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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48: 대학의 시작과 스콜라학의 전성 - 자주적 학문활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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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7 ㅣ No.239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48) 대학의 시작과 스콜라학의 전성 - 자주적 학문활동의 욕구로 탄생

 

 

- 소르본 대학 : 소르본 대학 전경. 소르봉 신부가 수업료와 서적 구입, 숙식 등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해 세운 기숙사가 토대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이르면 소르본 광장 주변의 노천카페에서 많은 학생들이 차 한잔을 시켜놓고 레포트 등을 작성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모습들을 흔히 대하게 된다.

 

소르본 대학은 1257년 프랑스왕 루이 9세의 궁정신부였던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이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을 위해 세운 일종의 기숙사(collegium)이다. 이것이 후에 파리대학의 신학부 문학부 이학부를 지칭하는 대학이름이 된 것이다.

 

 

대학의 시작

 

12세기 이전 유럽의 모든 교육은 수도원 학교와 주교들이 성직자의 소양교육을 위해 주교좌 성당 인근에 설립한 교회학교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뤄지는 학문활동은 주로 성서와 고대 문헌을 읽고 주석하는 것으로 종교적인 목적에 국한되어 있었다. 교과과정도 그리스 이래의 7학과인 문법, 수사, 변증의 3학과(trivium)와 수학, 기하, 천문, 음악의 4학과(quadrivium)로 이뤄져 있었다. 이 교과과정을 로마시대에는 시민의 실생활에 맞게, 중세에는 교회의 목적에 맞게 재편성해 가르쳤다. 음악은 교회음악, 수학은 부활절 계산을 위해 가르치는 식이었다. 또한 주교들은 자신의 권위를 유지시키고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교육내용을 제한하며 교육 면허를 가진 교사(magister)에게만 허락했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 급속히 성장한 그리스도교 국가의 위용과 십자군 전쟁 이후의 사회적 변화는 새로운 학문적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상업과 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시민계급의 부상과 십자군전쟁으로 동방 문화와의 접촉은 사람들의 향학열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600여년간 잊혀졌던 유스티아누스 법전의 발견과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의 유입, 유클리데스의 기하학과 아라비아에서 도입된 아라비아 숫자에 기초를 둔 새 수학의 도입으로 크게 확장된 정신세계를 기존의 교육제도로는 수용할 수 없었다. 교사들도 주교나 수도회 총장들의 편협한 감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여기서 자주적 학문활동을 위한 교수와 학생들의 조합(Universitas magisti orum et scholarium)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대학의 시작이다. 이들이 국가의 승인을 얻고 교황으로부터 특전을 받음으로써 독립되어 대학으로 성장했는데 노트르담 성당의 부속학교가 파리대학으로 성장한 것처럼 주로 유명한 교회 학교들이 대학으로 변모했다. 대학의 자치권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소정의 과정을 마친 학생에게 학위를 수여한 것이었다. 이로서 학위를 가진 사람은 신귀족으로 대우를 받게 됐고 학문은 교권과 제권에 이은 제3세력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중세의 대학이 새로운 학문적 활동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교회적인 성격이 강했다. 교육의 최고 파수병인 교황의 동의가 있어야 대학이 생길 수 있었고 어디서나 가르칠 수 있는(Facultas ubique docendi) 권한을 줄 수 있었으며 신학이 모든 교과목 중 가장 우위에 있었으며 교수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성직자였다.

 

이러한 대학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된 것이 설교를 위해 종교 교육을 절감한 양대 탁발 수도회였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이미 1218~1220년에 파리대학에 기숙사를 건립했으며 도미니코회원은 1229년에 프란치스코회는 1231년에 대학에서 신학강좌를 개설했다.

 

12~13세기 대학의 형성은 스콜라학의 전성기를 열어 주었다. 스콜라학(Scholastica)이란 말은 중세 여러 학교(scolae)들에서 형성된 신학적 철학적 학설을 말한다. 스콜라학의 가치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로 신학의 과학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즉 하느님의 계시와 같은 신학의 소재들을 이성적 능력인 철학적 원리에 근거하여 체계화시킴으로써 객관적인 진리에 도달하고자 한 것이다.

 

 

스콜라학의 발전

 

스콜라학의 번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대학의 설립과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코회 같은 수도회의 학문적 활동과 더불어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저서들의 재발견이 스콜라학의 전성기를 이끈 원인이다. 이전까지 교부철학 중심의 중세 학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보에시우스의 번역과 주해에 의해 논리학자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작품 전체가 번역돼 소개됨으로써 새로운 학풍이 휘몰아쳤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이성과 경험과 자연의 원리에만 근거하고 있어 범신론적이고 반교회적인 사상을 안고 있었지만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학자들을 거쳐 순화된 사상은 이전 플라톤-아우구스티노주의 중심의 학문에서 명확하지 못하던 신앙과 이성의 종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재론은 13세기의 지배적 세계관이 됐다.

 

이러한 12세기 이성의 강조는 규정화된 세상에 대한 해석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성서를 가르치는 것 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어나는 인간의 문제와 각종 모순 같은 신학의 명제들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이 도입됨으로써 교의신학을 등장 시킨 것이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아우구스티노의 주장에 따라 「이성의 인증」이란 방식을 도입한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모가 교부철학과 스콜라학을 매개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스콜라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이 방법을 체계화 한 사람으로는 엘로이즈와의 비극적 사랑으로 유명한 아벨라르도와 베드로 롬바르두스가 꼽힌다. 그리고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란 명제를 내세운 불세출의 보편적 박사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스콜라학이 완성된다.

 

스콜라학 전성기에 진보적 주장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탁발 수도회원들이었고 주요 활동은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가톨릭신문, 2002년 4월 28일, 김상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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