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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50주년 총회 최종 문서(방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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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2-13 ㅣ No.1209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50주년 총회 최종 문서(방콕 문서)


아시아 민족으로 함께하는 여정


“그리고 그들은 …… 다른 길로 갔다”(마태 2,12)

 

 

머리말

 

1.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여정을 함께 걷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니는 사명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통하여 참으로 모든 민족과 피조물 전체를 품는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아버지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 우리를 돌보시며 수많은 도전과 위기의 이 시대에 우리가 가는 여정에 새로운 길들을 열어 주신다.

 

2.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FABC) 50주년 총회는, 우리가 동방 박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함께 가는 길을 계획하고 현재의 역사 안에 보이는 하느님의 ‘별’을 따르며 또 시대의 징표를 읽으면서 여정을 시작하도록 초대한다. 동방 박사의 여정에 관한 마태오의 이야기(마태 2,1-12 참조)는 FABC 설립 50주년을 기념하여 2022년 10월 12일부터 30일까지 방콕에서 열린 FABC의 첫 번째 총회(General Assembly)의 길잡이가 되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별의 인도를 받은 동방 박사들이 어떻게 위험천만한 길을 함께 나섰는지 설명한다. 이 희년 주제인 “아시아 민족으로 함께하는 여정 ‘그리고 그들은 다른 길로 갔다’(마태 2,12)”는 여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우리는 지금이 바로, 우리가 아시아에서 모든 이 특히 변방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착취의 상처에 신음하는 어머니 지구(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49항 참조)에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사명과 직무를 식별하고 이를 참으로 쇄신할 새로운 길들에 나설 적기라고 생각한다.

 

3. 아시아는 위대한 종교 전통들의 대륙, 평화와 정의와 화합의 공동 추구에 함께하는 다양한 문화를 지닌 민족들의 대륙이다. 가톨릭 교회는 복음의 힘으로 이러한 공동의 탐구에 함께한다. 교회는 아시아의 소수 종교로서 우리 아시아 민족들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눈다. 우리는 모든 사회 세력과 단체, 시민 사회와 선의를 지닌 모든 이와 하나 되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이 현재 놓인 상황을 벗어나 모든 이의 존엄과 권리가 증진되고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도록 힘을 보탠다. 우리는, 아시아 백성이 다시 한번 희망할 수 있기를, 연대와 화합 안에 함께하는 삶을 통하여 끝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 또한 아시아의 주교이며 하느님 백성의 대표로서 우리 시대의 표징을 읽고 식별하며 이끄심을 찾고 새로운 길들을 발견하고자 한데 모였다. 우리는 아시아 선교의 특정 시기들, 곧 마테오 리치 신부와 그와 같은 선교사들이 모국의 문화에 예속된 방식이 아니라 참으로 토착화된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였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각양각색의 우리 아시아 민족 문화에 주목하는 한편, 아시아 민족들의 부각되는 현실과 도전과 희망에도 주목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서로 배우며 함께하는 여정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며 성령께서 아시아 교회들과 민족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식별하였다. 우리는 교회와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하여 겸손되이 봉사하고자 함께 예배드리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신 선물들을 풀었다. 마침내 우리는 온전히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새로운 길들로 나아갔다. 우리는 이번 총회를 통하여 새롭게 다짐하고 쇄신되었으며 활력을 다시 얻어 우리의 공동체, 본당, 교구, 주교회의는 물론 아시아 민족들과도 함께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에 나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는 사회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는 보편 교회와 일치를 이루는 이 아시아 대륙의 교회로서 더 나은 아시아, 더욱 평화롭고 정의로우며 화합하는 인류, 그리고 피조물의 보호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5.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를 재촉한다. 충만한 생명(요한 10,10 참조)과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하느님 사업에 참여하면서 불의한 삶의 구조들을 척결하고 의미와 목적을 향한 공동 탐구로 함께하는 여정을 시작하기 위하여, 동방 박사들이 그러했듯이 국경을 과감하게 뛰어넘으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우리는 동방 박사들의 여정을 뼈대로 삼아 이 FABC 50주년 총회 최종 문서를 다음과 같이 총 5부로 제시한다.

 

제1부 함께하는 여정

제2부 부각되는 아시아 현실을 바라보기

제3부 식별하기

제4부 우리의 선물을 드리기

제5부 새로운 길을 열기

 

 

제1부 함께하는 여정


시노달리타스의 부름에 응답하기

 

6. 한때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그러했듯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자 익숙한 땅을 떠난 동방 박사들은, 당신께서 몸소 하신 일 그대로 실천하도록 초대하신 하느님을 향한 공동 탐구 안에서 그들이 있던 안전지대를 떠나 ‘쉰(syn[συν]: -와 함께)-호도스(hodos[ὁδός]: 길)’ 곧 ‘함께 걷는 길 위에’ 있었다. 중국에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 구원 역사의 첫걸음을 떼신 분은 인간과 함께 에덴동산을 걷고자 앞서가신 하느님이시다(창세 3,8 참조). 그러한 ‘걷기’는, 하느님께서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신 분으로(히브 4,15 참조)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써 정점에 다다랐다.

 

7. 마태오 복음서에서 만민들의 대표로 그려진 동방 박사들은 우리 아시아 교회의 여정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역사적 상황이 우리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왔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라는 뜻의 임마누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크나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하느님 얼굴을 계시해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하는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길 자체이시다(요한 14,6 참조).

 

8. 시노달리타스를 향한 우리의 열망은 우리와 함께 걷고자 앞서가시고 또 우리가 당신과 함께 ‘겸손하게 걸어가도록’(미카 6,8 참조) 초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 행위와 더불어 생겨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성실한 탐구자와 순례자에게 당신을 알게 해 주신다. 또한 선의의 모든 이가 당신의 별을 볼 수 있게 하신다.

 

9.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처럼 우리도 때로는 이 여정을 포기하려는 유혹에 빠진다(민수 14,4 참조). 또는 사막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에 직면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 냄비를 그리워하는(탈출 16,3 참조)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막다른 길에 이르거나 넘지 못할 것 같은 장벽을 마주할 때, 우리는 이 여정을 이어 나갈 용기가 꺾인다.

 

10. 여정을 떠난 동방 박사들은 이끄심을 따르고자 하늘을 보며 스스로 길을 개척하였다. 기도하며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는 분위기는 시노드 여정에 참여하면서 계속 걸어 나가도록 우리에게 힘을 준다. 곧, 우리는 “놀라운 별, 밤의 별 …… 저희를 완전한 빛으로 이끄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계속 하늘을 바라보라고 초대받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함께하는 여정 안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다.

 

11. 그리스도의 길은 너무도 흔히 ‘십자가의 길’로만 그려지며 고통과 죽음에 영광을 돌리는 무서운 여정처럼 여겨져 왔다.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빈 무덤의 의미를 놓치고 비탄이나 혼동에 사로잡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방해받을 수 있다. 우리는 함께하는 여정 가운데 있지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중일 수도 있다(루카 24,13-35 참조).

 

12. 우리가 참된 목표를, 곧 예수님을 선포하려는 목표를 상실하는 바로 그때 우리는 포기하고픈 유혹에 빠진다. 예수님의 제자 몇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라 여겼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흩어져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하셨던 이 질문은 우리를 향한 말씀일 수도 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6)

 

13. 교회의 역사는 흩어져 떠나가는 수많은 슬픈 이야기로 가득하다. 교리 문제 때문에, 사목적 돌봄의 문제 때문에, 행정 등의 문제 때문에 우리가 함께하는 여정 대신에 저마다 제 갈 길을 가기로 결정한 이야기들이다. 그때마다 베드로 사도의 목소리가 우리를 다시 이끌어 왔다.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7).

 

14. 아시아 교회 또한 때때로 바른길을 잃고 헤매 왔다. 중국에서 마테오 리치 신부가, 인도에서 로베르토 데 노빌리 신부가 그러했듯이 새로운 길을 연 선구자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교회는 매어 놓은 닻줄을 끊어내기를 꺼리며 익숙한 길만을 좇았다. 1986년 필리핀의 에드사 혁명(민중의 힘 혁명)과 최근 미얀마를 비롯한 다른 지역들에서 보이는 예언자적 모습처럼 교회의 지지를 받은 위대한 해방 운동들이 있었지만, 때로는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침묵당하기도 하였다. 교회가 인권을 옹호하는 데에 너무 조심스러워하는 때도 있었다.

 

15. 방콕에서 열린 FABC 50주년 총회 내내 우리는 동방 박사들이 그러하였듯이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첫 번째 공의회에서 몇몇 사람이 바오로 사도의 이방인 선교에 반발하여 유다인 개종자에게만 국한하여 선교하기를 바라자 베드로 사도가 하였던 대로(사도 15장 참조) 따르도록 이끄심을 받아 왔다.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아 야고보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서 그들을 일치시키는 데에 앞장섰다(사도 15장 참조).

 

16. 교회에 제시된 새로운 경로는 시노달리타스의 길이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이루는 세 가지 근본 요소는 바로 친교, 참여, 사명이다.1)

 

17. 친교는 배척으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경향과 정반대에 있다. 세례 받은 모든 이는 동등한 품위를 지닌다. 우리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세례 받은 지체로서 모두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1베드 2,9). 교회 안에는 일등 구성원도 이등 구성원도 없다. 나아가 성령께서는 우리가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이와 또 모든 피조물과 친교를 이루도록 힘을 주신다. 세례 때에 받은 친교의 성령의 힘이 아니라면 우리는 친교의 일꾼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오로지 성령과 이루는 친교 안에서 제자 공동체로 자라나, 반죽 속의 누룩처럼 행동하는 기초 그리스도인 공동체이자 인류 공동체의 건설자가 될 수 있다.

 

18. 참여는, 그리스도의 몸이 살아 있으며 그 몸의 각 지체는 같은 성령의 숨결을 받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가장 분명한 표징이다. ‘권력 문제’는 교회에 대한 참여를 방해할 수 있다.2) 성직자 역할을 권력의 지위로 해석할 때, 그리스도 몸의 다른 지체들이 저마다 은사에 따라 고유한 역할을 할 수 없게 가로막곤 한다. 그러면 교회는 ‘성직자의’ 교회로 축소된다. 다양한 직무들을 증진하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그 직무들을 조정하는 것이 주된 역할인 수품 직무자가 지도자 역할을 독점해 버릴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 20,26) 하고 권고하신 말씀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지도자 역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주님의 지도자 역할에 동참하여 언제나 섬김의 정신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19. 끝으로 사명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자기중심성’(self-referentiality)이라고 일컬으시는 우리 세태와 정반대의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을 때에 우리는 자기중심적이 된다. 사람들이, 섬기는 교회의 지체로서 사회에 봉사하게 하기보다 교회에만 봉사하게 하려고 우리의 직무를 세운다면 우리는 자기중심적이 되어 버린다.

 

20.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수많은 ‘헤로데’로부터 도전받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유지 관리 형태’에 머물려고 하는, 곧 익숙한 경로만 고수하려는 일반적 경향을 피하여야 한다.

 

21. 이번 총회 마지막 날, 교황 사절로 참석한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은 우리에게 중대한 과제를 제시하였다. 그는 (종교와의 대화, 문화와의 대화,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라는) 삼중의 대화를 통하여 복음화에 힘쓰는 교회라는 FABC의 전망을 인식하면서, 대화는 흔히 두 상대방 사이의 역학을 의미하는 양자 간(兩者間) 대화로만 이해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멀티로그’(multilogue) 또는 이번 FABC 50주년 총회에 완전히 새로운 특징을 부여한 바로 그 시노달리타스 정신을 요구하는 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 다자간(多者間) 대화에 참여하는 새로운 길을 추구하라는 과제를 제기한 것이다. 타글레 추기경은 지역 교회 안에서 우리가 안을 향해서는(ad intra) 우리 가운데에서, 그리고 밖을 향해서는(ad extra) 우리가 일하는 다양한 아시아 사회와 맺는 관계 안에서 더욱 진지하게 대화의 영성과 생활양식, 대화의 삶을 살아갈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22. 시노달리타스는 주교들이나 서품된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만 존재하여서는 안 된다. 시노달리타스가 교회 안의 친교, 참여, 사명을 증진하는 데에 관계된다면, 우리 아시아 교회는 우리가 시노드 자문과 공동 식별의 기회를 통하여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을 식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이러한 시노드 자문과 공동 식별에는 주교들만이 아니라 그 밖의 신자들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과 교회의 삶과 사명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부문들도 참여한다. 아시아 교회는 세계주교시노드 「대륙별 단계 작업 문서」의 제목으로 사용된 우리의 “천막 터를 넓혀라.”라는 이사야서 54장 2절의 말씀을 부단히 되새겨야 한다.

