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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2장 길위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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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14 ㅣ No.1869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2장 길위의 그림자

 

 

희망의 싹

 

현대 복지 국가의 기틀은 영국에서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를 담은 베버리지 보고서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영국이 복지 국가로 나아가는 청사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사회 보장의 지도 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국민적 지지를 받아 국가 정책의 근간이 된 데에는 영국 국민의 공동 경험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세계 대전 이전의 영국은 최강의 자리를 다투는 부국이었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듯 빈부의 격차도 엄청났고, 그만큼 사회적 갈등도 심각했지요. 그런데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공평하게 먹거리를 나누는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영국 사람들은 서로 나누면 아무도 굶주리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뼛속 깊이 체험합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을 제도로 운영해 보고 체험하면서, 미래 사회에 대한 희망을 함께 키워 가는 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적이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은 뛰어난 행정가의 신묘한 비책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게 하는 희망의 싹, 공동의 비전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대개 이런 공동의 비전은 고난과 시련의 시기를 서로 도우며 극복하는 가운데 만들어지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 사회가 기억하는 시련의 경험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함께 어려움을 견디면서 함께 위기를 벗어나는 경험보다, 정말 위험한 순간에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좌절의 경험이 더 크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IMF 경제위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각자도생’이 공공연하게 입에 오르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내 몫 찾겠다고 악다구니 쓰는 사람은 많아도, 먼저 양보하고 함께 살길을 찾아보자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보면 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공동의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모든 인간의 창조주 하느님, 모두가 형제로 창조된 인간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은 희망의 싹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 형제애에 있다고 알려줍니다. 교황님은 내 편, 내 사람만을 챙기지 않는 보편적인 형제적 사랑의 본보기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를 묵상 해 보자고 초대하십니다.(『모든 형제들』,56·86항)

 

어떤 형태의 편가르기도 뛰어넘는 사랑은 구약 성경의 창세기부터 신약 성경까지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고 물으실 때 욥이 “어머니 배에서 나를 만드신 분이 그도 만드시고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모태에서 지어 내지 않으셨던가?”(욥기 31,15)라고 고백할 때 모든 이가 같은 창조주에게서 나와서 서로 보살피는 형제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마태 5,45) 하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고 예수님께서 명하셨고, 초대 교회 공동체는 그분의 명을 따라 폐쇄적이고 고립된 집단을 이루려는 유혹과 싸웠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은 한계를 모르고, 우리 신앙인은 그 사랑을 닮도록 불리었다는 점을 상기시킨 다음에, 우리가 근본적인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많은 고통과 상처 앞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되든지, 아니면 길가에 쓰러진 사람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편, 심지어 강도의 편이 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약함을 자기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배척의 사회가 건설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와서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고 회복시켜 공동선을 이루게 합니다.”(『모든 형제들』, 67항)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된다는 것은 “사랑 안에서만 달성되는 충만함”을 선택한다는 것이고, 누구도 ‘삶의 길가’에 머물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의미입니다.(68항)

 

 

되풀이되는 이야기

 

교황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는 이야기라고 지적하십니다. 비유 속의 강도는 오늘날 “권력, 축재, 분열의 삿된 이익에 동원되는 폭력과 무관심의 짙은 그림자”(72항)로 나타납니다. 비유 속에서 다친 사람을 보고도 멈추어 서지 않고 지나쳐 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해서 다른 이들을 도외시하고 그들의 역경에 무관심한 현대인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지나쳐 간 사람’으로 지목한 이들은 사제와 레위인 같은 종교인이었지요. 하느님을 믿고 경배한 다는 사실이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 삶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참으로 열려 있음을 드러내는 보증은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인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공경하고자 합니까? 그분께서 헐벗으셨을 때에 모른 척하지 마십시오. 바깥에서는 그분께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받으시도록 내버려 두면서 성전 안에서는 그분을 비단옷으로 공경하지 마십시오.”(74항)

 

고통받는 사람들,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 그 고통 앞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인간 사회에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어도 타인의 고통, 약자의 고통에 무관심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고통의 악순환을 이루는 한 부분이 되고 맙니다.

 

 

새롭게 시작하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되풀이되는 이야기라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기회도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기회, 새로운 가능성을 얻습니다. … 우리에게는 새로운 과정과 변화를 계획하고 실현하는 공동 책임이 필요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사회를 되살리고 지원하는 데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형제자매라는 것을 표현하고, 증오와 분노를 조장하는 대신 다른 이들의 역경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77항)

 

최근 사회교리를 실천하는 것과 특정 정당이나 정파를 옹호하는 것을 혼동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다친 사람은 뒷전으로 물린 채 증오와 분노를 조장하고 편을 가름으로써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적 이해를 편드는 것은 사회교리와 거리가 멉니다. 사회교리는 다른 이들의 역경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데 필요한 첫 번째 척도는 타인의 굶주림과 아픔을 함께하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어느 집단에, 어느 정치인에게 유리한 일인가를 따지는 것과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일인 것입니다.

 

[월간빛, 2022년 6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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