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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ㅣ심리ㅣ상담

[상담] 별별 이야기: 나보고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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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3-08 ㅣ No.1030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63) 나보고 어쩌라고 (상)

 

 

사제가 되고 싶어 신학교에 입학한 마태오는 인간관계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았다. 본당 신부님이 자신을 너무 이기적이며 태도가 교만한 학생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본당 신부님은 자신의 성격과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사제가 되기 힘들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마태오는 내 모습이 원래 이런데, 그런 나를 어떻게 바꾸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는 너무 자신만 생각한다” “좀 겸손한 태도를 보여라” “왜 그렇게 눈치가 없냐”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나? 그 눈초리가 맘에 안 든다”라는 말을 들으면 분노감정이 올라와 견디기 어려웠다. 차라리 “오늘은 밥값을 네가 내라” “기도를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으니, 차라리 성당에서 성무일도를 바쳐라” “앞으로는 눈을 마주치지 말고 말해라”라는 식으로 말해주면 더 편할 것 같다고 했다.

 

마태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마태오는 사람들이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말을 주로 듣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평가와 판단은 주관적이다. 즉 평가와 판단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어떤 사실과 현상에 대한 주관적 견해다. 따라서 자신의 말과 행동이 마음에 안 들면 주관적으로 비판하지 말고, 차라리 객관적인 행동 지침을 말해 주는 것이 낳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마태오의 말대로라면 “버르장머리가 없구나!”라는 평가를 하지 말고, “나를 만나면 적어도 45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라!”라는 식으로 지시해 달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마태오처럼 대인관계 감수성이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이라든지, “눈치가 없다”는 판단의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태오는 자신을 위해 충고하고 싶다면, 비난하기보다는 차라리 지침을 말해달라는 하소연을 하였다.

 

신학생에게는 본당 신부님과의 관계가 무척 중요하기에 신부님과의 에피소드 하나만 말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최근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본당 제대회원들이 실수한 것이 마태오 눈에 들어왔다. 그날은 초를 두 개씩 제대 좌우로 세워야 하는 주일인데 그만 초를 세 개씩 세워 놓은 것이었다. 마태오는 주저 없이 제대로 올라가 제대회 자매에게 초를 두 개씩 다시 세팅해 놓으라고 말했다. 자매는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초를 다시 두 개씩 맞추어 제대를 꾸몄다. 여기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본당 신부님이 마태오를 불러 야단을 쳤다. 앞으로 제대회원들에게 뭘 지시할 사항이 있으면 직접 말하지 말고 자신에게 먼저 알리라는 것이었다. 마태오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하는 일마다 야단을 치는 본당 신부가 점점 불편해졌다.

 

마태오는 이렇게 생각했다. “뭔가 문제가 생겨 잘못된 일이 있어도 사회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그냥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자신의 일은 아니었지만, 제대회원이 잘못한 일을 지적해 주어 교정해 주었다면 일단 절차야 어떻듯 간에 그건 고마운 일이 아닐까? 그리고 급한 상황에서 꼭 절차를 잘 거쳐야만 하는 것일까?”

 

마태오는 이 사건의 핵심을 자신이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더라도 일단 본당 신부를 통해서 일을 처리하지 못한 ‘절차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자신이 신부님으로부터 혼이 난 이유는 본당 신부님을 제쳐놓고 자신이 직접 문제를 해결한 일, 즉 절차를 무시한 행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본당 신부가 마태오를 야단친 진정한 이유는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당 신부가 과연 마태오를 야단친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3월 7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64) 나보고 어쩌라고 (중)

 

 

