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시간전례(성무일도)의 거행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0 ㅣ No.265

시간전례(성무일도)의 거행 (1)

 

 

그리스도와 교회의 공동행위인 전례는 교회의 기도, 곧 매일 거행하는 시간 전례 안에서도 실현된다. 다시 말하면, 시간 전례 안에서도 새로운 계약의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시간 전례를 거행하며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할 때 그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 그러므로 시간 전례의 거행은 마땅히 전례의 중요한 부문으로 간주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간 전례의 거행을 탁월한 전례 기도로 이해하였으며, 이의 거행이야말로 주님께서 분부하시고 바오로 사도가 권고한 끊임없이 계속해야 할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하였다(전례헌장, 86항 참조).

 

앞으로 이 글에서는 시간 전례의 신학적 의미와 각 시간경의 특징 그리고 시간 전례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게 될 것이다.

 

 

기원과 발전

 

초대교회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매일 기도에 대한 강한 충동은 예수님 자신에게서 유래한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는 스스로 열심히 기도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으며(마태 6,9-13; 루가 11,2-4) “간단없이 항상 기도하라.”(루가 18,1)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차례 경계, 주의를 잃지 말라는 주님의 권고도 듣게 된다. “너희는 깨어있어라. 주인이 집에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새벽일지, 아침일지 너희는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5; 마태 24,42).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사도행전과 사도 서간들이 전해주고 있듯이 기도에 관한 주님의 권고와 모범을 충실하게 따랐다(사도 1,14).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히브리 전통에 따라 하루 중 특정한 시간들에 성전과 회당에서 있었던 기도와 예배에 참석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기도를 위한 특정한 ‘시간들’은 일찍이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특정한 시간들 중에 무엇보다 먼저 아침과 저녁 기도를 위한 시간이 첫자리를 차지했고, 다음으로 ‘빛의 시간’ 열둘에 따라 분류하여 삼시, 육시, 구시의 기도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식 분류를 따라 하루를 아침 6시에 시작했다. 이러한 초기 공동체의 기도는 가족적이거나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성서는 그 반대의 증거들을 제공해 준다. 성서는 공동 기도와 그 기도를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바쳤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사도 2,46-47).

 

순교자 이냐시오 주교 역시 이러한 증거를 보여준다(마그네시아 교회에 보낸 편지, 7,1). 이러한 증거는 2세기초에도 사도들의 전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부터 약 100년 후 테르툴리아노에게서는 법과 관습에 따라 규정된, 아침과 저녁 기도의 시간에 대해 법정기도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기도에 대하여, 25,5). 로마의 히폴리토에 따르면, 사제들과 부제들은 매일 아침 주교가 지정한 장소에 모여 가르침과 기도를 포함하는 말씀의 전례를 신도들과 함께 거행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사도전승, 39; 41). 그리고 저녁기도 때에는 히브리인들과 희랍인 그리고 로마인들에게, 여러 가지 양식의 빛을 밝히는 종교적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4세기 말엽의 “사도 규정”은 이미 오늘날의 우리의 저녁기도와 비슷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VIII, 35,2-7).

 

다음으로 시간 전례의 구조에 특별히 영향을 미치는 것이 수도 공동체들이다. 수도 공동체들은 기도의 시간들에 추가하여 한밤중에 바치는 밤중기도를 제도화했다. 그러나 밤중기도는 그때까지는 부활날 밤과 몇몇의 다른 축일들에만 바쳤다. 밤중기도에 이어 즉시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직전에 바치는 기도인 일시과와 잠자리에 들기 직전의 종과가 추가된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시간 전례의 양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는 노르챠의 성 베네딕토(+547)이다. 성 베네딕토 양식은 로마에서 바쳤던 수도자들의 성무일도를 수정한 것이었다. 수도원이 아닌 주교좌나 명의 교회들의 시간 전례에 언제나 큰 영향을 끼쳐온 성 베네딕토 성무일도는 아침기도(=밤중기도), 찬미기도, 일시과, 삼시과, 육시과, 구시과, 그리고 저녁기도와 끝기도로 구성되었다. 시간 전례는 1970년에 새로 개정될 때까지 이 구조를 가지고 행해졌다.

