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김봉식 마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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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25 ㅣ No.1185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김봉식 마오로 신부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연길 수도원, 1913년 8월 24일 생, 북간도 훈춘
세례명 : 예로니모
첫서원 : 1939년 3월 26일
사제 서품 : 1942년 4월 5일
소임 : 연길 대목구 팔도구 본당 보좌, 훈춘 본당 보좌, 도문 본당 주임, 원산 지역 순회 사목
체포 일자 및 장소 : 1950년 6월 24일, 원산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0월 9일, 원산

김봉식 마오로(金鳳植, 1913-1950) 신부는 1913년 북간도 훈춘 인근 팔지(八池, 현 중국 훈춘시琿春市 경신진敬信鎭 육도포촌六道泡村) 태평촌(太平村)에서 태어나 예로니모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전교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선교사들을 도와 신자 공동체를 결속하였다. 신심 깊고 부지런한 어머니는 많은 식구를 보살피기 위해 밤낮으로 애썼다. 그는 허약했고 요절한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약골이었다. 재능은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성실하였다. 1927년 9월 그는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보다 두 살 많은 누나 김 안나는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에 들어갔다. 김 안나는 요세파라는 수도명을 받고 1932년 5월 26일에 첫서원을 했으나, 1938년 6월 18일, 원산 수녀원에서 선종했다. 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에서 1944년 5월 18일에 첫서원을 한 김봉옥 플라치다 수녀가 그의 누이동생이다.

덕원 신학교에서 중·고등 과정을 마치고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김 마오로 신부는 1938년 3월 23일, 연길 수도원에서 최영호 요한 마리아 비안네(崔永浩, 1908-1998) 신부와 함께 수련을 시작했다. 수련장은 빅토리노 차일라이스(Viktorinus Zeileis, 徐相烈, 1888-1957) 원장신부였다. 그는 1939년 3월 26일에 첫서원을 했고, 1942년 4월 5일, 연길 수도원 성당에서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 팔도구 본당 보좌 신부로 사목 일선으로 나갔다. 1944년 북간도를 통치하고 있던 만주국 정부는 모든 사립학교를 국유화했고,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각 본당에 설립한 초등학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조치 이후 그는 고향인 훈춘 본당으로 가서 보좌신부 생활을 했다.

- 연길 수도원 수련실(1938, 연길)


1945년 여름, 김 마오로 신부는 도문 본당에서 해방을 맞았다. 당시 독일인 선교사들은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의 학정으로 곤욕을 치렀다. 그는 팔도구와 훈춘 등지를 돌면서 독일 선교사들의 공백을 메꾸며 사목활동을 펼쳤고 소련군이 철수한 후 득세한 중국 공산당에게 붙잡혀 연금되기도 했다. 1946년 5월 20일 연길 수도원이 폐쇄되고 독일인 선교사들이 체포되어 남평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체포를 모면한 김 마오로 신부는 홀로 도문 본당을 지키다가, 1947년 연길 수녀원 소속 한국인 수녀들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덕원 수도원으로 갔다. 그는 병으로 요양 중인 쿠니베르트 오트(Kunibert Ott, 吳炳世, 1912-1952) 신부를 대신하여 임시로 고산 본당을 맡았다가 후에 여러 본당을 순회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 사이 북한에서는 대규모 월남이 감행되고 있었다. 덕원 수도원은 남아 있는 신자들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강력히 맞설 수 있도록 노력했고, 가능한 많은 본당에서 평신도 묵상 연길 수도원 수련실(1938, 연길)회를 개최했다. 김 마오로 신부도 강사로 나섰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공산당이 강연을 방해하여 결국 평신도 묵상회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1949년 1월 20일부터 김 마오로 신부는 춘천 지목구 관할인 강원도 이천 본당 임시 본당 주임으로 갔다. 그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감당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천 본당에 분원을 설치해 달라고 원산 수녀원에 요청했다. 그리하여 우선 박빈숙 루치아(朴彬淑, 1919-1950) 수녀와 제삼례(諸三禮, 1920-2010) 율리아나 수녀가 이천 본당으로 파견되었고, 5월에 정식 분원이 설립되면 최신정 리오바(崔信貞, 1908-?) 수녀가 분원장을 맡기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이 폐쇄되는 바람에 분원 설치는 무산되었다. 같은 날 덕원 수도원도 폐쇄되었고 독일인 선교사와 한국인 성직자 전원이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수도원에서 멀리 떨어진 본당에서 지내던 그는 체포 명단에서 누락되었다가 1950년 6월 24일에 체포되어 원산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10월 9일, 인민군은 퇴각하기 직전 수감자 400명을 처형했는데, 거기에 김 마오로 신부와 춘천 지목구 양양 본당 주임 이광재 디모테오(李光在, 1909-1950) 신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신은 인민 교화소 뒤편 언덕의 한 방공호에서 발견되었다. 살육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준명(韓俊明) 목사의 증언을 듣고, 원산 본당 교우들이 두 신부의 시신을 찾았다. 김 마오로 신부는 입고 있던 옷으로, 이 디모테오 신부는 어릴 때 다친 손가락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50년 10월 22일, 미군 존 머피(John Patrick Murphy, 1905-1981) 군종신부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패트릭 오코너(Patrik O’Connor) 신부가 장례미사를 집전했으며 그의 시신은 원산 본당 뒷동산에 있는 본당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 자료출처 :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원산수녀원사(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1988년), 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2003년), 승리의 십자가(분도출판사 1978)

 



[분도, 2013년 봄호(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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