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18 ㅣ No.712

문종원 신부의 생태칼럼 (1)



이번호부터 ‘문종원 신부의 생태 칼럼’을 연재합니다. 서울 낙성대동본당 주임인 문 신부는 미국 로욜라대학에서 사목학과 사목상담, 영적 지도를 공부했으며, 영적 성장을 위한 감성 수련, 영적 지도, 생태 심리학 등과 관련된 내용을 연구, 강의하고 있습니다.


생태학적 위기와 기회

지난 200년에 걸쳐 산업 문명은 지구의 공기, 토양, 바다, 화학 작용, 물의 순환, 그리고 열 균형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가차 없이 훼손시켰다. 생태학적 위기는 경제적, 인종 간의, 계층 간의 갈등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결합되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서로 뒤얽혀 있어 얼핏 보아선 알 수 없는 이러한 재앙은 개개인의 발달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친다. 서구화된 사회에서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참된 성인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진정한 노인도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의 정신적인 성숙은 정지 상태이거나 고착되어 버렸다. 따라서 인류 초기의 자연과의 원천적인 친밀감이나 개개인의 독특한 특성, 곧 혼(soul)과 멀어진 채 우리 삶은 아주 멀리 표류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를 주시해야 하는지 안다면 우리는 이러한 위기로 인해 야기된 중요한 기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생태적, 정치적,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교육적이고 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지구에서 행해지는 인간 활동의 모든 측면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편, 급박하고도 거대하게 일어나고 있는 쇄신에 대한 인류 공동체의 갈망도 목격하고 있다. 인간과 지구와의 생존 가능한 동반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다.


지구와 동반 관계를 위한 세 가지 전제

첫째, 개개인이 더욱 성숙해야 한다. 성숙한 인간 사회는 더욱 성숙한 개개인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숙해야 아이들을 기르고 청소년을 지원하며,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인간 문화를 만들 수 있다.
 
둘째, 우리는 자연(인간의 더 깊은 특성, 혼)은 항상 인간의 성숙을 위해 최상의 원형을 제공해 왔고 여전히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가장 현명하고 믿을 만한 안내자이며, 이 안내자는 삶의 단계를 거쳐 온전해지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 안내자는 현재의 자아(ego) 중심적인 사회(물질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계급화된 사회이며, 폭력을 일으키기 쉽고, 지속하기 어려운 사회)가 아닌 혼 중심적인 사회(상상력이 풍부하고 생태 중심적이며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정의롭고 자비로운 그리고 지속될 수 있는 사회)로 진보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셋째, 모든 인간은 야생세계와 독특하고 신비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성숙이라는 것을 단순히 힘든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나 실질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것과 관련해서만 생각하지만, 참된 성인은 초월적인 경험과 신비롭고 성숙한 소명으로 구현된 경험에 근거를 둔다.


통합된 세계관

우리는 각 생명을 지구의 신성한 이야기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은 에워싼 환경이 우리와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광대한 우주적, 지질학적, 생물학적 존재의 일부라는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 몸과 시야를 열고 확대하여 우리가 더 큰 생명체의 일부임을 생각해 보자. 이 큰 생명체가 바로 지구다.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분리된 존재라는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고 제한된 시각은 지구 전체 생명의 조화를 무시하고, 인간이 마치 지구 생명 전체를 위협하는 암세포와 같은 비정상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 우리 인류가 직면한 상황과 인간 활동을 토마스 베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인간의 영광이 지구 황폐화를 초래했다.

2) 지구 황폐화는 인간의 운명이 되고 있다.

3) 전문영역이나 프로그램이나 제도나 기관 등에서 하는 모든 인간 활동은 인간과 지구와의 관계 증대를 목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지구의 한 표현이며, 인간의 안녕과 건강은 지구라는 생명 공동체의 건강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치유와 운명은 전적으로 땅과 공기와 물과 지구 생명체와의 관계에 달린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구에게 하는 것이 결국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이로운 우주의 일부분이다. 인간의 운명을 논할 때 이런 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9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2)



혼(Soul)을 잃어버린 현대 사회

현대 사회는 혼과 접촉하지 못하며 심리적이며 영적인 성숙, 또는 진정한 성인기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렸다. 대신에 우리 사회는 예상할 수 있는 안전, 거짓 정상(正常), 물질적 위로, 지루한 오락, 영원한 젊음에 대한 환상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우리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지도자들 대부분은 군사적 공격 행위나 자연 ‘자원들’의 통제와 착취로 이뤄진, 그리고 다른 종들, 다른 국가들, 부족들, 인종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미래 세대들의 필요를 무시하는 안보의식으로 이루어진 삶의 방식들을 주장하고 방어한다. 이러한 가치들은 우리의 더 깊은 인간 본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인간 역사에서 이러한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성숙한 인간 종들을 일으킬 수 있는 심리적ㆍ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필요하다. 자연에 기반을 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인기는 지구, 곧 우리를 낳고 유지시키는 더 큰 유기체와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발전한다. 자연과 혼과의 친밀한 관계를 무시하고 경멸하기까지 한 현대 문화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심리적이며 영적인 성숙을 이루는 것은 힘들지만 가능할 뿐 아니라 지금이 가장 절실하다.


인간 혼과 혼 기술

토마스 베리는 혼이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인 개념이며, 살아 있는 존재를 체계화하고, 유지하고, 안내하는 기본적인 원리라고 정의하면서, 혼 기술(Soul Craft)은 전 우주와 일치를 이루는 쪽으로 인간 혼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라고 말한다. 빌 플라킨은 혼의 기술은 야생 자연과 우리 혼의 심층 모두를 포함하는 정신과 세상을 다루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생태-심층 심리학이라고도 한다. 우주와 인간 혼은 서로를 통해서 자신들을 실현한다. 혼은 다양한 살아 있는 형태에 움직일 수 있고 재생할 수 있는 놀랄만한 힘을 제공하지만, 무엇보다도 감각과 감정에 더 놀랄만한 힘을 제공한다.

모든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혼은 목초지에 꽃들을 피우게 할 수 있다. 혼은 모든 종류의 살아 있는 형태, 새, 물고기, 그리고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이 대륙들을 횡단하며 심연의 어두운 바다에서 이리저리 수천 마일을 이동하는 여행을 통해 그들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전 우주는 혼의 신비로운 힘에 의해서 방대하게 짜여진 패턴을 통해 형성되고 유지된다. 자연 세계는 단순히 과학적 측정법에 의해서 알 수 있는 단순히 기계론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 이전의 서구 세계의 혼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것이었다.

인간은 그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살아 있는 다른 존재들과는 다르며, 그것에 의해 영적인 존재들과 관련된 지성적이고 윤리적인 능력들을 혼에게 제공한다. 빌 플라킨은 인간 이외의 세계에서 혼의 존재가 거부되면, 인간 세계에서 혼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게 된다고 경고한다.

19세기 동안 그리고 20세기에 산업 문명 이래로 혼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 이후에, 심리적인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혼의 존재 없이는 어떤 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연 세계의 혼에 대한 수용은 융(Jung)의 연구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는 지구의 생명력 있는 힘을 지닌 완전한 존재로 인간 혼을 회복시킬 필요성을 이해했다.


우주와 인간과의 친교

토착 민족들은 전체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생명력 있는 힘들과의 전례적인 친교를 통해서 그들이 야생에서 직면했던 도전들을 다루는 데 필요한 내면의 힘을 얻었다. 전 자연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힘은 그들이 사냥하도록, 계절에 따른 더위와 추위를 견디도록, 적을 대항하도록 안내하고 지원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다. 음식과 은신처에 대한 불안이 있었고, 병과 죽음이 있었지만, 우주의 힘으로부터 지원이 있는 한, 이러한 것들은 받아들여지고 창조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그것들이 의미 있게 해석될 때, 고통과 죽음은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16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3)



혼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림

혼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우리 존재를 폄하시켰다. 산업상 성취들은 우리를 의미 없는 세계, 곧 순수하지 못하고 해를 끼치는 세계로 인도한다. 모든 발명도, 의학적인 방식들도 우리의 깊은 불안을 막아주지 못한다. 엄청난 군비도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에서 생명이나 안전에 대한 최소한의 위협만으로도 두려움에 떤다. 우리는 다른 인간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자연 세계에 대해 더 강한 통제를 함으로써 우리를 보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적당하다고 한 안전장치가 늘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전과는 달리 우리는 우리가 남용해온 환경, 물, 흙, 그리고 다양한 삶의 형태들과 같은 자연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위협을 받는다. 자연 세계와 어떻게 관계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인간 세계와의 관계에 관해서도 모른다.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의학적인 절차들을 뛰어넘는 치유를 요청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개인적인 또는 공동체의 위기 시기에 우리를 안내해 줄 수 있는 숙련된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우주와 친밀한 관계

초기의 문화에서 우주는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자연 자원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친하게 교제하고 지시를 받는 실재로 경험되었다. 바람, 산, 솟구쳐 날아오르는 새, 숲 속을 돌아다니는 야생 생물, 어두운 밤에 하늘을 수놓는 별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이 전에 알았던 가장 깊은 경험들을 전달하고 있다. 존재의 가장 큰 공동체에서 우리의 장소를 경축하는 동안 우리는 인간의 내면의 삶, 기쁨 그리고 환희를 경험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신체적인 그리고 영적인 자양분 모두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의존한다. 이 모든 것이 혼의 세계로 인식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간 존재의 더 큰 맥락은 돌보는 세상이었다. 세상은 음식과 은신처 그리고 병든 시기에 치유를 제공했다. 경제적인 필요들을 뛰어넘어 자연 세계는 자신의 모든 경이로움을 통해 노래와 춤 그리고 시에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이전의 세계 모든 곳에서 원시 시기에서 뿐만이 아니라 초기 고대 문명에서 인간사들을 더 큰 우주에 관련지어 설명한 방식이 우세했다. 삶은 사는 보람이 있었다. 헨리 프랭크 포트(Henri Frankfort)가 그의 연구 「Before Philosophy」(철학 이전)에서 말한 것처럼, 전 세계는 ‘그것’으로서가 아니라 ‘너’로 소개되었다. 포괄적인 범위에서 삶은 의미 있고 충족시키는 경험이었다.