 

이러한 기도의 시간들은 여러 가지 이름들이 있다. ‘시간 전례’와 ‘법정 시간들’(Horae canonicae)이라는 표현은 기도가 하루의 지정된 시간에 배치되고, 하루 전체를 성화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다. 또 다른 이름, ‘브레비아리움’(Breviarium)의 기원은 중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라틴말 breviaria(= 축약된, 줄여진)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그 안에 있는 주(註)나 짧은 지시를 따라, 공동으로 바칠 때 사용한 여러 책들에서 어떤 텍스트들을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짧은 목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1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든 텍스트들을 한 권의 책 안에 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한 권으로 묶고서도 이전 목록들의 이름(이것을 tabellaria라고도 불렀다)을 여전히 표기하고 있었다. 이 한 권으로 묶은 성무일도는 개인적으로 암송하는 데에, 특히 여행할 때 크게 편리했다. ‘Breviarium’의 어원적인 기원에 대해 어떤 다른 학자들은 “성무일도를 바치기 위해 사용한 여러 책들(시편집, 응송집, 기도집, 독서집)을 하나로 묶으면서 생긴 축약, 독서들의 축소”로 설명한다. 자주 사용되는 또 다른 이름 하나가 ‘직무’(Officium)이다. 이는 자주 ‘하느님의’(divinum)라는 수식어와 함께 쓰인다.

 

‘성무일도’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이 이름은 서방 라틴 교회에서 본래 의무와 의식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더욱이 전례 행위 전체를 뜻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점차로 시간 전례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러한 관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새 시간 전례서가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늘날에는 ‘성무일도’라는 용어보다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시간 전례’(Liturgia Horarum, Liturgia delle Ore, Pri re des Heures, Stundengebet, Liturgy of the Hours)라는 말로 이 전례를 표현한다.

 

서방 대부분의 나라에 로마 예식이 전파되면서 로마 시간 전례도 받아들여졌다. 중세기에는 기도의 수와 길이가 증가되는 경향을 보였으나 이러한 증가와 확장은 커다란 불편을 주어 시간 전례를 축소하게 하였다. 특별히 16세기초에 근본적인 개혁을 강하게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1535년에 Qui ones 추기경이 개인적으로 바치도록 마련한 '성 십자가 축소 성무일도’라고 하는 아주 축소된 Breviarium은 몇 년 사이에 약 100판이 나올 정도로 열정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것은 교회 권위에 의해 금지되고1 1568년 비오 5세가 개편한 새 Breviarium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이것도 즉시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여가서 특별히 언급해야 할 것은 비오 10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개혁들이다. 여기서는 밤중기도의 시편이 18개 또는 12개였던 것이 9개로 줄어들었다. 다음으로 비오 12세는 1948년 전례의 전반적 개혁을 준비하는 위원회를 세우고 1950-1957년에 전5권으로 된 새 성무일도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러한 비오 12세의 전례 개혁의 노력은 1955년과 1960년의 법규 개편을 결실로 내놓기도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집중적으로 Breviarium의 개혁에 열을 쏟아 전례헌장 안에 19개항(83-101)으로 된 한 장(제4장)을 이 부문에 할애했다. 여기에서는 시간 전례의 신학과 영성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고, 공동체 기도의 특성을 강조한다. 또한 ‘시간의 진리’ 곧 기도의 시간을 제 시 간에 맞추도록 강조한다(88항). 구체적인 개정을 위한 기준은 89항에 소개된다. [경향잡지, 1996년 1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본지 주간, 신부)]

 

 

간전례(성무일도)의 거행 (2)

 

 

시간전례란 무엇인가?

 

“전례헌장”과 “시간전례(성무일도)에 관한 총지침서”(이하 ‘총지침서’라고 한다)는 매우 분명한 논조로 시간전례가 무엇인지를 소개한다. 그 주제를 크게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가) 시간전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시고 유일한 중개자이시며 그분만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전공동체를 당신 자신과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기도와 온 인류의 기도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다지셨다. 실상 인간의 종교적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구원적 가지와 목적을 이룬다”(총지침서, 6항). 세례와 견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기도에도 참여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런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당신 몸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또 우리의 기도를 받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시편주해, 85,1).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만이 아니라 시간전례를 그 거행할 때에도 안에 현존하시고 구원을 이루신다(전례헌장, 83항).

