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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두드려야 얻어지는 세렌디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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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03 ㅣ No.273

[과학과 신앙] 두드려야 얻어지는 ‘세렌디피티’

 

 

고분자화학과 플로리

 

미국 화학회에서는 1986년부터 「이력, 진로 그리고 꿈」 시리즈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화학자들을 엄선하여 그들의 학문 세계와 인생 역정을 자서전 형식으로 엮는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 중에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로버츠 교수가 쓴, 「적시적소(適時適所, 그때 그곳)」란 제목의 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학문과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우연처럼 기회가 만들어졌고, 먼 훗날 뒤돌아보니, 자신의 모든 학문적 성과나 인생의 중요한 사건에 관련된 그 우연은 적시적소에 필연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고 회고합니다.

 

비단 화학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오늘의 자신을 만든 ‘그때 그곳’은 언제 어디서였을지 한 번쯤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로버츠 교수가 쓴 책 제목을 빌려, 제가 전공하는 고분자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기고 그 공로로 1974년 화학 부문의 노벨상을 받았던 P.J. 플로리(Flory) 교수의 삶을 통해 ‘그때 그곳’의 흔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분자화학 분야에서 플로리 교수의 공헌은 지대합니다. 고분자 전공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의 80% 이상의 내용은 거의 그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플로리 교수는 미국 인디애나 주 노스 맨체스터에 있는 맨체스터대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뒤 신시내티대학교와 코넬대학교, 스탠더드 석유개발회사와 굿이어 타이어 고무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1961-1976년에 스탠퍼드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76년 명예교수가 되고 1985년에 작고하였습니다. 그의 이력에 나타난 대로 그는 아주 다양한 경험을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플로리가 고분자화학의 토대를 완성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된 데는 아주 기막힌 우연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하이오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델라웨어 주 웰밍턴에 있는 듀폰의 연구원으로 취업합니다. 고분자화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였지만, 듀폰에서 캐러더스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고분자화학의 세계에 뛰어들게 됩니다.

 

 

플로리와 캐러더스

 

지난 2000년 새로운 천 년기를 앞두고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 ‘타임’이 지난 천 년 동안의 10대 발명 가운데 하나로 플라스틱을 꼽은 적이 있습니다. 고분자의 하나인 플라스틱이지요. 그때 1900년에서 2000년까지, 곧 지난 백 년 동안 인류 최고의 발명품도 선정한 바 있습니다. 컴퓨터와 함께 10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 것이 바로 나일론입니다.

 

오늘날 의류용은 물론이고 각종 산업용품으로 널리 쓰이는 나일론을 발명한 분이 바로 캐러더스입니다. 하지만 나일론 합성 과정의 이론 전개는 순전히 플로리의 몫이었습니다. 플로리는 캐러더스와 함께 일하면서 나일론뿐만 아니라 고분자의 세계에 푹 빠져들게 됩니다. 그와 함께 일하면서 고분자과학의 중심을 이루는 수많은 이론을 발표하였습니다.

 

1920년대 말부터, 독일의 슈타우딩거가 고분자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화학자들조차 고분자가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만큼, 플로리의 탁월한 천재성은 캐러더스에 의해 꽃필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고분자 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슈타우딩거는 고분자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공로로 1954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듀폰에서 캐러더스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였다면 플로리의 삶은 우리가 아는 바와는 다른 삶의 길을 걸었을지 모릅니다.

 

캐러더스는 40대를 갓 넘긴 나이에 갑자기 자살로 생을 마감해 버립니다. 1938년 플로리가 듀폰을 떠나 2년간 신시내티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캐러더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가져다준 충격 때문입니다.

 

코넬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된 플로리 교수의 「고분자화학의 원리」라는 책은 고분자 과학의 성경 같은 교과서입니다. 플로리는 8년간(1948-1956년) 코넬대학교에 재직했는데 그 책의 집필은, 또 다른 저명한 화학자이며 그의 코넬대학교행을 가능하게 하였던 디바이의 초청 덕분이었습니다.