 

 

제2부 부각되는 아시아 현실을 바라보기


아시아 교회가 직면한 도전들을 인식하기

 

23.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2,1-2).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방인 탐구자들을 ‘동방 박사들’ 곧 노력을 기울여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지는 지혜로운 이들이라고 특징짓는다. 이는, 그들이 지상의 일들을 묵상하고 하느님의 이끄심을 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24. 아시아 교회는 동방 박사들이 시작한 탐구와 긴밀히 연결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아시아의 관상적 특성과 비슷한 방식으로 동방 박사들을 묘사한다. 침묵 안에서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 필요한 때마다 질문하며 하느님의 이끄심과 인간적 인도를 모두 추구하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25. FABC 50주년 총회에 모인 우리 주교들은 동방 박사들처럼 각계 전문가들에게, 곧 사회학자, 환경 전문가, 경제학자, 정치학자, 신학자, 심리학자, 법률가, 활동가, 그리고 아시아 대륙에서 부각되는 현실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이들에게 인간적 인도를 구하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끄심을 청하였다. 분명 우리는 아시아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현실을 바라보는 순간순간마다 침묵 안에서 기도하였다. 매일 오전 회의는 토착화된 아침 기도와 상황에 맞는 성경 묵상으로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지속적인 기도의 분위기 덕분에 우리는 부각되는 현실을 신앙과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26. 동방 박사들은 ‘지혜로웠다.’ 하늘을 보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권고를 구하고자 주위를 둘러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아시아의 현실을 바라보는 적절한 눈을, 곧 인간적 관점인 동시에 하느님의 관점, 바로 강생하신 하느님의 관점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번 FABC 총회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며 영적 대화에 전념하면서 널리 바라보고 둘러보았다.

 

27. 마찬가지로 우리는 특히 아시아 각국을 ‘온라인 방문’하면서 우리 지역 교회들의 역사적 근원과3) 발전을 많이 되짚어 보았다. 그 가운데 일부 곧 한국, 일본, 베트남, 캄보디아 등은 말 그대로 순교자의 피로 물들었다. 각각의 ‘방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양한 아시아 국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작에 대하여, 곧 복음의 첫 씨앗을 뿌릴 땅을 마련한 첫 선교사들에 대하여 알고 감사하게 되었다.4) 각 ‘방문’은 우리가 각자의 지역 교회에서 부각되고 있고 영향을 주고 있는 희망찬 현실은 물론 고통스러운 현실에도 눈을 뜨게 하여 주었다. 또한, 거의 듣지 못하던 다양한 아시아 국가의 여러 본당과 부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28.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적대적이던 여러 아시아 국가 안에서 교회가 조용히 꽃을 피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지역 교회가 국가 수립, 인간 발전, 교육, 환경 보호, 인신매매 반대 활동5), 소셜 커뮤니케이션 등에 한 긍정적 기여를 반갑게 받아들인 정부들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한국 형제 주교들은 ‘타종교’ 대신에 ‘이웃 종교’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함으로써 우리에게 일깨움을 주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스티크랄 모스크와 자카르타 성모 승천 주교좌성당의 지하를 잇는 ‘우정 터널’을 통하여 항구한 종교 간 화합을 상징함으로써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신생 몽골 교회는 주로 비정부기구 역할을 하지만 몽골 정부와 우호적 동반 관계를 맺어 왔다.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서 교회는 정부 기구들과 시민 사회와 동반 관계를 맺어 코로나바이러스19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에 대처하면서 선제적인 접근을 해 왔다.

 

29. 한편 우리는 종교 자유의 침해, 종교 극단주의, 양심의 자유와 신앙 보존을 위협하는 법률, 종교 극단주의가 부추긴 테러 공세, 허위 정보를 뿌리려고 소셜 미디어를 동원하는 인기영합주의자와 권위주의 정부의 득세에 대응하고 있는 일부 아시아 지역 교회의 열악한 상황에 대하여 들었다. 그러한 자들은 제도적 부정부패와 인권 침해를 저질렀던 전적이 있음에도 대중의 표심을 얻었다. 역설적이게도, 권위주의적 통치에 새롭게 미혹되며 시민 자유의 무시에 관대해지는 듯하다.

 

30. 아시아의 드넓음과 깊이는 이 광대한 대륙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의 다양성을 이해하기 참으로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아시아 사회들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떨치는 현실로 우리에게 강렬히 다가온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 중요한 우선 사항을 확인하였다.

 

가. 흔히 고국에서 쫓겨난 이주민, 난민, 토착 민족

나. 사회의 못자리인 가정

다. 급변하는 아시아 사회에서 발전하는 여성의 역할

라. 교회와 사회가 직면한 사회적 성(gender) 문제

마. 새로운 세상에 직면한 젊은이들

바. 디지털 기술의 영향

사. 도시화와 세계화에 맞서 공정 경제를 증진하기

아. 우리 공동의 집을 위험에 빠뜨리는 기후 위기

자. 아시아 대륙에 화합과 평화를 가져오는 종교 간 대화

 

 

가. 흔히 고국에서 쫓겨난 이주민, 난민, 토착 민족

 

31. 베들레헴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하였던 성가정처럼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주민이 되어 국내 또는 외국으로 쫓겨나고 있다. 2050년경에는 전 세계에 4억 명 이상의 이주민들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우리는 가족을 위하여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한편, 그에 따른 두뇌 유출이라는 부작용도 알고 있다. 간호사, 의사, 복지사, 건축가, 공학자 등과 같은 전문직의 이와 같은 잇단 이민은 그들 고국의 성장 둔화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32. 아시아는 인간 가치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폭발적인 이민 산업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가정생활은 파괴되고 아이들은 버려지며 사회 구조는 점차 무너진다. 어떤 나라에서는 이주민의 송금이 나라 경제에 크게 이바지한다. 자국 발전에 손실을 줄 정도로 노동자들의 타국 이동을 장려하는 일부 개발도상국들의 정부 정책이 이것으로써 설명된다. 이주민들은 고된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돈을 고국에 송금하여 경제에 도움을 주지만, 고국 정부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데에 거의 한 푼도 투자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에는 해외에서 일하려고 땅까지 판 이들도 있다.

 

33. 많은 이가 경험하는 학대와 착취의 끔찍한 일화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노예살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우리는 특히 걸프 지역 국가들이나 좀 더 산업화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계약직 노동자로 살고 있는 인도인, 필리핀인,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을 생각한다. 그들을 받아들이는 도시와 나라의 경제에 기여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종종 달갑지 않은 이방인처럼 취급당한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가족과 떨어져 외로움과 싸우고 있다. 향수병을 다스리려 노력하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복잡한 가족 상황에서 비롯된 혼외 관계에 얽히기도 한다.

 

34. 우리는 미얀마와 그 밖의 지역에서 무력 분쟁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많은 이들과, 정치 박해를 피해서 비호 신청 중인 정치 난민들을 생각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에 불법 체류자로 들어가 추방당할까 두려워하며 이민 당국의 눈을 피해서 몸을 숨긴다. 많은 이들이 체류증도 없고 법적 지위도 없이 어떤 사회 보장도 받지 못한 채 값싼 노동력으로 착취당하고 교육이나 보건 의료와 같은 공공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없다.

 

35. 많은 이주민이 저숙련 직종에 종사한다. 이들 대부분은 정해진 계약서도 없이 불공정한 임금을 받고 인간 이하의 노동 조건을 감내한다. 정부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여러 사안 가운데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가입할 자유와 같은 이주민 노동자의 복지를 위한 통치와 법률의 부족 문제가 있다. 여성 이주민들은 대체로 최악의 괴롭힘과 학대를 겪으며 대개 보호도 거의 받지 못하고 가장 적은 임금을 받는다. 이주민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들의 고충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처지를 호소하는 국내외 단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나. 사회의 못자리인 가정

 

36. 가정은 사회의 필수 요소이다. 가정은 가치관과 덕목을 가르치는 첫 자리이고, 사랑과 희생을 처음으로 경험하며 신의와 용서를 처음으로 배우는 곳이다. 아시아인 대부분은 화목한 가정생활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렇게 단언하셨다. “젊은이들이 인격적 사회적 성숙으로 성장하는 일상적인 장소”로서 “가정은 인류 자신의 유산의 보유자”이고 “아시아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아시아 교회」[Ecclesia in Asia], 46항).

 

37. 그렇지만 아시아 가정은 오늘날 그 평온을 위협하는 여러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인적 참사, 폭력, 전쟁. 자연재해가 부른 죽음은 자녀들에게서 부모를 앗아 가기도 한다. 도심이나 해외로의 취업 이주가 가족 구성원들을 헤어지게 만든다. 다행스럽게도, 친척(조부모, 삼촌, 고모나 이모, 손위 형제자매, 사촌 등)의 지원은 남은 자녀들이 어려움에 맞서고 전통적 가치들을 전수받을 수 있게 하여 준다. 비록 아시아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양육할 때 자녀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믿지만, 일하는 어머니와 전업 주부 아버지, 한부모를 지지한다. 어디에서든 가능하다면 부모나 그 대리자들이 자녀의 교육을 책임진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중고등학교와 대학, 대학교는 사립 교육 체계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한다.

 

38. 혼종혼과 종교 간 혼인이 몇 가지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이 분명한 한편,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위한 첫 번째 학교로도 인식된다. 그들은 자기 가정의 안녕과 미래를 염려하면서 젊은이도 노인도 사회에 참여하고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일을 증진한다.

 

39. 소셜 미디어에의 접근이 원활한 지역에서는 문화적 세계화가 가정에 대한 태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아시아 교회」, 39항 참조). 나아가 정부의 인구 억제 정책들도 혼인, 출산, 양육에 대한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 급변하는 아시아 사회에서 발전하는 여성의 역할

 

40. 「FABC 50주년 총회 안내서」(FABC 50 General Conference Guide Document)는 이렇게 말한다. “여전히 우리는 아시아 전역의 많은 삶의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 폭력, 억압의 이야기를 듣는다. 여성의 지도적 역할은 경시되었고 그들의 공헌은 무시되었으며 일부 사회는 여전히 여성을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임금 격차, 소유권과 상속에 관한 법률, 소녀들의 교육 기회, 여아 낙태, 낮은 의료 접근성, 의사결정과 그 밖의 여러 분야에서의 여성을 향한 편견을 다룬 많은 보고서가 있다. 놀랍게도, 성별에 근거한 폭력은 계속 존재하며 사회적 성(gender) 문제는 대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6)

 

41. 교회 내 일부 사람들의 가부장적 사고방식 때문에, 그리고 일부 아시아 종교와 남아시아에 있는 특정 문화의 순결과 금기에 대한 관념들 때문에 아시아 여성들은 흔히 교회와 사회 안에서도 소외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교황 교서 「여성의 존엄」(Mulieris Dignitatem), 프란치스코 교황의 세계주교시노드 후속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와 같은 많은 교회 가르침이 여성의 존엄을 강조한다.7) 그런데도 여전히 이론과 실재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본당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에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은 교회 내 의사결정에서 그에 비례하여 참여하지 못한다. 여성이 가부장적 가치관과 태도를 내면화하는 것 또한 교회 내에서 여성의 존엄과 사명을 방해하는 주요 요인이다. 여성의 고통은 성차별, 계급 차별, 인종 차별로도 이어진다.

 

42. 그러나 상황은 변하고 있다. 최근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연구조사는8) 다양한 생활 여건에서 성평등 관점에 몇 가지 진보가 있었음을 주목하였다. 예를 들어, 오랜 길을 돌아 아시아 여성은 발언권을 얻고 그 타고난 가치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아시아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에게 주어졌던 책임을 맡게 되었고 가부장적 사회의 도전을 계속하여 뛰어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상기시키신다. ‘남녀의 동등한 존엄에 대한 확신에 기초하여 여성의 합법적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없는 도전적이고 심오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차원의 문제를 교회에 제기합니다’(「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04항 참조). 여성들은 그 어떤 위계적 구조도 그들을 억압하지 않을 대안 사회를 꿈꾼다.

 


라. 교회와 사회가 직면한 사회적 성(gender) 문제

 

43. 성소수자들(LGBTQI+)은 크게 소외당하며 그들의 뚜렷한 성적 지향, 성 정체성과 표현에 기반한 여러 형태의 낙인과 차별을 맞닥뜨린다.9) 예컨대, 조지아, 싱가포르, 태국은 동성애자 관계에 관대한 반면, 아프가니스탄, 브루나이, 이란,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 에미리트 연합국, 예멘에서는 동성애 행위를 사형으로 처벌하여야 한다고 단언하는 것이다.10) 이와 비슷하게, 2021년 탈레반의 아프카니스탄 점령 이후로 성소수자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11)

 

44. 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2019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응답자의 45퍼센트가 이 지역에서 동성혼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믿고 있는 반면에, 31퍼센트는 이를 단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12) 사회적 성 문제는 참으로 논쟁적인 사안이기에, 감수성과 식별과 주의를 크게 기울여 다루어야 한다.

 

 

마. 새로운 세상에 직면한 젊은이들

 

45. 국제 연합에 따르면 15세부터 24세 사이의 사람들로 정의되는 젊은이는 현재 세계 인구의 약 18퍼센트를 차지한다. 오늘날 전 세계 12억 명의 젊은이 가운데 대다수가 개발도상국에 살고 있다. 2005년에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전 세계 젊은이의 61.8퍼센트가 살았다. 최근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다양한 인구학적 요인 때문에 국가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15세부터 24세 사이인 ‘청년 인구 팽창’을 목격하여 왔다.

 

46. 몇 가지 요인들이 복합된 결과, 오늘날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젊은이들은 유례없이 안정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발전에 참여하며 그 혜택을 누린다. 이 지역 젊은이들의 초등 교육 수료 비율은 이전 세대에 비하여 높다. 고등 교육 단계 등록률은 남녀 각각 18퍼센트와 15퍼센트로, 젊은이들이 더욱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서 젊은이들은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없는 소극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중요하면서 동등한 참여자로서 그 지방과 국가와 지역의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왔다. “아시아의 젊은이들은 흔히 여러 나라에서 사회적 종교적 변화의 선봉에 서 있으면서, 다양한 사회 해방과 옹호 운동을 이끌고 교회의 쇄신 운동에 참여하며 교회의 사목 프로그램과 기초 교회 공동체 운동의 지도자로 떠오른다”(FABC 제8차 정기 총회 최종 문서, 33항). 아시아 젊은이들은, “새로운 종교 운동들의 발생이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처럼, 영적 가치들을 위한 깊은 목마름을 체험하고 있다”(「아시아 교회」, 6항). 우리는 젊은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 형제애를 향한 꿈을 ……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여 이 세상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진정한 바람을 …… 특별한 예술적 감수성을 ……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갈망을 …… 소통을 향한 깊은 욕구를 ……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깊은 바람을”(「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84항) 볼 수 있다. 이는 “격려와 지혜와 용기를 주는 한마디 말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출발점, 내적 활력”(「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84항)이다.

