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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사ㅣ 준성사

[고해성사]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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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10-25 ㅣ No.104

고해성사 (1)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을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살아가다 보면 인간은 자기자신과 이웃, 더 나아가 자신을 창조한 하느님을 향해 죄를 범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간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를 파멸로 던지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의 가벼움 앞에서 항상 사랑으로 얼굴을 내미시는 하느님이라는 존재의 은혜로움에 의해 구원의 잔치(빠스카)로 초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는 죄를 “오 복된 탓이여”라고 노래하며 어둠에서 빛이 더욱 밝게 빛나듯이 죄를 통하여 드러나는 더욱 커다란 하느님의 자비를 칭송하고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음으로서 인간의 희망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무한한 하느님의 자비를 고해성사 안에서 더욱 명확하게 보존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클 수는 없다. 우리가 뉘우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성사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켜주시고 더 깊은 관계로 우리를 이끄신다.

 

요즈음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고해성사에 대한 의문들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만나게된다. 지은 죄를 성찰하고 고백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기도 하고 죄가 부끄러워 제대로 고백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몇몇 사제들도 판공성사 때가 되면 밀려드는 군중으로  인한 피곤함을 호소하며 고해성사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초대교회와 중세시대의 고해성사의 변천사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그에 대한 논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고해성사의 역사를 보아서도 그렇고 현재 신자들의 영신적 유익을 위해서도 그렇고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비(Misericordia)와 인간의 가여움(Misera)이 만나는 장임은 자명하다. 하느님을 만나는 이 자비의 장인 고해성사의 옛이야기들을 아주 옛적 초대교회부터 이제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초대교회의 화해예절

 

교회의 첫 3세기는 박해의 시기였으므로 어떠한 일정한 성사의 틀을 마련하기에는 어려운 시대였다. 또한 이 시기는 주요 대도시(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로마 등)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이방인 공동체로 퍼져나가는 기간이었고 따라서 유대인들의 풍습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이방 문화를 만나는 시기였다. 유대인들은 구세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절실히 체험하였고 이는 구약성서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신명4:31). 비록 인간이 죄 중에 있더라도 용서를 청하고 뉘우칠 때 하느님은 그를 구원하여주신다(이사 44:21). 예수는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선포하며 길 잃어 헤매는 양을 어깨에 메워오는 주님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비록 주석학적인 쟁점들은 있을 수 있으나 복음서에서 우리는 간접적이든(마태 16:18-19; 18:18), 직접적이든 (요한 20:21-23) 죄의 용서에 대한 성사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묶거나 풀어줄, 또한 용서해줄 권한을 이양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 여러 곳에서 초대교회의 화해 성사를 가늠하게 해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음행, 탐욕, 우상숭배 등의 중죄를 범한 이들에 대해 공적인 추방을 언급한다(1고린 5:13, 2테살 3:14). 그리고 또한 그들에 대한 용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2고린5:7.10) 사도 바오로의 언급을 정리해보면 초대교회의 화해의 예절을 가늠해볼 수 있겠다. 첫째, 중죄(살인, 간음, 배교 등)를 지은 죄인은 공적으로 교회로부터 교회공동체 혹은 교회의 우두머리(주교)에 의해 추방당하며 얼마간의 기간이 경과한 후에 다시 공적으로 용서를 받음으로써 화해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오로의 화해예절은 후에 디다케(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적은 책으로 2-3세기경의 문헌으로 추정됨)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디다케 4장과 14장은 화해예절에 대해 언급하는데 여기서 초대 교회의 화해 예절은 공개적으로 공동체의 모임에서 행해졌으며 성체성사와 연결되어 완결됨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로마의 클레멘스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96년경 저술된 것으로 추정)에서는 참회는 성직자 아래서 무릎을 꿇고 벌을 수락함으로써 이루어졌고 용서받기 위해서 참회자는 애덕을 실천하여야 했다. 헤르마스의 “목자”(140년경 로마에서 저술된 것으로 추정)는 초대교회의 화해예절을 3가지 면에서 더욱 자세히 그려낼 수 있게 해준다. 첫째, 화해예절의 종말론적인 성격이 부각되는데 화해성사는 죄인을 하늘나라로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둘째로 화해예절에서 죄인의 마음 깊숙한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마음의 진정한 통회 없이는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 화해예절은 세례를 받은 후에 오직 일생에 있어서 한 번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해예절을 한번 받은 후에 또 죄를 짓는다면  “그가 뉘우친다해도 구원받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헤르마스는 선언한다(Mandata, 4,3,6, l.c., 155).