우리의 안전과 위로는 봉사를 통해 온다

삶의 실현은 경제적 발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안전과 위로는 창조적이며 혼이 일으키는 삶을 위한 기반인 봉사를 통해 온다. 우리 각자는 세상에 독특한 선물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 세상은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성인들에 의한 사회적인 변화를 몹시 필요로 한다. 제임스 힐만(James Hillman)이 말한 것처럼 세상 그 자체가 인간 혼의 부흥을 또는 지구 크기의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가 밝아 온다

우리가 우주에 관해서 더 많은 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는 이전의 사람들이 가졌던 것보다 우주와 덜 친밀하다. 산업화된 세계는 꽃이 피는 목초지, 하늘에 닿을 듯한 숲, 흐르는 시내, 숲과 벌판의 야생 생물을 지닌 사랑스러운 행성을 찌꺼기만 남을 때까지 개발하려고 한다.

토마스 베리는 지금, 21세기에, 우리는 산업 사회는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20세기를 지나 지금 살고 있는 우리는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음을 믿는다. 산업-영리적인 세계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지금 21세기에 우리는 우리 지구의 쇄신을 시작했다. 산업 시대는 그의 파괴적인 길을 계속 가겠지만, 새로운 창조적인 힘들이 인간과 자연 세계가 서로 더 친밀함을 나누는 미래를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더 깊은 의미, 그리고 우리가 거대한 우주적인 전례에 참여를 통해 필요한 정신적인 지원을 발견할 것이다. 새벽의 상쾌함, 저녁의 치유하는 고요함을 통해, 새들이 노래하는 봄의 시기, 여름의 소나기, 가을의 원숙함, 그리고 겨울의 정적을 통해 필요한 정신적인 지원을 발견할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23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4)



우리에게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참으로 우리는 신비롭고 멋진 존재다.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한 위대한 선물을 지니고 있다. 때때로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느낄지라도, 우리는 의미 있는 삶, 신비의 삶, 가장 위대한 성취와 봉사의 삶을 살 자격이 충분히 있다. 이러한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직업을 그만둬야 하는 것도, 집을 팔아야 하는 것도, 야채만 먹는 방식을 배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길이 길고 어려운 만큼 기쁘고 감사하며 여정을 떠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위대한 갈망 두 가지

우리는 우리 개인의 삶의 비밀과 신비를 알고자,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는 독특한 방식을 발견하고자, 우리가 태어나면서 우리 공동체에 가져다줄, 전에 결코 보지 못한 보석을 캐내고자 갈망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보물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갈망의 절반에 해당한다. 다른 절반은 우주와 모든 피조물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영적 갈망을 이해하고 통합해야 한다. 첫 번째는 각자의 개인적인 의미와 삶에 기여하는 방식에 대한 갈망, 세상의 한복판으로, 곧 야생의 자연으로,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들의 어두운 땅으로 나아가려는 갈망을 말한다.

우리의 가장 큰 갈망과 함께, 우리가 찾고 발견하는 데서 오는 엄청난 공포가 있다. 이로 인해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들을 거부하게 되면, 너무 작은 삶 안에 우리 자신을 가두게 된다. 우리 내면의 깊은 목소리는 전에 결코 보지 못한 보물은 어떤 어려움과 희생을 치르고라도 되찾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우리 혼(soul)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미지의 세계로, 우리 자신의 어둠의 깊은 곳으로, 많은 위험이 있고 불확실한 멀리 떨어진 밖의 세계로 여행해야 한다. 그것은 혼의 어두운 신비로 내려가는 여정이다. 이것은 시인 릴케가 쓴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가벼움이 아니라 무거움을 신뢰하도록 요청한다. “사물들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떨어지라고, 우리의 무거움을 인내로이 신뢰하라고. 새조차도 날기 전에 그렇게 해야 했다.”


혼을 향해 아래쪽으로

사람들은 태초로부터 혼을 향해 아래쪽으로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의 신화에서, 우리는 지하 세계(underworld, 의식의 초월적 상황과 혼과 관련된 심층, 어둠, 잠재의식, 상처, 꿈, 미지의 또는 알려지지 않은 그림자, 의식의 자아가 깊어지고 성숙하는 영역)로 내려가는 영웅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발견한다.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페르세포네, 베오울프, 수메르인 이난나의 신화 등등이 이러한 하강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아프리카의 누비아는 아주 위험한 장소인 강바닥으로 내려가는데, 큰 선물을 가지고 마을로 돌아온다. 수많은 문화 안에서 그것들은 우리가 가장 깊은 수준에서 우리 자신을 치유해서 충만하고 진정한 성인기에 도달하려면 우리 각자가 하강의 여정을 떠나야 한다는 것과 지하 세계에 그다지 친근하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강력하고 위험한 존재들이 있다는 것과,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화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화학자 캠펠(Campell)은 전 세계 신화를 통하여 하강 여정의 기초가 되는 보편적인 양식들과 주제들을 상세하게 알아낸다. 신화의 영웅들은 일상의 자기(나 또는 자아, ego)에 해당한다. 지하세계의 모험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신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곧 집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평범한 세계와 역할들 그리고 내가 아는 친숙한 방식들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지하 세계에서 통로를 감시하는 악마(당신 자신의 무의식의 그림자, Unconscious Shadow 요소)를 만난다. 이것이 첫 번째 시험이다. 그다음 “낯설지만 이상하게 친근한 힘의 세계”를 통과하는 여행을 한다.


세상을 구제하는 것

이 통과 여정을 거치고 나면, 우리 의식의 자아(ego)와 혼 사이의 일치, 거룩한 존재에 의해서 승인된 혼의 지식, 성스러운 힘의 전달자로서의 자기(Self)의 경험, 또는 보물이나 은혜의 발견 등이 따라온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것은 세상을 구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온전히 속하려는 시도이다. 세상 구제는 세상을 구제하려는 노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기 전에 우리 자신이 세상에 제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 가져다줄 나의 독특한 선물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큰 기회이며 도전이다. 이 선물을 제공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봉사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중요한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30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5)



인류는 21세기 지구 공동체에서 삶을 향상시킬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실패한다면 인류는 상당수 줄어들 것이다. 아울러 이미 근래에 많은 종(種)이 사라진 것 이상으로 종으로서의 잠재력을 잃어버릴 것이며 나아가 수천 수백만의 또 다른 종들도 멸망시킬 것이다.


산업 성장 사회 대 친환경 사회

인류는 생명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인간의 독특한 잠재력, 곧 지구 스스로가 꿈꾸는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을 따를 수도 있다. 생태철학자 조안나 메시(Joanna Macy)는 자아 중심적인 ‘산업 성장 사회’에서 혼(soul) 중심의 ‘친환경 사회’로의 전환을 “위대한 전환”이라 부른다. 경제학자 데이빗 코턴(David Korten) 역시 그의 저서 「위대한 전환」을 통해 “제국(帝國)에서 지구 공동체로의” 전환을 역설했다. 문화 역사학자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친환경에 필요한 이러한 노력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업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대변혁에 기여하는 것은 모든 이의 특권이며 책임이다.


대변혁의 사례들

변혁의 과정은 이미 세계 도처의 수많은 생태 중심적인 사람들과 공동체의 창조적인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빌 플라킨(Bill Plotkin)은 위대한 과업이 기술, 과학, 예술, 경제, 교육, 정부 그리고 종교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영역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지역 특성을 반영한 청결하고 안전하며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눈부신 발달(풍력, 수력, 태양 에너지와 생물 연료까지)과 에너지 보존 방식에 대한 혁신이 있다. 또한 이른바 ‘트리플 바텀 라인’(TBL, triple bottom line, 경제적 성과만이 아니라 환경적 성과와 사회적 공헌까지도 함께 고려하는 것)에 기여하는 경제나 식량 체계도 친환경적인 노력의 예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최우선으로 두는 ‘생태 읽기’(ecoliteracy, 생태계가 생명의 그물망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진화해온 조직 원리)에 기초한 초·중등 교육 과정이나, 또는 측량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와 친근한 관계를 맺으려는 강한 갈망도 예로 들 수 있다. 대중성을 띤 환경운동의 급증과 그것이 지닌 동력, 지구환경선언(모든 종(種)들과 환경의 상호의존성을 천명한 국제 선언, ‘리우환경선언’이라고도 한다)을 채택하는 나라의 증가, 인간이 아닌 것에도 기본 권리를 부여하는 새로운 법의 출현도 친환경적 흐름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기술대 대 생태대

세계 곳곳에서 많은 것들이 이해관계를 넘어 솔선해서 추진되고 있다. 우리가 이 위대한 변혁을 성공시킨다면, 이 세기는 미래 지구가 신생대 시대(공룡 시대를 끝낸 대멸종이 시작되던 지금으로부터 약 6500만 년 된)에서 토마스 베리가 “생태대”(Ecozoic era)라고 부르는 것으로 전환될 것이다.

토마스 베리는 우리에게 두 가지 가능성을 제안한다. 첫째, 기술대(technozoic era)의 도래이다. 기술대란 인류의 단기 이득을 위해 자연을 극도로 통제하고 이용하는 시대를 대표하는 표현이다. 인류를 위한, 그리고 지구를 위한 다른 가능성은 “생태대”의 도래다. 이 길만이 인류와 지구를 위한 유일한 선택이라고 토마스 베리는 강조한다. 생태대의 가장 중요한 관점은 자연과 지구를 더 큰 우리의 몸으로 인식하는 심오하고 폭넓은 차원의 몸적인 깨달음이다. 이곳에서 모든 생명 종은 그들의 서식처가 보호되어야 하며 각각의 종이 마음껏 자기표현을 하도록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토마스 베리는 이 깨달음을 “현재의 은총”이라 표현한다. 생태대에 진정한 삶의 가치는 자신과 서로에게 진실하고 정직하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요 몸이자 운명인 지구라는 생명체에 진실하게 자신을 열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깨어 있는 당신과 나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달려 있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6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6)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수 세기 동안 인간 발달의 초기 세 단계, 곧 유년기, 아동기, 그리고 초기 청소년기에 요청되는 자연 과업(집 밖의 세계에 몰입하는 체험을 함으로써 자연 세계의 매력을 배우고, 자연과 동조(同調)하는 일)을 최소화하거나 완전히 무시해 왔다. 균형을 잃고 자연에 역행하는 청소년기 세계는 정신병리 현상을 드러낸다. 곧, 물질주의적이고 탐욕적이며 적대심과 지나친 경쟁,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또한 인종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고령자 차별과 같은 다양한 문화적 병리 현상들을 낳고 있다.