 

47. 오늘날 젊은이들은 수많은 혜택과 이점을 누리지만, 새로운 기회와 큰 도전이 공존하는 복잡하고 격변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있기도 하다. 첨예한 경쟁이 이 지역 시장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젊은이들은 흔히 취약한 상황에 머물러, 변화하는 경제 사회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아시아 노동 인구의 20.8퍼센트가 젊은이였지만, 실업자의 거의 절반(49.1퍼센트)도 젊은이였다. 장기 실업은 비행이나 약물 중독과 같은 폭넓은 사회적 병폐로 확산된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병폐에 빠져들기 쉽고, 이는 흔히 정치적 불안과 폭력을 부추긴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약물 남용과 그 밖의 건강상 위험에 특히 많이 노출된다.

 

48.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청소년 ‧ 청년 사목은 과거의 관행들을 개선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젊은이들을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려는 사목자의 진정성과 의욕을 보여 줄 새로운 접근법들과 변화된 관점들, 진화하는 구조들의 추구도 포함한다. 나아가 젊은이들은 교회의 미래로 불리기보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자리매김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틀림없이, “여러분의 젊음은 ‘과도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지금이며,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178항) 하고 말씀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지를 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바. 디지털 기술의 영향

 

49. 제삼천년기가 시작된 이래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과 디지털 상호작용의 세상은 빠르게 상승 곡선을 그리며 발전하여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디지털화는 거의 모든 생활 측면에 영향을 끼쳐 왔고 수많은 방식으로 효율성과 생산성을 늘려 왔다.

 

50. 그러나 이점들과 더불어 도전들 또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화는 개인 보안, 몰개성화, 증오 범죄, 가짜 뉴스, 사회적 단절, 괴롭힘과 중독에 관한 문제들을 낳는다. 게다가 이러한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는 기술을 소유한 이들이 지배한다. 그들은 데이터를 소유하고 소비자들에게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돈을 번다. 그들은 광고를 고삐로 자신들이 유통을 허락한 내러티브(narratives)를 통제한다. 또한 우리는, 정부와 기업이 권력을 행사하고 문화를 좌우하려고 디지털화를 이용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은 인터넷 기반 서비스(교육, 금융, 정부, 종교 등)에 접근 가능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 드러나는 디지털 격차이다. 인공 지능 분야의 빠른 발전 또한 인간 개인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기한다. 더 새로워진 디지털 가상 세계에 들어갈 때에 우리는 이 모든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51. 우리는 특히 디지털 기술이 젊은이들의 전인적 성장에 악영향을 미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거나 안전감을 얻곤 한다. 최근 연구 결과들은 젊은이에 대한 디지털 매체의 심각한 영향 가운데 하나이자 경종을 울리는 요인으로 ‘젊은이들 사이 공감력의 미성숙’을 지적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려스러운 점은 젊은이들의 정신에 논리, 추론, 정서, 분석, 성찰의 능력을 개발하는 데에 필수적인 ‘진지한 독서’에 참여하는 힘을 디지털 매체가 심각하게 저하시켜 왔다는 인식이다.

 

52. 가톨릭 매체 종사자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 또한 영향력 있는 사람들(influencers: 인플루언서)이며 선포하여야만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을 촉구하였다. 효과적인 디지털 복음화를 위한 그들의 제안에는 지역 교회들 안에 교회 고유의 안전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구축하고 소셜 커뮤니케이션 팀을 구성하는 일을 포함한다. 가톨릭 매체 종사자들은 디지털 세상에서 이야기가 전략이라는 사실을 교회 지도자들에게 상기시키며, 하느님 말씀을 더욱 효과적으로 민족들의 삶에 접목하기 위하여 이야기와 이미지, 은유와 ‘좋아요’의 힘을 활용하는 창의적인 교리 교육을 제안하였다. 마침내, 젊은이들 이른바 ‘디지털 원주민들’이 이러한 사목을 이끌 것으로 기대한다.

 

 

사. 도시화와 세계화에 맞서는 공정 경제

 

53. 오늘날 전 세계는 커다란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고, 세계화로 불리는 이러한 과정은 문화의 동질화를 가져왔다. 아시아 백성의 다문화적 삶의 방식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이 현상은 ‘문화적 세계화’로 명명되었다. 한편, 세계의 다양한 나라의 경제를 하나로 묶는 ‘경제적 세계화’도 존재한다. 우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1997년에 발표하신 1998년 제31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되새긴다. “1989년부터 시작된 광대한 지정학적 변화는 사회 경제 분야에 실질적인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경제와 재정의 세계화는 이제 현실이며, 우리는 정보 기술과 관련된 급속한 진보의 결과를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잡한 문제들과 더불어 커다란 희망을 안고 있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에 서 있습니다.”

 

54. 세계화는 사람들이 세계 어디든 지진이나 자연재해의 피해를 입은 나라를 돕고자 달려갈 수 있게 함으로써 세상을 하나 되게 하였다. 다른 한편, 세계화는 세상을 갈라놓았고, 빈부 격차를 벌려 놓았다. 모든 이를 품어 안는 포용적인 세상이 되기는커녕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배제하였다. 돈-이윤-시장은 오늘날 결정적인 경제 목표가 되는 듯하다. 더 큰 부를 향한 탐욕으로 세계화 세력은 가난한 이들의 자원을 전유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하고 있다. 이 모두가 개발과 발전과 성장이라는 미명으로 치장된다!

 

55. 인도의 전임 총리이자 경제학자 만모한 싱(Manmohan Singh) 박사가 인도에 관하여 말한 내용은 참으로 아시아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곧 우리는 “성장을 일으키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 성장에 비례하는 성공을 포용에서도 이룩하여야 하지 않을까?!”13)

 

56. 아시아 교회 앞에 놓인 도전은 바로 이 문제 곧 어떻게 하면 경제가 소수의 ‘최상위층’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선을 향하게 하는가이다. 아시아 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2001년 4월 27일 교황청 사회학술원에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교회는 절대다수의 인류에게 해를 끼치면서 과학, 기술, 소통, 지구 자원을 지배하는 부유한 엘리트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이 과정에서 승리자가 되도록 보장하고자 선의의 모든 이와 함께 계속 일해 나갈 것입니다. 교회는 온전한 인간 개인과 모든 이에게 봉사하게 될 세계화를 증진하고자 사회 안의 모든 창의적 요소가 결집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14)

 


아. 우리 공동의 집을 위험에 빠뜨리는 기후 위기

 

57. 동방 박사들이 21세기에 살았다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헤로데만이 아니라 극심한 기후 조건, 홍수, 태풍, 산불, 해수면 상승, 식량 부족, 바이러스 변이, 신종 질병도 상대하여야 했을 것이다. 새로 나신 왕을 찾아가는 길에 이 모든 것이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58. 실제로 우리는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와 그와 관련된 생태 위기가 21세기의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장기적 도전임을 인식한다. 극한 기후 현상, 가뭄, 태풍, 삼림 파괴와 산불, 물 사용을 둘러싼 분쟁 때문에 무수한 아시아인이 이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물 접근성은 식량 공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시아에 보금자리를 둔 많은 나라들이 기후 변화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해수면 상승, 대기와 토양과 수질 오염, ‘쓰고 버리는 사고방식’, 생물 다양성 손실, 폐기물 관리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이미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자연과 후손들을 거스르는 범죄이다.

 

59.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2). FABC 50주년 총회는 이번 총회에 초청된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어머니 지구가 새롭고 더 나은 세상의 탄생을 준비하면서 진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착취의 상처로 신음하는 중’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60.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하여, 자연의 고통을 그리고 기후 변화 피해자들의 고통을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삼을 수 있을 때라야(「찬미받으소서」, 19항 참조) 비로소 우리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자본주의적 생산 모델을 거부하는 동시에 우리의 생활양식을 개혁하는 데에 절실히 필요한 조치를 택할 수 있을 것임을 일깨우신다.

 

61. 우리가 스스로 맞서야만 할 고통을 통하여, 기후 변화로 말미암아 현재와 미래의 존엄을 모두 빼앗긴 수많은 아시아 어린이와 젊은이의 얼굴에서 우리는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님을 알아뵙게 될 것이다. 자녀들에게 편안한 집, 충분한 영양, 적절한 건강 관리나 교육을 제공할 수 없는 수많은 부모들의 얼굴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고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기후 변화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 탓에 이주로 내몰리는 처지가 된 부모들에게서, 또는 전쟁이나 무력 분쟁의 폭력, 물 부족과 유독 폐기물 처리를 둘러싼 다툼의 결과로 피신하여야 하는 부모들에게서 마리아와 요셉의 고통을 본다.

 

62. 우리 아시아 대륙의 이웃 종교들을 비롯하여 선의의 모든 사회 단체, 정치와 경제 분야책임자들과 함께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는 통합 사목 활동을 통하여 더 나은 아시아를 향하여 또 인류의 행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 공동의 여정에 새로운 길들을 열 수 있다(「찬미받으소서」, 49항 참조).

 

63. 참으로 아시아 교회는 생태적 회개를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인간의 환경 착취가 촉발한 자연 재앙에 가장 속수무책인 가난한 이들에게 현 세대가 저지르고 있는 큰 불의를 깨닫게 된다. 생태적 회개는 또한 우리가 자연을 파괴할 때 우리 스스로도 파괴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우리 공동의 집을 섬기는 모든 지구 피조물과 살아 있는 유기체와 우리가 본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피조물의 관리자로서 역할을 시작할 수 있다.

 


자. 아시아 대륙에 화합과 평화를 가져오는 종교간 대화

 

64. 아시아는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땅이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신도 등 세계의 일부 종교가 아시아에서 생겨났다. 아시아의 이러한 다종교 상황에서 각각의 종교가 고유한 자리와 자율권을 찾는 가운데 경쟁의식이 개입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의 정신을 따르며, 타종교들과 경쟁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증인이 되고자 그리스도교 신앙을 되살리고 저마다의 삶 안에서 복음적 가치를 드러내는 데에 오히려 관심을 쏟아야 한다.

 

65. 세계화, 소비주의, 물질주의, 비인간화, 자연 착취의 상황에서 수많은 변화와 도전을 마주한 그리스도교가 타종교들과 또 현대 세계의 세계관들과 공존하여야 한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 저마다가 가치관, 헌신, 아름다움, 기쁨, 행복의 측면에서 세상에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한다. 실제로, 상대주의 가치에 마비된 세상에 실행할 수 있는 윤리적 도덕적 지침을 줄 수 있는 포괄적 세계관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한 까닭에 다가오는 수십 년은 그리스도교에 크나큰 도전이자 절호의 기회이다.

 

 

제3부 식별하기


성령께서 아시아 교회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66. 마태오는 찾는 이들을 “동방 박사”, 곧 시간을 내어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보는 지혜와 영감을 지닌 이들이라고 특징짓는다. 이는 그들이 세상에 대한 염려를 성찰하고 하늘의 인도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67.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았고 함께 여행하였으며 그들의 진짜 목적지인 베들레헴과 가까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 전한다(마태 2,1 참조). 마태오는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찾는 그들의 일이 당시 유다인의 임금이었던 헤로데의 이목을 끌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마태 2,3). 헤로데 임금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이 “메시아”가 “태어날 곳”(마태 2,4)이 어디인지 찾고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묻는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성경을 찾아보고 미카서 5장 1절을 인용하여, 이 이방인들이 찾고 있는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의 탄생이 예언된 곳으로 “유다 베들레헴”을 꼽는다. 여기까지 이 동방 박사들을 인도하여 준 것은 별이었기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었다”(마태 2,7).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이렇게 일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와서 알려 주시오”(마태 2,8). 동방 박사들은 아기를 찾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헤로데에게 아기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정보를 알려야 하는가? 이 질문은 진지한 식별이 필요하였다.

 

68. 아시아 교회는 헤로데와 같은 정치적 인물들, 예루살렘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지역 종교 지도자들과 수많은 유사한 만남을 이어왔다. 초기 선교사들 또한 그들의 존재만으로 위협을 느낀 정치 종교 권위자들을 만났다. 오늘날의 선교사들도 비슷한 어려움에 놓인다. 한편 ‘동반자 정신’과 ‘협력’을 보여 주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상황들에 어떻게 대처할지 끊임없는 식별이 요구된다.

 

69.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식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령께 도유를 받는 신자 전체는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주교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에, 온 백성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의 중개로 이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교회 헌장 12항).

 

70. 우리는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시노드 총회 「편람」 제2조 제2항에서 공동 식별 과정에 관한 몇 가지 통찰을 얻었다. 「편람」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과정에는 우리 서로에게, 우리 신앙 전통에, 시대의 표징에 귀 기울이는 일이 수반된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식별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식별은 일회적 행사가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더 크신 하느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의 방식이다”(「편람」, 2.2.).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이러한 과정을 따랐다. 그리하여 사도들은 식별의 전 과정 끝에 내린 결정이 성령과 사도들의 공동 결정이었다고 확신에 차 말할 수 있었다(사도 15,28 참조).