마태오는 제대회 자매의 실수를 본당 신부님에게 먼저 말씀드리지 않고 직접 지적했기 때문에 야단을 맞았다고 생각했다. 본당 신부님은 본당에 관련된 모든 사실을 먼저 보고받아야 하는 책임자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지적일 것이다. 하지만 마태오는 비록 절차의 문제는 있었지만, 미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눈치도 없고 너무 의욕이 앞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잘못된 일에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마음을 공감받지 못해 속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웬만한 사람이라면 본당 신부님이 마태오에게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제대회 자매가 그 지적을 받고 난 후 어떤 표정이었는지, 그 이후 마태오를 대할 때 뭔가 다른 느낌을 받은 적은 없는지를 물었다. 마태오는 그 당시 자매의 표정이나 태도가 변한 것은 알 수가 없지만, 그 후로 자신과 눈을 잘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보인다고 말했다. 대화가 이 정도까지 진행됐다면 본당 신부님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하고자 한 말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예상해야 한다. 하지만 마태오는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태오는 제대회 자매가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에게 지적받은 사실을 본당 신부님에게 고자질한 태도도 이해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지적을 당하면 누구나 기분은 나쁠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하여도 잘못을 알려주어 시정됐으면 일단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닐까?’ ‘자매의 하소연을 듣고 나의 상황과 의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절차를 지적하시는 신부님은 왜 나만 미워하는 것일까?’ ‘앞으로 상황이야 어떻든 간에 본당에서 신학생이 신부님에게 지켜야 할 예의와 절차만 잘 지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마태오는 신학생 신분으로 본당에서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하루빨리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신자들은 자신을 신학생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았고, 본당 신부님은 자신의 말과 행동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마태오는 마치 벼랑 끝에 내몰린 처지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이 문제의 핵심은 신학생이 신부님께 먼저 상의하지 않고 직접 제대 회원의 실수를 지적해 주었다는 점이 아니다. 즉 신학생이 지켜야 할 절차를 지키지 않았던 행동을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지적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마태오가 제대회 자매의 실수를 알아차렸을 때 곧바로 본당 신부님에게 찾아가서 보고했다면, 과연 본당 신부님은 절차를 잘 지켰다고 칭찬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예상 답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예상되는 답변은 긍정적 반응이다. “아! 그래? 알았다. 내가 직접 자매에게 전화해서 촛대를 하나 빼라고 할 테니 그리 알거라. 미사 전에 빨리 알려주어서 고맙구나.” 두 번째로 예상되는 답변은 부정적 반응이다. “아! 그래? 그럼 자네가 직접 그 자매에게 말해주면 되지 그걸 왜 바쁜 나에게 말하는 거지?”

 

마태오는 자신이 겪은 사건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본당 신부님이 자신을 미워하기에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꼬투리 잡는 것처럼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제대회 자매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본당 신부님에게 먼저 알렸다 하더라도, 부정적 답변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됐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마태오는 본당 신부님이 자신에게 요구했던 절차의 문제는 이 사건의 핵심 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당 신부님이 마태오에게 원했던 것은 절차를 지키는 과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3월 14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65) 나보고 어쩌라고 (하)

 

 

상담을 통해 마태오는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고 상대의 욕구가 충족되는 상황이 가장 좋은 대인관계의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 해결책을 자신의 사건에 대입해 보는 과정에서 마태오는 제대회 자매가 잘못한 것을 바로잡아주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인식했다. 즉 마태오는 자매의 실수를 지적하고 잘못을 바로잡음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했던 것이다.

 

마태오는 자신의 욕구는 해결했지만, 그 순간 자매의 마음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사회적 민감성이 떨어지면 자신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는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 마태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대인관계의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사회적 감수성 훈련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려야 했다.

 

마태오가 경험한 사건을 다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마태오는 제대의 촛대 수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이것을 바로 잡아주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고, 동시에 이를 당연하고 정상적인 욕구로 인정했다. 하지만 상황을 바로잡고 싶은 욕구의 더 깊은 곳에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만일 자신의 욕구가 상황을 바로잡고 싶은 것이었다면, 자기가 제대 위에 촛대 하나씩을 빼며 “자매님~ 오늘은 주일이니까 촛대가 양편에 두 개씩이면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해주었을 수도 있다. 지적과 충고 대신 자기가 손수 봉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자매가 직접 잘못을 인지하고 시정하도록 지적한 행동은 마치 선생님이 잘못을 저지른 학생을 가르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마태오는 의식적 차원에서 신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말과 행동에서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넘쳐흘렀다. 다만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물론 제대회 자매에게 잘못을 깨닫도록 지적한 행동의 이면에는 자매가 이 사건을 확실히 인지하고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않도록 각인을 시켜주고 싶은 사랑의 의도(?)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자신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은 욕구의 하나로서, 역시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의 또 다른 표현방식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대회 자매가 마태오에게 교육받고 싶은 욕구를 평소에 표현했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가 받을 마음이 없는데 주는 것이야말로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묻지도 않는데 답을 주는 사람에게 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제대회 자매가 마음이 넓고 아량이 넘쳐 마태오의 지적을 오히려 고맙게 받아들여 주었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매는 분명히 이 사건으로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신부님으로부터도 지적받고 싶지 않은 자존심을 신학생으로부터 손상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분을 참지 못했으면 본당 신부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을까 생각해 보니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마태오는 이 사건 외에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을 제물로 삼는 여러 경우를 탐색하면서 사회적 민감성을 높이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다 보니 본당 신부님이 왜 자신에게 절차를 지키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마태오가 스스로 내면 통찰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본당 신부님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말씀은 차라리 어떤 상황에도 나서지 말고 본당 신부님을 통하라는 훈시뿐이었을 것이다. 마태오는 점차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홀로 남겨져 울고 있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기 시작했다. 타인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고 자신에 대한 연민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치유를 향한 첫걸음이 분명해 보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3월 21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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