 

나) 시간전례는 교회의 기도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인간역사에 개입하신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들과 구원된 사람들을 성령의 보살핌을 받는 공동체로 만드셨다. 그 공동체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부른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에 따르면 그 백성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라는 말을 자주 역사적인 제도, 또는 외형적인 조직체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지닌 영적인 힘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교회’(ecclesia)라는 말 자체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모든 믿는 이들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밀접한 일치를 이루고, 그를 통해서 영적인 힘을 얻는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도시대부터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따라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는 처음부터 ‘기도하는 교회’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교회의 신원은 시간전례 안에서 그 핵심적 표현을 찾는다. “교회는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교회의 본질을 실행하고, 지금의 교회를 실현하며 앞으로 되어야 할, 아직은 이루지 못한 교회가 될 수 있는 힘을 이끌어낸다.” 이제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가 어떤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있든 아니든 이 기도에 참여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인류를 구원하는 교회의 자기실현을 위해 함께 일한다.

 

“이 기도를 바치는 모든 이는 한편으로 교회의 고유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을 찬미하면서 어머니이신 교회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있기에 그리스도의 신부가 지니는 최고의 영예에 참여하는 것이다”(전례현장, 85항; 총지침서, 15항 참조).

 

다) 시간전례는 대화의 특성을 지닌다.

 

모든 전례행위가 그런 것처럼 시간전례도 하느님과 인간의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대화의 특성을 지닌다. “시간전례 안에서 인간의 성화가 이루어지고 하느님께 대한 예배가 성취된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백성이 하느님께 노래와 기도로써 응답하는 가운데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 또는 나눔이 이루어진다”(총지침서, 14항).

 

라) 시간전례는 무엇보다도 공동기도이다.

 

“전례헌장”과 “총지침서”는 시간전례가 지닌 공동체적 특성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례는 사적인 본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다른 전례행위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적용되는 원칙에 따라 공동으로 시간전례를 거행하는 것이 혼자 바치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전례헌장, 26-27; 99항). “총지침서”는 시간전례를 공동으로 거행해야 하는 사제나 수도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의 단체와 본당 공동체도 할 수 있는 한 교회 안에서 “주요 시간경들을 공동으로 바치도록”(총지침서, 21항)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신자들이 시간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함께 모일 때, 마음과 목소리를 합쳐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하는 교회를 드러내준다”(총지침서, 22항). 그래서 총지침서는 ‘가정교회들’인 가족들도 함께 기도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시간전례의 어떤 부분들을 거행함으로써 교회와 더욱 밀접히 일치하도록 권고한다(27항).

 

마) 시간전례의 시간들은 제시간에 맞추어 거행되어야 한다.

 

전례헌장 88항과 94항에 따라서 이미 지속적으로 준비해 온 것이 “총지침서”의 중요한 요구사항이 되었다. “시간전례의 목적은 하루 전체와 모든 인간활동의 성화에 있으므로, 이들 시간경의 순서는 현대생활의 여건을 감안하면서 각 시간경들의 거행이 하루의 제시간에 가능한 한 부합하도록 다시 꾸며졌다”(총지침서, 11항). 그러므로 아침기도를 오후에, 저녁기도를 이미 밤이 지난 다음 새벽에 바치는 것은 옳지 않다. 몇 십년 전만 해도 실제로 많은 사제들이 사목활동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할까봐 전날 오후에 밤중기도와 아침찬미를, 오전에 저녁기도와 종과경을 바치는 것을 관례처럼 생각했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오늘날에도 계속 이렇게 시간전례를 거행하는 사제들을 가끔 볼 수 있다.

 

바) 어떤 지정된 사람과 공동체는 시간전례를 거행할 의무를 지닌다.

 

교회의 이 본질적 기도가 언제, 어느 곳에서도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교회는 서품으로 성직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수도 공동체에 이 기도의 봉사의 직무를 맡기었다(총지침서, 17항; 28-29항). 종신부제들도 주교회의의 지시에 따라 최소한 매일 시간전례의 일부분을 바치도록 권고한다(총지침서, 30항). 그러면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간전례의 거행을 다른 전례행위로 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 주었고, “특별한 경우와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 성무일도의 의무를 바꾸어주거나 전부 또는 일부를 면제할 수 있도록 주교들과 수도회의 최고 장상들에게 권한을 위임하였다(전례헌장, 97항).