 

71.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를 본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을 향하여(묵시 1,4 참조) 이렇게 말한다.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묵시 3,22). 우리는 이번 FABC 총회 내내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성령께서 우리 시대의 아시아 교회들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고 자문하여 보았다. 특히 우리가 함께 식별한 아홉 가지 도전에 어떻게 응답할지 자문하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 도전에 응답하도록 함께 부름받았음을 느낀다.

 

가. 이주민, 난민, 토착민을 동반하기

나. 가정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기

다. 아시아 교회의 여성들에게 새로운 지도자 역할을 열어 주기

라. 사회적 성 문제 다루기

마. 젊은이들의 사목자

바. 디지털 기술의 효과적인 사용을 장려하기

사. 도시화와 세계화의 상황에서 포용하는 성장에 기초한 경제를 촉진하기

아.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기

자. 아시아의 대화와 화해를 위한 도구로서 다리를 놓는 사람이자 다리가 되기

 

 

가. 이주민, 난민, 토착민을 동반하기

 

72. 수많은 국내외 이주민들은 신앙을 ‘영적 생존 장비’의 일부로 가져오는 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들이다. 이들은 한데 모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이들을 받아들인 나라들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에 그러하다. 이들은 기도 모임과 성경 연구 모임에 참여하고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대중 신심을 함께 표현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지원 단체를 꾸린다. 고국에서 능동적 신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외국 땅에서 마주한 도전과 어려운 처지에 심리적 영적으로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신앙에 이끌린다. 이들은 이주 사목 담당 사제와 그 사목을 위안의 원천이며 피난과 연대의 자리로 여긴다.

 

73. 우리는 이주민과 난민, 실향민에게 문을 열어 준 지역 교회들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그들에게 예배 장소를 제공하고, 그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그들의 권리를 수호하며, 인신매매와 성 학대 피해자들에게 사목적 배려를 제공하려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본당들에서 교훈을 얻었다. 당연하게도, 이민과 인신매매와 관련된 문제들은 매우 중대한 문제들이어서 종종 정부와 비정부기구, 시민 사회와 동반자 관계가 요구된다. 지역 교회들이 선제적인 동반자 관계를 맺어 이주민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사목적 돌봄의 필요에 응답하는 공동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훨씬 더 큰 효과를 얻을 것이다. 특히 우리는 그러한 필요에 대처하도록 성직 자치단을 설립하자는 필리핀 주교들의 제안에 주목하였다.

 

74.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신앙의 실천이 급격히 줄어든 주요 ‘가톨릭’ 국가들에서 이주민 신자들은 신앙의 열기가 이미 식어 버린 본당에 새로운 불꽃을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시아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그들이 열심한 신앙 실천이나 성모 신심,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9일 동안 드리는 미사,15) 사순과 부활 시기 관습, 주보 성인 축일 등 자신들의 전통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하느님 섭리에 따라 선교사가 되어 가는지를 생각하여 본다. 멀리 드넓게 퍼져 있는 아시아의 대중 신심은 ‘검은 나자렛 예수님’(Black Nazarene) 행렬이나 아기 예수 신심, 싱가포르의 영원한 도움이신 성모님께 바치는 9일 기도, 또는 인도 벨란카니의 성모님, 인도 사르다나의 성모 대성전, 베트남 라방의 성모님, 파키스탄의 마리아마바드 성지, 또는 스리랑카 마두후의 성모님을 향한 성지 순례 등이 있다. 아시아 출신 가톨릭 이주민들은 숨은 보화와도 같은 그들 특유의 신심을 품고 가서 전 세계 여러 나라에 멀리 드넓게 계속 전하고 있다.

 

75. 교황 성하께서는 지난해에 다음과 같은 강론 말씀으로 로마 가톨릭 이주민 공동체를 격려하셨다. “여러분은 복음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 그리고 이 기쁨이 여러분 민족 안에서 …… 여러분의 눈에서, 여러분의 얼굴에서, 여러분의 노래와 기도에서 뚜렷이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그 기쁨으로 타국 땅에 신앙을 전합니다.”16) 교황 성하께서는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어디로 가든 신앙의 씨앗을 뿌린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신중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겸손하고 드러나지 않으며 용기 있고 인내하는 모습을 통한 …… 신앙의 증거”로 여기셨다.

 

76. 교황 성하께서는 복음의 기쁨을 가져가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 영웅적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선교 제자로 변모하는 아시아 가톨릭 이주민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셨다! 이에 우리는 아시아 가톨릭 이주민들을 양성하고 격려하는 데에 기여하고자 FABC를 통하여 할 수 있는 일을 결의하였다.

 

77. 우리의 보살핌과 지원이 필요한 특별 범주의 사람들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소외되고 쫓겨나고 있는 토착민들이 있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우리는 토착민들의 곤경에 대한 공감과 인식이 자라나는 것을 보아 왔다. 2007년 국제 연합 총회에서 ‘원주민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고, 아시아에는 자기 정체성을 밝힌 원주민 집단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일반적으로 토착민들은 한 지역에 맨 먼저 자리 잡은 사람들이고 무한한 문화적 풍요로움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생태적 사회적 재난을 겪고 있는 세계화된 세상에서 더욱 인간적인 삶을 위한 지혜와 관습을 전 세계에 제공한다. 토착민들의 지식과, 기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농업 풍습 또한 세계 각지에서 점점 더 인정받고 있다. 그들이 맞닥뜨린 사회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생태적 도전들은 결국 더욱 큰 동반과 지원을 요구할 것이다. 교회의 예언자적 전통을 떠올리며 교회는 착취의 상황에서 토착민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사회 문화적 분쟁 상황에서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토착민들을 더욱 힘차게 동반하고 지원할 길을 찾으며 그들의 기본권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협력자이며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교회는 아시아의 서로 다른 토착 문화들을, 문화적으로 공감하는 복음화를 위한 창의적인 방식으로 더욱더 그리스도 신앙을 드러내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17)

 

 

나. 가정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기

 

78.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참되고 안정적인 문화를 위한 핵심 요소이다. 나아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가정은 아시아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 노인과 병자들에 대한 효도와 사랑과 배려,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조화와 같은 가정적 가치들은 아시아의 모든 문화와 종교 전통들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아시아 교회」, 46항).

 

79. 참으로 ‘가정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증언하고 선포하여야 하는 특별한 소명이 있다.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최초의 그리고 주된 교육자로서 공동 책임의 정신으로 신앙 실천에 모범을 보여 준다. 부모는 자녀들의 첫 교리교사로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편, 자녀들이 실천한 복음을 그들에게서 전수받기도 한다! 이러한 가정은 다른 많은 가정과 이웃에게 복음 선포자가 되어 복음의 빛을 전한다(「가정 공동체」[Familiaris Consortio], 각주 123 참조).

 

80. FABC 50주년 총회는 다음과 같은 가정생활과 가정 직무의 주요 측면들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도록 이끌었다.

 

1) 어린이와 젊은이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는 자기 자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조언자인 부모에 대한 사목이 필요하다. 나아가 자녀의 신앙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성사를 받는 때이다.

 

2) 본당 내 가정 운동 단체는 신앙의 교사 역할을 하도록 부모들을 가르치고 지원할 수 있다. 또한 본당 가정 셀 모임은 기초 교회 공동체, 여성 셀 모임, 그리고 위기의 가정을 지원하는 그 밖의 본당 단체와 관계망을 구축할 수 있다.

 

3) 디지털 세계는 가정을 공략하기 쉬운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가정 안의 신앙을 굳건히 하고자 할 때에 이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4) 혼종혼인 부부가 그들 자녀와 함께 교회 생활에 인도되어 통합되려면 특별한 사목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5) 책임 있는 부모 역할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각별히 증진하여야 한다.

 

6) 세대 간 조언자 관계를 증진하여야 한다.

 

7) 가정들이 관계를 맺고 심화하는 기술을 기르기 위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는 혼인 전후 교육 프로그램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8) 독신 남녀, 성소수자, 장년층, 노약자, 유가족, 병자와 장애인, 위기에 놓인 개인과 가정 등 취약한 구성원에 대한 특별한 지원과 돌봄이 필요할 것이다.

 

81.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이가 상호 존중과 조화 안에 더불어 살아가는 가정, 부모들이 스스로를 위해서는 물론 자녀들이 인간으로도 그리스도인으로도 성장 발달하도록 돕고자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자리인 가정을 증진하는 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우리는 노인이 존경받고 생명의 문화가 고양되는 아시아 사회 구축에 힘쓴다. 우리는 이주민이 통합되고 난민이 그들 가족과 재결합하는 아시아 사회 건설을 희망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가정들이 다른 가정들을 돕고 노인들이 젊은 부부들의 조언자가 되는 ‘사랑의 문명’을 이루는 것이며, 현실이든 가상이든 그 안에서 어린이도 젊은이도 점차 성숙한 시민으로 자라나 마침내 선교 제자로 성장하는 안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다. 아시아 교회의 여성들에게 새로운 지도자 역할을 열어 주기

 

82. 세계 여자 수도회 장상 연합회 회의에서 교황청 축성생활회와 사도생활단부 장관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왜 교회와 사회에서 성평등을 체험하기 어렵습니까?”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남자와 여자로서 함께 걷는 문제는 깊이 파고들어 더욱 많이 더욱 깊이 탐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근본적인 통찰로 돌아가서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마땅합니다. ‘하느님 모습으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남녀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에만 하느님 모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느님 안에서 일치와 다양성은 결코 문제였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역사를 통틀어 큰 문제가 되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이러한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

 

83.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개인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개인이 된다는 것의 본질은 개별화와 관련된다. 나는 타인과 다르다. 그러나 나는 타인 없이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없다. 생명이 탄생하려면 관계가 필요하다. 성장하려면 관계가 필요하다. 영성 생활도 과연 관계가 없이 가능한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관계들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

 

84. FABC 50주년 총회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언하였다.

 

1) 돌봄은 가톨릭 신학, 교회 역사, 복음을 전하는 교회 사명의 중요한 일부이다. 그러한 사명 안에서 우리는 공동선의 정신으로 각자에게 자기 몫을 돌려주려고 의롭게 노력하면서 다른 이들 특히 여성과 같은 취약한 이들을 돌보도록 부름받았다. 돌봄과 정의는 여성이 교회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며 교회가 끊임없이 증진하여야 하는 가치이다.

 

2) 사회적 우애와 정치적 애덕의 개념에 기반하여(사회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88, 169항 참조), 교회 기관들은 저임금 여성 노동자, 외국인 가사 노동자, 소수 인종, 학대 피해 여성과 그 밖의 취약 여성들에게 사목적 돌봄을 제공하여야 한다.

 

3) 성모 마리아의 마니피캇에 기반하여(루카 1,46-55 참조), 여성이 해방의 객체이자 주체라고 확언하여야 한다. 여성은 역사의 주체이며 변화의 주역이다.

 

4) 교회는 여성에게 힘을 실어 주고 여성 자립 단체들을 지원하며 사회 변화를 지지함으로써 여성과의 연대를 확인하는 다양한 길들을 채택하여야 한다. 참으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존엄은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지어졌다는 확언에서 비롯된다. 나아가 이는 여성과 남성이 지도자 역할을 비롯하여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함께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으로 옮겨져야 한다.

 

85. 아시아 교회는 여성의 체험에 귀 기울여야 하고, 여성은 그들이 경청 받으며 교회의 삶에 기여하여 왔다는 사실을 느껴야 한다. 삶으로 보여 준 실천이 신학이 되는 축이 된다면, 여성의 삶의 체험이 배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억압 구조에 저항하는 여성의 투쟁이 기존의 아시아 신학을 재구성할 새로운 자리를 열어 준다.

 

 

라. 사회적 성 문제 다루기

 

86.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최근 기자 회견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에게 성소수자들을 교회 안으로 환대하라고 요청하시면서 동성애를 범죄로 여기는 법률은 부당하다고 비판하셨다.

 

87. 교황께서 하신 말씀은 동성애자 권리 옹호자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로 환호받으며, 성소수자에 대한 그분의 전반적 입장과 또한 가톨릭 교회가 차별 없이 모든 이를 환대하여야 한다는 그분의 신념에 부합한다고 여겨졌다. 교황께서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2358항을 인용하였다. “간과할 수 없는 숫자의 남녀가 깊이 뿌리박힌 동성애 성향을 보이고 있다. 객관적으로 무질서인 이 성향은 그들 대부분에게는 시련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존중하고 동정하며 친절하게 대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에게 어떤 부당한 차별의 기미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들의 처지에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들을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결합시키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88. 동성애 옹호 단체인 인간 존엄 협회(The Human Dignity Trust)에 따르면, 전 세계 약 67개국은 합의에 따른 동성 성행위를 범죄로 간주한다. 그중에서 11개국은 사형을 선고할 수 있거나 실제로 선고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러한 법은 시행되지 않은 곳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한 추행, 낙인찍기, 폭력에 근거가 된다.

 

89. 다른 성적 지향을 지닌 이들은 주님의 식탁에서 일어나는 차별에 대하여 종종 불만을 제기하여 왔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례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1324항 참조),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이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성인이나 죄인이나 모든 이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사랑의 성사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맺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통하여 모든 이에게 베푸는 하느님 은총이다. 성체는 우리처럼 갈라진 백성을 위하여 쪼개어져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몸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변화되고 또 그리스도로,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교회로 변모될 수 있다. 참으로 주님만이 우리의 갈라짐을 치유하여 온전한 모습을 되찾게 하여 주실 수 있다.

