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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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56: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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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0 ㅣ No.817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56)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 ⑧


“세상 끝 날,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서겠습니다”

 

 

복음적인 영적 어린이의 길

 

소화 데레사가 전하는 영적 어린이의 길은 지극히 ‘복음적인 길’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오 복음(18,4)에서 말씀하셨듯이,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어린이의 길이 복음적이라는 말은 공생활 동안 예수님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분이 여행하면서 방문하며 돌보았던 사람들은 주로 죄인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의인이기 때문에, 선한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사랑은 억눌리고 소외되고 죄로 인해 짓눌린 이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눈에는 엄격하게 윤리생활을 하며 자기 만족과 교만 속에 사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임을 통감하며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머리를 숙여 용서를 청하는 세리, 창녀들이 더 귀하게 보였습니다. 소화 데레사의 영적 어린이는 그렇게 자비로운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영혼을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의화론’과 일맥상통

 

또 한 가지, 복음적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소화 데레사의 가르침이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의화론’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해 조건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여겨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의인이란 하느님의 율법을 따라 잘 사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의 의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불한당 같은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해 조건 없이 용서받고 하느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신약에서의 의인 개념입니다. 

 

소화 데레사의 영적 어린이는 다름 아닌 조건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여겨진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의인이 되기 위한 조건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소화 데레사가 말하는 영적 어린이의 특징 또한 탁 믿는 마음, 곧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신뢰입니다.

 

 

참된 공로의 의미

 

통상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구원되고 성화되는데 있어서 공로를 많이 쌓아야 한다고들 생각합니다. 우리가 덕을 닦고 선업을 많이 쌓아서 거룩해지고, 그래서 공로를 많이 쌓기 위해 선행을 하고 단식을 하고 고행을 하고, 흔히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지극히 바리사이적인 냄새가 나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의 선업, 공로의 횟수나 크기에 따라 그것을 갖고 하느님과 거래를 해서 구원을 받고 성화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하는 지극히 상업적인 냄새가 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공로’는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07항은,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 앞에서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창조주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우리 사이의 차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선한 일을 해도, 그건 모두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이라는 원금을 거저 꾸어주신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이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공로를 ‘보수적(報酬的) 공로’와 ‘의합적(意合的) 공로’로 나눕니다. ‘보수적 공로’는 인간이 선업을 쌓아서 그에 합당한 상급을 받는 공로를 말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하느님 앞에서 보수적 공로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통상 공로라고 하면 ‘의합적 공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셔서 우리가 그 은총에 힘입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서겠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전문적으로 신학을 배우진 않았지만, 자신의 독특한 영적인 직관을 갖고 이미 공로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성녀가 1893년 7월 6일 자로 언니 셀리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공로란 많이 행하고 많이 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많이 받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조건 없는 자비로운 사랑을 많이 받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느님 사랑에 사랑으로 자유롭게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녀는 자신이 세운 모든 공로를 하느님께 돌려드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의 귀양살이가 끝난 다음,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주님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위한 공로를 쌓기를 바라지 않고, 주님의 사랑만을 위해 힘쓰기를 바랍니다.… 이 생명이 끝나는 날, 저는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서겠습니다. 저는 주님께 제 업적을 헤아려 주시기를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모든 의로움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께서 바로 그 주님의 의로움으로 저를 꾸며 주시어,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영원히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소화 데레사의 영적 어린이의 길은 지극히 복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성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소화 데레사의 지혜를 본받아 생의 마지막에 주님 앞에 설 때 빈손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10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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