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수도 ㅣ 봉헌생활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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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14 ㅣ No.5

현대사회는 이익사회인 까닭에

가치의 척도마저 이해관계로 삼고 있으니,

참다운 신앙을 심어 주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리하여 강론에 있어서 조차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 너에게 유익하니!

자선과 선행을 많이 하라! 너에게 이로우니!"

이런 식으로 해야 하니,

어떻게 무상성(無償性)인 하느님의 사랑과

그에 대한 참된 신앙을 심어 줄 수 있겠는가!

그런 식으로 되어선 설사 전인류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온 천지에 교회가 빽빽이 들어설지라도 결코 참다운 신앙사회는 아니다.

 

참된 신앙은 결코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참된 신앙생활은 밝고 행복할 때만이 아니라

불행에 처한 어둠의 때에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그 절망이 깊어 아예 ’천국에 대한 기대’조차 끊겼을지라도,

참으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의 그 시간에도

그 관계는 튼튼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관계적인 조건이 전혀 없는 사랑을 통해서만

참 신앙에 이를 수 있고 또 그 길로 갈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성소를

자신 속에 온전하게도 올바르게도 품지 못하고

중도에 좌절을 겪거나 실패하는 까닭도

사심 없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이해하지도

또 당연하게도 그 스스로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느님에 대한

거짓없이 뜨거운 애정과 신뢰만이 성소를 참으로 열매맺게 한다.

사실 모든 게 이해관계로 이뤄지는 현대사회에선

’부모에 대한 효도’나 ’부부간의 애정관계’조차 이해타산의 자로 잰다지만,

지금의 타락한 현실 말고

오히려 지난날의 자식애(子息愛)나 효도 그리고 부부애 등등이

여기서 말하는 참된 신앙을 어느 정도 표현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동고동락하면서

이 우주의 시작 때부터,

아니 저 세상에서부터 이미 숙명적으로 맺어져,

그리하여 서로가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되는 걸

팔자소관인양 무슨 소명으로까지 여기는 그런 관계 말이다.

그것이 또한 하느님과 신앙인 사이에 놓여지는 올바른 관계이다.

 

한 인간이 참으로 소명의식을 느낄 때,

또는 자신이 성소의 존재로 자각될 때,

그것이 어제오늘에 그 자신이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시원(始原)으로부터 이미 하느님께서 작정하셔서

그렇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이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다."라고

확신하게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나는 아브라함 전부터 있었다."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 자신의 성소 자각의 극적인 표현이다.

하느님과 영원에서부터 맺어진 관계로 자신을 보고

그것을 느껴 깨닫는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소명의식이다.

왜냐면 그럴 때 비로소 그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 하는 것이니,

그래 하느님을 위해선 모든 걸 버릴 수 있기에

또한 하느님을 위해선 모든 걸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성소는

시편 작자나 예레미야가 "태중의 시기부터"라고까지 고백하듯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전에 그대에게 내린다.

그대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간절히 깊고 조용히

오랫동안 그대 안에서 홀로 계속되어 왔나를 가만히 생각해 보라.

하느님은 그대가 어릴 때부터

’어떻게 쓰여질 것인지, 아주 구체적으로까지’

암시적으로 꾸준히 예감시키고 각인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도구로 쓰일 때나

그가 자신의 생활이나 소명에 대해 전혀 낯설지 않게 만들어

마치 먼 옛날부터

이런 생활이나 일을 계속해 온 듯 느껴지게 되는 것이니,

예언자의 열정은 그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자로서의 그 비극적 생애를

그 자신 벌써 어렸을 때부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희미하게나마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부르심의 순간

스스로 불가능한 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것을 뿌리치려 순간 몸부림쳤던 것이다.

 

모세의 출애굽 소명도

불타는 가시덤불 사건 그때 갑자기 내려진 것이라곤 볼 수 없다.

오히려 어쩌면 애굽에서의 왕궁 시절부터

젊고 어린 모세의 영혼 속에 조용한 음성으로 울려져 왔던 것이,

때가 차자 그 순간 불타올라 넘쳐 나온 것이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예고 역시

순간적이고도 직감적으로 그분에게 예감되어진 것이라기 보단,

공생활 이전부터 왠지 가슴에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온 존재적 순명을 요구-갈원(渴願)이랄까!-하며 와 닿았던,

깊고도 높은 그 눈길에 대한

비로소 드러내는 응답-작정이랄까!-으로 이뤄진 것이리라.

그것은 참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질,

아니 이뤄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예언자는

자신의 소명을 하느님의 분명하고도 절대적인 뜻으로,

진실로

운명 이상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소는 사랑과 같이 운명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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