 

플로리 교수가 듀폰, 에소, 굿이어 등 기업 연구소에 있으면서 발표한 고분자 관련의 이론에 감탄한 디바이 교수는, 코넬대학교가 마련한 베이커 강연에 플로리를 초청하게 됩니다. 그 강연 자료를 바탕으로 쓴 책이 바로 위 책입니다. 디바이의 초청이 없었다면 그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플로리 교수가 고분자과학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탁월한 이론을 세운 배경에는 그의 다양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터에서 용액 속에서 고분자의 거동을 비롯하여 고분자의 기본적 성질에 대해 뛰어난 논문들을 발표하였습니다.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부산물로 얻은 성과입니다.

 

플로리 교수는 코넬대학교 시절을 끝내고 1960년까지 피츠버그에 있는 멜론연구소에서 고분자 분야 연구소장을 맡습니다. 그는 여기서 코넬대학교와 멜론 시절을 통해 지난 8년간의 회사 경험을 살려 고분자 용액의 점도와 분자 크기의 상관성에 대해 더욱 깊이 연구한 이론으로 노벨상을 받게 됩니다.

 

플로리 교수의 삶을 보면, 정말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연구를 통해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이런저런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과학자에겐 창의성 못지않게, 이른바 하늘이 내린 그 기회를 어떻게 잘 살리는지가 과학적 성과를 낼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가름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플로리 교수는 그 기회를 아주 적절히 잘 살린 과학자의 전형적인 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페니실린 발명으로 유명한 영국 출신의 플레밍은 우연히 미생물 배양 배지 접시 바닥에 붙어있던 곰팡이에서 그 힌트를 얻었습니다.

 

오늘날 병원에서 널리 쓰이는 엑스선도 뢴트겐이 진공관에서 방전되는 전하의 영향에 대해 연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뢴트겐에게 물리학 부문의 제1회 노벨상을 안겨준 발견이지요.

 

하지만 과학의 역사를 더 깊이 살펴보면, 그런 우연 뒤엔 필연적으로 그 과학자의 피와 땀이 있음은 물론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그런 기회는 숱하게 찾아오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눈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직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교우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계기는 저마다 다를 테지요. 이웃의 권면으로 성당 문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을 테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주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저처럼 제 발로 성당에 찾아가 주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남에는 결코 우연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가톨릭 신자가 된 것으로 생각되어도, 하느님의 섭리와 부르심이 없으면 결코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없겠지요?

 

요한 묵시록 3장 20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주님께서 곁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시는데도 쉽게 문을 열지 못하는, 아니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가진 이웃이 주위에는 참 많습니다.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와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자 끊임없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노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세렌디피티를 바란다면 두드려라

 

플로리 교수라고 하는 한 고분자 화학자의 삶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과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내려면 우연히 찾아온 위대한 과학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밤낮없이 노력해야 가능한 법입니다.

 

참, 우리 과학자들에게는 그렇게 자신에게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대한 성과로 이끌어내는 능력을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 부릅니다. 사전을 보면 ‘행운을 우연히 발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되는 단어입니다. 과학사에서는 완전하게 우연히 얻어지는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을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우연에 따른 과학적 세렌디피티는 없습니다. 저온 살균법으로 유명한 루이 파스퇴르는 “우연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라고 하였다지요? 세렌디피티가 일어나려면 ‘준비되고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우연한 발견이라고 하지만, 그 말엔 그 이상의 복합적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30년 이상을 고분자 과학의 연구에 몸담은 저에게도 그런 세렌디피티라고 부를 만한 세기적 발견을 할 수 있는 눈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단히 노력하면서 주님께 부지런히 청하고, 문을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는 청하는 대로 받고, 두드리면 문이 열리겠지요(마태 7,8 참조).

 

* 하창식 프란치스코 - 부산대학교 고분자공학과 교수.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호주 퀸즐랜드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접착 및 계면학회 회장, 부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6년 2월호, 하창식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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