 사이에서 극단의 모험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회칙은 인류가, 정확히는 소수의 막강한 권력자들이 인류를 상대로, 그렇게 무모한 모험을 하는 근본 원인을 ‘무차별적이며 일차원적인 패러다임’에서 찾는다(106항). 이 패러다임에서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외적 ‘객체’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켜 극단으로 찬양하는데, 여기서 인간과 물질적 객체 사이는 원래의 우호적 관계에서 일탈하여 ‘대립적 관계’로 진입하게 된다. 인간은 과학과 과학기술로 외부의 객체를 지배하고 소유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추출하려고” “이 행성을 끝없이 쥐어짜서 말리려” 대든다. 마침내 우리는 세계라는 실재에 대한 지배와 소유와 무한 추출을 ‘발전’, ‘진보’, 혹은 ‘무제한의 성장’이라고 믿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회칙은 단도직입적으로 ‘거짓말’과 ‘거짓 개념’ 때문이라고 밝힌다. 회칙은 이 거짓에 기초한 패러다임을 무차별적이며 일차원적인 ‘기술주의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교종의 회칙은 색깔이 분명하다. 이 기술주의 패러다임에 따른 ‘무제한의 성장’이라는 발상이 “경제학자들과 금융업자들과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너무 매력적인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발상과 권력(힘)의 결합을 다음과 같은 ‘거짓말’과 ‘거짓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분명하게 비판한다. “지상의 재화를 무한정 공급할 수 있다.” “무한한 양의 에너지와 자원을 얻을 수 있다.” “그것들을 재빠르게 재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자연 질서의 착취에 따른 부정적 결과들을 쉽사리 경감시킬 수 있다.”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 식으로 말했을까? 경제학자들과 금융업자들과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이고, 그리고 인류가 무심히 기대하고 있는 그 ‘무제한의 성장’이나 ‘인류의 번영’이 거짓말과 거짓 개념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까지 말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지금부터라도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의 악화를 극복하면 되지 않을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칙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환경의 악화’는 하나의 표지일 뿐이라고 단언한다(107항 참조).

회칙은 기술주의 패러다임이 사람과 사회까지 종속시켰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을 단순한 도구로 채택하고 다른 문화적 패러다임을 촉진시키겠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과학기술의 동기가 인류의 이익이나 참된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것’ 즉 권력에 있다고 고발한다. 과르디니를 인용한 내용이 오늘 인류의 처지를 대변한다. “인간은 자연도 박탈당하고 인간 본성도 박탈당한 요소(부품)들로 된 (기계의) 손잡이를 움켜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과 사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남아 있을까?(108항 참조)

기술주의 패러다임은 경제 생활과 정치 생활마저 지배하려 한다. (경제의 실질적 토대를 무시하는) 금융이 실물경제를 압도하게 된 것도, 세계적 금융 재앙 앞에 속수무책인 것도, ‘낭비적이며 소비주의적인 초발전(superdevelopment)과 탈인간화의 강탈(dehumanizing deprivation)이 지속되는 상황’이 공존하는 것도 기술주의 패러다임이 경제 생활과 정치 생활을 지배했기 때문이다(109항 참조). 회칙이나 교종이나 사방에서 반대 받는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어느 월간지는 교종을 두고 ‘악마의 배설물에 맞서는 교황’이라는 제목의 글을 1면 톱으로 다루기까지 했다.

교종은 “과감한 문화적 혁명의 길로 나서는 일이 시급히 필요”하며, “모든 것의 의미와 목적에 관해 의문을 품자”고 호소한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아직까지)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책임과 가치와 양심의 발달과 동반하지 않고”(105항) 있으며, “과학적이며 과학기술적인 진보가 인류와 역사의 진보와 동일화될 수 없기”(113항)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8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7. 제3장 - 생태적 재앙의 근원들


④ 근대의 인간중심주의가 초래한 재앙과 그 결과 - 생태 재앙의 뿌리 : 왜곡된 인간 본성(인성), 왜곡된 인간관계(사회적 차원)와 하느님과의 관계(초월적 차원)



교종은 ‘일단 멈춰서’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을 맑은 정신으로 바라보자고 초대한다. 하늘과 땅과 뭇 생명의 절규를 듣자고 한다. 사람들 삶의 질이 추락하고 사회가 고장 나며, 전 지구 차원의 불평등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처를 고통스럽게 보자고 한다(제1장 참조).