 

그러나 공의회 교부들은 시간전례의 거행이 부담스럽다는 것을 이유로 면제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거부했다. “총지침서”는 시간전례의 거행에 대해 그것을 교회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라는 권고로 이해하고 있다. “총지침서”는 주요 시간경, 곧 아침찬미와 저녁기도에 대해서는 더욱 강하게 권고하고 있다. “중대한 이유가 없는 한 이 두 가지 시간경을 생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총지침서, 29항). 위에서 말한 의무를 완화하는 조항은 현행 교회법 제276조 2항과 3항 그리고 1174조 1항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로운 전례서의 다양성에서 나온 것 같다(전례헌장, 98항 참조). 그런데 현실에서는 “총지침서” 29항의 “날마다 시간경 전체를 바칠 것이다.”라는 표현을 “날마다 성무를 면제하는 의무를 가진다.”로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 올바로 거행하는 시간전례는 개인의 신심을 북돋아준다.

 

시간전례 의식은 그것이 아무리 직무 때문에 행하는 것일지라도 마음의 참여없이 형식적인 의무에서만 거행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전례헌장은 “성무일도를 바치는 사제들과 모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칠 때에 정신을 소리에 맞추도록 주님 안에서” 권고한다고 말하고 있다(전례헌장, 90항). 마음과 목소리의 일치는 “이 기도가 그에 참여하는 사람들 각자의 기도가 되고, 신심과 하느님의 풍부한 은총의 원천이 되며, 개인기도와 사도적 활동의 자양분이 되도록 하기 위해”(총지침서, 19항)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그리스도를 찾고 기도로써 그리스도의 신비에 항상 더 깊아 젖어들며” 시간전례를 거행하는 사람들은 “구세주 자신이 기도하실 때 지니셨던 같은 정신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청원을 드린다”(총지침서, 19항). 이것을 더욱 잘 실현하기 위해서 전례헌장은 “전례와 성서, 특히 시편에 관한 풍부한 교육”(전례현장, 90항)을 받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전례헌장이 다른 전례행위들에서 추천하고 있는 명상적인 침묵(30항)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총지침서”는 이 지시를 특별히 시간전례에 적용한다. “마음속에 성령의 목소리가 더 충만히 메아리쳐오게 하고, 우리 개인의 기도를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 공동체의 목소리와 더욱 밀접하게 결합시키기 위해 적절할 때에는… 지혜롭게 한 순간의 침묵을 삽입시킬 수 있다”(202항). [경향잡지, 1996년 2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본지 주간, 신부)]

 

 

시간전례(성무일도)의 거행 (3)

 

 

각 시간경의 본성과 정신

 

‘시간을 따르는’ 시간전례의 특성은 각 시간경들이 하루를 따라 사다리처럼 나누어 펼쳐졌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 시간들에 연결된 구원의 신비들과 관련을 갖는 각 시간경들의 주제에 따라서도 드러난다.

 

가) 아침찬미

 

아침찬미는 전통적으로 밤을 마감하고 새날을 시작하는 시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신랑을 깨우는” 신부인 교회의 목소리이다. “총지침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침찬미는 그것이 지난 많은 요소에서 나타나듯 아침시간을 성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고 또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38항). 아침찬미의 많은 요소들은 실제로 아침, 여명, 빛, 솟아오르는 태양, 하루의 시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통상 찬미가, 많은 시편들, 후렴, 응송, 청원기도, 마침기도, 즈가리야의 노래의 후렴들에서 확인된다.

 

아침찬미는 새벽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기시킨다. 아침찬미는 ‘솟아나는 태양’이시고, 세상을 비추시며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 하루의 모든 활동 안에서, 하루의 순례길에서 우리를 인도하러 오시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노래한다.

 

또한 아침찬미는 창조(우주의 아침)와 자유롭고 지혜로운 활동을 통하여 역사의 틀(인류의 시작이며 아침)을 짜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라고 인간한테 주신 사명을 기억한다.

