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 배움터: 삶 안에서 기도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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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11 ㅣ No.709

[기도 배움터] 삶 안에서 기도 들여다보기 (1)



지금까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공부했다면, 이번에는 일상 삶 안에서 기도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우리는 날마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 같지만, 일상 안에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늘 포함되어 있다. 특히 아침에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은 매우 중요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영성가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눈을 뜰 때 통찰이 일어난다고들 말한다. ‘통찰’이란 수도생활을 한다든지 기도생활을 오래 해온 사람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듯, 그날 하루를 살아갈 통찰 역시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첫 새벽에 하루 먹을 만나를 거두었듯이, 우리도 아침의 첫 느낌과 생각을 잃거나 빼앗기지 않는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침에 떠오른 통찰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는 얼마 전에 ‘영적 쓰기’에 관하여 알아본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첫 눈을 뜨자마자 우리 마음에서 일어난 느낌과 생각 가운데 단어 하나라도 기억나면 ‘영적 쓰기’ 공책에 적어보자. 가령 ‘불안’, ‘두려움’, 또는 ‘유쾌함’, ‘설렘’ 등등. 또는 어제 있었던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마음에 켕기는 것이 떠오른다면 서둘러 그 느낌과 생각을 공책에 적어보라. 때로는 간밤에 꾼 꿈을 적는 것도 좋다. 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영적 쓰기’ 공책을 펴서 그러한 느낌과 생각이 어디로 흐르게 되었는지를 쭉 돌아보는 것은 자신과 삶에 관해 파악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에게 온 느낌과 생각은 오늘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물은 주는 분께서 의도가 있어 주시는 것이므로 선물을 해석할 필요는 없다. 곧 자신에게 그것이 부정적 느낌을 주든 긍정적 느낌을 주든 그것에 관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기도에서 일상 삶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우리가 생활고를 겪을 때 더욱더 그러하다. 여기서 생활고란 경제적 어려움, 자녀양육의 어려움, 배우자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 각각의 질병 등, 흔히 지금도 우리가 삶의 현장 안에서 겪는 어려움 모두를 포함한다. 필자는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삶의 현장에서 현재 일어나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길을 안내하고자 한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태 바로 그 안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가령 “주님,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집을 나간 자식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남편을 일으켜 세워 주십시오.” “먹을 것을 주십시오.” “아내를 살려 주십시오.” 등등. 우리 삶의 현장 그대로를 스케치하여 하느님께 기도로 쌓아 올린다. 이를 끊임없이 반복하라. 이것이 삶 안에서 기도를 들여다보는 방법이다. 기도란 일상 삶 가운데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화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 것처럼,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이 체험은 요란하지도 복잡하지도 또 어떤 수준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직 우리의 현장 삶만이 기도의 재료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시는지 그 생생한 현장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타임머신을 타고 2천 년 전의 이스라엘 갈릴래아 카파르나움으로 가보자. 마르코 2,1-12의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중풍병자인 친구를 네 명의 친구들이 들것에 눕혀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데려 가는데, 거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어서 입구로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낸 뒤 그리로 내려 보낸다. 현장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거나 치유 중이셨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 구멍이 뚫리는 천장을 향해 시선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병자를 내려 보내는 이 장면에서 주시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눈빛이다. 여기서 놓쳐선 안 되는 장면은 예수님이 친구를 들것에 달아내려 보내는 친구들을 보고 감동하는 모습이다. 이를테면 “내가 친구를 향한 당신들의 태도를 보고 어찌 그를 고치지 않을 수 있겠소!” 하는 모습이다.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군중 가운데는 소란을 피운 병자와 그 친구들을 질타하거나 거북하게 느꼈을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바라봐야 할 중점은 그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예수님의 시선이다.

또한 이 장면에서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판단 없이 그들의 의로운 행동과 우정,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게 베푸는 끝없는 친절을 바라보게 하신다. 바로 이것이 일상에서 우리가 기도를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기도의 훈련이 왜 필요한가? 기도의 훈련이 되면 우리는 일상을 관상하게 되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의 일상을 관상하면 곧 우리의 일상을 관상하게 되고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행동에 감동하며, 일상 안에서 쉽게 놓칠 수 있는 작은 것에 감동하게 된다. 이 작은 감동은 우리를 영감으로 인도하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께 귀 기울이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삶의 질곡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 산다는 것, 복잡하고 매우 골치 아플 수도 있는 삶의 여정이 얼마나 기도와 밀접한지 다시 한 번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삶 안에서 기도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생경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삶을 통하여 기도를 해야 하고 또한 삶 안에서 기도를 성찰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등, 나날의 일상이나 사건(생활 사건, 사회 사건, 시대적 사건 등)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의견을 말씀하셨을지 그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다.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감동을 되돌아보면 예수님과 친구들이 통했던 그 지점을 요즘 사회에서 많이 유행하는 ‘공감’이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고, 그분의 공감능력을 목격할 수 있다. 공감한다는 것, 연민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판단을 보류한 채 그 현장에 있는 것이다. 현장에 철저하게 현존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7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기도 배움터] 삶 안에서 기도 들여다보기 (2)