이 절규와 상처(증후군, symptoms)를 불러온 병은 지난 2세기 동안 사람과 사회와 정치와 경제가 맹목으로 뒤쫓은 ‘무차별적이며 일차원적인 기술주의 패러다임’이다. ‘인간’과 ‘윤리’, ‘양심’과 ‘도덕’을 퇴출시킨 과학 및 과학 기술과 경제의 동맹이 ‘만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패러다임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스러운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동안 인류가 이룩한 업적에 비하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기껏해야 간단히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는 ‘부작용’쯤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회칙은 병뿐만 아니라 증후군마저도 ‘치명’이라고 고발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와 자연과 저개발 지역의 뭇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과학)기술주의 패러다임’과 함께 회칙이 생태 재앙을 불러온 또 다른 인간적 뿌리로 제시한 것이 ‘근대의 과도한 인간중심주의’다. 이는 세상 안에서 인간의 ‘참된 자리’를 잃어버리게 했다. 대신 자신만을 중심에 놓아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공간을 자의적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세상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존엄함’을 훼손했다. 게다가 이는 개인 차원은 물론 사회 차원의 유대를 약화해버렸다. 마침내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실재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절대적 지배행위”를 하게 만들었다(117항).

회칙은 이 ‘과도한 인간중심주의’의 배경에 교회의 책임도 있음을 밝힌다.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부적절하게 제시한 것이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불러왔다고 고백한다(116항 참조).

교종은 지난해 이 땅을 방문하여 주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교회의 사목이 공리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 태도를 갖게 될 유혹을 경계한다. 교종은 또 사목 활동가들의 ‘극도의 개인주의’를 ‘악’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지난 호에서 교종과 회칙이 교회 안팎으로부터 ‘반대 받는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언급했는데,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왜곡된 인간중심주의의 겉모습이라 할 수 있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공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은 ‘절대적 지배’의 자리에서 ‘초발전’의 삶을 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49항 참조).

‘과도한 인간중심주의’가 불러온 현상은 두 극단이 공존하는 ‘일종의 지속적 정신 분열’이다. 한 극단에는 “보다 더 작은 존재들, 즉 사회적 약자, 인간의 한 태아, 장애를 갖고 있는 한 사람, 자연 자체에 본래부터 있는 가치들을 전혀 보지 않는 기술주의의 태도”가 자리하고 있다. 다른 극단에는, 앞의 태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간들한테 있는 특별한 가치를 전혀 보지 않는 태도”(118항)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 본성(인성, humanity) 자체의 쇄신’이 대두된다. 회칙은 ‘쇄신된 인성’이 결여된 인간중심주의를 ‘잘못 지도된(길을 잘못 들어선) 인간중심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불균형을 더할 것이며, 사람들의 고유한 역량(지성, 의지, 자유, 책임)을 존중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118항 참조).

회칙은 ‘상호 인격적 관계의 쇄신’, 곧 ‘사회적 차원’의 쇄신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만일 오늘날 생태 재앙이 근대성의 위기, 즉 윤리적, 문화적, 정신적 위기를 드러낸 하나의 작은 표지에 불과한 것이라면, 근본적인 모든 인간관계를 치유하지 않으면서, 자연과 환경과 맺은 우리의 관계를 치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향한 개방성이라는 ‘초월적 차원’에서의 쇄신은 말할 것도 없다(119항). 회칙은 이 ‘인성 자체’와 관계의 사회적 차원과 초월적 차원의 쇄신을 위한 길을 제4, 5, 6장에서 제안하고 있다.

인간의 ‘참된 자리’는 ‘무엇이든 누구든’ 폭압적으로 지배하려는 세상과 독립된 ‘자기중심(self-centeredness)’에 있지 않다. 회칙은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참된 자리’를 되찾자고, 더 나아가 “새로운 종합”(121항)을 개발하자고 초대한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25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6. 제3장 - 생태적 재앙의 근원들


