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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봉헌, 완전한 사랑: 주님과 세상을 향한 사랑의 선택인 정결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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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19 ㅣ No.508

[봉헌 - 완전한 사랑] 주님과 세상을 향한 사랑의 선택인 정결 서원

 

수도 서원의 의미

 

 

교회 안에서 수도자를 성직자나 평신도와 구별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수도 서원’입니다. 이 수도 서원은 자신이 속한 수도 공동체와 교회 앞에서 하느님께 일생을 정결, 청빈, 순명의 정신으로 살겠다고 공적으로 서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통상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 어느 수도회의 성소자로 왕래하던 지원자가 정식 입회 절차를 밟아 입회하게 되면 약 1-2년간의 청원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수도회의 영성을 본격적으로 배우는 수련기를 1-2년간 보내며 그 수도회의 사람으로 서서히 변화되어 갑니다.

수도 서원은 이 수련기를 마치고 난 후 수도 공동체 앞에서 그 수도회의 대표인 장상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공적인 예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때 서원자는 1년간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봉사를 위해 정결, 청빈, 순명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을 한시적으로 서약하게 됩니다. 이렇게 1년간 서원한 것을 살아가면서 주님과 교회를 위해 평생 봉헌할 수 있는지 일종의 시험기간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해마다 서원을 갱신하고 통상 다섯 번을 갱신한 다음, 일생을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서원하는 것을 이른바 ‘종신서원’이라고 합니다. 수도회 지원자는 이 종신서원을 통해 하느님과 그리고 교회와 완전히 일치하게 되며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수도회의 수도자로서 그 수도회의 영성과 정결, 청빈, 순명을 자기 삶의 좌우명으로 받아들여 치열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수도자의 서원 생활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응답하기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이 되신 하느님,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자 그분의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사랑으로 일치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른바 소승불교처럼 자신만의 구원과 성화를 지향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바라셨던 온 인류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는 데 더 큰 뜻이 있습니다.


정결 서원의 의미

3대 수도 서원 가운데 흔히 가장 먼저 회자되는 서원은 정결 서원입니다. 정결 서원은 인간 인격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과 직결된 서원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사랑은 성(性)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 존재 전체를 그를 위해 내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성적인 능력 역시 그 사람을 위해서만 유보해 둡니다.

인간에게 몸은 그 사람의 영적 차원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성사적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몸 따로 마음 따로의 존재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하는 총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마음은 자연스레 온몸으로도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과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도자에게 하느님, 그리고 그분을 이 세상에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은 유일무이한 사랑이십니다. 수도자는 그분을 자기 사랑의 순위에서 최고의 자리에 두는 사람이자 이를 마음뿐만이 아니라 몸을 통해서, 성을 통해서 표현하고 살아가고자 공적으로 약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바로 ‘정결 서원’입니다.


정결 서원의 역사적 배경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초세기부터 하늘나라를 위해 독신을 살도록 권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일생을 동정을 지키며 주님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봉헌하는 가운데 교회를 위해 봉사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사막에 나가 철저한 고독과 고행 그리고 기도의 삶을 살았던 수도승들도 있었고 도시나 마을에 남아 복음적인 동정(童貞)을 지키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병자들을 돌보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교부들은 여러 작품을 통해 ‘동정’을 단순한 삶에서 영성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며 성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카파도키아 교부 가운데 한 분인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같은 분은 동정이야말로 인간이 신적인 차원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했습니다.

동정에 대한 이러한 교부들의 성찰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본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교부들은 이러한 공동체적인 차원을 각 개인의 차원으로 확장해서 우리 각 개인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보았습니다.