 

이상에서 우리는 아주 간략하게 초대교회의 화해성사에 대한 언급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초대교회는 박해를 받고 있었고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대단한 결심을 필요로 한 일생의 결단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후에는 모든 신자들은 대단한 신앙심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해 또다시 죄를 짓게되고 여기에 하느님의 자비의 표징으로 화해예절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초대교회에서 집전되던 화해예절을 되살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박해라는 상황과 지역적인 광대함은 지역적으로 조금씩 다르게 화해예절이 집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화해예절의 공통점은 참회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였고 또 공적인 형태로 공동체와 그 수장(주교나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다시 공동체와 하느님과 화해하는 형식의 예절을 집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뒷날까지 많은 영향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되는 “헤르마스의 목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세례를 받은 후에는 일생에 단 한 번만 화해예절에 참여할 수 있었던 지역교회도 많이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초대교회의 화해예절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한 번 되돌아보자. 고해성사를 의무적인 것이라고만 여기며 판공성사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또한 참회와 회심 없이 고해성사에 임하기도 하며 고해성사가 번거롭다고 하여 아예 기피하고 결국 냉담에 이르는 신자들은 얼마나 많은가? 초대교회의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한번 되새겨보면서 하느님과의 화해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매일 생각하면 사는 신앙인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화해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이라면 죄조차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 저 넓은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밀라노 칙령 전후의 교회와 화해예절(고해성사)

 

313년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다. 이후 교회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빠르게 자신을 정비하고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391년에는 교회는 로마의 국교가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곧바로 395년에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교회도 동서로 분열된 로마제국의 영토에 따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뉘어진채 각각의 전승을 보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분열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방과 서방교회는 공의회등을 통하여 일체감을 계속 확인하였으며 저 불행한 1054년의 대분열 때가지 하나인 교회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3세기 이후에는 교회가 행하던 고해성사의 흔적을 담은 문헌을 비교적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먼저 3세기의 문헌으로 “사도들의 가르침(Didaschalia Apostolorum)”이라는 책을 보면 죄를 지은 사람은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주교에 의해서 안수와 보속을 받은 후에 교회 밖으로 추방되게 된다. 3-7주 정도가 경과된 후 죄인이 회심하면 그 죄인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는 예식이 있었는데 이것이 고해성사의 효시가 된다.  예식은 모든 회중 앞에서 거행되며 회중이 기도하는 가운데 주교가 안수를 함으로써 죄의 용서가 이뤄지는 것이다.

 

또 다른 자료로 “사도헌장(Costitutiones Apostolorum)”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4세기 말경의 문헌으로 보이는데 죄를 지은 사람을 향한 부제의 훈계와 주교의 사죄의 기도가 들어있다. 이 훈계와 기도문은 많은 성서적 표현들이 들어있으며 후에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전례문헌이라 할 수 있는 젤라시안 성사록(Sacramentarium Gelasianum)으로 전승된다. 이 두 문헌이 동서방 교회를 막론하고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여러 교부들도 하느님과의 화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중죄를 지은 이들에 대한 추방과 그들의 회개를 통한 새로운 받아들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리용의 이레네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그들중에 특히 떼르뚤리아노는 몇가지 중죄(우상숭배, 독성, 거짓증언, 간음, 살인 등)를 지은 이들은 그 죄를 다시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히뽈리또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 3세기 전반)에는 죄를 사하는 것이 주교의 고유권리임을 명백히 하고 있으며 히뽈리또와 함께 카르타고의 치쁘리아노는 일상적으로 짓는 범죄들(Lapsus)에 대한 손쉬운 용서를 거부하였다.