오늘날 산업화된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청소년기의 병리 증상은 자아 중심주의로 인해 생긴 것이다. 수십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가난으로 인해 비참하게 살고 있다 해도, 과시적인 소비에 물든 청소년기적 정신 병리 문제를 지니는 수십억 명이 있는 한, 청소년기의 병리적 야망을 지닌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대다수의 투표자들이 있는 한, 또는 우리가 산업 성장 사회에 대한 모든 대안들을 억누르는 정치 체제에서 살고 있는 한, 자연 과업을 통한 인간성숙은 어렵다. 이로 인해 청소년기에 자연과 동조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더 이상 성숙하지 못하게 되었다. 산업사회는 자연 차원의 인간 발달을 억압함으로써 소비주의를 만연시키고 혼을 억압하는 직업을 만들었다. 또 참으로 미성숙한 시민을 낳았다.


인간 본성을 무시하는 사회적 태도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는 사회적 태도는 인간의 성숙에 큰 장애가 되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 비극에로 우리를 이끈다. 생명력 있는 개성화와 혼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인류를 발전시키고 존속시키는 자연 세계로부터 점차 소외되게 된다. 혼은 뉴에이지의 영적 환상이나 선교사의 전리품으로 치부되고 자연은 기껏해야 우편엽서나 휴양지, 아니면 하드웨어의 쓰레기 더미로 취급받고 있다. 많은 사람이 자연세계를 자신의 혼과 일치시키지 못하여 그 결과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손상을 입히고 있다.


위대한 전환

아직 늦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인간 발달의 각 단계에서 자연 과업을 이해하고, 산업사회에서 얻어낸 것보다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문화 과업을 이루어야 한다. 이 두 가지 과제를 충실히 이행할 때 아름다운 지구와 약동하는 우주에서 우리의 자격을 되찾을 수 있고, 개인으로서 그리고 사회 조직원으로서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성숙한 성인이, 마침내 진정한 노인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생명을 유지하는 21세기를 만들 수 있다.

요안나 메시(Joanna Macy) 몰리 영 브라운(Molly Young Brown)은 ‘위대한 전환’이란 세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첫째, 지구와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의 훼손을 줄이기 위한 행동을 지속하는 것이다. 불매운동, 봉쇄, 고발, 항의, 그리고 시민 불복종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을 포함해서 지구 생명 체계의 파괴를 늦출 수 있는 진보적인 입법과 규정, 정치적 행동과 소송 및 캠페인에 이르기까지 지구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둘째, 구조적인 원인 분석과 대안적인 제도 장치를 창출하는 일이다. 산업사회가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얼마나 유혹적이며 파괴적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역동성을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경제, 정부, 식량과 에너지 체계 그리고 교육과 식(食)문화에 이르기까지 현 문화 체제 안에서 대안을 모색한다.

셋째, 세계관과 가치들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을 이루는 것이다. 앞에서 만들어진 대안적 제도들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산업사회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에 바탕을 둔 의식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슈퍼맨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온전한 인간이란 살아 숨 쉬는 혼과 살아있는 야생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가정이나 농장, 교실과 같은 그들의 소박한 일터에서든, 아니면 큰 무대에서 공적인 일을 하든 상관없이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진정한 예술가요 지도자며,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세계의 시민으로 성숙해야 하며 우리의 정체성과 핵심 가치를 그에 상응하도록 점차 개선해 나가야 한다. 미래형 인간을 낳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13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7)



현대 사회의 정신 병리 현상들

현대 사회에서는 성숙한 성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이가 청소년기의 다양한 정신 병리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불안한 사회에 대한 무력함, 정체성의 혼돈, 극도로 낮은 자존감, 사회성 부재, 자기도취, 끊임없는 탐욕, 도덕성 발달의 정지, 빈번하게 일어나는 신체적 폭력, 유물론적 강박 관념, 소통 부재, 물질 중독, 그리고 정서적 무감각 등과 같은 정신적 문제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과 유명인들에게서 이러한 정신 병리들을 아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이미지 보존, 재선 가능성에 대한 집착, 권력ㆍ부ㆍ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정치인, 알코올ㆍ약물 중독과 섭식장애 그리고 성형외과 수술로 스스로를 죽이면서 우상시 되는 소위 스타들, 탐욕과 권력집착으로 전례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든 산업 수장들이 그 예다. 산업 성장 사회의 정부, 협회, 학교, 그리고 종교 기관의 지도자들을 살펴보면, 그들 중 많은 이가 자신과 자신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연 환경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심리적 청소년기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사람들은 초기 청소년기에 꿈꾸었던 영웅주의적 모험을 열망하며 삶을 보낸다. 예를 들어, 최고의 경기장, 가장 빠른 차,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좋은 침대, 특정 계급의 은밀한 회의실 등과 같은 것들을 소망한다. 또한 여성들은 청소년기 영웅의 전형이 되는 남자에게 정착하기를 희망하거나, 남자에 상응하는 여성 영웅이 되기를 희망한다.

원숙한 지도자들이 얼마 안 되는 우리의 공동체는 문화의 황무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대상(隊商)과 같다. 우리는 방향을 잃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잊어버렸다. 언젠가 신(神)이나 마법의 심부름꾼이 우리를 구해주러 오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서구화된 사회는 성(性)적 성숙, 사회적 독립, 진정한 개인의 실현, 혼의 발견을 위해 또는 인간 세계보다 큰 자연과의 평생의 상호관계를 위해 젊은이를 어떻게 준비시킬 것인지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몇 세기 전에 생명력을 빼앗긴 전통적 통과의례들은 죽은 혼의 버려진 껍질처럼 되었을 뿐이다. 그 결과, 우리는 십대들과 어린이들에게서 문화 병리 현상의 가장 걱정스러운 징조를 볼 수 있다. 약물에 중독되고, 폭력을 일삼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를 꾸미고, 감옥에 수감되고, 심각한 정신장애로 진단받아 정신에 변화를 주고 감정을 마비시키는 약물을 일상적으로 처방받는 십대들의 비율이 계속 늘어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믿을 수 없겠지만, 사춘기 이전의 어린이들에게서조차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병리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성범죄, 약물 중독, 살인, 조직 폭력에 개입된 아이들이 그렇다. 이는 병리-청소년기 사회가 보여주는 가장 걱정스러운 퇴폐적 종착 단계의 증상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동기에서조차 그 시기의 온전함을 보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건강한 아동기는 자연과 가족 안에 뿌리를 내리지만, 현대 세계의 많은 어린이는 자연과 가족 모두로부터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진실로 여왕답고 성숙한 여성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훈련과 의식(儀式)을 잃어버린 우리는, 대신에 어린아이 때부터 그릇된 미의 경연 대회를 치르게 하고 있다.


청소년기의 위기와 기회

그러나 청소년기 자체가 문제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청소년기(건강한 청소년기)는 개인 발달과 인간 혁명 둘 다를 위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 시기의 청소년에게는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주어진다. 청소년기의 위기와 우리 문화의 위기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난국의 두 얼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에서 기회를 잡는 것은 다른 하나를 위한 기회에도 자극을 준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모험을 통해 청소년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는지, 자신이 세상에 줄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 자신의 마음에 어떤 거룩한 특성이 살아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고 또 속해 있는 고유하고 독특한 길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사람들이 청소년기가 안고 있는 이러한 고유한 특성(전망과 잠재력)을 받아들인다면, 현대 문화는 다시 친환경적이 될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20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8)



건강한 사회

건강한 사회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환경친화적이고 정의로우며 인정이 많다. 지구 공동체의 통합적 요소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환경친화적이며, 시민들을 포함해 모든 피조물에게 유익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기회와 유익함을 주기 때문에 정의로우며, 다른 모든 사회와 더 큰 생명 공동체에 자신이 가진 바를 나누기 때문에 인정이 많다. 건강한 사회는 다른 민족이나 종을 착취하지 않으며, 인간의 감각과 몸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고 경축하며, 정신과 자연의 신비로움을 상상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북돋운다.


지구의 꿈

인간 생태학자 폴 셰퍼드(Paul Shepard)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관찰해 온 바로는, 환경 위기가 초래된 것은 특별히 산업화된 국가의 힘 있는 사람들(주로 부유한 남자들) 가운데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우리의 방식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아이들을 인정 많고, 자연을 존중하고, 비전을 갖고, 자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성인으로 기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지만 이러한 성인들이 때가 되어 인간 공동체보다 더 큰 혼을 돌보는 마음과 정신 능력을 가진 참된 노인들이 될 수 있을까?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현대 사회 어디에서나 진행되고 있는 산업 발전, 무제한적인 성장, 그리고 소비사회로 지나치게 몰입하는 현상을 두고 “인류 역사에 있어 최고의 병리”라고 일컬으며, 이러한 병리를 치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산업 문명으로 인해 현대 사회의 문화는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깊이 있는 문화 치료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간 의식은 지구 변천 과정에서 드러나는 장엄함과 성스러움에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우리 인간은 지구의 꿈에 참여하게 된다. ‘지구의 꿈’은, 인간이 꾸는 꿈의 대상으로서의 지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지구 자체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토록 풍부하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지구의 고유한 능력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다. 그 아름다움은 인간의 의식을 압도하는 까닭에 지구는 스스로 꿈꾸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꿈을 스스로 드러낸다. 우리는 무한한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동시에 장구한 시간에 걸쳐 변화를 거듭하여 온 우주 자체의 원초적이며 근원적인 꿈에 동참해야 한다. 토마스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문화 치료는 지구의 꿈에 대한 각성이나 환시의 경험으로부터 온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각성이 개인을 지구의 꿈에 동참하는 여정으로 초대한다.


