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종교철학ㅣ사상

동양고전산책: 가득 찼어도 텅 빈 듯이 - 성탄을 맞아 생각해 보는 자기 낮춤의 삶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08 ㅣ No.266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가득 찼어도 텅 빈 듯이”
- 성탄을 맞아 생각해 보는 자기 낮춤의 삶



성탄이 다가옵니다. 동지 무렵의 칠흑 같이 어두운 겨울밤에 아기 예수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모두가 연말의 축제 같은 분위기에 취해 흥청대는 가운데 가장 낮은 모습, 가장 가난한 모습,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직접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이러한 강생(降生)의 신비는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런 강생의 신비를 잘 표현하는 것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로, 제가 〈빛〉잡지 연재를 시작하던 첫 회(1월호)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도를 깨우친 사람은) 자신의 빛을 낮추어 조화를 이루며 먼지와 같은 세상과 함께한다.”1)

세상 사람들은 흔히 남들보다 조금 더 빛난다고 해서 그 빛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잘났다고 해서 남들을 업신여기며,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하다고 해서 남들을 깔보고 가르치려 듭니다. 하지만 도(道)를 깨친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빛난다고 해서 그 빛을 마음껏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교만하지 않고, 비천한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그들과 함께합니다. 이런 “화광동진”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어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동등한 지위까지 내려오셨지만 이 낮춤은 오히려 사람들을 당신의 원래 위치에까지 올려 주신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결국 낮아져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선 낮아지셨는데 우리는 자꾸만 높아지려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오셨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 14. 10)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기뻐하며 그분을 맞이하는 나의 자세는 어떠한지, 나는 어떤 상태에 있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어둡습니까? 춥고 앞이 안 보일 만큼 캄캄합니까? 그분께서 빛으로 오셔서 우리 마음을 밝혀 주실 것입니다. 지금 내 처지가 너무 가난하고 비참하고 밑바닥 인생처럼 느껴집니까? 그분께서 사랑으로 나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분은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기에, 가장 어두운 곳에 오셨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는데, 추운 겨울 밤,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집도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강생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가 아닙니다. 실제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먼지 같은 하찮은 존재가 되어 그들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강생의 신비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유가(儒家)에서도 겸손(謙遜)이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논어』에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이 친구 안연(顔淵)의 겸손한 덕을 존경한 말이 나옵니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는 인(仁)을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였습니다.

증자가 말하였다. “유능하지만 능력이 없는 이에게도 물으며, 학식이 많으면서도 적게 아는 사람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 듯하고, 가득 찼어도 텅 빈 듯이 하며, 남이 나에게 잘못을 범해도 따지지 않는 것은 옛날 내 벗(안연)이 일찍이 이에 따랐도다.”2)

우리는 유능하면 혼자 일을 처리해 버리지 무능한 사람과 함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많이 알면 무식한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자기가 가진 것을 드러내 보여 자랑하고 싶어 하지요. 가득 찬 사람이 스스로 텅 빈 것처럼, 바보가 된 것처럼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압니다. 그리고 남이 나에게 잘못을 범하면 불같이 화를 내며, 혹시라도 제대로 따지지 못했다면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러니 이렇듯 자신을 낮추며 겸손의 삶을 직접 살았던 안연은 가히 성인에 버금가는 아성(亞聖)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나는 얼마나 자신을 낮추며 사람들과 함께하려 했는지요? 성탄을 맞이하면서, 아기 예수님의 구유 앞에 앉아 우리는 얼마나 높아졌는지, 높아지려고 했는지 돌아봅시다. 나를 죽이고 좀 더 낮아지도록 노력합시다. 내가 낮아져야 더 낮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자신을 낮추시어 먼지 같은 가장 비천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신 구세주를 생각하며 우리도 더 낮고 어려운 이들과 함께합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 3-4)

올 한 해 동안 동양고전의 세계를 함께 산책해 왔습니다. 많은 길을 같이 걸었습니다. 공자, 노자, 맹자, 장자, 묵자, 양주 등 동양고전의 여러 사상가가 걸어간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나요? ‘길 없는 길’이란 없습니다. 내가 걸어가면 그것이 바로 ‘길(道)’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길은 모두 주님께 닿는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장자(莊子)가 말했습니다. “길은 내가 걸어가면 이루어진다.”3) 도(道)라는 것은 내가 행하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수많은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직접 걸어가는 이는 바로 “나”입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라 하더라도 내가 가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도 기쁘게 걸어갑시다. 그 길은 자기 낮춤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오히려 높아지는 길이며, 자신을 죽이는 것이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또 믿습니다.

1) 『노자(老子)』 56장. “和其光, 同其塵.”
2) 『논어(論語)』 태백(泰伯) 8편, 5장.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
3)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11장. “道行之而成.”
 
* 최성준 신부는 북경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5년 12월호,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2,956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