 

416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1세가 굽비오의 주교 데첸시우스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로마에서는 화해성사가 매년 성 목요일에 거행되었고 죄의 종류에 따라 보속을 엄격하게 하였고 그것을 잘 준수하는지를 엄중히 관찰한 후에 화해예식을 집전하였으며 또한 죄가 막중할 경우에는 죽기전 성체를 영하기 위한 화해예식만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체사리오는 하느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넓은 포용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죄를 피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매우 힘든 보속을 주기도 하였다. 아우구스띠노는 성서가 이야기 하는 죄 중에서 고의로 지은 죄만을 화해성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고의가 아니거나 무지에 의한 죄는 무거운 보속이 딸린 공적인 화해예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아우구스띠노는 교회는 어떤 죄인이든지 거절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모두에게 열려진 용서를 강조하였다.

 

이상에서 밀라노 칙령을 전후로 한 몇가지 전례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아직 교회 전체가 통일된 하나의 예식서를 준비하지 못한 시기였고 지역마다,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의 화해예식과 죄에 대한 신학이 자리잡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의 몇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화해예절이 공개적으로 거행되었다는 것이다. 떼르뚤리아노가 강조하듯이 죄인은 자신이 범한 죄를 공적으로 교회의 수장 앞에서 고백해야 했고 교회는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들의 회심을 도왔다. 또한 교회의 수장(주교)은 죄인들에게 보속을 명하였고 사제와 부제들은 죄인들이 보속을 잘 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였다. 보속은 대체로 엄격한 것으로 절식, 금주, 성지순례, 고행 등이 요구되었다.  특히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암브로시오와 오리제네스등은 기도, 끝없는 통회, 단식, 애긍과 형제들끼리의 용서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초대교회는 빠스카의 교회였다. 사도들의 전승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며 순교자들의 증거가 그대로 목격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박해시대때는 순교, 곧 죽음이 곧 하느님 나라에서의 탄생(Dies natalis)으로 여겨져서 슬퍼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죄를 지은 이들에 대해서는 그만큼 엄격하였고 죄를 지은 이들도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 위하여 기꺼이 그 어려움을 감수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자유를 되찾고 안정되기 시작하자 초대교회의 빠스카적인 신앙은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하여 신앙을 위한 계명들이 유린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엄격한 화해절차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화해성사를 뒤로 미루어 결국 화해예절은 죽음을 준비하는 종부성사의 성격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을 신실한 마음으로 찾는 이들에게는 화해성사는 하느님께로, 빠스카에로 인도해 주는 하나의 길이었다.

 

 

고해성사 (2)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초대교회에서의 고해성사는 공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죄인의 참회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띄었다. 주위 형제 하나가 죄에 넘어졌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공동체가 나누어 졌으며 그 죄인을 다시 은총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공동체가 힘을 모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형태의 참회예절과 사죄는 곧 이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교회가 날로 발전하여 외적으로 비대해지며 신자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참회예절을 공적으로 거행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죄인들의 숫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안정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보수화를 초래했고 이로 인해 하느님과의 화해보다는 교회 내적인 인간관계가 우선시 됨으로써 공적인 참회식에 참여하는 것을 곤란하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속이 지역적에 따라서 너무 과하기도 부과되었기에 많은 이들이 죄를 짓고도 참회를 거절하거나 참회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불합리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일생에 한 번 뿐 허락되어 반복해서 받을 수 없었기에 “제2의 세례”로 여겨지기도 하여 아직 젊은 죄인들에게는 참회예절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죽음의 순간까지 참회식을 미루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로써 고해성사의 공백기가 도래하게 된다. 이러한 공백기에 대한 대처로 등장하게 된 것이 사적고해성사인데 이는 아일랜드(켈트교회)의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7세기에서 9세기까지의 고해성사