 

 

마. 젊은이들의 사목자

 

90. 발달 과정에서 가장 힘겨운 시기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여정 안에서 자라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인도와 지원이 필요하다. 교회 안의 젊은이들에게 주님과 이루는 관계 안에서 자라나도록 가르치는 일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젊은이들을 사목할 때에 우리는, 그들이 미래의 지도자가 되도록 준비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데에 기여하도록 그들에게 권한도 부여한다. 그리스도를 향하는 젊은이들을 북돋는 것은 언제나 교회의 관심사였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참여를 환영하는 교회, 그들의 실패를 참아 주고 용서하는 교회, 그들 삶의 선택을 이끌어 주며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그리스도인 어른이 되도록 도와주는 교회가 필요하다. 이러한 영감을 주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 “‘교회는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 들을 모두 이러한 ′동행의 예술′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 예술은 우리가 다른 이의 거룩한 땅에서 우리의 신을 벗으라고 가르칩니다”(탈출 3,5 참조)’(「복음의 기쁨」, 169항). 따라서 교회는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젊은이들과의 동행을 추구한다.22)

 

91. 교회는 청년 사목 프로그램과 활동과 기능을 공동체, 본당, 지구, 교구 등 모든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 이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요건들이 충족되고 가정, 공동체, 교회에 그들을 통합하도록 보장하려는 것이다.

 

92. FABC 50주년 총회는 청년 사목의 몇 가지 핵심 분야들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였다.

 

1) 신앙 교육: 신앙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신앙 체험과 깨달음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면 젊은이들은 세상의 물질주의적 가치에 또 타 교파나 단체의 가르침에 취약해질 위험이 있다.

 

2) 진로 안내: 자신의 성소와 삶의 목적을 식별하는 맥락에서 진로 안내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3) 상담: 젊은이들은 그들 부모가 자라난 세계와 너무도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젊은이도 그들 부모도 모두 이 두 다른 세계의 간극을 이어주는 상담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은 또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헤쳐 나가도록 도움을 줄 전문가의 지도가 필요하다.

 

4) 봉사 활동과 참여: 젊은이들은 그들이 살고 싶은 세상과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일원으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젊은이들은 자기 이웃과 사회 안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서부터 출발하여 시민과 정치 문제에도 참여하여야 한다.

 

93. 수도회는 젊은 회원들을 섬기며 그들이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도록 도와줄 그리스도 닮은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몸이 성장하도록 젊은이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젊은이들이 교육 과정 동안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그들을 준비시킬 것이다.

 

94. FABC 50주년 총회가 미성년자와 취약한 성인 보호의 필요성에 관하여 성찰한 것은 바로 젊은이에 대한 돌봄의 맥락에서였다. 「FABC 50주년 총회 안내서」는 이렇게 말한다. “특히 ‘침묵의 문화’가 이 지역에 만연한 때, 교회는 미성년자의 성적 학대 추문으로도 도전받는다. 권력의 남용(권위의 오용)도 교회가 씨름하여야 하는 도전들에 덧붙여진다.”

 

95. 아동 존중과 노인 공경의 가치는 아시아 가정의 특색과 같다. 교회가 양성,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변화, 취약한 이들의 보호에 앞장서기 등을 통하여 장기적 변화를 이루려는 노력에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계획 가운데 다수가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하여 비정부기구와 시민 사회 단체와의 협력과 관계망 구축을 통하여 시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동반자 관계는,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성령의 힘으로 우리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교회(교회 헌장 5항 참조)가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모든 민족에게 봉사하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 디지털 기술의 효과적인 사용을 장려하기

 

96. 과학자들은 ‘4차 산업 혁명’23)에 대해서 언급해 왔다. 현재 아시아에는 22억 명의 온라인 사용자가 있고 그중에 95퍼센트가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다. 결코 가상 만남이 현실의 대면 만남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정보 기술의 빠른 발전과 디지털 혁명이 끊임없이 우리 생활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가져오는 이와 같은 현실에 우리는 앞을 내다보는 선교적 응답을 주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 사명을 위하여 디지털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도록 ‘디지털 이주민’ 세대가 디지털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97.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디지털 기술의 힘과 유용성을 강조하였고, 이는 봉쇄와 제한 조치가 시행 중임에도 본당이 영적 도움과 신앙 교육을 온라인으로 제공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98. 그러나 이처럼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는 기술을 소유한 이들이 지배한다. 그들은 데이터를 소유하고 그 데이터에 대한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돈을 번다. 그들은 광고를 고삐로 자신들이 유통을 허락한 내러티브를 통제한다. 가톨릭 매체 종사자들은 교회 지도자들 또한 인플루언서이며 선포하여야만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식하라고 촉구하였다.

 

99. 우리는 효과적인 디지털 복음화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여기에는 지역 교회들 안에 교회 고유의 안전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 구축과 소셜 커뮤니케이션 팀의 구성이 포함된다. 나아가 우리는 디지털 세상에서 이야기가 전략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더욱 효과적으로 민족들의 삶에 접목하여 주는 이야기와 이미지와 은유의 힘을 활용하는 창의적인 교리 교육을 권장한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임무를 이끌어가리라 촉망받는 이들은 이른바 ‘디지털 원주민’인 젊은이들이다.

 

 

사. 도시화와 세계화의 상황에서 포용하는 성장에 기초한 경제를 촉진하기

 

100. 세계화가 오늘날 세계 경제를 좌우하고 있다. 「FABC 50주년 총회 안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나 자기 잇속만 챙기는 정치권력 투쟁이 세계화를 끌고 갈 때, 소수의 지배 세력과 초국적 기업의 손아귀에 경제 권력과 정치권력이 집중될 수 있다. 이는 약소국, 중소기업, 토착민, 빈곤층, 취약 계층, 환경을 희생시키면서, 세계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서 다자주의를 경시하게 하는 원인이다. 흔히 정부와 결탁한 초국적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목표로, 세계 자유주의 시장을 이끌어야 할 규칙과 통제의 상대적 부재를 이용한다. …… 또한 이윤과 무한 성장에 대한 탐욕은 아시아의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비대칭적인 발전 과정으로 이어진다.”

 

101. 현 경제 질서는 가난한 이들의 편이 아니라, 오히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마음을 울리는 말씀을 명심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인간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분명한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제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 오늘날 모든 것이 경쟁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면서 힘없는 이는 힘센 자에게 먹히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배척되고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자리도, 희망도, 현실을 벗어날 방법도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53항).

 

102.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22년 5월 25일 세계 연대 기금 이사진에 보낸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경제는 변화되어야 하며, 그것도 당장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주의 경제에서 대중들의 공유 경제 곧 공동체 경제로 이동하여야 합니다. …… 우리는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경제 형태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또한 공산주의에서 비롯된 경제 행태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103. 도시화와 세계화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여겨지기에, 교회 지도자들은 아시아에서 부각되는 이 흐름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갖추고 상황에 대처하는 사목적 준비를 시급히 갖추어야 한다. 도시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있는 장소이기에, 아시아의 증가하는 그리스도인 도시민들은 양성을 받아, 도시민 전체에 효과적으로 봉사하고자 소금과 빛이 되는 증인 공동체가 되도록 깊은 믿음과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신약성경의 정점은 상징적인 하나의 도시, 곧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 겸손한 이들의 구원, 피조물의 쇄신을 실현하는 평화로운 보금자리인 새 예루살렘이다(묵시 21-22장 참조).

 

 

아.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기

 

104. 우리는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피조물과 깊은 대화를 시작하여야 한다. 우리는 피조물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이다. 우리가 우리 공동의 집을 온전히 보존하고 다음 세대들의 미래와 존엄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앞서 간 세대들 덕분이다. 세대 간 연대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정의와 품위 있는 삶의 문제이다. 환경은 각 세대가 빌려 쓰는 것이며 이를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물려줄지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105. 우리는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 또한 자연을 외부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자신을 길러 주는 어머니로 여기는 우리 토착민의 지혜에서 배워야 한다. 바로 그 토착민들로부터 우리 모두는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피조물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토착민들은 자연을 통합적으로 연결된 체계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체계의 한 부분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아시아 국가들은 탄소 배출 최고 증가율을 기록한다. 따라서 아시아 정부들도 또 오랜 세월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이자 지속 불가능한 생산 모형으로 이윤을 얻어 온 산업 국가들도 시급히 2015년 파리 협정과 관련한 해당 결정을 이행하여야 한다.

 

106. 2015년 파리 협정은 참으로 기후 변화에 대한 전 세계적 응답의 표석이다. 파리에서 열린 국제 연합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 모인 세계 지도자들은 기후 변화와 그 부정적 영향에 대처하고자 2015년 12월 12일 이 역사적인 파리 협정에서 타개책에 도달하였다. 파리 협정은 모든 나라에 지침을 주고자 다음과 같은 장기 목표를 설정한다. 가) 기후 변화의 위험 및 영향을 상당히 감소시킬 것이라는 인식하에,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섭씨 2도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 및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섭씨 1.5도로 제한하기 위한 노력의 추구, 나) 식량 생산을 위협하지 아니하는 방식으로, 기후 변화의 부정적 영향에 적응하는 능력과 기후 회복력 및 온실가스 저배출 발전을 증진하는 능력의 증대, 그리고, 다) 온실가스 저배출 및 기후 회복적 발전이라는 방향에 부합하도록 하는 재정 흐름의 조성. 파리 협정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제 협약이다. 이는 2016년 11월 4월에 발효되었다. 현재 파리 협정 가입국은 194개국(193개국과 유럽 연합)이다.24)

 

107. 우리는 행동의 대가보다 행동하지 않는 대가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약 우리가 파리 협정 이후 지난 7년처럼 행동한다면 섭씨 2.5도조차도 달성하지 못하며 특히 아시아와 전 세계의 빈곤층에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원유와 가스의 가격이 높아 화석연료 판매로 엄청난 돈을 벌어 왔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거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재생 에너지 창출, 에너지 효율 보장, 비용 대비 고효율 변환 기술 개발에 사용하는 것이다.

 

108. FABC 50주년 총회는 기후 변화와 관련한 교회의 대헌장인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하여 생태적 회개와 기후 행동을 요청하는 교황 성하의 부름에 응답하여, 생태적으로 무책임하며 지속 불가능한 습관들과 낭비하는 삶의 방식에 마침표를 찍고, 생태적으로 안전한 고체, 액체, 기체 폐기물 관리의 적극적인 증진을 통하여 환경 의식을 개선하며, 독성 화학 비료, 살충제, 제초제에 의존하는 농업 모델을 뿌리 뽑고, 석탄과 기타 화석연료 생성 에너지에 의존하는 산업을 그만두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또한 우리의 개별 교회 기관부터 시작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깨끗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생성을 의식적으로 증진하자고 약속하였다. 우리는 삼림, 하천 유역, 산호초를 복원하고 야생 생물을 보존하며 토착 생물의 다양성을 지키고 생태계와 생물군을 회복시키고자 시민 사회 내 모든 역량과 정부 대표는 물론 아시아 전역의 토착민들과도 협력할 것이다.

 

109. 몇몇 주교회외와 개별 교구가 소속 단체들을 석탄과 화석연료 발전과 같은 ‘더러운 에너지’(dirty energy)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아시아 교회와 사회가 닮아야 할 하나의 구체적인 움직임이다. 우리는 우리 지역 내 인식을 강화하고 산업국에 자리한 교회들이 솔선수범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찬미받으소서 운동’(Laudato Si Movement)과 모든 교회 단체는 본당과 수도회들이 행동하도록 격려할 뿐만 아니라, 주교회의들과 FABC 차원의 계획은 물론 지역 상황을 위한 실천 방안도 마련하여야 한다. 「찬미받으소서」의 빛으로, 우리는 또한 다른 대륙들의 주교회의 연합회와 더불어 옹호하는 노력을, 그리고 우리 아시아 백성의 고통 경감을 위하여 인식 강화와 행동이 뒷받침되는 노력을 배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나아가 우리는 시민 사회 단체와 이루는 동반자 관계는 물론, 기후에 대한 염려와 행동과 관련된 교회 일치와 종교 간 계획들에도 열려 있을 것이다. 또한 교회의 「찬미받으소서」 목표와 2015년 파리 협정의 달성 목표, 국제 연합의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의 이행을 위하여 정부와 비정부기구와 협력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자. 아시아의 대화와 화해를 위한 도구로서 다리를 놓는 사람이자 다리가 되기

 

110. ‘다리 그리고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시아 교회의 사명 그리고 우리가 아시아 민족들과 전 세계에 전하는 기쁜 소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표상이다. 이는 우리가 선포하는 그리스도이며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사명과 목적을 요약한다. 그분께서는 아시아에서 태어나 아시아인으로 성장하고 아시아 대륙에 위대한 영적 전통을 탄생시키셨다. 하늘과 땅 사이의 층계에 대한 야곱의 꿈을 전하는 성경 말씀(창세 28,10-19 참조)은 구원 이야기를 요약한다. 이는, 인간이 신처럼 행동하면서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와 인간 사이의 연결을 오만하게 끊어내려 하는 경향인 죄의 영향을 앞장서서 막아 주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죄는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서로에게서, 피조물에게서, 우리 스스로에게서 멀어지게 하여 왔다.

