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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는 대화다: 우리는 왜 나의 기도를 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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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6 ㅣ No.275

[경향 돋보기] 기도는 대화다 - 우리는 왜 나의 기도를 하지 못할까

 

 

가정기도

 

지난 성탄 판공성사를 공동참회와 개별고백으로 보면서 공동으로 보속을 주었다. 성탄과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온 가족이 모여 가족 공동기도를 바치라는 거였다. 가정기도 순서를 정하고 간단한 음식과 정성어린 선물도 준비하여 자녀들이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고 권고하였다.

 

가정기도를 바칠 때 기도서의 틀에 박힌 기도문만 외우면 무미건조할 수도 있다. 혼자 또는 일상에 바쁠 때야 간단한 기도가 좋겠지만 때로는 이벤트성 기도도 필요하다. 제사를 지낼 때와 명절 때에도 기도와 제사를 병행하면 의미 깊은 축제를 지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생일이나 영명축일, 세례기념일에도 자신의 삶과 묵상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창의적인 가정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 만과(저녁기도)와 묵주기도를 그렇게도 하기 싫었는데 어머니의 압력으로 강제로 드렸던 기억이 새롭다.

 


보편지향기도 유감

 

본당의 주일미사 ‘보편지향기도’에 유감이 많다. “매일미사”에 예시된 기도를 그냥 무미건조하게 읽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때는 철자법을 틀려가며 읽는다. 기도 지향은 그대로 따른다 하더라도 몇 마디라도 자기 말로 기도하라고 당부하지만 부담스러워 하기는 마찬가지다.

 

때때로 서운하다. 사제가 강론을 잘못하면 불평을 하면서 막상 신자들은 기도하나 정도도 준비해 오지 않는 것이 말이다. 다사다난한 현대의 삶에서 자고 나면 지구적 관심을 끄는 사건사고들이 일어나고 기도할 일도 많은데 한두 달 전에 예시된 기도문이 어찌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무미건조하고 생동감이 없는 기도가 되고 만다.

 

 

소공동체 기도

 

소공동체 모임이나 반모임 때는 으레 자유기도를 바친다. 그러나 기도시간이 오면 긴장하여 고개를 숙이고 몸이 얼어붙으며 어색해하기 일쑤다. 그래도 요즈음은 정성어린 기도를 잘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훈련이 되고 경험이 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소공동체 예비신자 교리교재인 “함께하는 여정”은 짧고도 쉽게 자유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잘 안내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게 훈련하면 앞으로 분명히 더 자연스럽고 창의적인,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바치게 될 것이다.

 

 

성사중심의 신앙생활

 

흔히 천주교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보다 기도를 잘 못한다고들 한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천주교는 성사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 말씀과 찬양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개신교 신자들보다 기도를 잘못할 수 있는 이유다.

 

교회의 전례는 공동체가 드리는 공식 기도다. 자연히 예식의 절차에 따라 미리 규정된 기도일 수밖에 없고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전례 절차와 성스러운 분위기를 중요시하니 개인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위축되고 정해진 기도를 건조하게 욀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 교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성사와 말씀을 함께 중요시하고,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면서 차츰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졌다.

 

 

낮은 종교체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영성을 가지고 있다. 영성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세계관과 인생관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자와의 내면적 관계나 원리다. 이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나 기도생활 또는 교리나 가르침으로 형성되고 강화된다.

 

한국 갤럽의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조사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들의 종교체험 비율은 개신교 선자들에 비해서 현저하게 낮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드러나는 바 주일미사 참석과 매일기도, 성경읽기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정통교리에 대한 신심 측정 곧 하느님 존재, 창조설이나 사후심판설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영성적 기반의 취약성은 쉬는 신자 증가, 전례 참석자의 감소와 더불어 신앙생활의 활력을 잃게 한다.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됨은 당연하다. 그러나 성령기도회나 꾸르실료, 떼제 기도 등 감성적이고 신앙체험적인 기도가 늘어나고 있다.

 

 

신앙과 삶의 이원화

 

교회의 가르침과 전례는 친교의 공동체 삶을 강조하지만 사람들은 탈권위주의 시대의 변화에 따른 개인주의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신자들이 공동체 의식과 신자로서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또한 신자로서 자아의식을 약화시키고 일상의 삶과 신앙을 일치시키지 못하게 한다. 때로는 조용한 신자생활을 추구함으로써 종교적 생활마저도 사적인 영역으로 격리시키고 신앙의 목적을 개인의 건강이나 안녕에 맞추게 한다. 방관 또는 소외와 무관심한 집단의 구성원은 기도의 영역에서마저 자신의 체험이나 경험을 나누거나 노출시키기를 두려워하고 숨어버린다.

 

 

기도는 대화다

 

대화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 소리와 표정과 몸짓으로 자신을 나누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고 깨닫고 신뢰할 때 가능하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더불어 알려주신 분이시다.

 

그래서 참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과 더불어 하느님과 참된 만남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 만남이 회개다. 참된 회개는 종교를 선택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의 종교인으로 양성(formation)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환(transformation)이 되는 것 곧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참된 기도는 샘솟는다. 그렇지 않다면 수박 겉핥기와 같이 무미건조하거나 기복적인 기도가 되고 말 것이다.

 

 

전인적인 기도

 

요즘 들어 사람들은 참삶(wellbeing)을 추구한다. 그래서 심신의 건강과 안정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추구하는 자연중심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유사영성도 일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불교가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라고도 한다. 삼천배, 삼보일배, 오체투지, 참선 같은 몸에 대한 영성과 수련법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추상적인 영적인 면에 치중하고 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실제로 몸에 대한 영성이나 수련법이 없는 게 사실이다. 동양의 여러 가지 몸에 대한 수련법들을 배척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 참조) 취사선택하여 몸과 마음을 함께 성숙시켜(‘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 이 시대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향심기도는 참선과 거룩한 독서를 결합한 것이 아닌가?

 

* 정일 가브리엘 - 안동교구 계림동성당 주임신부. 영국 런던 대학에서 사목신학을 전공하였으며 “산다는 것이란 되어 간다는 것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읽기”를 옮겨 엮었다.

 

[경향잡지, 2007년 2월호, 정일 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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