⑤ 실천적 상대주의와 고용보호



교종은 오늘날의 생태 재앙이 저절로 발생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지난 2세기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늘과 땅, 사람과 사회, 그리고 지구촌 차원에서 목격되는 부정적 모습을 ‘발전과 성장’에 따른 부작용쯤으로 가볍게 볼 수는 없다. 치명의 재앙 수준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교종은 그 재앙의 원인을 그동안 인류가 지녀온 마음의 태도, ‘과학 및 과학기술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 정신’ 혹은 ‘근대성’에서 찾는다. 이는 역사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 즉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을 대변한다. 오늘날 생태의 재앙은 ‘무차별적이고 일차원적인’ 과학기술주의 패러다임을 쫓은 결과이며, ‘과도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맹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회칙은 극복해야 할 “최근 몇 세기의 잘못된 주장들”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교종은 교회가 ‘실천적 상대주의’ ‘고용의 보호’ ‘생물학의 새로운 과학기술들’에 대해 계속해서 성찰해야 한다는 뜻을 밝힌다(121항).

실천적 상대주의: 마음의 태도는 생활 양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회칙은 ‘잘못 인도된 인간중심주의’라는 마음의 태도가 ‘잘못 인도된 생활 양식’, 곧 ‘실천적 상대주의 문화’를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이는 “당장의 편의를 절대적으로 우선하고 다른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만들어버리는”(122항) 생활 양식이며, “우리 자신의 열망과 즉각적 욕구 충족 말고는 객관적인 진리들이나 건전한 원리들을” 부정하는 생활 양식으로서, 하나의 “무질서”다(123항).

이 실천적 상대주의 문화는 ‘환경의 타락’(재앙)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부패’를 불러온다. 교종은 ‘사회의 부패’ 현상으로 ‘강제노동’ ‘노예노동’ ‘아동 성 착취’와 ‘노인 유기’ ‘인신매매’ ‘조직 범죄’, ‘마약 거래’, ‘피의 다이아몬드 거래(무기밀매)’, ‘멸종위기 동물의 모피 거래’, ‘사람 장기매매’, ‘아이들의 제거’ 따위의 행위를 구체적 사례로 들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시장의 볼 수 없는 힘’에 대한 맹신을, 문화적 측면에서는 ‘사용하고 버리는 문화’를 실천적 상대주의의 논리와 같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사회와 문화 자체가 부패하면, 이를 바로잡으려는 정치적 노력이나 법 집행은 ‘독단적 강요’나 ‘장애물’로 보일 뿐이다(123항).

고용 보호: 교회가 성찰해야 할 시급한 과제의 다른 하나로서 회칙은 ‘고용 보호’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계량(규모)의 경제들”(129항)과 “기업의 한정된 이해 관계와 모호한 경제적 추론”(127항)을 앞세워 “단기적으로 보다 많은 재정(금융) 소득을 얻기 위해,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을 그만 두는 그런 기업” 활동과 “노동자의 해고와 기계화로 생산 비용을 절감하려는 경제적 진보”(128항)를 묵인하고 있다. 그 대가는 “많은 사람의 경제적 자유”는 가로막히고, “고용의 가능성들은 계속해서 악화되는” “현실적 조건”(129항)이다.

교회는 변함없이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선성’을 가르쳤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치닫고 있는 셈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사람의 모든 활동이 갖는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물음”(125항)을 오로지 ‘경제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환원(축소)주의’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는다.

인간 노동(활동)은 “창조된 세상을 신중한 방식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세상을 돌보는 가장 좋은 방식”(124항)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무엇과 맺어야 하고 맺을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125항). 인간 노동은 “영적으로 의미 있는”(126항) 활동이며, “인격적 성장을 위한 무대”(127항)가 되며, “지상 생활에서의 성장과 인간적 발전과 인격적 완성을 향한, 곧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려는 경로”(128항)가 되어야 한다. 바로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한 안정된 고용 보장”을 오늘날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127항)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산의 다양성과 사업의 창의성을 옹호하는 그런 경제를 촉진시켜야 한다.” 그래서 회칙은 “소규모 생산자들과 차별화된 생산물을 떠받쳐줄 분명하고 확고한 수단을 취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자원과 재력을 가진 이들을 억제해야 할” 정치 권위의 “권리와 의무”를 강조한다(129항).

“현실적 조건들은 많은 사람의 경제적 자유를 가로막고 있으며, 고용의 가능성들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는데도, (당국이)경제적 자유를 주장한다는 것은 정치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그런 속임수(a doublespeak)를 쓰는 것입니다”(129항). 우리 현실을 보는 듯하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8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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