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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가톨릭 신심유형: 고유문화와 맞물려 가톨릭 신심 쉽게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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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2 ㅣ No.81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 교회] (5) 한국 가톨릭 신심유형


고유문화와 맞물려 가톨릭 신심 쉽게 수용

 

 

’신심(信心, devotion)’이라는 말에는 다양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전적 의미로 ’종교를 믿는 마음, 혹은 옳다고 믿는 마음’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말이 좀더 복잡하게 설명된다. ’하느님의 신비나 하느님과 관련된 어떤 것에 마음을 향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를 드리는 인간 자세’라고 설명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을 섬기고 경배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신비·위격·속성과 구원사업에 관계된 어떤 창조적 실재(realitas creata)에 대해 구체적 표현을 하는 인간 자세이자 종교적 행위’라고 설명하는 책이 있다.

 

게다가 신심은 영성(靈性)이라는 단어와 뒤섞여 쓰이기도 한다. 신심을 주제로 하는 연구이기 때문에 용어를 분명하게 정의하고 시작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것을 신자들의 ’모든 신앙행위’로 정의하고자 한다.

 

’신자들의 신앙행위’는 외적으로 볼 때 대부분 교회가 지정한 방식을 따라간다. 그러나 구체적 생활 속에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시대가 변함에 따라 어떤 신앙행위는 강화되고, 어떤 신앙행위는 약화되는 것이다.

 

본 논문은 한국 근현대 100년 역사를 세 시기로 나눈 것(개항기~일제 강점기, 해방후~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현재) 중에서 첫번째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가톨릭 신심 유형을 소개한다. 이 시기에 특별히 행해지던 신심 유형들을 정리하고 그 성격을 요약한 후, 역사, 문화적 배경을 제시한다. 먼저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의 대표적 신심 유형이라 할 수 있는 성체, 순교자, 성모, 대사와 은사회 등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살펴본다.

 

일제 강점기 가톨릭 신심 중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성체신심이었다. 선교사들이 성당을 지어 그 안에 성체를 모시면서 성체신심은 여러 형태로 표현되었다. 1890년대에 이르러 수녀원에서는 성체강복(聖體降福)이 시작되고, 그 후 본당에까지 보급되어 매월 첫 금요일인 ’첫 첨례 육’ 같은 날에는 성체강복을 하는 것이 관례화 되었을 뿐 아니라 주일에도 하게 되었다.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고 성당이 설립되어 매일 미사에 참례할 수 있게 되자 성당 가까이 이사하여 매일 영성체를 하고 싶어하는 신자들이 많았으며, 실제로 시골에서 성당 곁으로 이사하는 예가 있었다고 한다. 사형 당하기 전(1910년) 감옥을 찾아온 빌렘 신부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신 안중근에게서도 성체신심이 발견된다. 또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와 신자들 중에서 79위가 1925년 7월 로마 대성전에서 시복(諡福)된 이후 순교자들을 기리는 행사도 자주 열렸다.

 

매월 첫 토요일은 ’첫 첨례 칠’이라 하여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특별한 지향으로 미사, 고해성사, 영성체를 했다. 잠벌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대사를 얻기 위해 은사회에 가입하기도 하고, 성당 봉헌 행사 참여, 성물을 통한 기도도 성행하였다.

 

그런데 이때 신심 유형들은 교회 지도층이 주관하는 행사 위주(성체, 순교자, 성당 봉헌 등의 신심), 개인 구령 위주(대사와 은사회, 성물 등의 신심)의 특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신심 유형 특성은 국가나 민족 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오랜 기간 박해를 체험한 한국교회가 겨우 맞게 된 신앙 자유 시대에 정부와 마찰을 빚지 않으려고 소극적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외국인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교회 지도층이 선교현장인 한국의 운명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신자들로 하여금 몰사회적 영혼의 기쁨과 안식을 추구하는 신심 활동을 하게 만들어서, 어떠한 정치나 국가 체제에도 안주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일본군을 위해 기도하거나, 순교정신으로 일본에 ’보국’하라고 부추기기도 했으며, 일제 대륙침략 전쟁을 위해 목숨을 바쳐 순교정신으로 순국하자는 주장까지 하였다. 이것은 신앙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가톨릭 본래의 순교정신이 변질된 것이었다.