 

111. 지금껏 우리는 우리 조상 야곱처럼 끊임없이 ‘하느님과 씨름하면서’ 하느님 자비의 도움으로 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죄 많은 이들임에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인류와 함께 걸으실 수 있도록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고 ‘천사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층계가 되어 봉사하도록 부름받았다. 때가 차면 야곱의 꿈은 바로 스스로 다리가 되어 섬기러 오신 성자 예수님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요한 1,51 참조). 다음과 같은 바오로 성인의 말씀 그대로이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을 통하여]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9-20).

 

112.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다리이심을 선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을 찾아 왔다. 오직 그분의 이름으로 아시아 교회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라는 성령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다. 우리는 FABC 첫 모임이 소집된 이래로 늘 아시아 교회의 근본적인 사목 우선 사항으로 대화를 제시하여 왔다. 대화는 다리 놓는 사람이 되라는 우리의 소명을 가장 잘 표현한다. 우리는 종교, 문화, 가난한 이들이라는 삼중의 맥락을 넘어 젊은이와의 대화, 여성과의 대화, 정부와 시민 사회 단체와의 대화, 피조물과의 대화, 기술 관료와 사업가와 과학자와의 대화, 그리고 가난한 이들, 노숙자, 문맹자, 이주민과 난민, 토착민, 인신매매 피해자, 장애인, 밀입국자, 반란군, 중독이나 그 밖의 정신 건강 문제로 고통을 겪는 이들과의 대화를 아우르는 대화로 이해의 폭을 확장하도록 부름받는다.

 

113. 우리가 평화 건설과 화해 증진에 봉사하는 아시아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대화의 맥락 안에 있다. 평화의 증진에서 우리는 폭력의 피해자들과의 대화가 폭력 가해자들과의 대화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학대받은 이들이 학대자가 되고 피해자가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을 막아낼 도리가 없다.

 

114. 아시아 각지에서 교회는 여러 갈등 상황 가운데 자기 길을 찾아가며, 바로 그러한 까닭에 화해의 일꾼이 되라고 부름받는다. 우리는 고백, 통회, 보속, 사죄라는 교회의 화해 성사를 이루는 네 가지 기본 요소의 지혜에서 많은 가르침을 얻는다. 이 기본 요소들은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화해하여야 할 필요에 응답하는 데에 효과적이기에 우리 개인, 가정, 공동체, 사회 갈등에 응답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효과적이다. 우리의 약점과 실패를 겸허히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찌 화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끼친 피해와 상처에 대한 마음속 뉘우침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어찌 화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기워 갚고자 또 구체적인 보속 행위를 하고자 결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화해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용서를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으로 보게 만들려면 화해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115. 우리가 확인한 아홉 가지 도전들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효과적으로 응답하려면 양성이 하나의 핵심 요소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직면한 도전들과 하여야 할 적절한 응답은, 협력하는 교회를 이루고자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보장인 주교, 신부, 수도자, 평신도 등 모든 이의 일치된 대응을 요구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 특히 평신도를 위한 양성 프로그램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실제로 세례 받은 모든 이의 헌신적이고 조화로운 참여 없이는 우리가 직면한 도전에 적절히 응답할 수 없다. 그리고 평신도가 세례 때에 한 약속을 교회와 사회에서 모두 살아가도록 뒷받침하려면 주교, 신부, 수도자의 교육이 필요하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쇄신된 교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모든 이를 위한 더 좋은 아시아가 될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일하는 아시아 교회가 느끼는 소명이다.

 

116. 성령께서는 직무 사제직의 토대가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에 있다는 사실을 회복하라고 아시아 교회를 초대하신다. 이에 관한 표현으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그 무엇보다 적절할 것이다. “제가 여러분의 주교이지만, 또한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믿는 이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 몸의 지체들로서 같은 품위를 지닌 이들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신자 공동체를 위한 성품 직무자의 역할을 결코 의미 있게 수행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사실을 명확히 밝힌다. “지상 생활과는 다른 삶의 증인과 관리자가 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봉사자가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실생활과 그 생활 조건에서 멀리 떨어져 산다면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도 없다(2코린 6,14-15 참조). 사제 교역 자체가 이 세속을 본받지 말라고 특별히 요구한다(로마 12,2 참조).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에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가도록 …… 요구한다”(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제품」[Presbyterorum Ordinis], 3항).

 

117. 우리는 지난 FABC 정기 총회들에서 여러 차례 결의하였던 바를 FABC 50주년 총회에서 다시 한번 재확인하였다. 곧, 더욱 참여하는 교회를 증진하고 평신도에게 지도자 역할을 위한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성품 직무자들의 초기 양성과 지속 양성 프로그램 모두에 필요한 개혁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신학생, 신부, 수도자, 주교의 지속 양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놓인 특정 문화와 아시아 각국 세계관의 상황에 맞는 양성 프로그램과 양성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당신 제자들에게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하고 되새겨 주신 그 모범을 따라, 성품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 모두가 맡도록 부름받은 다양한 직무와 봉사를 통하여 평신도와 축성생활자와 함께 지도자 역할을 공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18. 여성을 비롯한 평신도들이 성품 직무 후보자들의 인성적, 영성적, 사목적, 지성적 양성에 참여하고 훌륭한 역할 모델로서 그들에게 긴밀한 개별 조언을 제공하며, 그들을 가난한 이들의 삶의 자리로 깊이 이끌며, 기초 교회 공동체와 인간 공동체 현장을 체험하고 종교 간 대화, 교회 일치와 문화 간 대화에 관여하도록 돕는 일은 ‘양 냄새 나는 목자들’을 기르는 데에 필수적인 양성 환경을 조성해 줄 것이다. 특히 우리는 FABC의 가르침과 전통을 학사 일정에 포함하여야 할 필요성 또한 강조하여 왔다.

 

 

제4부 우리의 선물을 드리기


아시아 문화와 영성

 

119. “그리고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120. 별의 인도를 받아 베들레헴의 비천한 집으로 가는 동방 박사들을 묘사하는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우리가 집에 들어갈 때 하도록 배웠듯이 방문객들이 걸음을 멈추고 경건하게 발에서 신을 벗는 아시아의 전형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가정’이 성스러운 공간을 함께 형성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아시아적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발에 달라붙은 먼지를 털어내고 우리 집의 깊은 내실에서 거룩한 분과 만나고자 준비하는 씻는 행위를 한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집이라는 범위 안에서 거처할 곳을 마련하시고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게 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집과 가족의 온갖 보살핌과 애정이 필요한 연약한 아기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인식한다.25)

 

121. 우리는 하느님을 경배한다는 것의 의미를 아기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비우시어 모든 것을 버리시고, 인성의 존엄성을 진정한 신성의 형상으로 끌어올리고자 우리의 인성을 품으신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한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찬 그들은 하늘을 유심히 살피고 별의 광채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문명의 진보와 인간 마음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에 영감을 주는 초월을 향한 탐색을 체험합니다”26). 이 아기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선물로 인식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한 모든 선물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그 선물들을 봉헌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거룩한 선물(사제, sacerdos)로 바치셨다.

 

122. 교회에서든 아시아 교회가 존재하는 세상에서든 우리는 공존하는 다양한 견해, 종교, 문화, 색과 풍미를 조화뿐 아니라 긴장 속에서도 다룹니다!

 

123. 동방 박사들과 같이, 우리 아시아인들은 경건한 침묵을 소중히 여기며 성전, 아쉬람(ashram) 그리고 신성한 장소에서 묵상을 위한 고독을 추구한다. 우리는 기도나 경배뿐만 아니라 인정과 존경을 표하고 평화를 빌고자 할 때도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는 같은 몸짓을 사용한다. 또한 상대방을 축복하고, 영예를 받아들이고, 감사를 표하고, 대화와 우정을 시작하고, 용서를 구하고, 작별을 고할 때도 마찬가지다. 말로 축복을 구하는 대신에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단순하게 원로들의 손을 잡고 자기 이마에 그 손을 댄다.

 

124. 예수님의 왕직이 구유라는 극도의 가난 가운데 드러났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구원의 힘을 인식하고 그들을 교회의 중심에 두면서 때로는 가난한 이들의 삶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지혜를 곰곰이 생각하라고 호소합니다.27)

 

125.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함께 구원받거나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인식을 키워야 합니다. 지구 한편에서 겪는 가난, 타락, 고통은 결국 지구 전체에 타격을 주게 될 문제의 암묵적 온상지가 됩니다”28). 우리는 다음의 가르침을 믿는다. “모든 이에게는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쓸모없거나 불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는 삶의 주변부에 있는 이들을 포함시킬 방법들을 모색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또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중한 결정들을 내리는 권력 중심부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현실의 여러 측면을 봅니다.”29)

 

126. 우리 시대에는 고대 점성가들의 방식, 곧 별의 위치로 ‘시대의 표징’를 읽을 수는 없지만 자연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공동체와 주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계속하여 ‘표징들’을 읽는다. 아시아 문화들은 언제나 믿음과 사랑으로 응답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충만한 삶으로 이끌면서 우리와 소통하려는 주도권을 가지신 하느님의 현존, 신성의 현존에 민감하게 하여 준다.

 

127.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신앙 조항[예수님의 강생]을 고려할 때, 오늘날의 신학은, 다른 종교 체험들의 존재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그것들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숙고하는 데에서, 이 종교들이 어떤 식으로 역사적인 형태와 긍정적인 요소들을 띠고 있는지, 또한 그것들이 구원의 신적 계획 안에 포함되는지에 대하여 연구하도록 요청받고 있다.”30)

 

128. 그러므로 아시아인에게 본다고 하는 것은 눈으로 사물의 위치를 찾는 것보다 더 큰 의미이다. 이는 우리의 무지에 대한 겸허한 인정, 더 많이 알고자 하는 깊은 열망 그리고 세상에 대한 경외심과 놀라움을 갖는 기질에서 나오는 주의력 깊은 성향이다. 우리 아시아인들은 삶을 대립하는 것들 가운데, 흑과 백, 빛과 어둠 사이의 선택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우리 사이에서, 우리 주변에서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창조적인 역동성 안에 있는 긴장을 의식하며 계속 다루어 나갈 것이다.

 

129. 아시아 교회는 선조들의 비폭력에 대한 강한 문화적 성향에서 배울 것이 많다. 우리는 자기방어를 하나의 기술로 발전시켜 왔는데, 이는 가해자를 해치며 상처입히거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선을 미리 파악하며 그의 공격을 피하고 그가 제풀에 쓰러질 때까지 그의 공격을 막는 게 목적이다. 자기방어 기술이 아시아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원리는 같다. 한결같이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불의에 반대하여 일어서는 국민이 집단으로 움직일 때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그 예로,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의 빛나는 유산 중 하나인 사티아그라하(Satyagragha)라는 이름으로 외세의 지배를 종식시켰고, 필리핀에서는 피플 파워(People Power)라는 이름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130.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을 헤쳐갈 길을 찾는 법을 배우는 한편, 인간을 고통의 동반자로 인식하는 선택은 우리에게 평화와 화해를 향한 아시아의 길을 열어 준다. 우리는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불의와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치유의 정신을 늘 염두에 두며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 이는 폭력의 악순환이 싹트지 못하게 막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용서라는 선택이 약점이 아니라 힘이라고 믿기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권능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성사로서 아시아인의 영혼에 깊이 울려 퍼진다. 바오로 성인이 정확하게 말하였듯이, 궁극적으로 가장 으뜸인 덕은 믿음도 희망도 아닌 아가페, 곧 무조건적인 사랑이다(1코린 13,13 참조). 이는 아시아 교회가 선포하는 참된 복음이다. 가장 탁한 물에서도 고요하게 피어나는 연꽃과 같다.

 

131. 그러므로 대화는 FABC가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으뜸가는 사목적 우선 사항이 되어 왔다. 그 다양한 형태 중에서 우리는 특히 삼중 대화라고 부르는 이웃 종교 전통, 이웃 문화,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에 집중하여 왔다.3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시노달리타스의 관점에 비추어 대화의 범위를 대인관계의 소통을 넘어 넓히고 이를 동반과 친교라는 시노드 개념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도록 영감을 주셨다. 이는 악의를 전제로는 결코 진행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창세 1,26-27 참조) 본성적으로 선하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칙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비록 하느님의 모상이 죄로 인하여 손상을 입고 희미하여졌을지라도 그러하다.

 

132. 아시아의 일부 지역 교회들이 예수님을 ‘아시아인의 얼굴’로 소개하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들은 유럽 선교사들의 복음화 노력을 통하여 유럽의 양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아시아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식민지였던 그들의 과거와 그리스도교 확산이 연관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더욱 당연한 일이다. 일부 아시아인들은 모순적이게도 그리스도교가 처음에 아시아 땅에 뿌리를 내렸으며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육화하신 문화와 환경이 바로 아시아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성경에서 후기 그리스-로마 시대의 신앙 표현의 핵심에 셈족과 아시아 문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33.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첫 선교 지역이 루카 복음사가가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소아시아’로 알려진 도시에 속하였다는 사실도 종종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 도시들은 곧, 바오로 사도의 선교지였던 시리아, 안티오키아, 프리기아, 갈라티아, 에페소, 이코니온, 데르베, 리스트라와 피시디아, 트로아스와 밀레토스이다(사도 16장 참조). 요한 묵시록에서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묵시 1,3)에 보내는 환시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134. 그리스도교 신앙은 실제로 제일천년기에 본래 아시아의 모습으로 여러 아시아 국가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잘 증명되어 있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를 통하여 펼쳐진 최초의 선교 활동에 그 뿌리를 둔 시로-말라바르(Syro-Malabar)와 시로-말란카라(Syro-Malankara) 교회의 동방 예법을 통하여 입증하듯이, 이 예법이 남아 있는 인도를 비롯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제일천년기에 박해를 포함한 많은 상황이 아시아에 신앙이 뿌리내리는 데에 걸림돌이 되었다.