 

7세기에 들어서서 고해성사는 획기적인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신자들의 영성생활의 문제들을 의식하여 아일랜드지방의 수도자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개별적(사적)이며 반복가능한 고행성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고해성사에서 혁신적이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공개적이며 반복불가한 고해예식이 이제 사적이고 내밀하게 이뤄지게 되었으며 사순시기가 아니더라도 연중 필요한 때에 성사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특색있는 것은 보속목록이 있었다는 점이다. 사제들은 고해자의 죄를 듣고 보속을 주는데 일정하게 정해진 보속목록에 따라서 보속을 주었고 이를 수락하면 사죄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죄를 범한 사람들의 보속은 목록에 따라서 모두 같은 보속을 해야했으며 여러 가지 죄를 지은 사람은 마치 그에 해당하는 보속을 모두 수락해야 사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시대의 고해성사를 정가(定價) 고해성사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고해성사에서 부과되는 보속은 속죄를 판가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개별적인 죄의 고백도 보속의 양을 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정해진 보속을 수락하는 것은 죄를 뉘우쳤다는 속죄의 표지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오늘날의 성사와는 차이가 나는 점이라 하겠다. 또한 이전에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는 공적인 참회와 사죄가 허락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이 이미 참회적이며 속죄적인 것이라는데 있었다. 특히 수도자들의 수도서원은 그 당시에는 참회예절의 성격이 강했고 실제로 수도원 입회 전의 죄에 대한 사죄가 이뤄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큰 죄를 지은 성직자나 수도자가 있다면 공개적인 참회예절 대신에 다른 수도원에 파견되어 고립된 생활을 하여야 했으나 죄의 비밀은 보호되었다. 개별고백은 개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었으므로 성직자 수도자들도 모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참회예절은 사제와 참회자간에 성당안에서 이뤄졌는데 사제의 시작 권고, 참회자의 죄의 고백, 사제와 참회자가 함께 제단 앞에 엎드려 참회의 시편을 노래한 뒤 사제가 참회자에게 보속을 수여하는 형태로 이뤄졌으며 통상 보속을 완수한 다음에 화해기도를 해 주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바로 화해기도를 해주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새로운 방법의 고해성사는 획기적인 것이었기에 이에 대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는데 특히 589년 스페인과 남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주교들의 모인인 똘레도 공의회에서는 이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647년부터 653년 사이에 열린 샬롱 쉬르 사온느(Chalon-sur-Saone) 공의회에서는 이 새로운 고해성사가 사목적인 유익함 때문에 받아들여지게 되며 그 후 이 새 고해성사는 아일랜드에서 유럽 전역으로 서서히 퍼져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두 가지 유형의 참회성사가 병행하여 사용되었다. 즉 공적인 죄를 범한 이를 위해서는 공적인 참회예절이, 그리고 개인적인 죄들은 사적인 고해예절이 모두 사용되었다.

 

특히 카롤링왕조의 프랑코 왕국에서는 공개적인 죄인을 화해시킬 때는 공적인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사순절 첫날 죄인을 성당에서 베옷을 입히고 재를 뿌리며 낙원에서 쫒겨나는 아담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빵을 먹기위해서는 땀을 흘려야하리라...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기 3,19)”라는 말을 하며 성당에서 추방하는 예식을 하였고 성 목요일에 또한 공적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예식과 사죄경을 참회자를 위하여 바쳤다. 이러한 예식은 참회자의 개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온 공동체가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참회한다는 참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조된 것이었다. 11세기까지 이러한 공적인 예식이 병행되었으나 그 이후에는 오로지 사적 고백만이 행해지게 되었고 공적참회 예절의 흔적은 현재까지 사순시기 곳곳에 남아있다.

