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현대 영성: 관상은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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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4-11 ㅣ No.1794

[현대 영성] 관상은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이 아닙니다

 

 

관상에 대한 그릇된 개념 중의 하나는 관상을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으로 여기는 것이다. 초기 사막 교부들에게 신비주의(Mysticism)와 관상은 직접적인 하느님 체험을 다르게 표현한 두 용어였다. 그런데 16세기에 들어와 신비 신학은 점점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같은 신비가들을 연구하는 학문이 되어 갔고, 심지어 『가르멜의 산길』이나 『완덕의 길』과 같은 그들의 저서들은 영적인 삶의 단계를 상승하게 하는 기술을 배우는 안내서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관상에 관한 생각은 모호해지거나 잊혔으며 신비주의는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에 빠지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고, 보통의 사람들은 이를 피해야 하며 누군가 이런 체험을 하면 그 신앙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토마스 머튼은 단호하게 주장한다. “관상은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이 아닙니다. 이것은 광포한 힘에 의해 ‘점령된’ 감각적인 광신도 아니요, 신비적 광란에 의해 자유 안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새명상의 씨』) 이교도의 신비적 종파들과 원시적이고 밀교적 전례들이 주는 신비주의에 대한 부정적 암시는 현대에 와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사실 신비주의나 관상은 같은 것이며, 둘 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이는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이며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는 부득이하게 언어와 개념, 이미지 등 매개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친교(communion)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러한 매체가 불필요해진다. 언어의 영역을 넘어가는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의 영(靈)이 사람 안에 직접 내재하여 활동하실 때에는 사람의 사고와 감정과 상상은 하느님과의 ‘침묵의 일치’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인간의 언어와 개념 등은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계시하고 활동하시려는 자유를 제한하기에 이른다. 관상은 이러한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깊이 들어간 관상가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모두 침묵시키고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밀한 친교를 체험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존재가 본질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도달해야 할 ‘대상’이나 ‘목적’이라기보다는 ‘삶의 주제요, 내용이며 생명의 원리’가 되기에 이른다.

 

나아가 이제는 관상적 삶의 여정에서 은총의 선물로 주어지는 하느님 체험에 도달하려는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관상에서 오는 고요함과 평온 역시 하느님이 아니기에 영적 집착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관상을 통해 무엇인가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알기에 일상의 소소한 것에 더욱 충실하게 된다. 자신을 하느님께 집중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겸손하고 순수하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깊은 관상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에 도달하게 된 영혼은 자신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의 현존을 일깨워 주는 뜻밖의 은총의 선물을 기다리며 묵묵히 그리고 항구히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릴 수 있는 은혜도 얻게 되는 것이다.

 

관상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도달해야 할 삶 자체, 즉 천국에서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사람 가운데 “저는 결코 낙원에서 하느님을 뵙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을 뵙고 그분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희망한다. 아담이 있었던 인간 본래의 자리인 낙원에서 하느님과의 참된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 바로 관상이다. 이와 관련해 토마스 머튼은 『새 명상의 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조의 목적에 다다른 모든 사람은 다 천국에서 관상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많은 사람이 아직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이런 초자연적 영역으로 들어가 새로운 환경을 맛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리신 새 아담, 그리스도의 목숨 바친 자기희생적 사랑은 우리도 관상을 통해 새 아담이 되어 낙원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이 낙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모든 외적인 허물을 다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나는 하느님과 함께 벌거벗고 에덴동산에서 기쁘게 주님과 함께 거닐 수 있는가?’ 아니면 ‘부끄러움 속에서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하고 있지는 않은가?’

 

[2022년 4월 1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톨릭마산 2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분도 명상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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