우리의 협력

사르댕(Teilhard de Chardin)에 의하면 우주와 은하들과 태양계, 그리고 지구는 그 맨 처음 순간부터 물질이 한데 모여 생겨나기 시작했다. 즉 ‘시원의 원자’에 있어서 최초의 에너지로부터 지구라는 행성, 그리고 그 위에 생명의 탄생과 마지막 인간 의식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극적인 변화를 통해 전개되어 온 것이다. 토마스 베리는 우주 진화의 위대한 변화를 “은총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이는 “미래가 지속되는 패턴을 통해 규정되는” “특권의 순간”이다. 우리의 태양계를 탄생시킨 초신성이 그러한 은총의 순간 중 하나다. 자기-의식에 눈을 뜬 영장류인 인간의 출현 또한 이러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창조적이고 신비스러운 우주를 상상했으며, 이 순간은 우주 그 자체를 가장 심오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중대한 시기를 은총의 순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비상한 전환점들 각각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가 된다. 토마스는 “대변동의 순간들은 또한 창조의 순간들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행성으로서 또 다른 위기의 순간을 맞고 있으며, 토마스가 말한 “의식 안에서의 포괄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이는 가장 위험하면서도 독특한 기회이다. 우주가 위기의 순간을 통해 진화하는 것처럼 인류 개개인도 그러하다. 우주의 이야기 안에서 전환이 일어난다면, 이전과는 달리 사려 깊은 협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개인과 공동체, 전 세계의 국가 간의 협력뿐만 아니라 상상하는 인간의 개념과 같은 집단적으로 활성화된 인간의 상상력과 유사한 더 거대한 것을 요구한다. 개인의 정신과 지구 꿈의 심층을 통해 이 새로운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 그런 후에 협력하는 공동체라는 거대한 그물망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27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9)



정신-생태적 지위(Psycho-Ecological Niche)

문화 인류학자이자 생물학자이며 생태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 주장하듯이, 정신은 자연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다. 또한 현대의 많은 심층 심리학자들이 자연은 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브라이언 스윔(Brian Swimme)과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모든 사람과 사물은 세상에서 독특한 장소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물 자체가 바로 독특한 장소나 공간이라고 말한다. 빌 플롯킨(Bill Plotkin)은 혼이 세상에서의 궁극적인 장소라고 말한다. 여기서 장소라고 칭한 것은 지형적인 장소가 아니라 사물이 다른 사물과 관계하는 역할과 기능, 지위 상태를 의미한다. “일어나는 모든 것” 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모든 사물과의 관계에 의존한다. 곧, 모든 것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 토마스 베리는 이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한다. “어떤 것도 다른 것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보편성은 거대한 그물망과 같으며,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그물망 안에서 마디들(장소들)로 이해된다. 어떤 두 가지 사물들 사이에 관계가 변할 때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독특한 장소를 가진다. 어떤 사물의 ‘궁극적인 장소’는 사물의 가장 중요한 도식 안에 있는 그의 장소이며, 세상이나 우주 안에서 가장 본질적인 장소이다. 혼은 포괄적이고 핵심적인 사물과 일치하는 장소이며, 사물의 가장 참된 장소이다.


생태 중심적 혼 중심 사회

혼 중심 사회는 필연적으로 생태 중심적이다. 혼 중심 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궁극적 장소를 발견하고 거주하도록 지원하는데, 이는 자연에 의해 부여받고 드러나는 자신의 장소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회는 자연 세계에 직접 뿌리를 내린다. 지구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소속되는 첫 번째 장소다. 혼 중심적인 사람은 의식적으로 지구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경험하기에 자연스럽게 다른 모든 것과의 상호 연관성을 알게 된다.

혼 중심 사회의 인간 발달 단계는 아이를 키우는 관습, 핵심 가치, 성장 단계, 통과 의례, 공동체 조직, 그리고 지구 공동체보다 더 큰 세계와의 관계를 포함한다. 혼 중심적인 삶의 초기 세 단계, 곧 유년기, 아동기, 그리고 초기 청소년기에서는 자신, 다른 사람들, 문화, 그리고 자연과 건강한 교류를 할 수 있는 자아의 발달에 초점을 맞춘다. 그다음 후기 청소년기, 초기 성인기, 그리고 후기 성인기인 세 단계에서는 혼의 발견과 실현에 초점을 맞춘다. 노년기에 이르면 지구와 인간관계의 통합, 곧 인간 공동체보다 더 큰 혼에 초점을 맞춘다.

혼에 입문한 성인들은 그들의 혼에 봉사함으로써 자연과 문화 모두에 봉사한다. 문화를 생태 중심적이라고 하는 것은 관습, 전통, 실제들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근본적으로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는 인식에 뿌리를 둔다고 할 수 있다. 생태 중심적인 사회에서 개인은 세상을 관계라는 유기적인 그물망으로 이해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진화하는 그물망에 통합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인지한다. 그러한 사회 안에서 모든 사람은 개체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 힘입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칭송받으며 유지된다.

현대 사회에서 혼 중심적인 사람이란 삶의 목적이 명확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 자기 민족을 위해 그들이 가진 보물을 명확하게 알고 조건 없이 내어 주는 사람이다. 진실로 자기 민족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 매일의 삶에서 자신의 혼 작업에 기쁘게 몰두하는 사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생명력 있고 아름다운 장소로 만들려는 노력을 통해 깊은 만족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자신들이 자연 세계에서 상호 의존적인 일원임을 깊고 풍요롭게 경험한 사람이 혼 중심적인 사람이다.

이러한 것들이 혼에 입문한 사람, 곧 진정한 성인의 명백한 징표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런 풍요로운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1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10)



원과 자연 주기

융(Jung)과 그의 동료들은 원이란 온전함, 무결함, 완전함, 전체성의 보편적 원형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야페(Jaffe)는 원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정신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원의 표상이 원시의 태양 숭배, 신화나 꿈, 티베트의 수도승이 그린 만다라, 도시의 평면도, 초기 천문학자들의 천체 개념 등 그 어디에 나타나든, 그것은 항상 삶의 가장 중요한 측면, 곧 궁극적인 온전함을 의미한다. 블랙 엘크(Black Elk)는 말한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도 둥글고, 모든 별도 그러하다. 바람은 빙빙 돈다. 새들은 둥지를 원으로 만든다. 태양은 원을 그리며, 달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계절의 변화도 큰 원을 그리며 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인간의 삶은 아동기에서 시작해 아동기로 돌아오는 원이며, 그래서 힘이 움직이는 모든 것 안에 원이 있다.”

정방형의 원은 그리스도교 전통을 비롯한 서구 전통에서도 등장한다. 야페는 유럽의 거대한 성당의 장미 문양의 창문들, 성화에 나오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후광, 네 명의 복음사가들에게 둘러싸인 그리스도 등을 유사한 예로 제시한다.


계절 주기와 인간 발달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다. 긴 밤이 지나 빛을 선사하는 동쪽은 주로 시작, 원천, 탄생을, 식물의 성장 주기에서는 씨앗을 의미한다. 계절로는 봄이다. 새벽은 밤의 끝,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에 계몽과 깨달음과 연결되며, 그 결과 영과도 연결된다. 우리의 지각과 이해, 특히 유머와 무죄함, 지혜, 그리고 지각을 확장한다.

남쪽은 가장 따뜻하고 밝은, 한낮의 정점에 태양이 있는 장소다. 일 년 내내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식물과 동물의 개화와 성장과 연결된다. 계절로는 여름이다. 또한 인간 영역에 있어 남쪽은 결혼 적령기로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고 개화하는 장소이다. 남쪽은 성장하는 아이의 장난기, 자율성, 희열, 경이감뿐만 아니라 아이의 감정과 언약함과도 짝을 이룬다. 몇몇 심리치료사들은 남쪽이 “내면의 아이”의 장소라고 말한다. 태양의 따뜻함이나 편안함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남쪽은 신체적, 심리적 치유와 협력하며, 인간 마음의 따뜻함과 정서적 유대감을 나타낸다.

서쪽은 빛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며 하루의 끝을 건네준다. 가끔 무서운 느낌을 주지만 때로는 넋을 빼놓거나 황홀감에 젖게 만든다. 때로는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며,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데리고 간다. 계절은 가을이며, 수확의 시작이며 땅의 열매를 걷어 들이는 시기이다. 인간 발달 역시도 이와 같다. 신비와 그림자 영역, 곧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에 모호하고, 어둠으로 인해 두렵고, 무서운 것들로 인해 위험하다. 종종 신비, 심원, 비밀과 짝을 이루며, 정신의 감추어진 면, 곧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상상, 꿈, 환시를 떠올리게 한다.

북쪽은 함축적으로 태양이 지고 사라진 후에 가는 곳, 춥고 짙은 어두움, 고요의 장소이다. 한밤중과 짝을 이룬다. 겨울이 언제나 그렇듯이 고난의 장소이지만, 오히려 고난은 친근하고 익숙해질 수 있다. 위험과 도전이 있는 어둠에 적응해 왔고 능숙하게 조절하는 방식을 찾아왔다. 북쪽은 추위와 어둠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지식, 기술, 인내, 그리고 용기를 받아들이며, 인간의 돌보는 능력과 지성적 사고와 짝을 이룬다. 또한 봉사와 관련이 있으며 생식력을 가진 성인의 장소이다.


순환

한 바퀴를 돌아서 동쪽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하루의 끝, 계절 주기의 끝, 인생의 끝에 있게 된다. 그리고 끝은 다시 시작점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삶의 끝에서 우리가 왔던 곳이지만, 보이지 않는 장소인 영으로 돌아간다. 동쪽은 우리의 탄생뿐 아니라 우리의 마지막이며, 육체적인 죽음과도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과 노년을 잇는다. 동과 서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동은 인식의 외향성이고 서는 내향성이다. 동은 빛이며 서는 그림자이다. 동은 시작이며 서는 끝이다. 동은 상승이며 서는 하강이다. 동은 영과 연결되며 서는 혼과 연결된다. 동-서는 순환의 초월적인 축이다. 남과 북 또한 양극의 관계를 가진다. 북은 생존이며 남은 성장이다. 북은 양육과 지도력이며 남은 아동기와 놀이이다. 북은 지식이며 습득한 기술이고, 남은 감정이며 자율성이다. 북은 봉사이며 남은 기쁨이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8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11)



뿌리 내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인

현대 산업사회의 자아 중심적인 문화처럼, 우리는 하느님, 자연,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더 깊은 자기(Self)와 분리된 채 살아가고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 중에서 매일 하나 이상의 종이 사라진다. 우리는 결코 땅을 밟을 수 없는 콘크리트 숲에 살기 위해서, 맨땅에 스스로를 뿌리내릴 수 있는 우리의 열대 우림을 파괴한다. 평균 3년마다 가족이 이사를 가서 우리의 가족들 역시 뿌리가 없다. 사회학자들은 친구들의 지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는 3년이 걸린다고 말한다.