 

135. 아시아의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는, 곧 그리스도교 복음화 활동이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의 이전 식민지들과 같이 유럽에서나, 또는 아카풀코를 통하여 필리핀에 도착한 이들처럼 북미나 남미에서 온 선교사들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곳에서는 서방 그리스도교의 흔적이 종교, 예술, 건축 그리고 전례적 표현에 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한 경우, 아시아의 표현을 그리스도교에 부여하려는 노력은 당연하다. 로마 교회와의 친교가 아시아 교회의 ‘로마화’를 의미할 필요는 없다.

 

136.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례 헌장에서 아시아 지역 문화와 언어로 전례의 토착화에 대한 지지를 명확하게 표명하였음에도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표현과 실천 모두를 계속 구체화하여야 하는 문화 간 대화와 관련하여 아직 할 일이 많다.

 

137. 사목 활동, 전례적 표현, 대중 종교 신심 그리고 토착 영성의 영역에서 문화적 정서에 민감한 활용방식뿐만 아니라 상황을 더욱 고려한 신학들을 위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공통된 열망은 우리 아시아 대륙 주교회의에서 보내온 모든 문서에서 분명하다. 이러한 열망은 현재 진행 중인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시노드가 고려하도록 격려한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으로 확인된다.

 

 

제5부 새로운 길을 열기


다른 길로 돌아가기

 

138.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

 

139. 마태오 복음사가는 동방 박사들이 정보를 구하려고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이렇게 물었다고 전한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동방 박사들은 신적 인도, 곧 별을 따랐다. 동시에 그들이 찾던 그분을 찾고자 다른 이들의 도움, 곧 인간적 인도를 따랐다. 그분을 찾은 그들은 아기이신 임금님 앞에 엎드려 보물을 드렸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 참조).

 

140. 우리 아시아 주교들은 FABC 50주년 총회에 함께 모여 이와 비슷한 일을 하였다. 제2부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기도와 묵상에서 하느님의 인도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인간적 인도를 구하였다. 우리는 아시아 각국을 ‘온라인 방문’하여 다양한 현실을 함께 살펴보았다. 우리는 아시아의 현실을 살펴보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식별하였으며, 우리가 발견한 보물들을 예수님께 드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FABC 50주년 총회가 우리 앞에 열어 준 새로운 길을 따라 “다른 길”로 각자의 교구에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FABC 50주년 총회 이후 따라가고자 하는 다섯 가지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가. 외래어 표현에서 토착화된 복음 선포로

 

141.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시아인의 인성을 취하셨다. 최초의 선교는 ‘소아시아’ 국가들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후 제이천년기 중반 무렵 많은 아시아 국가의 그리스도교 복음화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국이 세계를 서로 나누는 유럽의 지정학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그리스도교는 유럽의 양상을 띠었다. 때로는 자신이 소속된 수도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외세 왕족의 후원에 의존하였다.

 

142. 물론 다른 길을 가기로 선택한 선교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지배 당국에서 그들의 사명을 끌어들이려는 것을 막으려고 다른 방법을 따랐다. 그러한 선교사들 가운데 16-17세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예로 그리스도교를 일본과 중국에 각각 전파한 예수회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와 마테오 리치 신부32) 그리고 인도 남부 지역에서 마테오 리치 신부의 발자취를 따랐던 로베르토 데 노빌리 신부를 들 수 있다33). 그들은 시대를 앞서 살았으며 아시아 문화와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한 FABC의 주장보다 거의 4세기 앞서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43. 이탈리아 예수회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와 마테오 리치 신부는 신앙을 전하고자 현지 언어를 배우는 데만 주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그들은 지역의 문화들과 신앙들 또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가르치기만 하지 않고 그들을 받아들인 나라의 세계관에 몰두하며 배우려고 왔다. 그들은 복음이 아시아 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그들은 “정복의 복음화 표본”이 “일본과 중국의 고대 문명에 스며드는 데 전혀 결실을 거둘 수 없다”34)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인도에서 자신들을 받아들인 나라의 문화에 복음의 뿌리를 내리고자 노력하였던 로베르토 데 노빌리 신부와 그의 조력자들 또한 이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국가들은 “그리스도교 국가(Christendom)라는 관념을 거부했다. 곧, 그리스도교와 유럽 사회 사이에 본질적인 동일성이 있다는 가정을 거부했다.”35)

 

144. 실제로 초기에는 복음화하려는 국가의 지역 풍습에 적응하고 그 문화를 존중하는 이러한 선교적 접근이 로마 교회의 지지를 얻었다.36) 안타깝게도 17세기 중국에서 다른 수도회들이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와 마테오 리치 신부가 채택한 토착화와 적응의 복음화 표본에 강하게 반발하여 열띤 논쟁에 불을 붙여 결국 로마 교회의 관심을 끌고 ‘중국 의례 논쟁’(Controversia de ritibus)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704년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이러한 중국 조상 제사 의식을 비난하고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교령 Cum Deus Optimus을 반포하였다. 이 교령의 가장 심각한 결과 중 하나는 이전에 호의적이었던 황제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제국의 금지령을 시행하는 정반대의 행동으로 돌아서게 한 것이다.37) 중국 조상 제사 의식에 대한 논쟁은, 1939년 비오 12세 교황이 20세기 초 교황청 포교성성을 통하여 새로운 교령 Plane Compertum을 발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38) 최근 교황들께서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와 마테오 리치 신부의 토착화와 대화를 통한 선교적 접근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더욱 긍정적인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이셨는지 주목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39)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마테오 리치 신부를 “외국인의 신분을 넘어 세계의 시민이 된 만남의 장인”이라고 묘사하였다.40)

 

145. FABC 50주년 총회에서 우리는 교회가 토착화된 복음화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꼈다. 토착화는 육화와 파스카 신비 신학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육화를 통하여 우리의 인성을 받아들이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다. 바오로 성인은 이를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장 7-8절에서 하느님의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움)라고 부른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근원적 진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셨다.”

 

146. 육화의 신비는 교회와 함께 지속된다. 지역 교회 또는 전 세계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제자 공동체에서 계속하여 육신을 취하신다. 신앙은 결코 단절된 상태에서 생기지 않는다. 복음화는 언제나 문화 간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147. 우리는 토착화가 참으로 신앙과 문화 사이의 대화의 본질적인 양상이라고 알고 있지만, 결국 대화는 토착화의 새로운 형태를 가져올 수 있는 문화 간 만남에 자신을 개방하는 이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문화 간 만남은 대화에 참여하는 서로를 모두 유익하게 하는 일종의 역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는 문화 이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에 우리를 열어 준다. 곧, 우리가 문화를 초월하여 문화의 성장과 정화로도 이끌 수 있게 하는 공통 가치를 발견하는 길을 열어 준다는 의미이다.

 

 

나. 기초 교회 공동체에서 기초 인류 공동체로

 

148. 방콕에서 열린 FABC 50주년 총회에서 우리는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더욱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 대한 열망에 비추어 우리의 기초 교회 공동체가 사회 안에서 쇄신의 촉매제가 되는 방향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기로 하였다. 실제로 시노달리타스는 대화를 뛰어넘기에 의사소통을 촉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사소통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동반, 함께하는 여정 그리고 공존이다. 우리 공동체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편협한 교회’의 관심사에만 갇혀 있다면 우리의 기초 교회 공동체는 시노달리타스를 삶의 양식으로서 참으로 구현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사명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다시 말하여 밀가루 반죽 속의 누룩처럼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초 인류 공동체(Basic Human Communities: BHCs)로 나아갈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여야 한다.

 

149. 우리는 또한 더 이상 우리 공동체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사목들을 버리고 그 대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너그러이 베풀어 주신 은사를 확인하고 새로운 사목을 마련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사목은 신자들이 교회를 섬기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교회 구성원으로서 모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평신도들은 특히 모든 수준의 갈등을 관리하는 데 돕고, 공동선을 위한 정치 곧, 정의와 인간 존엄성을 위한 상호 존중에 기반을 둔 평화와 화해의 노력에 앞장서서 기여하고자 우리 신앙의 최고 자원을 활용하여야 한다.

 

 

다. 대화에서 시노달리타스로

 

150. 지난 50년 동안 FABC는 문화, 종교,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라는 삼중 대화의 길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여 왔다. 이 대화의 길은 이제 시노달리타스의 더욱 충만한 표현을 모색하고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의회성(conciliarity)의 새로운 표현을 부여한다. 우리가 FABC에서 열렬히 추구하여 온 것을 더욱 잘 표현할 수 있게 하여 준 것이 바로 이 시노달리타스이기에 우리에게 이것이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노달리타스는 대화 그 이상의 것일지라도 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화에 수반되는 경청과 식별은 시노달리타스에도 기본적으로 함께 하는 요소이다. 그 목표는 다름 아닌 대화 상대의 타자성(otherness)을 뛰어넘어 친교의 이웃이자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친교, 참여, 사명에 대한 열망을 아우르는 시노달리타스는 이 대화의 목적을 더욱 설득력 있게 명시한다.

 

151. FABC 50주년 총회 기간 내내 우리는 동방 박사들이 하였던 것처럼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첫 번째 공의회(사도 15장)에서 바오로 사도의 이방인 선교에 반대하여 일부 사도들이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에게만 선교를 제한하고자 하였을 때 베드로 사도가 한 것처럼 하도록 인도되었다.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아 야고보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서 그들을 일치시키는 데에 앞장 섰다(사도 15장 참조).

 

152. 아시아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현실을 우리가 함께 식별할 때 우리의 길을 밝혀 준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당신의 성찰을 통하여 교회에 불을 붙여준 새로운 불꽃이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헌, 곧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관한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에 관한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 그리고 최근에 발표된 교황청과 세상 안의 교회에 대한 교황청의 봉사에 관한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 등이 포함된다. FABC 50주년 총회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고찰하는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기념비적인 베드로좌의 가르침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다시 확인하고 보편 교회에 ‘원천으로 돌아가기’(ressourcement)라는 도전 과제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시대의 징표’(쇄신, aggiornamento)에 응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5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구체적인 결실 중 하나가 주교 시노드이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가 ‘시노달리타스’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이를 안으로(ad intra) 그리고 밖으로(ad extra) 모든 방향으로 확장하도록 초대하였다고 우리는 느낀다. 안으로는 교회 안에 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축성 생활자, 성직자, 평신도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에게로 향한다. 교회와 함께 밖으로는 외부의 그리스도인, 종교인, 인류 특히 가난한 이와 공동의 집의 모든 피조물로 향한다.

 

 

라. 복음 선포에서 스토리텔링으로

 

154. 예수님께서 1세기 팔레스티나에서 기쁜 소식으로 선포하신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우리의 공통된 열망 안에서 인류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발견하도록 사람들을 초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가능한 모든 매체를 활용하심으로써 당신의 메시지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셨다. 대부분의 유다교 율법 학자들이 회당이라는 친숙한 매체를 고수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인 곳, 곧 호숫가의 배에서, 친교를 나누는 식탁에서, 길에서, 언덕에서, 나무 아래에서 당신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 어디에서든!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거의 언제나 단순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155. 예수님의 복음 선포 방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스토리텔링이다. 세계 어디서든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를 즐긴다.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서 ‘옛날 옛적에……’, ‘머나먼 바닷가 마을에……’, ‘어느 날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는데……’라고 평범하게 이야기를 시작할 때 우리 안에는 언제나 귀를 기울이는 ‘어린아이’가 있다. 우리는 아시아의 예수님 면모를 성찰하였던 2006년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 선교대회 주제가 “예수님 이야기를 전하기 ……”였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또한 기초 교회 공동체를 양성하는 방법론으로, 친교를 강화하고 공동체를 건설하는 실생활 대화를 증진하면서 아시아의 교회 생활을 가장 특징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인 ‘스토리텔링’을 촉진하도록 결정하였다.

 

 

마. 관례적인 길에서 새로운 사목적 우선순위로

 

156. FABC 50주년 총회에서 우리 주교들은 오래된 관례적인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우선순위로 나아가려고 구체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결정들 일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157. 우리는 친교와 참여의 역동성 안에서 우리 공동체를 양성함으로써 사명을 향한 아시아의 모든 지역 교회의 사목들을 새롭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다름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의 참 기쁨을 세상에 나누고자 신자들이 자기 자신만을 기준으로 삼는 태도에서 방향을 바꾸어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우리의 소명을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새롭게 되고 되살아나기를 갈망하는 세상에 나누는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다. 우리는 섬기는 교회 사명의 일환으로 단순히 교회를 섬기는 것에서 세상을 섬기는 것으로 사목의 방향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한다.

 

158. 우리는 기초 인류 공동체를 건설하는 기초 교회 공동체를 양성함으로써 우리의 본당들을 유지하는 데에서 사명으로 변화시키고자 헌신한다. 우리는, 모든 지역 교회가 어린이들과 취약한 어른들을 위한 안전한 공간이 되고, 모든 형태의 학대를 해결하고 예방하는 데 적극적으로 행동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가난한 이들을 향한 환대, 특히 이주민, 행려자, 실향민을 환대하고, 언제나 포용하며 성인지 감수성을 지니며 참여하는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할 것이다.

