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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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7-15 ㅣ No.1309

[124위 시복 특집] 주문모 야고보 신부 ① (1752~1801년)


“나는 천주교를 위하여 죽습니다.”



1752년 중국 강남성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난 주문모 야보고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삯바느질하는 고모 곁에서 성장했습니다. 이후 장성하여 북경에 간 그는 서양 선교사를 만나 서양 학문과 천주교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 후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깊이 감동하여 세례를 받고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북경 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으로 파견될 선교사로 주문모 신부를 선발하고 그에게 성무 집행을 위한 통상적인 권한과 특별 권한 모두를 부여했습니다. 1794년 2월 북경을 떠나 조선으로 향한 주문모 신부는 우여곡절 끝에 그해 12월 24일 밤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한양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주문모 신부는 성무 집행을 위해 한글을 배우는 한편, 1795년 성주간에 세례와 보례를 집전하였으며, 한자를 통한 필담으로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이어 부활대축일에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서 사목을 시작한 지 6개월도 채 안되어 배교자의 밀고로 발각되었고, 이 와중에 그를 극진히 보필하던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이 순교했습니다. 가까스로 강완숙의 집에 몸을 숨긴 주문모 신부는 그곳에서 비밀리에 성무를 집행하면서 순교 전까지 6년가량 머물렀습니다. 강완숙은 양반 집안 출신이었는데, 조선의 풍습에 따르면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가택 수색을 할 수 없었고, 더욱이 부녀자가 주인인 집에는 외간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언어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고, 풍속에도 충분히 익숙해져 조심스럽게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발각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의 가정 방문과 사목 활동은 비밀에 싸여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문모 신부의 열성적인 사목으로 인해 신자가 6천여 명이나 증가하여, 그가 순교할 무렵에는 조선의 신자가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성무활동뿐만 아니라 신자들을 위한 저술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지은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는 고해성사와 세례성사를 준비하는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울러 최창현과 강완숙을 남녀 회장으로 임명하고, 교리를 연구하여 가르치는 모임인 ‘명도회’를 조직하는 등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다음 호에는 주문모 신부의 순교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일 서울주보 6면]

 

 

[124위 시복 특집] 주문모 야고보 신부 ② (1752~1801년)


“제가 월경죄(越境罪)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당국은 주문모 야보고 신부 체포에 필사적이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신자들이 그의 은신처를 추궁받으며 잔혹하게 고문당했습니다. 소식을 접한 주문모 신부는 잠시 중국에 피신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자신이 조선을 떠난 사실이 알려지면 박해가 멎거나, 적어도 그 포악함이 덜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으로 가던 중 황해도 황주에 이르렀을 무렵, ‘착한 목자’로서 자신의 양떼와 끝까지 운명을 같이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는 조선이 섬기던 중국의 백성이었으므로 국경을 넘으면 능히 살 수 있었지만, 자수하면 신자들의 고통이 끝날 거라는 생각에 서울로 발길을 되돌린 것입니다.

1801년 4월 24일, 스스로 의금부에 간 주문모 신부가 외쳤습니다. “나도 천주교를 믿소. 듣자하니 정부에서 천주교를 엄금하고 매일 무죄한 백성을 죽인다 하여 나도 죽여 달라고 청하러 왔소. 내가 당신들이 사방에서 헛되이 찾는 그 신부요.” 그는 즉시 체포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왜 조선에 왔느냐?” 관장이 물었을 때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조선에 온 목적은 한 가지뿐이오. 즉 참된 종교를 전하여 이 불쌍한 백성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오.”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모든 질문에 진중하고 슬기롭게 대답하였고, 천주교에 대한 길고 웅변적인 호교(護敎)의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주문모 신부의 처리를 두고 대신들은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했습니다. 일부 대신은 중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그를 중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다수의 대신들은 천주교의 두목을 벌하지 않을 수 없다며 사형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문모 신부의 사형이 결정되었습니다.

사형 집행 날, 관례에 따라 다리에 매를 맞은 그는 들것에 실려 시내에서 10리 되는 곳에 있는 노들 혹은 새남터라 불리는 군(軍)의 사형 집행 장소로 끌려갔습니다. 들것에 실린 채 장터를 지나며 구경꾼 무리를 조용히 둘러보던 그는 목이 마르다며 술을 청해 한 잔을 다 마셨습니다. 그가 형장에 도착하자 박해자들은 그의 양쪽 귀에 화살을 꽂고 재판 기록과 판결 내용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 문서를 침착하게 끝까지 다 읽은 주문모 신부는 소리를 높여 모여든 군중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천주교를 위하여 죽습니다!” 군중 둘레로 세 바퀴 조리돌림 당한 그가 마침내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기쁘게 머리를 숙이니 그 머리가 곧 칼 아래 떨어졌습니다. 1801년 5월 31일, 당시 그의 나이 49세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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