 

새로운 화해예식은 영성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로써 참회가 아주 편안한 것이 되었고 언제든지 죄를 범하면 언제든지 참회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점은 아직 남아 있었다. 정가 고해성사가 그것이다. 범한 죄의 종류에 따라 보속을 이률적으로 받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한 것이었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가오는 참회의 인격적이고 생생한 느낌을 법률적으로 획일화 시켜버림으로써 영성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못되었다. 더욱이 정가표(보속목록)을 살펴보면 지나치게 과중한 경우도 많았다.(예를 들어 100편의 시편을 암송하면서 이틀간의 단식, 성서에 나오는 7개의 노래를 하면서 무릎꿇기 1500번, 일년간의 물과 빵으로 살 것 등). 그러므로 아직은 참회가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그리고 참회가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 가까이 있는 것인지를 느끼기에는 아직도 지나친 면이 있었다.

 

 

13세기까지의 고해성사

 

이 시대까지는 아직 가톨릭 교회 전체를 위한 통일된 전례 예식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와 유럽전역에서는 고위성직자들이 즐겨 사용할 수 있는 예식서들이 출현하였는데 주교예식서(Pontificale)라고 불리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9세기경부터 전례집전을 편하게 하기 위해 등장한 이 주교예식서는 트렌토 공의회 이후 전 교회적인 차원의 예식서가 출간될 때까지의 전례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에 따르면 적어도 13세기까지는 교회 안에서 앞에서 언급한 공적인 참회예절과 개별적인 화해예절이 공존하였으며 특히 죽음을 앞둔 이들을 위한 화해예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게르만 주교예식서에 실려있는 공적 참회예절은 대단히 드라마틱한 것으로 참회자와 부제, 주교들이 각기 고유 청원과 여러 가지 기도를 바치며 시편, 찬가 등을 노래하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같은 예식서에 나오는 개별적인 화해예절도 기도와 신앙고백 등으로 꾸며져 대단히 장황하게 집전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지 죄를 묻고 고백하고 훈계와 보속을 주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졌고 집전자와 참회자가 죄의 용서를 위한 공동체적 유대는 강조되었다. 12세기 이후에는 개별적인 화해예절이 더욱 발전하여 죄를 고백할 때는 사제의 귀에 귓속말로 고백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귓속말 고백에 의해 고해의 비밀을 지켜야할 사제들의 의무가 규정되었으며 이는 1215년 라테란 공의회 규정 21항에 의해 처음으로 입법화되기에 이른다.

 

13세기 이후의 대표적인 주교예식서인 <굴리엘모 두란도의 주교예식서>에는 삼베와 재를 축복하는 예절이 있으며 이는 사순절이 시작되던 때 참회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을 위한 화해식은 성목요일에 거행되었다. 이 시기의 위와 같은 전승들은 후에 사순시기의 전례 전승으로 이어져 재의 수요일에 재를 축복하고 머리에 얹는 예식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이 공적인 참회식에는 장엄한 복장을 한 주교와 부제, 복사들, 성가대, 회중 등이 등장하며 용서를 청하는 기도로 시작하는데 이때 참회자들은 꺼진 초를 들고 문밖에서 바닥에 엎드려 겸허한 모습으로 기다린다. 우리는 이 예절에서 극명한 극적 요소를 볼 수 있다. 이제 그들의 초에 차부제들에 의해 불이 붙여지면 빛이신 그리스도의 자비로서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예절 중에 회중과 성가대는 장엄한 호칭기도(Litania)를 노래한다. 그리고 이 예식에서 주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문밖으로 나아가 잃은 양을 찾아오듯이 그들에게 화해의 기도를 해주고 인도하여 성당 안으로 들인 뒤에 사죄경으로 그들을 화해시킨다. 이 장엄한 예식에는 많은 부분이 성가로 노래되는데 이 역시 라틴어 노래로서 일반 회중이 따라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미 7세기 후반부터 성가대도 성직자로 구성되었고 (Schola cantorum), 일반 회중들은 후렴 구절이나 따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렇듯이 전례가 점점 회화화, 극화되어감으로써 일반 대중의 신심과는 유리되어 갔으며 이는 곧 교회 안의 생명력과 유기적인 결속력의 상실을 의미하는 슬픈 것이었다.

