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윤유일 순교자의 미친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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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5 ㅣ No.1451

[특별 연재] 이 시대, 순교신심에서 길을 찾다


윤유일 순교자의 미친 존재감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땅에 선교사를 모셔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중국 북경을 향했던 윤유일 바오로 선조의 겸손하고도 담대한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크나큰 가르침이다.


양력으로 1790년 1월 30일 조선에서 온 선비 하나가 중국 북경의 북당(北堂)을 찾았다. 북당은 1784년 우리나라 천주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이 세례를 받았던 성당이다. 이 선비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주었던 그라몽(J.J. De Grammont, 梁棟材, 1736-1812?) 신부를 만나기 위해 북당으로 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라몽 신부는 이미 북경을 떠났고 조선에서 온 선비를 맞은 사람은 북당의 새로운 책임자 라자로회 로(N.J. Raux, 羅廣祥, 1754-1801 신부였다.

북당을 찾았던 선비는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이었다. 그는 당시 조선천주교회가 북경교회에 파견한 밀사(密使)였는데, 그를 북경에 파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조선에 천주교회가 탄생하였다는 것을 알리고 조선천주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조선천주교회가 선교사의 직접적인 선교활동 없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한문으로 된 서적들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생된 문제들이었다. 한국천주교회는 교회를 스스로 시작하였다며 세계교회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고 자랑하지만 이렇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태생적으로 두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가장 핵심적 요소인 미사와 성사(聖事) 등을 집전할 성직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왕정체제에서 천주교를 자유스럽게 믿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왕이나 정치권력과 어떤 형태로든 대화가 있어야 했는데 그 창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이나 중국 모두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정치지도자와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조선에는 선교사들이 직접 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천주교회는 그런 대화의 창구를 원천적으로 가질 수가 없었다.

이런 태생적 문제들을 단번에 풀기 위해서는 수학자 선교사나 의사, 화가 선교사 등 서양학문에 조예가 있는 서양 선교사를 조선에 영입하는 것이 필요했다. 선교사가 오면 당연히 성사나 미사 집전은 가능한 것이고 조선의 왕이 유럽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왕과 교섭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천주교 지도자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북당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밀사를 보내어 조선 신자들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고 서양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밀사로 뽑힌 윤유일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다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경기도 양평군 한강포로 이주하여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1801)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그에게서 배우며 학문을 닦았다. 그런데 윤유일이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2)을 통해서 였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온 직후 권일신이 윤유일에게 천주교를 전해 주었던 것이다. 윤유일은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가족들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1818-1866) 주교는 조선천주교회 지도자들이 북경에 파견할 밀사로 선택한 윤유일의 성격과 그를 택한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유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윤 바오로에게 눈길을 돌려 이 중요하고도 복잡미묘한 새로운 임무를 그에게 맡겨 수행하도록 하였다. 윤 바오로는 여주 지방의 한미한 양반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는 권씨 집안의 제자였으며,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한테서 천주교를 배웠다. 그는 유순하고 친절하며 매우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윤 바오로가 성공적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윤유일이 비록 한미한 양반 집안사람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대학자인 권철신에게서 학문을 쌓고, 천주교를 권일신에게서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학문 면에서나 신앙 면에서 충분히 자격을 갖추었다고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교회의 사정을 정확하게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또한 윤유일의 성격이 매우 유순하고 신중하여 북경을 오가는 과정에서나 선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지혜롭고 침착하게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윤유일은 조선천주교 지도자들이 써 준 편지들을 옷 속에 품은 채 1789년 말 이성원(李性源)을 정사(正使)로 하는 진하 겸 사은 동지사(進賀兼謝恩冬至使)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윤유일은 은자(銀子) 20냥을 들여 마부의 자리를 산 다음 사신 일행에 끼어서 따라갔다.

북당에서 로 신부를 만난 윤유일은 조선천주교 신자들이 쓴 편지들을 전해주며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북경의 선교사들과 윤유일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서양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서양 선교사가 중국인 선교사로 바뀌었지만 윤유일은 자신이 북경에 온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밀사로 온 윤유일의 존재감이다. 요새 ‘있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눈에 띌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미친 존재감’이라는 말을 쓴다. 당시 북경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그야말로 윤유일의 미친 존재감이 그가 북경에온 목적을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로 신부는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에서 온 이 밀사가 도착하였을 때 그가 보여준 겸손한 태도와 너무도 깊은 신심을 보고, 또한 그가 천주교에 대해 대단히 많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저희(북당의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북경에 있는) 네 성당의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자들 모두가 너무도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윤유일을 만난 북경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윤유일의 태도와 신앙심을 보고, 그리고 윤유일이 천주교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모두들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북경의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1751-1808) 주교는 로 신부가 윤유일에게 조건부로 세례성사를 베풀어 주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도록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윤유일에게 견진성사까지 주었다. 그리하여 윤유일은 조선천주교 신자로서는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받았고, 또한 네 가지 성사를 받은 초기교회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 되었다. 윤유일의 세례식은 2월 5일(양)에 있었다. 그런데 윤유일이 성사를 받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또 다시 많은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구베아 주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세례는 대단히 화려하게 진행되었으며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드렸답니다. 저는 같은 날 그에게 견진성사를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깊이 통회하는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받았으며 천사와 같은 열정으로 성체성사를 모셨습니다. 윤 바오로의 이와 같은 열정을 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북경의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윤 바오로가 신입 교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복음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완숙한 경지에 이른 오래된 천주교 신자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결코 평범하지 않은 얼굴과 언행 그리고 덕스런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모두들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를 못하였습니다.

또한 북당의 부책임자인 길랭(J.J., Ghislain, 吉德明, 1751-1812) 신부는 윤유일이 세례를 받고 난 다음 미사에 참여하였을 때 대단히 큰 감동을 받아 이렇게 쓰고 있다.

저희들은 그 조선 신자들의 대표에게 세례를 준 후 대미사에 참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하느님께 몰입해 있었던지, 만일 제가 여러 차례 그에게 제대를 좀 바라보라고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제 생각에 아마도 그 사람은 제대에 서 있는 사제는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성당 문을 나섰을 것입니다. … 저는 그가 깊이 기도하는 모습과 교회에 대한 열정을 보고는 정말이지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랭 신부는 심지어 고향에 있는 자기 가족에게 이런 말까지 하였다.

우리 가족들도 그 젊은이가 보여주었던 정신을 배워 누가 뭐라고 빈정대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듯 윤유일을 직접 만나본 북경의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자들은 윤유일이 보여준 겸손한 태도와 신앙 때문에 한결같이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북경의 선교사들은 윤유일에게 매우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주었다.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심지어 길랭 신부는 자신이 직접 조선에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비록 길랭 신부가 조선에 올 수는 없었지만 북당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선에 선교사들을 보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래서 로 신부를 비롯한 북당의 신부들은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즉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전구를 청하는 9일 기도를 시작하기까지 하였다.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이러한 윤유일의 존재감, 그 ‘미친 존재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3년 11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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