우리는 소속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창조된 모든 것에 소속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 안에 선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선함을 알아챌 때, 그것은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 자신의 선함을 우리에게 반사한다. 모든 피조물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있기에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 시작할 수 있다.

실라(Sheila)는 「소속감(Belonging)」에서 소속감에 대한 체험을 이야기한다. “몹시 불안해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갔던 어린 시절에, 나는 숲속을 걷기 위해서 갔다. 나는 자주 나뭇잎, 풀잎 또는 작은 곤충을 보면서 숲속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혔다. 나는 앉아서 그것을 오랫동안 살펴보았고, 그러한 것들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람처럼, 풀잎이나 작은 곤충은 어떻게든 해서 자신을 드러냈다. 때때로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나를 반사하는 존재를 알아차렸고 나는 내면에서 연결된 느낌을 가졌다. 그 존재는 내가 얼마나 선한지를 알고 있었고, 나에게 내가 사랑받고 있고, 내가 소속되었다는 것을 말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실라(Sheila)처럼 바람, 풀잎 그리고 작은 곤충한테도 소속감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을 우리의 형제나 자매로 환영할 힘을 우리에게 준다. 모든 피조물은 우리에게 형제적 사랑을 나누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친인척” 관계로 삼을 수 있다.


경이로운 창조물들의 온기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변에 있는 동식물을 통해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창조물 안에서 선함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을 통해 그리고 자기 주변에 있는 풀잎과 작은 곤충들을 통해 응답하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존재의 이름은 바로 예수님이다. 그 존재를 깨달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성장한다면, 그들이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건 그러지 않건, 모든 사람 안에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현존을 느낀다. 그리스도교는 창조된 세상을 사랑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경이로운 창조물들의 온기”를 인지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고 실제로 거의 의식적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을 계시하려고 애쓰고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들이다.


하느님, 나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주와의 재결합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에 민감해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치유하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 역으로, 치유하시는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선함을 볼 수 있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나뭇잎들, 잔디들 그리고 작은 곤충들 안에서 선함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모든 피조물과 더 친근해질수록, 피조물의 선함에 감동 받을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의 선함에 의해 더 희열을 느낄수록, 그것들을 더 깊이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이 우리를 알고 우리 자신의 선함을 반영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주변의 피조물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조차도 소속되지 못한다. 반면에 피조물과 관계를 회복할 때 우리는 우리 안의 참된 자기, 다른 사람들, 하느님 그리고 우주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느님, 나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주와 재결합할 수 있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25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12)



자아 중심 문화

자아 중심적 문화는 일생 위로와 안전, 사회적 수용을 우선시한다. 자아 중심적인 문화는 고립적이고 경쟁적이다. 자아 중심적 문화 안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자연 세계 안에 있으나 그곳으로부터 분리된 채 살아간다. 또한 그들은 소속감도 없고 지구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도 없다.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개인 소유물, 직업, 몇 가지 즐거움, 자신의 몸, 그리고 소수의 지인과 사랑받는 사람들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자아 중심적 문화는 생태 중심적이라기보다 불가피하게 인류 중심적이다. 이러한 문화는 인간의 극단적인 배타주의, 곧 인간이 최고라는 믿음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이라는 아주 편협한 생각을 갖는다. 이것은 어떤 민족과 성, 계층, 국가에 기초하여 형성된다. 다른 종들과 모든 생명을 지지하는 환경에 파괴적인 영향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믿음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개인의 자아 중심주의(‘내가 세상의 중심이다’)는 인류 중심적인 사회를 낳는다. 이것은 발육이 정지된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문화 인류 중심주의는 세상은 우리 인간, 특히 내가 속한 계층, 성, 종교, 또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각 시민으로 하여금 사물과 타인을 이용하도록 부추긴다. 그것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소비자’로 생각한다. 자아 중심주의는 일정 연령이 지나면 일탈이나 정신병리(비정상적인 인격기능을 말하는 것으로, 행동, 사고, 의식면에서 이상 증상이 있는 것을 뜻하는 말) 현상을 유발한다.

자아 중심적 사회는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초기 청소년기의 가치가 사회 전반에서 우세하다. 곧 이 사회가 건강하지 않은 많은 자아들로 이루어진 자아 중심적인 사회라는 점이다. 자아 중심적 사회의 우선적 가치들은 안전, 안락, 쾌락,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 등이다. 자아중심적 사회에서 추구하는 안전이라는 것은 신체적이고 의학적인 안전도 포함하지만, 우선적으로 수용과 소속감에서 오는 사회적 안전이다. 물론 적정 수준의 안전과 경제적 위안 또는 친밀감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목표이자 최우선적인 것들이 될 때, 잃는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혼의 부재 가운데서 추구하는 안전, 안락, 쾌락은 기껏해야 부의 축적(중산층과 상류층을 향한)이다. 혼이 없는 부는 권력의 차이, 사회 경제적인 계층화, 소수민족, 여성, 아동, 가난한 사람들, 모든 자연 세계의 ‘자원’에 대한 착취와 같은 피할 수 없는 병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충분한 부를 소유한 행운아들에게 있어서 자아 중심적 가치와 부를 추구하는 것은 흔히 지루함, 중독, 소외, 무의미로 그들을 이끈다. 그리고 자율(‘자유’)이라는 현혹시키는 감각 역시 모든 사람을 막연한 두려움, 소외감, 그리고 상처 입기 쉬운 상태로 몰아간다.


자아 중심 문화와 혼 중심 문화

모든 건강한 문화와 그 문화에 사는 구성원들은 혼, 영, 그리고 자연과 협력한다. 그러나 자아 중심적 사회는 자신의 핵심에서 벗어나 그것 없이 살려고 애쓴다. 혼 중심 문화와 자아 중심 문화의 구별을 다른 차원에서 구분한 학자들이 있다. 메시(Macy)는 산업 성장 사회와 생명 친화적 사회를 대조한다. 아이슬러(Eisler)는 지배의 원리로 조직된 문화와 동반자의 원리로 조직된 문화를 구분한다. 동반자 모델이 “우주의 생명을 생성하고 성장시키는 힘”을 높이 받드는 반면에, 지배자 모델은 “파괴적인 총칼의 힘”을 찬양한다. 코턴(Korten)은 계층적으로 체계화된 사회를 “제국(帝國)”으로 지칭하고, 후자인 평등주의와 민주적으로 체계화된 사회를 “지구 공동체”로 지칭한다. 제국의 사고방식은 지배 계층의 물질적인 편향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죽음과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권력을 숭배하고, 여성을 폄하하고, 인간 성숙을 위한 잠재력 실현을 억압한다. 지구 공동체의 사고방식은 생명과 사랑이 가지는 생성의 힘을 존중하며, 여성과 남성의 본질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고, 인간 성숙을 위한 잠재력 실현을 촉진한다. 자아 중심주의는 산업 성장 사회가 탐욕스러워지고, 제국이 오만해지고, 사회의 지배자가 폭력적이게 되게 하는 원인이다. 혼 중심주의는 생명 친화적인 사회로, 봉사하는 지구 공동체로, 생명을 육성하는 협력 사회로 이끄는 동기가 된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1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13)



인류는 암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렸다. 물질주의, 경제 중심주의, 소비주의, 경쟁주의, 개인주의, 성장 지상주의의 영향 하에 있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것들에 중독되어 간다. 중독이 심할수록 사랑이 더 배고프게 되고 정신은 피폐해진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를 이용하는 상거래가 되고, 못자리인 야생 자연과의 관계는 탐욕과 착취로 얼룩져 간다. 인간은 공멸의 길로 치닫고 있다. 정신과 자연은 늘 우리에게 같이 살자고, 그렇지 않으면 다 죽는다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 인간은 귀를 막고, 그 경고의 소리를 없애기 위해서 정신과 자연을 죽이고 있다. 인간은 지구에서 암과 같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연은 중독자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잃어버렸고, 하늘과 땅을 잃어버렸다. 다른 말로, 영과 혼과 단절된 채 물질로 전락해 버렸다.

이 위기에 경고의 메시지는 절박하다. 만약 위기를 전환의 기회로 삼는다면 모두가 상생의 길을 가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지구의 건강하고 정상적인 모든 것을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영과 혼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를 다양한 방식으로(신체적, 감정적, 상호 관계적,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절박하게 초대하는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목소리는 두 가지 방향을 가리킨다. 한쪽은 영을 향하고, 다른 쪽은 혼을 향하는 것이다.


영성이란?

영성은 우리의 표면적인 삶의 평범한 세상을 뛰어넘는, 궁극적이고 핵심적인 실재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영성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 한 영역은 빛을 향해 위쪽으로 향한다. 이것은 내면의 고요, 평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의 온전함을 되찾도록 도움을 주며, 현재의 순간에 충분히 현존하는 지복의 경험과 모든 피조물과의 일치를 도모하도록 도움을 준다.

영성의 다른 영역은 혼에 관한 것이다. 이는 우리 개인의 자기의 어두운 중심을 향해 아래로 향하는 것이다. 이 하강의 여정은 데이비드 화이트(David Whyte)가 말한 것처럼,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세상에서 살도록 우리를 준비시키고, 우리가 확고하며 독특하게 우리의 입장을 어떻게 그리고 어느 곳에 두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하강의 여정을 통해, 우리 갈망의 중심을 향해 내려가는 것이다.


영과 혼

영과 혼이라는 말은 상당히 많은 전통들 안에서 많은 방식으로 사용되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용어에 구애받지 않고, 단어가 설명하는 의미를 알아듣는 것이다. 혼은 우리 자신의 생명력 있는 야생의 신비로운 핵심을 말하며, 각 사람에게 독특한 본질, 우리 인격보다 훨씬 더 깊은 자기(Self)의 층에서 발견되는 특징들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혼은 죽음 후에 몸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몸을 떠나고, 이후에 다시 육체를 부여받을 수 있는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실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스며들고 생명력을 불어넣지만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의, 광대한, 영원한 신비를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각각의 혼은 영을 위한 대리자로서 존재한다.