지상의 곡물과 과일이 익어가는 8월은 광복절과 성모승천대축일이 있는 달이다. 지난 달에는 복음을 통한 기도 안에서 중풍에 걸린 친구의 해방을 위해 어려운 길을 마다않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는 공동체와, 인간의 의지나 아름다운 우정을 지나치지 않고 감동받으시는 예수님을 만났다(마르 2,1-12 참조). 여기서 우리가 얻는 전망은 복음 이야기가 머나먼 옛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현장 삶이 되고, 우리의 현장 삶이 기도가 된다. 이번에는 예수님과 한 개인의 일대일 대면 내지 일대일 관계 맺기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요한복음 4장)를 통해 관상해보고자 한다.

여행길에 목을 축이고자 우물가에 다다른 예수님과 인간관계에 메마른 한 여인에게는 ‘목마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둘 사이에 목마름의 층은 현격히 다르다. 여기서 층이 다르다는 의미는 예수님과 여인의 첫 만남에서 드러난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라고 요청하는 예수님께 여인은 단순하게 물을 건네지 않고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하며 말을 비껴간다. 목마른 듯 보이는 어떤 사람이 마침 물을 길으러 온 사람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면 그냥 말없이 물을 주면 될 것을, 왜 여인은 예수님께 말을 걸기 시작했을까? 이렇게 여인이 말을 걸기 시작했기에 단순히 물 한잔 주는 걸로 끝났을 만남이 관계로 연계됨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이어서 여인은 예수님께 두레박도 없는데 어디서 생수를 마련할 것이며, 그분이 자신들에게 우물물을 마련해준 야곱보다 더 훌륭하겠는지 등등을 들어 자기 생각을 나열한다(요한 4,11-12 참조).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르신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물 한 잔을 주제로 여인과 예수님은 평범한 우물로부터 영생을 주는 샘까지 걸어간다. 우리는 이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은 만나는 대상이 누구이든 그의 조건이나 그의 배경을 보지 않고, 상대방의 현재의 필요만 보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호기심에 가득차 상대방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려 연거푸 질문을 하는 여인과는 사뭇 다르다. 도리어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예수님의 관계 맺기를 오랫동안 주시하고 또 이를 반복하여 관상하다보면, 이 복음말씀 말고 다른 많은 복음서 대목들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이처럼 대하고 계심을 알게 된다. 우리가 ‘삶 안에서 기도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살아야 하는지를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과 태도와 행동을 통해 관찰학습을 한다는 의미이다. 곧 기도 안에서 사람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수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보면 현장 삶에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태도가 예수님과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인과 예수님의 이 만남을 정리해보면, 관계의 첫 단계에서 예수님은 형식적 대화를 하신 것이 아니다. 도리어 사마리아 여인 스스로는 자신이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함으로써, 관계의 둘째 단계를 서서히 준비시키신다. 곧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될 것임을 언급하신다. 처음에 여인은 자신이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한 번 마심으로써 다시 물을 찾게 되지 않는다면 더욱 더 이 우물가에 오지 않아도 되니, 사람들과 맞닥뜨릴 일도 없다는 얕은 생각에 예수님께 물을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가르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를 들여다볼 거울이 되어주신다. 곧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너라!” 하고 명함으로써 실제로는 곁에 아무도 없는 그녀가 얼마나 영적으로 목이 마른 상태인지를 비추어 주신다. 그렇게 해주심으로써 여인은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드디어 여인은 “이 분은 예언자이시다. 이 분은 구세주이시다”(요한 4,19.25)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보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점진적으로 새로운 세계 곧 영적 세계로 들어간다. 여인은 변화됐다. 더 이상 땡볕이 내리쬐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오는 여인이 아니고, 오랜 시간 궁리는 많이 했으나 늘 해결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방황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대중 속으로 달려가 거기서 이를테면 “주님을 만났습니다”(요한 4,29)라고 선포하는 여인이 된다.

이렇듯 우리가 성경 이야기에서 발견할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어찌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인가?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전망은 기도 안에서 성경을 통하여 삶의 현장을 무수히 바라보다보면, 삶의 현장에서 기도를 들여다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봐야 한다. 인간에 대한 접근방법으로 끝까지 기다리고 존중하고 판단하지 않는 태도, 현재 그에게 놓인 상황 외에 다른 것은 보지 않는 그분의 태도를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의 일화를 통하여 한 사람을 해방시킨 분을 알고서 기도에 들어간다. 특히 여인의 열등감과 함께 기도에 들어간다. 그러면 주님이 이를 비춰주실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우리 역시 칩거에서 벗어나 사람들 사는 곳으로 가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우리 안에서도 실제로 변화가 일어난다. 기도의 질이란 우리 스스로가 해석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기도는 능동적이며 활동적이면서 예수님의 태도를 예의주시하는 것이다.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8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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