 

동시에 아침찬미는 ‘찬미의 제사’(sacrificium laudis)이다. 그것은 만물의 봉헌이고 활동적인 하루를 아버지 하느님께 헌정하는 것이며 정확한 싸움을 하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아침찬미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시간의 성화라는 목적과 함께 하느님의 도움을 통해서 전교회의 청원과 구원의 신비들을 기념하는 성사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나) 저녁기도

 

저녁기도는 낮의 끝이며 밤의 시작인 저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로마인들의 옛 분리법에 따르면, ‘전야’(vigilia vespertina), 곧 저녁은 밤을 넷으로 나눈 그 첫 부분이었다. 로마인들은 밤을 저녁, 자정, 닭이 우는 새벽, 그리고 아침의 넷으로 나누었다. 로마인들은 어두운 그림자가 지기 시작할 때 보이기 시작하는 저녁의 빛나는 별을 ‘vesper’(venus : 금성)이라고 불렀다.

 

“저녁기도는 그날에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과 우리가 올바로 행한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낮이 기울어 저녁이 될 때 바치는 것이다”(총지침서, 39항).

 

교회는 하루를 마감하며 자녀들의 죄로 하느님의 깨끗한 옷을 더럽힌데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한다(통상 3주간 월요일과 목요일 저녁기도의 마감기도 참조).

 

저녁기도는 (저녁에 거행된) 주님의 만찬의 신비를 기념하고, 당신의 지상생애를 마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한다(총지침서, 39항). 저녁기도는 복된 희망과 세상 종말에 있을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 도래의 기다림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빛의 은총을 우리한테 가져다주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과 관련하여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다(총지침서, 39항).

 

저녁기도는 교회의 포도밭의 일꾼들을 상징한다. 그 일꾼들은 하루의 끝에, 하루의 노동에 해당하는 보상 이상의 주님 사랑의 큰 선물을 받기 위하여 주님과 만난다(마태 20,1-6 참조). 낮 동안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도된 교회는 엠마우스의 제자들처럼 저녁이 되어 ‘저녁때가 되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라고 말한다(루가 24,29; 통상 4주간 월요일 저녁기도의 마감기도).

 

다) 독서기도

 

독서기도는 ‘시간의 성화’라는 시간전례의 목적과 관계없이 “하느님 백성에게 그리고 특히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께 봉헌된 사람들에게 성경은 물론 영성 저술가들의 저서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들을 풍부한 묵상자료로 제공해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총지침서, 55항). 그래서 독서기도는 “더 적은 수효의 시편과 더 긴 독서로 이루어져야 한다.”(총지침서, 57항)고 하면서 “하루 중 어떤 시간에나 바칠 수 있으며, 또한 전날 저녁의 저녁기도 후에 바칠 수도 있다.”(총지침서, 59항)고 하였다.

 

이 ‘독서기도’라는 이름은 성무일도서를 개정하기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름이다. 이 기도는 본래 밤중기도의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Matutinum’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기에 밤중찬미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수도공동체들은 이 독서기도를 밤중에 드릴 수도 있다. 이 기도의 첫째 독서는 성서독서이고 둘째 독서는 교부들이나 교회 저술가들의 전기나 저서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말씀의 봉독과 시편으로 짜여진 이 기도는 찬미의 성격과 함께 주님의 말씀과 교부들 그리고 교회 저술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주님과 교회의 신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기도이다. 그리고 이 기도에서 듣게 되는 성서말씀은 그 뒤에 따르는 응송을 통해서 하나의 기도가 된다.

 

라)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 또는 낮기도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일찍부터 사도시대의 모범을 따라 일하는 하루 중 여러 시각에 기도를 바치곤 하였다. 이에 따라 동 · 서방 교회의 전례관습은 삼시와 육시 그리고 구시에 기도를 바쳐왔는데, 이 시각들은 주님의 수난사건들과 최초의 복음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육시, 곧 정오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각이며, 구시(오후 세시)는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시각이다. 또 삼시(오전 아홉시)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세계 각지에서 온 군중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한 시각이다.

 

마) 끝기도

 

‘끝기도’는 그 이름이 뜻하는 대로 하루를 마감하며 잠자러 가기 전에 드리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자정이 지난 후라도 밤의 휴식을 취하기 전에 바치는 하루의 마지막 기도이다”(총지침서, 84항).