혼의 개념은 우리의 특별한 개성의 본질을 포함한다. 이러한 개성은 우리의 독특하고 가장 깊은 개인의 특징들, 우리의 인간성, 참된 자기, ‘진실한 나’를 규정하는 핵심적이고 지속적인 특성들을 반영한다. 혼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큰 야생이며 자연이다. 영은 모든 것을 초월하며 모든 사물 안에 존재한다. 영은 모든 것과 모든 사물, 곧 대지, 공기, 동물, 모든 민족들, 우리 인간 피조물, 우리의 몸과 자기들(selves)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혼이 우리를 세상과 개별적이고 독특한 관계로 부르는 반면, 영은 보편성을 가지고 우주의 모든 것을 공유한다. 영과 혼 둘 다 초월적 성향이 있다. 둘 다 개인의식의 자기(자아나 인격)보다 더 큰 영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영과 혼 사이를 구별하지 않고, 둘 다 개인을 초월한 영역을 지칭할 수도 있다. 따라서 신비라는 단어로 사용한다. 신비는 혼과 영이 구별되지 않는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혼과 영은 상반된 것, 곧 독특한 것과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과 혼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 보완이다. 완벽한 영성은 단지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둘 다 자신 안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영성의 이 두 영역은 함께 전체를 형성한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8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14)

 

 

초기 아동기의 발달과 자연

인간 세상보다 더 큰 자연은 생태 혼 중심적인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하기 위한 거대한 배경이 된다. 계속 유지되는 자연 환경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받아들인다. 부모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을 넘어서는 자연(나비, 시냇물, 비버)은 아이의 온전한 발달을 위해 상호 작용을 하는 자양분을 제공한다. 자연 안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할 때 갓난아이는 자신의 더 큰 어머니, 곧 생명을 불어넣는 세계가 항상 그곳에 있다는 것을 배운다.


아동의 물활론적 세계 

아이는 자연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느끼고 그것들을 친밀하게 받아들인다. 아이는 각각의 사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생태 중심적인 사회에서 세상에 대한 아이의 본능적이고 물활론적 반응은 남은 생애 동안 나무, 꽃, 동물, 산, 강, 그리고 별과 관계를 맺는 기초가 된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만의 세계가 있다. 자신들이 가지고 노는 놀잇감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발견하는 돌, 모래, 가방과 같은 무생물도 인간과 같이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세계이다. 이러한 아이들의 세계를 발달 심리학자 피아제(Piaget, 1932)는 ‘물활론(animism)’이라고 하였다. 즉,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계에서는 돌도 우리처럼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이러한 자신들만의 독특한 사고의 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상상의 세계이며 판타지의 세계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며 이 거칠고 험한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들이 생각지도 못한 시적인 문구가 튀어나오며 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초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의 풍부한 상상력은 지능이 발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창의성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물활론적 사고는 5, 6세쯤 되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물체로만 축약되는데 태양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기 때문에 살아 숨 쉰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6세 이후부터는 움직이는 모든 것은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동차가 그 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지적 능력이 더 발달하여 자동차가 살아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초기 아동기의 자연 안에서의 신비로운 경험

심층 심리학자 돌로레스 라샤펠(Dolores LaChapelle)은 아이가 세상에 대한 기초적인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을 마주해야 하고”, 부모, 문화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자연 환경 또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팔에 조용히 안겨 있는 동안에도 아이의 자아 발달은 햇빛과 비, 신선한 공기, 새들의 노래와 비행, 진흙과 나무껍질의 느낌, 바람과 물의 움직임, 동물과 사람의 목소리를 경험하는 것으로 기반을 다져야 한다. 생태 혼 중심적인 부모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충실한 자세로 인간보다 더 큰 세계인 자연에 그들의 순수한 아이를 맡긴다.

로라 쿠퍼(Laura Cooper)는 자신의 아이가 18개월이 되었을 때의 경험을 회고하며 이야기한다. “나는 아이가 자연 세계와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보살펴주었다. 아이가 물건을 만지기를 원하면 위험이 없는 한 허락했다. 아이는 진흙, 썩은 잎, 젖은 풀이 주는 재미에 빠졌다. 어제 우리는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오후에 달려 나갔고, 아이는 웅덩이에서 물을 튀기며 신나게 시간을 보냈다. 옷이 완전히 더러워졌다. 나는 아이가 세상에서 감각을 통해 참으로 기쁨에 찬 경험을 하기를 원한다. 나는 아이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장소를 알기를, 자신이 ‘자연의 가족’에 속해 있음을 느끼기를 원한다. 나는 아이가 벌레와 거미가 얼마나 귀중하고 매혹적인지 느끼기를 원한다. 죽은 도마뱀이나 썩은 통나무가 얼마나 매혹적이고 필요한 것인지를 느끼기를 원한다.”

라샤펠은 아이들이 자연 안에서 자유롭게 놀 때 맛보는 환희의 순간은 초기 아동기에 매우 흔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만남을 통해 “아이는 자신이 전체의 일부라는 것과 자연 전체가 자신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아이나 어른이나 언제라도 자연 안으로 다가갈 수 있다.” 라샤펠은 우리에게 자신이 다섯 살이던 아동기 때의 한 예를 소개한다. “집 바로 뒤에 풀밭으로 된 자그마한 뜰이 하나 있었다. 나는 내 위에 있는 미루나무의 살랑거리는 잎과 구름을 보려고 등을 대고 눕는다. 그러면 나는 내 얼굴 바로 위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풀잎의 손짓을 느끼게 된다. 나는 깊은 행복감에 젖어든다. 나는 부드럽게 파동 치는 풀잎을 따라 춤을 추며, 내 주위에 있는 다른 모든 것과 하나가 된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15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15)

 

 

아이를 큰 세계(자연)의 구성원으로 키우기

 

혼 중심적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인간 공동체보다 더 큰 세계의 구성원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유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봉사한다. 만약 그들에게 자녀가 있다면 그들은 아이를 자기의 소유물이나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독특한 운명을 지닌 한 인격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가 인간 사회와 그보다 더 큰 세계에 속하는 방법을 배워 자신과 부모, 마을과 세상 그리고 자연과 자연스럽게 신뢰를 유지하고 그것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아이가 자연과 관계하는 법을 배운 두 사례


한 아이의 엄마이자 전문직에 종사하는 주디 홀(50, Judy Hall)은 자신의 유아 시절을 회상한다. “나는 자주 엄마와 함께 꽃밭에 있었다. 엄마가 가까이에서 정원을 가꾸고 있는 동안 나는 주변을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나는 꽃과 식물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것들을 친척처럼 대했다. 그것들은 나의 놀이 상대가 되었다. 나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고 엄마가 내 시야에 없어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꽃줄기들이 내가 안보일 정도로 내 몸을 덮고 있는 것이 좋았다.” 

갓난아이나 유아(1~3세)기에 자연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은 발달상 중요하다. 부모들은 배낭용 아기 띠를 채워서 갓난아이를 데리고 공원이나 근처의 야생 벌판을 걸어 다닐 수 있다. 또는 아기들이 나무, 꽃, 새, 그리고 작은 짐승을 관찰할 수 있는 뒷마당이나 정원에서 왔다 갔다 하거나 낮잠을 자게 할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바깥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을 많이 허용하고, 잠깐 산책을 하면서 작은 자전거에 태울 수도 있다. 인간 세상을 벗어나 자연 안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끼면서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다.

로라 쿠퍼(Laura Cooper)는 자신의 아이가 10개월이 되었을 때 어떻게 인간 세상보다 더 큰 자연과 첫 번째 관계를 맺었는지 설명한다. “아이는 우리 집 참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를 무척 좋아했다. 우리는 매일 최소한 한 번, 도토리가 있는 쪽으로 갔다. 나는 나무에게 아이와 함께 도토리를 따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그다음 내가 아이를 들어 올리면 아이는 손을 뻗쳐 하나를 움켜잡았다. 나무가 쉽게 허락하면 그것을 따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나무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나무가 도토리를 줄 때 항상 감사했다. 이제 18개월 된 아이는 두세 개의 단어로 된 문장을 만들어 나무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도토리를 모은 후에 가끔 아이는 냇가 위 다리로 걸어가면서 도토리를 물속으로 던지기도 하지만, 주로 도토리들을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는 질문하고 들으면서 나무와 세상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동화들은 아이의 초기 감각을 발달시킨다

학령기 이전의 아이가 세상에 활기차게 입문하도록 지원하는 또 다른 방식은 이야기가 주는 매력을 통해서다. 이야기들, 특히 자연을 배경으로, 동물을 주인공으로 구성한 동화들은 아이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조각(彫刻)들을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연 세계와의 연속성을 경험한다. 아동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의 연구는 마술적인 장소와 동물이 “아이들의 정서를 교육하고, 지지하고,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세상이 무엇이며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그들의 가장 초기의 감각을 발달시켜 삶에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이들이 접하는 옛이야기들은 단지 긍정적인 것들만이 아니라 분개와 수치심에서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감정들을 담고 있다. 인간 존재의 어두운 측면을 포함함으로써 이러한 이야기들은 아이가 정신의 모든 차원들을 드러내고 온전함을 향해 성장하도록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자신의 화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고, 자신과 타인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배우며 성장한 아이들은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낮고,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을 지지하지 않는다. 단연코 그들은 삶을 나누는 동반자로 적합하고 외교와 민주주의에 더 능하게 된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2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16)



어린 시절의 놀이터, 자연

“메뚜기와 도롱뇽과 뛰어놀던 날에, 우리 중 누군가는 메뚜기는 어떻게 그렇게 멀리 뛸 수 있는지, 왜 도롱뇽이 오렌지 색깔의 몸에 검은 점을 가졌는지 물었다. 우리는 나뭇잎들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듣고 싶어 낙엽을 밟았다. 얼마나 멀리 튀는지 보려고 수면 위에 돌을 던지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밤에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었다. 잠을 자다가 이상한 느낌에 잠을 깨고는, 단지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한기를 느끼며 깨는지 궁금했다.”

위의 글은 어린 시절에 리처드 루이스(Ri chard Lewis)가 자연 속에서 궁금한 것들에 대해 질문했던 이야기다. 이러한 질문들은 놀라운 어떤 것, 신비로운 어떤 것을 알아내는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질문은 매일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건강한 어린 시절에는 거의 모든 곳에서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을 경험하고 배우고자 하는 욕구로 흘러넘친다. 매일 메뚜기, 낙엽, 돌, 시내, 다른 아이들, 어둠, 꿈과 같은 자연 사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아이는 신비와 황홀감으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영역으로 빠져든다. 아이들은 꽃이 피고 활기를 띠는 세상에 삶의 기초를 두고 그것을 탐구해 가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세상의 경계를 확대해 나간다. 세상의 경계를 넘어 아이들은 창의력을 키워나간다. 물결치는 청록색 바다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피조물의 쾌활한 놀이터이다. 희미한 하늘은 큰 나무들의 웃음이고, 벌레는 지구를 간질이는 작은 움직임이다.