 

더욱이 죽음의 위협 아래서 순교자들의 용감한 덕행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던 초창기 신자들의 생활태도에 비해, 일제 강점기 때는 행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고 국가 운명과 연결하여 순교자신심을 발전시키지 못한 아쉬운 부분이 있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가톨릭 신심과 민중들의 신앙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비록 교회 책임자들이 권면을 한다고 해도 신자들의 마음에 이미 자리한 공통분모가 없이는 이러한 신심 유형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 문화와 가톨릭 신심 유형들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국의 세시 풍속 중에는 설날에 스님들이 법고를 치며 마을 집집을 방문해 염불을 하며 권선(勸善)하는 ’마을놀이’가 있는데, 이때 스님들은 승병(僧餠)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성체신심과 승병(僧餠)이 가진 공통적 나눔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신앙이나 효(孝)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동을 아름다운 덕행으로 여겼던 한국인들의 심성과 순교 신심도 연결해 볼 수 있다. 특히 1903년에 개관된 원각사(圓覺社)에서 공연되던 각종 공연 중에서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가 판소리였다 하는데, 이 판소리 중에서 유명한 심청가를 떠올리면 순교신심과 효를 위한 죽음을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다.

 

신모(神母) 신앙과 속신어(俗信語)에서 드러나는 한국인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가톨릭 성모신심이 받아들여지기 쉬웠던 요소다. 어머니를 가장 포근하고 고마운 안식처로 여겨 이승은 물론이고 저승에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것을 큰 희망으로 삼을 정도로 어머니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던 한국인의 심성은 성모신심을 받아들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한국인은 오래 전부터 상선벌악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죽어서 받을지도 모르는 속죄의 과정을 살아서 미리 갚고자 하는 대사의 내용을 무리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각 성당에 모시는 수호성인과 한국의 가신(家神) 신앙, 마을 신앙 전통도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신신앙은 집안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다. 집터를 다질 때에 토지신에게 빌며 상량할 때에는 성주신을 모신다. 장소에 따라 집안을 수호하는 신들도 있었다. 또 마을을 지키기 위해 동구(洞口)에 세워놓는 장승신앙도 있다. 수호성인을 모시고 그에 봉헌하는 전통은 비록 선교사들이 들여온 것이지만 이런 한국 고유 전통이 있었기에 쉽사리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무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부적을 써왔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성물(상본, 성패, 성상 등)을 통하여 기도하는 관습은 이같은 배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현세의 행복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부적처럼 성물들을 간주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초창기 신심 유형들에 비해서 우리가 다루는 이 시기의 신심 유형들은 대체적으로 교회가 주최하는 행사나 단체가입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또한 성당 봉헌이나 성체거동, 성체대회 등의 형태는 초창기에 찾아보기 힘들던 것들이다. 이는 숨어 지내야 했던 박해시대와 달리 제대로 건축된 성당에 모여 함께 신심을 표현할 수 있었던 시대 배경 때문일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개항기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기간에 신심 유형들을 통해 드러난 교회의 태도는 대체적으로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모처럼 얻은 신앙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고자 정부와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려 했던 교회 사정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민중신앙의 형태와 가톨릭 신심 유형이 공통적으로 지닌 유사점을 찾은 것은 작은 결실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자료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고 가능성만을 제시한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이것을 후일의 과제로 남기며 이제 다시 시작하는 연구의 기초로 삼으려 한다.

 

[평화신문, 2003년 8월 3일, 최경선(가톨릭대 인간학연구소 전임연구원),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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