 

이 끝기도는 하루 중의 마지막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칠 때에 “전능하신 천주여,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고 하느님께 강복을 청한다. [경향잡지, 1996년 3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본지 주간, 신부)]

 

 

시간전례(성무일도)의 거행 (4)

 

 

시간전례의 여러 구성요소들

 

시간전례는 시편(제목, 후렴, 시편기도 포함)과 성서의 찬가, 그리고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 또는 교회 저술가들의 저서에서 따온 독서, 응송, 찬미가, 청원기도, 마침기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시간전례의 중요한 요소인 묵상을 위한 침묵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가) 시편과 찬가

 

시편은 시간전례 거행의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나누는 대화로서, 그 대화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고통과 기쁨, 두려움, 신뢰를 표현하기도 하고, 탄원과 감사를 드리기도 한다. 그 시편들은 병과 죽음, 박해와 갖가지 위험, 선과 악을 대하고 있는 인간조건을 드러내 주고 있다. 동시에 시편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자연적, 초자연적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나 시편은 순전히 인간의 손으로 된 것만은 아니다. 그 시편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작성되어 그것으로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과 사도들은 이 시편으로 기도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전통은 일찍부터 이 시편으로 바치는 기도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리신 기도요, 교회가 신랑에게 드리는 목소리이며 그리스도께 대한 아버지의 목소리, 또는 언제나 구원을 노래하는 천상의 찬가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시편으로 하는 기도가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들과 모든 상황에서 바치는 기도임을 확인시켜 준다. 혼자서 기도하는 사람이나 회중은 모두 교회와 그리스도의 기도를 그들은 바치는 것이며 한 순간의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기도를 바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바람을 드러냄으로써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통교함으로써 구원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능한 대로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데에 그 본질이 있으며, 그럴 때에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편의 기도는 기도하는 이와 분리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시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특전이라고 생각하였다.

 

시편의 기도는 계약의 고백이다. 각 시편은 자체로 독립적인 문학형태를 지닌 것이며, 하나의 시편은 또 다른 하나의 시편과 동일시할 수 없는 저자 자신의 독특한 접근을 담고 있다. 이 시편들에서 표현되는 상황은 각기 다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시편들은 처음부터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기 위해 작성된 것들도 있고, 또 다른 시편들은 성전이나 예배의 기능과는 아무런 관련없이 작성되었지만 편집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를 위해 재편성한 것들이다. 한마디로 각 시편의 문학적 기원과는 관계없이 모든 시편들이 예배를 위한 기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시편은 여러 상황에서 하느님 앞에 어떻게 나서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신앙심의 모범이 되었다. 이렇게 문학적인 시편들이 신앙심의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가 이방인들과 달리 신성시하여 하느님과 나누는 관련성 안에서만 생성되고 발전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라는 명백한 소명에 따라 형성되었는데. 이 계시는 점진적으로 이스라엘을 하느님과 통교하도록 이끌었고, 이것은 또 자연히 예배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자신들의 의무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전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히브리 문화에서 형상적이고 장식적인 예술을 제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부분적으로는 장식예술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민족적, 역사적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음악과 문학만을 이용하였다. 하느님의 계시는 말씀을 매개로 하여 전해졌다. 이러한 특징은 이스라엘의 예술을 ‘말씀의 예술(l’arte della parola)’로 자리를 잡게 했다. 말씀이 바로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삶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시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영원히 기도하는 사람으로 머무는 사제가 되라고 부름받은 백성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시편 전체를 기도와 계약의 관계로 설명하는 이유이다. 시편은 기도이다. 히브리 문화 속에 사는 시언은 하느님을 목표로 하지 않고서는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다. 시편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고백하는 기도이다. 더욱이 시편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효과적으로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 시편의 기도는 ‘계약의 고백(confessione dell’Al1eanza)’이 된다. 시편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손수 당신 백성의 사명으로 규정한 계약을 깨닫게 하고 선포하게 한다.

 

그리스도 교회는 이스라엘의 기도서인 시편집 안에서 주님의 신비를 밝혀내고, 시간전례 안에서 시편을 암송함으로써 파스카 신비의 한 차원,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를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시간전례가 본질적으로 기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이 기도를 드릴 때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린 기도가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아들과 아버지가 나누시는 영원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시간전례서는 확연히 저주의 성격을 띤 시편들, 곧 57편, 82편, 108편 그리고 몇몇 시편들의 몇 절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편들을 담고 있다. 특정한 시편들을 제외하는 이유는 그 시편 자체가 본질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시간전례서는 또 어떤 시편들은 대림과 성탄, 사순, 부활 등의 특별시기에 배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시편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성격 때문이다(77, 104, 105편). 이런 시편들은 더욱 분명하게 기념적인 전례시기와 연결시키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총지침서, 130항).