초세기의 수도승들과 동정녀들이 동정을 살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 바로 그분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동정성에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육화 강생을 가능하게 하신 분, 곧 그분의 어머니 성모님의 동정성이 원형으로 담겨 있습니다. 성모님의 동정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게 한 모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적인 삶을 포함해 인생을 동반하는 반려자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봉헌하는 동정의 삶은 인간에게 커다란 십자가이자 죽음입니다. 초세기에 동정이 하나의 영성으로 뿌리내린 데에는,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로 더는 신앙 때문에 순교할 수 없게 되자 당시 최고의 영성으로 여겼던 순교를 대신하는 삶의 증거를 통한 순교, 곧 ‘백색 순교’로 동정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맥락에서 본 정결 서원

이러한 동정의 삶은 중세로 들어오면서 신학적 차원에서 더욱 깊은 성찰을 거치며 영성 생활을 비롯해 교회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갔습니다. 동정을 살아가는 삶은 제도 교회 안에 정착되면서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정결 서원을 하는 형태로 발전되었고 동시에 이러한 정결은 윤리적인 덕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중세의 대표적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러한 삶이 하느님에 대한 관상, 그리고 그분과의 직접적인 사랑의 일치를 지향하는 신적인 보화이므로 혼인의 삶보다 우위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전망은 개신교도들이 정결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더욱더 강조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현대로 들어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다양한 차원에서의 연구와 사회적인 변화를 바탕으로 동정의 삶, 정결 서원이 과연 인간 성숙에서 가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이러한 흐름에 새로운 물꼬를 튼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공의회는 더욱 성숙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복음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성과 혼인 그리고 동정의 삶에 대해 숙고하고 균형있는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교회는 성성이라고 하는 보편적인 성소에 이르는 다양한 길로 사제직, 혼인, 동정, 수도생활 등을 들며 어떤 한 가지 신분의 우열을 논하지 않고 각각의 고유한 카리스마를 인정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수도자뿐만 아니라 혼인을 한 사람을 포함해서 교회의 모든 지체가 그 신분에 맞는 정결의 삶을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사실, 성이 개방되고 쾌락주의적으로 흐르는 현대의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정결 서원을 살아가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교회는 정결 서원이 갖는 더욱 심오한 가치들을 성찰하고 가르쳐 왔으며 오히려 그러한 가치들이야말로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정결 서원의 심오한 가치들

수도자들과 관련해서 교회는 공의회 이후 다양한 교도권 문헌을 통해 무엇보다 정결 서원이 갖는 공적인 사명의 차원을 강조했습니다. 곧 정결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봉헌이자 주님과 세상 그리고 교회를 위한 더욱 순수한 사랑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이를 위한 영적인 힘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정결을 사는 수도자는 이미 그 자체로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천상의 삶을 미리 앞당겨 증거하는 종말론적인 표징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수도자가 정결 서원을 사는 데에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가 그 이유입니다. 그분의 사랑에 매료되어 자기의 몸과 마음, 온 존재를 그분께 사랑으로 봉헌하는 것이 정결 서원입니다. 그리고 그 봉헌을 통해 세상의 구원과 성화를 이끌어내는 사람이 수도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동정의 삶, 그러나 그런 역설의 삶을 통해 오히려 수도자들은 하느님이 분명히 존재하신다는 것, 그분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시자 목숨 바쳐 사랑해야 할 최고의 사랑이라고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그분 한 분을 바라보며 자신의 성을,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봉헌한 수많은 젊은 수도자, 그리고 일생을 그렇게 살아온 연로하신 수도자들을 바라보면, 분명 하느님이 계시다는 걸 우리는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결 서원은 단순히 성에 대한 소극적인 포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세상을 향한, 교회를 향한,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향한 삶에 투신하는 가운데 정결 서원의 본디 가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며 거기서부터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힘을 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채 동정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정의 삶을 통해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일치를 이뤄내고 그렇게 축적된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교회와 인류를 향해 사랑의 삶에 투신하는 사람이 바로 수도자입니다.

* 윤주현 베네딕토 - 가르멜수도회 수도사제.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스페인의 아빌라 신비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현재 가르멜수도회 대구수도원 원장,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로 활동하며 다양한 저서와 역서를 펴내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2월호, 윤주현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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