“뒷마당에는 봄의 야생 능금 향기와 색깔, 여름 진흙의 따뜻함, 가을 낙엽들의 바삭거림과 그림자, 겨울눈의 차가움 등이 있었다. 저 너머 자그마한 숲과 좁은 길 끝에 있는 무시무시한 바위 산등성이로 가는 모험들은 2~3년 후에 더 깊은 숲 속으로의 신나는 원정과 미지의 세계로 방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친구들과 형제들과 함께했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은 자연 속에서 함께 집을 만들고, 우리가 물려받았던 더 큰 세상 안에 있는 집에 머무는 것을 배우면서 주위를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숲 속에는 우리가 만든 돌로 된 요새, 통나무, 그리고 버려진 잡동사니, 끝없이 펼쳐진 눈 터널, 그리고 할아버지 농장의 크고 마른 초원에서 숨바꼭질하면서 만들었던 구불구불한 회랑지대 등이 있었다.”

위의 글은 아동기에 빌 플라킨(Bill Plot kin)이 자연 안에서 탐구하며 감수성과 경이감을 키워나갔던 이야기이다. 자연의 황홀함에 빠지는 것은 아동기의 자기 발견뿐만이 아니라 이후의 모든 건강한 성숙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자연은 아이들에게 흘러넘치는 감정들(기쁨, 슬픔, 두려움, 죄책감, 상처, 분노, 사랑)을 제공한다. 아이들은 자연 안에서 이러한 것들을 몸으로 만끽하며 경험한다. 이 감정들은 세상에 소속되는 데 잠재적으로 도움을 주는 보물과 같은 것이다. 거대한 바깥 세계와 인간 삶의 감정 구조, 이 두 가지 주제가 가진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모두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다. 인간 본성(우리 감정 역시도)과 인간 세상보다 큰 세계인 자연은 우리가 태어난 세상의 기반이며, 따라서 이 둘은 우리가 온전하게 성장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자연 놀이터가 주는 혜택


현대 산업사회는 아이들이 노는 집 밖에 있는 자연 놀이터를 빼앗아 가고 있다. 그로 인해 아이는 다양한 정신 병리로 고통을 받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연구조사원들은 자연과 접촉하지 못하는 결핍 상태와 아동기에 나타나는 불안 증상, 어려움, 병리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입증했다. 루브(Louv)는 ‘자연 결핍 장애’라는 용어를 만들었는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면 감각의 둔화, 비만, 주의력 결핍, 과잉 활동 장애(ADHD), 우울증이 야기되고, 리탈린(아동 주의력 결핍 장애에 쓰이는 약)과 항우울제 같은 처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자연 결핍 장애’는 의학적 질환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인간이 치르는 대가이다. 이 소외는 아이들을 손상시키고 어른, 가족, 공동체의 형태를 변질시킨다. 자연 속에서의 자유로운 놀이의 부재는 평생 환경과 생태 파괴에 무관심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자연 접촉의 부재는 자연 상실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생명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소외와 생물 공포증으로 대체된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9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17)



자연의 매력 발견하는 아이들

자연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이 지닌 특성을 비롯하여 산, 들, 이름 모를 새, 달에 이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인종이나 문화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자연 세계의 고유한 표현이다. 모든 곰과 은하수가 가진 것만큼이나 우리는 자신의 본능적이고 타고난 특성들을 많이 갖고 있다.

야생 세계(우리 종을 낳는 원초적인 모체)는 유년기의 아이가 건강하게 발달하는 데에 필수 요소다. 아이는 보물, 위험, 그리고 색다른 가능성을 지닌 집 밖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나간다. 아이는 인간 세상보다 더 큰 세계에 매료된다. 그곳에는 야생의 장소, 동물, 식물, 그리고 밤하늘이 있다. 아이는 뒤뜰, 근처의 작은 숲과 덤불, 배수로나 개울, 목초지, 언덕이나 해변 그리고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돌아다니면서 탐구한다. 그곳에서 아이는 하늘과 태양, 달과 별, 행성들에 관한 수많은 질문을 할 것이다.

아이의 욕구는 단순히 문밖이 아니라 자연에 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때로는 혼자,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때로는 어른들과 함께) 몰입한다. 밖에서 하는 운동이나 미리 정해진 목적지(호수나 산 정상)로 향하는 강행군은 자연 속에서 감독하는 이 없이 자발적으로 하는 놀이와는 다르다. 야생 세계와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은 아이의 발달에 아주 중요하다. 자연 세계를 자유롭게 탐구하려는 아이가 가지는 보편적 욕구에 대해서 심층 생태학자인 돌로레스 라샤펠(Dolores LaChapelle)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는 가능한 한 바깥에서 놀아야 한다.… 인간이 새로운 영장류가 된 이래로 선호해 온 가장 좋은 놀이 장소는 숲 바깥 세계이다. 그곳에는 안전하게 숨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내다볼 수 있는 장소, 오를 수 있는 장소, 바위, 나뭇가지, 흙, 진흙으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단순한 자연의 재료들이 있다. 그곳에서 아이는 동물과 나무, 산, 강과 같은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만난다.”


아이의 자연에서의 놀이

생태학자 폴 셰퍼드(Paul Shepard)는 유년기를 시작할 때 아이는 놀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고 이야기한다. 놀이할 때 아이는 신이 난다. 동물들을 흉내 내며 이리저리 다니면서, 쫓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고 잡히기도 한다. 잠깐 어떤 동물이 되어 그 동물이 느끼는 것처럼 느끼다가 다른 동물이 되어 소리를 내고 몸으로 흉내를 낸다. 아이는 모든 것을 시험 삼아 해보고, 모든 것을 모방한다. 아이는 어른들이 동물 동작을 춤으로 만들어 추는 것을 보면 따라 한다.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에서부터 새들의 멜로디와 늑대들의 울부짖음에 이르기까지, 음악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아이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고양이의 우아함과 은밀함, 여우의 교활함, 나비의 쾌활함, 코요테의 난폭함, 송어의 물 흐르는 듯 부드러운 기백, 곰의 힘과 포효소리, 굴뚝새의 즐거움과 노래 등 동물들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들을 펼치며 높이 솟아 있는 나무의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 꽃의 아름다움과 우아함, 바위의 견고함과 인내심, 하얗게 펼쳐진 눈의 침묵, 태양의 따뜻한 표정, 구름의 변화무쌍한 모양, 그리고 별의 희망과 지구력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어렴풋이 본다.


자연 결핍 장애

아이는 자연과 친근하게 접촉할 때 성장한다. 신체적, 지성적, 감정적, 그리고 영적 발달을 위해 꼭 필요한 초록 세상을 경험하며 자라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산업화된 사회에서 이러한 모습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두려움이 가득한 현대 문화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사실상 집안에 갇혀 있다. 조사연구를 살펴보면 자연에서 규칙적으로 하는 자유 놀이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아이들에게 집중력, 조정, 균형과 민첩성을 길러주며, 질병에 대한 면역성을 키워준다. 풍부한 상상력과 창조적인 놀이는 언어 능력과 협력하는 기술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 비판적 사고, 의사 결정, 폭넓은 인식, 추론, 그리고 관찰 능력을 증진시킨다.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 충격이 감소되고 역경에 더 잘 대처하게 되며 폭력, 협박, 예술과 문화의 파괴행위, 혼란 등과 같은 반사회적인 행동을 줄여 준다. 관찰력과 창조적인 능력이 증가하고 마음의 평화가 증진되어 세상과 하나된 존재가 된다. 또한 놀이를 통해 아이는 친구들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텔레비전 시청, 컴퓨터 사용, 비디오 게임을 줄이고 자연에서 자유로운 놀이를 할 수 있도록 격려함으로써 아이들을 올바르게 양육할 수 있다. 자연으로부터 아이를 격리하는 사회는 아이를 심각하게 병들게 한다. 아이들을 자연과 자연 놀이로부터 떼어놓는 것은 산소를 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6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18)



유년기의 녹색 교육과 생태 교육

데이비드 소벨(David Sobel)은 아이와 자연 세계 사이의 공감은 4~7살 난 아이들에게 주요 목표가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어린 동물들에게 자연스럽게 끌린다. 동물과 공감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발달하는 유대감은 아이의 세상에 대한 소속감뿐만 아니라 이후에 만나게 될 식물학, 동물학, 생태학에 관한 공부를 위한 감정적 기반을 형성한다.

기회가 주어질 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동물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며, 동물과 인간 모두에 대한 윤리성을 향상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부모와 교사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자연 교육을 장려하고 촉진한다면 아이는 그것을 쉽고 즐겁게 배울 것이다. 어른들은 실제로든 상상으로든 자연 경치, 날씨, 동물에 관한 이야기와 노래를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 사슴처럼 달리거나 뱀처럼 땅을 기어 다니면서 어른과 아이들은 함께 움직일 수 있다. 아이와 함께 세상이 끊임없이 제공하는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다. 그리고 간단한 예식으로 바깥에서 함께 즐겼던 계절과 시간을 경축할 수 있다.