 

통상 4주간 시편집에는 서른네 개의 성서의 찬가가 섞여있는데. 그중에 스물여섯 개는 구약에서, 여덟 개는 신약에서 따온 것이다. 구약의 찬가들은 아침기도에, 신약의 찬가들은 저녁기도에 노래된다.

 

시편과 찬가에는 ‘따름노래(후렴 : antiphona)’가 붙어있는데, 이 따름노래는 그 시편과 찬가를 전례적으로 해석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또 각 시편과 찬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이 따름노래 외에 두 개의 표제를 갖고 있는데, 첫 번째 것은 성서적인 배경을, 두 번째 것은 전례적인 전망을 상기시킨다. 전례개혁은 ‘시편기도(oratio psalmica)’도 마련하기로 하였는데,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시편과 찬가는 모두 노래할 수 있도록 운율을 맞추어 구성되어 있어서 노래로 할 때에만 그 문학적 특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총지침서, 103, 269, 277항). 우리말 시편도 그러한 특성을 살리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찬가, 특별히 신약성서의 찬가에 대해서는 노래로 하기에 덜 적합한 부분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 찬가들도 그 내용으로 볼 때 노래로 부를 것을 생각하면서 선택한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나) 독서

 

독서의 기도에 배정되어 있는 독서로는 성서의 말씀과 교부들 또는 교회 저술가들의 글을 봉독하게 되는데, 이 독서들은 1년을 주기로 네 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긴 독서말고도 아침기도와 낮기도, 저녁기도를 위해서도 짧은 독서들이 준비되어 있다.

 

성서의 독서들은 전례주년 안에서 교회가 신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구원의 역사를 커다란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릴 수 있도록 배열하였다. 교회는 이 독서로써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여 그 은혜를 찬양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빛이요 그것을 배우는 학교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일(mirabi1ia Dei)’을 묵상하고 찬미하는 양식 곧 기도의 양식이 되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교부들이나 교회 저술가들의 작품을 통한 독서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어서 더 참된 ‘교회감각(sensus ecclesiae)’을 형성하고, 조직적이고 학문적인 해석은 아닐지라도 성서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주며 성서에 담긴 한없는 보화를 알아보게 한다. 또한 교회전통의 가치를 드러내고 그리스도교 계시에 대한 위대한 증언들과 다양한 체험들과 접촉하게 한다(총지침서, 163-165항).

 

그리고 가끔 만나게 되는 성인전에서 따온 독서는 성인들이 지닌 영성의 특정을 보여주어 그것이 교회생활 안에서 갖는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성인들의 삶은 신자들의 신심을 드높이는 데에 구체적인 모범을 제시해준다(총지침서, 167항).

 

이러한 독서들은 하느님과 나누는 통교를 증진시킴으로써 기도의 필요성을 더 느끼도록 하고, 이렇게 바치는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더 힘있는 사람이 된다. [경향잡지, 1996년 4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본지 주간, 신부)]

 

 

시간전례(성무일도)의 거행 (5)

 

 

다) 응송

 

응송은 독서와 깊이 맞물려 독서에서 들은 말씀을 되새기고 그 내용을 연장시켜 주는 구실을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영혼 안에 일으킨 반향을 표현한다. 독서에서 구약성서의 말씀을 들었더라도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다시 읽게 해주는 것이 응송이다(총지침서, 169항).

 

특히 독서기도에서 제2독서의 응송은 그 말씀을 되돌아보게 하고 중요한 개념들을 강조하며 그것들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하여 일상의 삶 안에서 이루게 한다(170항).

 

이 응송을 노래로 하지 않고 단순히 읽을 때에는 선창 다음의 반복을 하지 않아도 되며(171항),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응송은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은 다른 적합한 노래나 침묵으로 대체할 수 있다(49항).