 

159. 우리는 현재 기후의 긴급한 상황에 직면하여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참으로 민감한 방식으로 사목적 회심과 생태적 회개의 요청에 끊임없이 응답하고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염 에너지 사용을 거부하고 깨끗하면서도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 생산을 촉진하여 탄소 발자국을 줄이고자 헌신하는 기관들과 협력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의 정신으로 공동의 집인 지구를 보호하려고 그리스도인과 종교인 그리고 모든 인류와 함께 힘을 모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관에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 투자를 즉각 중단하라고 의식적으로 요청할 것이다.

 

160. 우리는 다리이자 다리를 놓는 이들로서 역할을 하며 분쟁들 가운데 화해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이의 복지를 의식적으로 증진하고 사회에서 가장 혜택받지 못하는 계층의 복지를 특별히 염두에 두는 사회 건설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이러한 계층에는 특히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 약물 중독자, 정신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이, 자유를 박탈당한 이, 인신매매와 초법적 살인의 희생자, 원주민, 전쟁과 자연재해의 생존자 등이 포함된다. 우리는 상보성의 정신과 진정한 대화 안에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조화의 정신을 실행하기로 다짐한다.

 

161. 우리는 그리스도교 전통 종교와 이웃 종교의 형제자매들과 협력하여 평화와 조화의 문화, 포용적 성장과 발전의 경제, 교육과 인성 형성의 총체적 접근 그리고 전인적 성장에 맞추어진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도록 도울 것이다. 우리는 젊은이들의 복지를 특별히 염두에 둔 디지털 기술의 적절하고 신중한 사용을 약속한다. 우리는 인권, 빈곤 완화, 인신매매, 환경 보호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올바른 사용에 관한 사안에 대하여 정부 기관과 비정부기구(NGO) 그리고 시민단체들과 연대할 것이다.

 

162. 우리는 개인 간 대화를 넘어 비판적 사고와 공동 식별의 훈련을 촉진하는 다자간 대화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시민들의 윤리적 인격 양성을 통하여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모든 신앙 공동체의 자유를 지킬 것이다. 우리는 공적 담론에서 신앙, 종교 그리고 영성을 배제하는 세속주의 이념에 대항할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 더욱 인간적인 세상을 조성하고 정의, 평화,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고자 선의를 가진 모든 이와 함께 일할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더 나은 아시아를 위하여 기여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결론

 

163. 아시아인들을 위하여 …… 모든 것이 될 수 있기를

 

164.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선교사가 된다는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2-23). 바로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는 2022년 10월 12-30일 방콕대교구 반 푸 완(Baan Bhu Waan) 사목 센터에서 열린 FABC 50주년 총회 최종 문서를 겸허히 제시한다. 우리는 우리 아시아 백성들과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 평화, 정의의 기쁜 소식인 복음만을 위하여 이 문서를 마련하였다.

 

165. 아시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중 한 사람인 어린이가 되신 하느님 앞에서 동방 박사들이 하였듯이 이 사랑을 목격하고 자신이 마련한 선물을 바치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시키고 권한을 부여하며 활력을 주는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가르침 안에서, 당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모든 사람과 자연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에게 드러내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이웃”, 곧 굶주리고 목마른 이, 병든 이, 외국인, 이주민, 토착민, 억압받고 궁핍한 이(마르 12,29 이하; 마태 25,31 이하 참조)를 섬기고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라고 가르치신다. 또한 더 나은 아시아를 위하여 종교, 문화, 사회 안에서 우리의 이웃과 함께 문화 간 관계를 맺는 토착화된 교회, 곧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 함께 걸어가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라고 가르치신다.

 

166. 우리는 아시아 교회와 아시아 민족을 우리의 복되신 어머니, 성모님의 전구와 보호에 의탁한다.

 

축복받은 여인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시여,

당신 아드님 품으로 저희를 이끄소서.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 아드님께 봉헌하나이다.

당신 아드님께서는 당신 모습 그대로 저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나이다.

그분 복음의 씨앗이 아시아의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하소서.

그분께서 끊임없이 아시아 문화에 육화되게 하소서.

그분께서 하신 것처럼 저희 자신을 비우는 법을 배우게 하시어,

세상이 저희 안에서 아시아인이신 그분의 얼굴을 보고

저희 안에서, 저희 가운데, 저희를 통하여

그분의 빛이 아시아 전 지역에 빛나게 하소서!

아멘.

 

167. 우리는 FABC 50주년 총회를 위하여 작곡된 ‘아시아의 노래’의 아름다운 가사로 이 문서를 끝맺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노래는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동방 박사들의 여정에 대한 마태오 복음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쓰인 시에 아시아 가락을 넣은 젊고 기대 가득하며 희망을 주는 기도이다.

 

아시아의 노래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라

 

우리 주님의 사랑이 땅에 씨를 뿌리네

어둔 밤에 솟아난 그 빛 자유의 표징 되네

주님의 태양 아래 우리 모습을 보네

이제 이방인은 없으리

모두 우리의 형제 모두 우리의 자매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 구원자 우리 주 예수

사랑의 불 놓으시는 성령님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라

 

가난한 이들의 찬양 우리 젊은이들의 사명

피조물의 탄식을 들으리라

평화에 봉사하리라 평화에 봉사하리라

 

주님의 손길 안에서 하나로 빛나는 우리

서로에게 선물 되고 빛과 소금이 되네

어스름의 별 하나 새로운 곳을 비추네

모든 이를 섬기는 우리

이땅에 우린 한 가족 이땅에 우린 한 식구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 구원자 우리 주 예수

사랑의 불 놓으시는 성령님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라

 

가난한 이들의 찬양 우리 젊은이들의 사명

피조물의 탄식을 들으리라

평화에 봉사하리라 평화에 봉사하리라

 

변방으로 나아가 주님의 얼굴을 보리라!

 

가난한 이들의 찬양 우리 젊은이들의 사명

피조물의 탄식을 들으리라

평화에 봉사하리라 평화에 봉사하리라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 구원자 우리 주 예수

사랑의 불 놓으시는 성령님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라

하느님을 찬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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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친교, 참여, 사명” 「편람」(Vademecum), 2021.9.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65호(2022), 235면.

 

2) 1990년 반둥에서 열린 FABC 정기 총회에서, 우리는 참으로 참여적인 교회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 될 기초 교회 공동체(Basic Ecclesial Communities)의 성장을 북돋움으로써 교회가 되는 새로운 길을 찾기로 결의하였다.

 

3) 시로 말라바르 예법과 시로 말란카르 예법 교회의 형제 주교들은, 우리가 일천년기와 그 이후 대체로 성 토마스 사도의 선교 덕분에 아시아 대륙 전역에 퍼졌던 ‘시리아 동방’ 예법이라고 불린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의 발전을 알게 하여 주었다. 또한 일천년기가 저물어갈 무렵에 그 예법들이 박해를 비롯한 여러 요인 때문에 어떻게 쇠락하였고 이천년기의 선교를 통해서야 겨우 되살아나게 되었는지 알게 하여 주었다.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역사 연구가 결실을 거두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4)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가득하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마테오 리치 신부, 로베르토 데 노빌리 신부, 요한 데 브리토 신부 등의 선교사들. 또 다른 모범으로 요셉 바즈 성인이 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나누고자 인도 고아에서 스리랑카까지 갔다. 그는 거부당하고 추방당하였으나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스리랑카로 향하였고 항구에서 짐꾼으로 일하면서 기쁜 소식을 나누는 자신의 사명을 이어갔다.

 

5) ‘탈리타 쿰’(Talitha Kumi) 프로그램이 떠오른다.

 

6)「FABC 50주년 총회 안내서」(FABC 50 General Conference Guide Document) 8면.

 

7) 특히 「여성의 존엄」(Mulieris Dignitatem) 29항과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 42항 참조.

 

8) https://www.pewresearch.org/global/2019/04/22/how-people-around-the-world-view-gender-equality-in-their-countries

 

9)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성소수자(LGBTQ)의 존재: https://www.undp.org/asia-pacific/projects/being-lgbti-asia-and-pacific

 

10)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rldviews/wp/2016/06/13/here-are-the-10-countries-where-homosexuality-may-be-punished-by-death-2/

 

11) https://www.hrw.org/report/2022/01/26/even-if-you-go-skies-well-find-you/lgbt-people-afghanistan-after-taliban-takeover

 

12) https://lgbtq-economics.org/research/lgbt-adults-2019/

 

13) 「인도 위원회와 정부 계획, 제11차 5개년 계획서」(Planning Commission, Government of India, The Eleventh Five Year Plan Document), 1권, 4면.

 

14) https://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speeches/2001/april/documents/hf_jp-ii_spe_20010427_pc-social-sciences.html

 

15) 이는 필리핀인들에게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는 ‘심방 가비’(Simbang Gabi)로 널리 알려져 있다.

 

16) 프란치스코, 필리핀 가톨릭 신앙 전래 500주년 기념 미사 강론.

 

17)「FABC 50주년 총회 안내서」, 10면 참조.

 

18) 바오로 6세, 성년 폐막 미사 강론, 1975.12.25.,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68(1976), 145면.

 

19) 조슈아 J. 맥켈리의 주앙 브라스 지아비스 추기경 인터뷰,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National Catholic Reporter), 2013.8.12., https://www.ncronline.org › news › vatican-religious-pr

 

20)「복음을 선포하여라」(Predicate Evangelium), 서문, 10항 참조.

 

21) https://www.npr.org › 2023/01/25 › pope-francis-says-bei 참조.

 

22) 인도 주교회의 2010년 제29차 정기 총회 참조.

 

23) Klaus Schwab,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what it means, how to respond”, World Economic Forum.

 

24) https://www.un.org/en/climatechange/paris-agreement.

 

25) 베들레헴에 관한 우리의 전통적인 묘사는 종종 루카 복음서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와 마태오 복음서에서 나온 요소들이 합해져서 생겨났다. 우리는 평범한 집이 아닌 마구간의 구유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데, 이곳은 세상의 중심,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류가 만나는 지점이 되고, 천상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가 만나는 곳이자 양과 목자들이 거하는 곳이며 몹시 가난한 이들과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몸을 엎드린 곳이다.

 

26) 프란치스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한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 강론, 2023.1.6.

 

27) Gregory Gay, C.M., Superior General’s Letter to Members of the Vincentian Family announcing the Vincentian Year of New Evangelization, 2014.7.18. 참조.

 

28)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2020.10.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1년(제1판), 137항.

 

29)「모든 형제들」, 215항.

 

30) 교황청 신앙교리성,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 2000.8.6., 14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17호(2001), 91면.

 

31) 한국 주교들의 증언에 힘입어 그들의 대화에서 표현한 대로 우리도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곧,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와 문화를 ‘다른’ 종교들과 문화라고 하지 않고 이웃 종교와 문화라고 하기로 하였다.

 

32) 이러한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들은 주로 포르투갈 영토인 인도 고아를 기점으로 중국 마카오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동방 전례의 인도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이 그들에게 복음화를 위한 다양한 접근 방식에 관한 발상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시로-말라바르 예법의 인도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인 힌두교 관례와 독특하게 토착화된 그들의 토마스 사도의 유산으로 자주 언급되었고, 학자들은 이를 ‘문화는 힌두, 종교는 그리스도인, 예배는 동방’이라고 묘사하였다. Felix Wilfred, The Oxford Handbook of Christianity in Asia, Oxford University Press, 참조.

 

33) 또 다른 한 사람으로 성인이며 순교자가 된 포르투갈 예수회 성 요한 데 부리토가 있다다. 그는 로베르토 데 노빌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이 분명하며, 17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다.

 

34) Ellsberg, All Saints, Claretian Publications 2008, 37-38면.

 

35) All Saints, 37-38면.

 

36) 예를 들어, 1659년 교황청 포교성성이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훈령은 이와 같다. “그들이 종교, 곧 가톨릭 그리스도교와 윤리에 명백히 반대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의식, 풍습이나 관례를 변화시키려고 열성적으로 행동하지도 어떤 주장도 제시하지 마십시오. 중국인들에게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나 또 다른 유럽 국가를 가져다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우리의 나라들이 아닌 신앙, 곧 모든 민족의 의식은 물론 관례가 혐오스럽지 않고 오히려 그 민족을 지키고 보호한다면 이를 거부하지도 해하지도 않는 신앙을 가져다주십시오.” Marcel Launay; Gérard Moussay, Les Missions étrangères: Trois siècles et demi d'histoire et d'aventure en Asie, Librairie Académique Perrin, 2008, 77-83면.

 

37) Dun Jen Li, China in transition, 1517-1911, Van Nostrand Reinhold, 1969, 22면.

 

38) 이 교령은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와 마테오 리치 신부의 선교학적 접근, 예를 들어 조상 제사 의식에 대한 접근 방법을 실질적으로 입증하였다. George Minamiki, The Chinese rites controversy: From its beginning to modern times, Loyola University, 1985, 197면 참조.

 

39)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도 16세 교황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테오 리치 신부에게 넘치는 경의를 표하였다. https: //christiansforsocialaction. org/resource/heroes-of-the-faith-matteo-ricci(2015.5.15.), https://www.vatican.va/content/benedict-xvi/en/messages/pont-messages/2009/documents/hf_ben-xvi_mes_20090506_ricci.html(2009.5.6.).

 

40) https://www.americamagazine.org/faith/2022/12/17/matteo-ricci-sainthood-cause-244370(2022.12.17.).

 

<원문 : The Federation of Asian Bishops’ Conferences, FABC 50 Bangkok Document Journeying Together as Peoples of Asia “... and they went a different way”(Mt 2:12), 2023.3.15.>

 

https://fabc.org/wp-content/uploads/2023/05/FABC-Bangkok-Document-web.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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