자연 안에서 오래도록 산책하는 것은 유년기 동안 부모와 아이가 나눌 수 있는 최상의 상호작용 가운데 하나다. 아이의 속도에 맞추고 아이가 멈출 때 멈추어라. 함께 돌아다니고 경탄하며 감탄하고 탐구하라. 먼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더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아이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상상력이 풍부해질 수 있도록 질문하라.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놀이는 유년기에 가장 중요한 상상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통로이다. 아이들은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을, 특히 동물 흉내를 내는 것을 즐거워한다. 이런 극적인 놀이는 대개 아이가 시작해야 하고 감독이 없어야 한다. 어른들은 또한 아이들이 이동, 동면, 변신과 같은 자연 현상을 연출하도록 제안할 수도 있다. 만약 아이가 어린 시절을 책, 컴퓨터, 현대 사회의 다른 인공적인 것들을 가지고 집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부모와 교사는 아이에게 자연 사물을 보고 듣는 법, 그것들의 감촉을 느끼는 법, 그리고 그것의 특징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를 감각으로 느끼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초기 학령기의 녹색 교육과 생태 교육

데이비드 소벨은 초기 학령기(대략 7~11살)의 교육 목표가 자연에 대한 더 광범위한 탐구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아이의 세계는 집과 뒤뜰에서 이웃과 공동체로 그리고 지역과 그 너머로 확장된다. 아이가 갈망하던 행동들은 자연스럽게 “요새를 만들고, 조그마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사냥하고, 모으고, 보물을 찾고, 개울과 오솔길을 따라가고, 경치를 탐구하고, 동물을 돌보고, 정원을 가꾸는 것”으로 바뀐다. 자연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아이는 초기 양육이나 외상(外傷)에 의해 자연에 대한 매력을 억누른 아이일 수 있다. 이 아이의 두려움은 탐구되어야 하고, 아이의 안전을 강화시켜 자연에 대한 흥미를 북돋울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아이는 아이만의 특별한 장소, 숨어서 관찰할 수 있는 덤불, 친구와 만났던 비밀스러운 정원 수풀 사이의 우묵한 곳을 만든다. 심지어는 도시 생활을 하는 아이도 아주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 담요로 만든 작은 집, 화장실 안의 한구석, 산울타리, 공원에 있는 자신의 나무 또는 호박돌 뒤에 숨겨진 틈바구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한편 시골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나무집들, 헛간이나 버려진 농가, 건초 두는 곳, 작고 신비스러운 초원, 속이 빈 나무통, 또는 숲의 작은 요새나 동굴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특별한 장소를 규칙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아이가 그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소속되도록, 특히 인간 세상보다 더 큰 세계에 소속되도록 도움을 준다.

대부분의 자연 세계는 대개 온화하고 늘 경이롭지만, 삶이 그런 것처럼 자연 또한 쐐기풀, 벌, 덩굴옻나무, 절벽, 미끄러운 경사, 그리고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추위와 더위 같은 수많은 해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자연 안에서의 시간은 아이에게 자신을 돌보고 분별하며 두루두루 조심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어른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바깥 세계는 또한 ‘다른 것들’, 곧 나비, 박달나무, 그리고 해변과 같은 인간과는 다른 피조물과 장소들을 돌보는 것을 배우는 장소이다. 식물, 동물, 그리고 광물 집단 안에 있는 수많은 것들로 활기찬 자연 세계는 생명에 대한, 다름에 대한, 다양성에 대한 아이의 존중과 돌봄을 깊고 넓게 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13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19)



정신이 발달된 아이에게는 자연에 대한 지적인 접근을

어떤 아이들은 몸보다 정신이 더 발달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분류학, 생물 기후학, 동물학, 천문학과 같은 지적인 접근을 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와 걸으며 각기 다른 새들, 나무껍질, 지질 형태를 탐구하라. 망원경을 사거나 빌려서 행성, 별, 은하의 이름과 위치, 색깔과 우주 이야기를 배워라. 예민한 소녀들은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빠져들 수 있다. 일단 바깥세상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면, 상상력과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몇몇 아이들과 함께 정원 가꾸기, 자연사 박물관 방문하기, 집으로 가져온 꽃을 그림으로 그리고 색칠하기 등으로 시작할 수 있다.


아동기의 야생 체험

세계 전반에 걸쳐 부모와 교사들은 아이들을 환경적으로 민감한 새로운 세대로 키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데이비드 소벨(David Sobel)은 교육 내용이 아이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발달에 부합하기 위해 나이에 맞는 독특한 환경예술의 교육과정을 채택할 것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소벨은 교사들에게 열대지방의 산림벌채와 지구 온난화와 같은 환경 파괴 개념과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이러한 현실에 노출되는 것은 그들이 자연 세계를 즐겁게 탐구하기보다 두려워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연과의 유대를 발전시키기 전에 지구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환경교육의 장기적인 목표에 역효과를 낳는다. 소벨은 “우리는 아이에게 지구를 구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동물, 야생화, 구름만큼이나 자신들이 야생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위해 모든 아이는 자연 세계에서 온전한 소속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어른을 필요로 한다. 자연은 적대적인 외계인으로 가득 찬 위협적인 장소가 아니라 아이의 친구, 협력자, 교사, 보금자리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아동기의 자연 탐구와 혼 중심적인 발달 사이의 중요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표현한다. “성경 공부를 통해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그들이 대부분 시간을 자연 세계의 사물들을 경험하면서 보내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우리가 숲을 잃는다면 우리의 혼을 잃는 것이다. 우리가 새들의 노랫소리를 잃는다면 우리의 혼을 잃는 것이다. 우리가 도시의 인공 불빛 때문에 별을 더는 볼 수 없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혼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상상력을 잃을 것이다. 그들은 내면의 발달을 빼앗기게 된다. 숲은 더 높은 비전을 앗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숲은 아이들에게 더 높은 비전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아이와 자연 세계와 유대를 맺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다. 만약 우리가 자연 세계를 황폐화하거나 일그러지게 한다면, 우리의 내면세계는 외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그만큼 왜곡될 것이다. 아이가 경험하는 것, 특히 아이가 외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내면을 형성한다.”

토마스 베리는 바깥 세계와 내면 세계가 어떻게 서로를 반영하는지, 그리고 자연, 혼, 상상력, 창조적인 인간 비전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문화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동기 전반에서 자연과 정신, 곧 바깥 세계와 내면 세계가 서로 반영하는 것을 배울 때, 아이는 건강하고 생태 중심적이고 혼으로 채워진 존재가 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우주론을 가르쳐라

야생의 세계는 지구의 숲, 강, 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훨씬 넓게 펼쳐진다. 그것은 가장 멀리 있는 은하수의 위대한 신비로 무한히 뻗어 있다. 우주론자인 브라이언 스윔(Brian Swimme)은 가족과 부족, 땅과 물 안에서뿐만 아니라 달, 태양, 태양계, 수천억 개의 별로 가득 차 있는 은하수, 그리고 수천억 개의 은하수를 가진 광활한 곳,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우주 안에서 그들이 일원임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이가 매혹적인 자연을 발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는 우주 안에 있는 인간처럼 우주와 우리의 장소가 지닌 의미를 배우는 것이다. 아동기에 우리는 우리의 가족 체계와 학교 체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태양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주와 우주의 펼쳐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황홀함을 맛보도록 가르쳐야 한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20일]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20 · 끝)



어린이의 상상력

상상력은 아이가 세상과 자신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상상력을 통해 아이는 질문할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때 나는 무엇처럼 느껴질까? 이 세상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창조할 수 있을까?” 상상력은 공동체 차원에서 건강한 인간 발달을 위한 혼 중심적인 사회와 자비롭고 정의로우며 환경친화적인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건강한 상상력은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혼을 마주하며, 세상에 필요한 우리의 독특한 선물들을 제공하는 데 필수적이다. 우리는 각자 개발되지 않은 비옥한 상상력을 갖고 태어나며, 이 창조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잠재력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아동기 전반에 걸쳐 격려와 훈련을 받아야 한다.


어린이의 꿈과 자연

아이의 꿈 세계 또한 격려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와 교사들은 아이들이 꿈 세계, 꿈의 감정, 꿈의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의 특징들(색깔, 소리, 감촉)을 신기해하며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도록 이끌 수 있다. 혼 중심적인 꿈 작업의 목적은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꿈에 대해 탐구하고 느끼는 데에 있다. 꿈이 불러일으킨 감정들이 어떤 것이든 그러한 감정에 적극 공감하면서 아이들이 온전히 느끼도록 격려해야 한다. 아이들이 꿈을 친구와 가족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꿈을 그리거나 춤으로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식으로 꿈에 대해 쓸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여섯 살 이하 아이들의 꿈에 대한 연구를 보면, 아이들의 꿈 80% 정도가 동물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은 아동기의 꿈들이 활기 넘치는 자연과 우리와의 관계 발달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자연 자체가 우리를 설계해 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상상력과 야생의 자연은 깊이 그리고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다. 생태학자 이디스 콥(Edith Cobb)은 아동기의 상상력은 온전히 자연 세계와의 접촉에 달려 있으며, 지극히 창조적인 어른들에게서 드러나는 독창성은 거의 자연 안에서의 그들의 어린 시절 경험에 뿌리박고 있다고 말한다. 심층 심리학자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도 이야기한다. “세상은 단순히 물체와 사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유용하고 재미나는, 그리고 흥미를 자아내는 기회들로 가득 차 있다.”

아이들은 자연이 제공하는 애정 어린 돌봄과 가르침들을 인식한다. 상상력은 가족 안에서 아이 혼자 만들어내거나 혹은 부모가 들려주는 만들어낸 이야기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 리처드 루이스(Richard Lewis)는 풍부한 상상력은 참된 인간 특성을 발견하고 활발하게 성장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외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만큼이나 “내면의” 시각과 심상의 상상을 사용하는 과정에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2학년 교실에서 나뭇가지 주위를 돌며 아이들에게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나무에서 떨어져 나왔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어떤 아이들은 펼친 손의 모양으로, 어떤 아이들은 말로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그림으로 대답한다.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상상 속으로 빠져든다. 아이들은 서로 마주 보며 웃는다. 이것은 아이들의 내면 세계가 자기에게만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나 여름 초원을 뒤덮는 수많은 소리와 같이 모든 사람 안에 있는 방대한 정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상상력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본질적인 부분이며, 모든 것은 완전히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상상력을 지닌 인간의 눈에 자연은 상상 그 자체”라고 말한다.


상상력, 몸, 감정, 그리고 자연

자연 안에 있다는 것은 자연의 지체가 된다는 것이다. 아이는 단순히 관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감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 굴뚝새를 단순히 보는 것만이 아니라 팔을 움직이며 그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고, 바람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나무들은 기어오르기 위한 것들이고, 물은 장구치고 그 안으로 뛰어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상상력을 통해 몸은 그가 마주치는 동물의 삶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비는 아이에게 상실감을, 태양의 따뜻함은 희망을, 폭풍우는 두려움을 느끼도록 도울 수 있다. 상상력, 몸, 감정, 야생 자연은 함께 영향을 미치며 복잡하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상호 작용한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연의 이러한 네 가지 차원과 충만한 관계를 이루도록 허락받고 격려받아야 한다. 어떤 한 부분을 소홀히 할 때 다른 세 가지와의 관계도 손상된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25일]



2,60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