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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우리는 모두 하나37: 슬픔의 번지수를 찾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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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29 ㅣ No.1960

[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7) 슬픔의 번지수를 찾는 일


억압된 기억, 삶을 송두리째 흔듭니다

 

 

자살 시도 후 찾아온 여고생 P는 상담자를 만나자마자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난 뒤 P는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기분이 가라앉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고 했습니다. 사실 할아버지와 별로 친하지 않았고 그렇게까지 슬퍼할 상황도 아니었는데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즈음부터 죽고 싶다는 생각도 강렬해졌다고 했습니다. 자신도 죽으면 할아버지의 장례 때처럼 많은 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멋지게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내내 P는 머리가 자주 아팠고 감정 변화가 심했습니다, 주의 집중이 안 돼 수업 시간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고 결석과 무단 이탈을 반복했습니다. 점차 노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담배, 술, 이성과의 성관계로 이어지면서 생활 전체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P는 자신이 소설 「은교」에 나오는 소녀처럼 외로워서인지 아니면 본능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관계에 빠져들었다고 했습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성관계를 하고 잠시 허망해하다가 또 성관계를 하기 위해 몸을 추스르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나중에는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고 원조교제에 대해서는 더 허용적이었습니다. 욕구도 채우고 돈도 생긴다는 면에서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P는 자신이 이렇게 사는 것은 자신에게는 미래가 없고, 또 미래가 없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미래가 주어진다면 어차피 그때에도 죽음만을 생각할 게 뻔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자신도 정확하게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P와의 상담은 한동안 겉으로 드러난 성적 일탈과 자살 시도에 관한 이야기만 반복할 뿐, 본질에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P가 상담 도중에 같이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남들의 눈을 피해 건물 뒤편에서 P와 담배를 피우는데, P가 길게 한숨을 내뿜더니 느닷없이 “모든 게 아빠 때문이에요”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다 기억이 났어요”라고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P는 친아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어린 나이에 그 기억을 감당할 수 없어 처음에는 그 일을 꿈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그 기억을 억압해 없었던 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통증 같은 신체화 증상과 심한 기억력 저하가 있었고, 억압된 기억이 의식 위로 떠오르려 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관계를 했습니다. 아빠에 대한 살해 충동, 아빠를 지우는 방법, 아빠에게 복수하는 방법으로 세상의 욕망 속에 자신을 던져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P는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지우기 위해 자신이 욕망 자체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해와 자살 충동 역시 P에게는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을 잊게 해주는 방편이었을 수 있습니다.

 

P가 기억을 되찾으면서, 우선 P와 그 주변을 재정렬하고 재배치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엄마를 상담하고, 아빠를 신고하고, 피해자인 P도 성폭력 피해자 전문 상담 기관의 도움을 받고, 몸과 마음의 치료를 받으면서 그렇게 P의 원래 일상을 다시 복원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랜 방황 끝에 P는 힘들지만 슬픔의 번지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P 역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3년 9월 24일, 황순찬 베드로 교수(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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