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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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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에게 복음을: 칠레 - 인구의 80%가 신자인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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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17 ㅣ No.197

[만민에게 복음을 - 칠레] 인구의 80%가 신자인 나라에서


신학교 시절에도, 사제가 되어서도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길입니다. 2007년 어느 날 보좌신부 전체모임에 함께하신 교구장님(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우리 교구에는 두 명의 사제가 칠레와 프랑스에 선교사로 나가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젊은 신부님들께서 선배들의 뒤를 이어 선교사의 삶을 꿈꿔보신다면 청해주십시오. 기꺼이 허락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저를 울렸고, 석 달여를 하느님과 씨름했습니다. 그러고는 선교사로서의 체험은 하느님께 더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될 테고, 교우들과 더 풍요로운 나눔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선교사의 삶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혼자 가기에는 영 자신이 없어 동창신부님께 함께 가자고 요청했습니다.

교구장님께 승낙을 청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 결국 2009년 1월 인사 때 발령을 받았습니다. 곧바로 성골롬반외방선교회와 지원사제 계약을 맺고 4개월 동안 기초교육을 받은 뒤 칠레로 떠났습니다.


40대와 60대가 친구라고?

칠레에 대한 첫 느낌은 답답함이었습니다. 막연하게 듣고 책을 통해 보았던 곳이 아니라, 이제 내가 살아야 할 곳, 또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기에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무엇보다 답답함을 해소할 곳이 없다는 것이 답답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5개월 동안 언어 공부를 하고 다시 칠레로 돌아왔습니다.

언어 공부를 했다지만, 부족한 제 언어 실력으로는 교우들과 소통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강론 하나 쓰는 데에도 새 사제처럼 일주일 내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제는 미사와 강론뿐 아니라 여타의 성사들, 그리고 병자 영성체와 신자 방문까지 해야 했습니다. 가슴 아픈 것은 제가 부족한 탓에 힘든 시기에 놓인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가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글썽거리는 일이 있습니다. 어느 날 40대 교우의 요청으로 병자성사를 주러 갔습니다. 누워있는 교우는 60-70대 할머니처럼 보였습니다. 성사를 요청한 자매님은 분명히 친구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성사를 주고 나오면서 다시 물었더니 “친구가 맞다.”는 것입니다. 40대와 할머니가 어떻게 친구가 된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칠레의 복지정책 중에는 우리나라보다 나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우리나라의 보건소 같은 곳에서 진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병에 걸리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침대에 누워있던 자매님도 다른 사람들처럼 보건소에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진료 결과 암, 다행히 초기였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의료시설이 잘 되어있지도 않지만 돈이 없으면 진료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약값도 비쌉니다. 그 자매님도 돈이 없어 아무런 치료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진료 순서는 위급함이 우선이기 때문에, 초기 암은 치료받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살았던 빈민가에서는 발병 사실을 알고도 침대에 누워 병이 깊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고통의 시간은 흘러가고 암은 2,3기로 넘어가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때쯤이면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방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기껏 “힘내세요. 잊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라는 쉬운 말과 따뜻하게 안아주며 볼에 입을 맞추는 것 이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 이상 위로할 수 없음에 늘 죄송한 마음 가득합니다.


열세 살짜리 산모의 첫영성체

칠레는 남북의 길이가 4,600km에 이르는 한국보다 훨씬 넓은 나라입니다. 인구는 1,800만 명이고 그 가운데 80%가 신자인 가톨릭 국가입니다. 그런 나라에 지구의 반대편, ‘가톨릭 신자가 10%도 안 되는 한국에서 왜 선교사를 파견해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본 모습은 두 가지입니다.

칠레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전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많지 않은 데다 독립한 지 200년 정도 됩니다. 500년 넘게 지속된 식민지 시대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교회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유럽의 식민지배 국가들은 귀족사회입니다. 귀족의 가문들은 사회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고 그 가운데 교회도 포함되어 가문에서 성직자나 수도자를 배출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중에 고위 성직자들도 나옵니다. 그런 문화가 칠레, 적어도 산티아고 대교구 안에는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산티아고 대교구에서 활동하는 400여 명의 사제들 가운데 교구 사제는 150명 정도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좋은 가문이나 엘리트 계층에서 배출한 사제들입니다. 제가 살았던 동네처럼 빈민가에서 성직자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이 성직자, 수도자가 부족한 이유입니다.

또 하나는 문란한 성문화입니다. 우리 표현으로 문란한 것이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유분방하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제가 첫 본당에서 겪은 일입니다. 한 아이가 혼자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퉁퉁 부은 것인지 통통한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열세 살의 여자 아이였습니다. 왜일까요?

알고 보니 2주 전에 첫영성체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출산 때문에 함께 공부했던 아이들과 같이 첫영성체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자기의 아기를 안고 미사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만큼 자유분방한 성문화는 어릴 적부터 성직자, 수도자가 되는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미사에 함께하면서 느낀 또 하나는 고마움입니다. 열세 살짜리 아이가 아기를 낳았는데도 가족들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함께 축하해 주고, 공동체 또한 한 아이의 첫영성체를 온 마음으로 기뻐해 주는 것이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성당을 털러 와서 성호를 긋다

제가 3년 동안 선교사로 산 곳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외곽의 빈민가입니다. 첫 번째 본당도, 두 번째 본당도 마찬가지로 빈민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카리스마에 따라 변방선교를 택한 것입니다.

제가 속한 광주대교구에는 이런 곳이 없기 때문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생각해 보지도 못한 낯선 환경이었습니다.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배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구원에 대해 확신하느냐고 물으면, 답하기를 주저합니다. 하느님관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한국사람 고유의 겸손함(?)탓이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칠레 사람들에게 물으면 100%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교우라고 하지만, 이들에게 신앙은 삶이지 의무가 아닙니다. 당연히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하고 견진성사까지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주일의 의미를 지키거나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습니다. 신앙의 행태로만 보면, 교우라 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삶입니다.

제가 살던 본당의 주일미사 참석률은 고작 1%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언제 어느 때든 성호를 긋고, 어떤 성당을 지날 때든 성호를 긋습니다. 그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었을 때, 개신교 신자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만, 천주교 신자가 성호를 긋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외국의 선수들이 성호를 긋는 장면은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칠레는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많고 범죄율 또한 높습니다. 성당이 털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당을 털러 와서도 성호를 긋고 당연히 떠날 때도 성호를 긋지만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은 싹 쓸어갑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 성당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의 집이기에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범죄를 저지르고도 성당에 찾아와 성체를 영할 수 있는 것은 그곳이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렘브란트의 성화처럼, 아버지의 마음뿐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까지도 함께 모여 자식을 향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그저 아버지일 뿐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행태는 고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쉬 따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갖는 신앙은 일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사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우리나라 신자들은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그렇게 아빠라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그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칠레에서 보낸 선교사의 삶은, 소중한 경험을 안겨주었습니다. 한국 안에서, 한국교회 안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배우지도 못했을 많은 것을 안고 왔습니다. 저는 이제 한국에서 더 많은 것들을 나눌 수 있습니다. 칠레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면 더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저에게 힘에 겨운 것들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저 그 시간들 안에 함께해 주셨던 아버지 하느님, 그리고 교구장님을 비롯한 교우들의 영적, 물적인 지원과 그 모든 것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 진병섭 히지노 - 광주대교구 신부. 2004년에 사제품을 받았으며, 2009년부터 3년 동안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지원사제로 칠레에서 활동하다가 최근 귀국했다.

[경향잡지, 2012년 7월호, 진병섭 히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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