 

 

트렌토 공의회와 고해성사

 

트렌토 공의회(1545-1563)는 확실히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정리, 선포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집된 공의회였다. 그러므로 공의회가 선포한 교령들은 대부분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단죄하고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공의회를 통해 고해성사에 있어서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공의회는 성사에 대해 반대하는 개혁자들의 견해를 단죄함과 동시에 그 당시에 어떤 일정한 기준 없이 주교의 의견에 의해 결정되고 집전 되던 고해성사 방식을 통일하고 이미 14세기부터 잘 집전 되지 않고 있거나 지나치데 극화된 공적인 참회예식을 이제 내밀한 개인 고백으로 바꾸어 전 교회에서 활용하게 하였다. 공의회는 성사란 그리스도의 명에 의해 설정된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는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셨기에 그 권한은 주교와 사제들에게 있으므로 이제 고해성사는 사제가 그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내밀하게 집전할 수 있음을 선포한다(6조). 이미 피렌체 공의회(1439-42) 이후 사죄경도 기도문의 형식에서 재판 판결문 형식으로 변화하였다. 즉, 죄를 사해달라고 청하는 기도문이 사제가 “나는 이 죄인을 사한다(Ego te absolvo)라는 형식으로 변경된 것이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이제 철저히 죄를 지은 사람과 사제 사이에서 집전 되는 성사가 된다. 공의회에서 결의한 헌장 7조에서는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여 대죄는 모두 고해성사를 통해 고백해야한다고 강조하며 8조에서는 1년에 한 번 의무적으로 고해에 임할 것을 규정한다. 이와 더불어 공의회는 고해와 성체성사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매우 강조한다.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드디어 1614년에 로마 예식서(Rituale Roma -num)가 출간되게 된다. 이 예식서에는 고해성사 뿐만 아니라 다른 성사예식들과 장례식도 수록되어 있다. 이 예식서에 수록된 고해성사 예절은 이제 전 교회가 사용하는 보편예절이 되었는데 거기에는 개인적인 고행성사 만이 수록되었으므로 공개적인 참회식은 이제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지나치게 극화된 예절이 단순화되었으며 성당 안에 고해소가 정식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사제의 복장등이 통일되었다. 이 공의회와 새 예식서를 통하여 오늘날 이뤄지는 고해성사의 틀이 구체적으로 확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남아있다. 고해성사가 지나치게 법률적인 개념과 형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냐하는 우려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고해성사는 법률적인 판결이 아니라 그 안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묻히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와 평화가 가득 담겨져 있는 아주 편안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고해성사

 

1959년 1월25일 교황 요한23세는 새 시대를 위한 공의회의 소집을 선포하였다. 이날은 사도 바오로의 개종축일이었다. 또한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교황이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하는 목표가 그리스도교 일치와 새로운 시대 상황에 알맞은 교회의 쇄신(Aggiornamento)이라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은 여러 면에서 이뤄졌지만 특히 전례에 있어서의 개혁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미사를 비롯하여 모든 예식서들이 새로 출간되었고 그 동안 학자들에 의해 이룩된 초대교회의 전례정신으로 복귀하려는 시도들이 전례 개혁을 통해서 실현되었다. 고해성사의 예절도 새롭게 개정되었는데 새 예식서의 지침이 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은 고해성사가 “성사의 본질과 그 효과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게 개정되어야 한다(72항)”고 말한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역사 안에서 지나치게 장황해지거나, 의식화, 규범화 되어있는 고해성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해성사는 어떤 법률적이거나 의전적인 사면행위나 절차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그 크신 자비로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하여 주시는 용서와 화해의 축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인인 사람은 하느님과 화해하여 의인이 되며 이로써 또한 온 피조물과 화해하게 되는 것이다. 공의회는 전례개정 전반에 걸쳐 신자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하고 있는데 고해성사에서도 성사를 받는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배려를 함으로써 고해성사가 참다운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장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드디어 새 고해성사 예식서는 1973년 12월2일 반포되게 된다.

