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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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6 ㅣ No.280

[기도, 한 걸음 더] 기도의 언어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 님이셨다”(요한 1,1).

 

유명한 로고스 찬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을 중국 성경에서는 ‘도(道)’로 번역합니다. 우리 문화와 정서에 아주 잘 맞는 번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가 결국엔 궁극자인 하느님께 향하고 또 인간 언어의 한계를 직시할 때, 우리는 도덕경 1장의 첫 구절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참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참이름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고금에 회자되는 명구절입니다. 또한 도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이처럼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핵심을 찌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세 가지 표현 방식

 

그리스도교 전통은 기도생활의 중요한 세 가지 표현 방식을 소리기도와 묵상, 관상으로 구별합니다. 이 기도들의 공통점은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지요(“가톨릭교회 교리서”, 2699항). 우리의 기도는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나 입으로 하는 말을 통해서 구체화되는데 이를 소리기도라고 합니다. 소리기도는 외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일반 대중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소리기도는 관상기도의 최초의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2700, 2704항).

 

묵상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탐색입니다. 묵상에는 사고력, 상상력, 감정과 의욕이 모두 동원됩니다. 이러한 동원은 신앙의 확신을 심화하고,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키며,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2705, 2708항).

 

관상기도는 선물이며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계약의 관계가 맺어지는데, 이는 겸손하고 비어있는 마음을 가져야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또한 경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이 되신 성자의“예.”(Amen)라는 응답과, 겸손한 여종의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는 응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관상기도는 침묵으로 그리스도와 합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713, 2716, 2717항).

 

 

언어로서의 기도

 

어떤 동물학자들은 돌고래, 침팬지, 꿀벌들이 자기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처럼 정교한 것은 아니지요.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서로 소통하고 교류합니다. 그리고 언어를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고, 계획하며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조금만 숙고해 보아도 그 무한성과 완전성, 절대성 앞에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흔히들 “아, 말로는 설명이 안 돼. 그건 표현할 수 없어.”라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또한 언어를 통해서 그분에게 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고뇌에 부딪히게 됩니다. 결국 말과 글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소통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베른하르트 벨테는 “종교철학”에서 언어로서의 기도에 대해서 다룹니다. 벨테는 신이 엄밀한 의미로는 말로 표현될 수 없음을 명백히 했지만, 또한 언어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그 가능성이란 언어가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를 그는 부정과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무한자(無限者), 무조건자(無條件者), 마침내 형언할 수 없는 자로 호칭될 때 부정사(不定詞)로 지칭된 것은 모든 말보다 더 위대한 신비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 언어의 도움으로 유한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 안에서 우리는 상징의 유비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은 언제나 더 위대하다(Deus semper maior).’라는 명제에서처럼 상징이 갖는 한계가 있지만 또한 그 상징을 통해서 포착할 수 있는, 본래 신과 관련된 의미의 한 부분을 잡아낼 수 있는 것이고, 신이 허락하는 한 우리는 신비로부터 오는 손짓과 부름에 의해서 그분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라는 문학 분야를 떠올린다면 더 쉽게 이해됩니다. 시로써 인간은 언어 저편의 세계를 만날 수 있고, 그 세계를 표현하고 음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솔직함과 전체성

 

우리가 기도의 언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두 가지가 있다고 벨테는 얘기합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솔직함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을 위장하고 기만을 번번이 고집할 때, 기도는 무의미해집니다. 우리의 기쁨과 감사, 곤경과 실망, 비탄과 불화, 걱정과 죄, 불안과 희망, 모든 것이 기도의 화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비탄으로 어쩌면 신에 대한 탄핵으로까지 이어질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억제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놀라운 솔직함 때문에 다른 이는 또한 감동을 받습니다. 이러한 솔직함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내려갈 수 있고, 우리가 놓인 실존적인 문제를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런 솔직함을 통해서 그분의 무한한 자비, 어머님의 품 같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전체성입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기도의 언어 안에서 신에게 토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본능과 욕구의 세계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구와 고통과 직면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고 교부들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만일 네가 하느님을 알고 싶다면 먼저 너 자신에 대해서 알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긍정적인 이상뿐만 아니라, 내가 싫어하고 감추고 싶은 욕망과 죄까지도 하느님 앞에 내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또한 내가 살고 있는 현실, 내가 관계 맺는 사람과 사회, 곧 세계 전체를 함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이 감사의 형태이든 청원의 형태이든 또는 탄식이나 그 밖의 어떤 형태이든 이 모든 것이 기도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도의 인간적인 측면은 또한 동시에 기도의 세계적인 측면이기도 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과 또 자신과 더불어 자신의 세계를 신을 향해 여는 것입니다.

 

 

무위(無爲)의 기도

 

앞에서 기도의 세 가지 표현 형태를 소리기도와 묵상, 관상으로 구별하였습니다. 소리기도는 물론이거니와 묵상 또한 언어를 사용하여 상상하고 추론하는 것이기에 언어를 사용한 유위(有爲)의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인간이 능동적으로, 노력을 통해서 하느님께 청원하고 탄원하고 다가가는 기도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인 기도의 정점으로 부르는 관상은 사실 언어를 넘어서는 기도, 곧 무위(無爲)의 기도입니다. 침묵 속에서 그 고요한 머묾 속에서, 한없는 평온과 따스함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움직임인지 어둠의 움직임인지 판별하는 기준이 결국 그 열매를 보고서 가늠할 수 있듯이, 올바른 기도는 사랑의 불꽃을 태웁니다. 기도가 불쏘시개와 마중물이 되어서 사랑에 대한 열정을 자극하고 또 사랑으로 살아가게 할 때, 우리는 올바른 기도를 하고 있고,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침묵의 침잠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온 몸과 온 정신, 온 영혼, 온 존재로 알아듣는 그 순간에 사람은 진정한 기도의 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풍경소리처럼 성령의 바람에 의해서 은은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 김성 세례자 요한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신부. 현재 수도회 총비서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3월호, 김성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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