 

새 예식서는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간추린다면 대략 4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새 고해성사 예식서는 지역과 환경에 따른 사목적 배려를 강조한다. 이를 위해 주교회의, 주교, 집전자의 사목적 역할을 강조하였고 예식서, 기율, 장소 등에 관해 많은 결정을 지역교회에 위임하였다. 이는 죄에 대한 표현과 윤리적 성향이 민족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대단히 유익한 결정이었고 고해성사가 단순한 법적인 절차에서 벗어나 참회를 통한 새로운 화해의 성사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겠다. 둘째, 새 예식서는 고해자의 참회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고해성사의 거행에 있어서 참회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나 중세이래 법률적이고 관습화된 고해성사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새 예식서는 참회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참회는 하느님과 교회 이웃을 향한 화해의 기틀임을 강조한다. 또한 올바른 참회로 이끌기 위해 새 예식서는 여러 종류의 참회예식을 수록하여 참회자들을 돕고 있다. 셋째, 초대교회의 예식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새 예식서는 고해성사에 있어서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중세이래 고해성사는 귓속말 고해성사로 사적인 것이 되었고 따라서 공동체의 역할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새 예식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인 관계로 모두가 참회의 공동체로서 고해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새 예식서는 예식을 3가지로 구분하여 준비해 놓았다. 첫째가 개별적인 고해성사로서 이는 고해실이나 또는 적합한 장소에서 사제와 고해자가 개별적으로 성사를 주고받는 예절인데 예절에 성서봉독을 하는 등 말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는 통상 간단하게 죄를 고하는 간략한 예절로 대치될 수도 있다. 둘째는 여러 참회자들을 개별적인 고백을 통해 화해시키는 예식으로 성대한 말씀의 전례와 참회예식을 거친 후에 개별적으로 죄를 고해하는 양식이다. 이는 참회자가 많을 때, 그리고 효과적으로 참회를 준비시킬 때 매우 유용한 것으로 우리 나라의 판공성사 때 교우들을 모아 놓고 집전하기에 매우 좋은 형식이다. 셋째로 공동고백으로 공동사죄를 주는 방법인데 이는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 죽을 위험이 있을 때 참회자는 많고 사제 숫자는 적어서 모든 고해를 들을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사용되는 방법이다. 이는 교구장의 허락 하에서 가능한 것이며 우리 나라의 판공성사처럼 단순히 신자가 많이 몰린다는 이유만으로 집전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공동고백을 통해 공동사죄를 받은 신자는 후에 적절한 개별고백의 기회가 오면 다시 고해성사를 보아야만 한다고 예식서는 규정한다.

 

우리 나라에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판공성사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법적으로 참회를 유도하는 것이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만약 진정한 참회를 통해 성사에 임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매우 아름다운 전통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판공성사가 성사표가 나오므로 습관적으로 보는 성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성탄이나 부활과 같은 전례 시기의 중요함을 깨닫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단장하여 구원의 신비를 가슴에 담기 위한 표지로서의 판공성사가 되어야 하며 이는 진정한 참회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진정한 참회는 우리를 저 아름다운 화해로 이끌어 줄 것이다. 이 화해는 우리를 자연과 이웃과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로 이끌어 줄 것이다.

 

[인천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이완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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