 

라) 찬미가

 

성서의 시편과 찬가와 마찬가지로 찬미가도 노래로 할 수 있도록 운율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시편과 찬가와는 달리 매우 자유스럽게 하느님을 향한 회중의 종교적 감성을 표현한다. 찬미가는 각 시간경과 축일이나 고유한 전례시기가 가지고 있는 주제의 특성을 회중에게 분명하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알려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시켜 더 잘 바치게 하려는 것이다(173항). 이 찬미가들 중에는 시적으로 또 내용적으로 매우 훌륭한 것들이 많다. 한마디로 이러한 찬가는 공동체 기도의 분위기를 창출하고 시작부터 회중을 하느님을 찬미하는 축제의 물결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데에서 자기 구실을 다한다고 할 수 있다(42항). 혼자서 기도하는 이라도 이 찬미가 안에서 강한 은혜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 청원기도와 마침기도

 

아침찬미와 저녁기도의 청원기도는 모두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여러 전례시기와 축일 그리고 통상 4주간 안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청원기도의 양식들은 2백 가지 가량 된다. 이 기도문들은 다양하고 풍부한 청원을 담고 있다. 그러나 미사에서 하는 ‘신자들의 기도’와는 양식을 다르게 했고, 선창에 뒤따라 하는 응답도 다양하게 했으며 응답하는 방식도 다르게 할 수 있도록 했다. 각 지향에 일정한 응답을 할 수도 있고, 선창은 전반부만 하고 회중이 후반부를 받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각 지향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킬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청원기도에는 이 기도를 마무리하는 사제의 기도가 없는데. 이것은 청원기도 뒤에 즉시 ‘주의 기도’를 바치고 마침기도(oratio)를 바치기 때문이다(180항 이하 참조).

 

마침기도는 독서기도에서는 언제나 미사의 본기도와 같다. 또 아침찬미와 저녁기도에서는 특별시기와 대축일 그리고 축일과 기념일에, 낮기도에서는 대축일과 축일 그리고 특별시기에 미사의 본기도와 같다. 이 밖의 다른 기도들은 거의 새로이 작성한 것으로 칠십여 개에 이른다. 이 기도문들은 통상 4주간의 아침찬미와 저녁기도 때에, 통상 4주간과 기념일의 낮기도 때에 그리고 끝기도 때에 바치게 된다. 이 마침기도는 각 시간경의 특별한 이념을 부각시키는 구실을 한다.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주의 기도’는 아침찬미와 저녁기도의 절정을 표현한다. 이렇게 매일 아침찬미와 저녁기도에서 ‘주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미사에서 한 번 바치는 것과 함께 “디다케”(Didache)에서 말하고 있는(8장) 하루에 세 번 ‘주의 기도’를 바치던 관습을 계속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바) 침묵

 

기도하는 이는 누구나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예배자이고 직접적인 수혜자이다. 그러므로 시간전례를 거행하는 각 개인은 그 안에서 실행되는 그리스도의 신비 속에 깊이 젖어들어 풍부한 은총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각 개인의 능동적인 참여 없이는 전례거행은 효과를 내지 못한다. 모든 이는 기도할 때에 정신을 목소리에 맞추고, 이루어지고 있는 신비에 마음을 일치시켜 최대한 자신 안에 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기도하는 모든 이는 구세주께서 기도를 바치실 때 지니신 마음과 똑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19항). 우리는 입으로 바치는 기도를 자신 안에 내면화시켜 결실을 거두어야 한다. 이러한 내면화를 위한 가장 귀중한 기회는 바로 침묵의 순간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침묵을 ‘거룩한 침묵’(전례헌장, 30항)이라고 까지 했다.

 

침묵의 순간은 “마음속에 성령의 목소리가 더욱 완전히 울려나게 하고 우리의 개인기도가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공적 목소리에 내적으로 더욱 밀접하게 결합”(총지침서, 202항) 시킨다. 이러한 침묵은 지나치게 전례의 단절을 가져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절히 삽입하여야 한다. 침묵을 삽입하기에 좋은 순간은 “시편 뒤 따름노래(후렴)를 반복한 다음에, 독서나 성경소구 다음에 또는 응송의 앞이나 뒤”(202항)가 될 것이다. “개인으로 바치는 경우에는 정신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부분에서 성무일도가 지니고 있는 공적기도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 묵상에 머물 수 있는 더 폭넓은 기회가 주어진다”(203항). 이처럼 침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행하는 전례가 각 개인 안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게 하는 귀중한 전례행위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성무일도’라고 했던 ‘시간전례’가 지닌 신학적 의미와 각 시간경과 구성요소의 특성들을 살펴보았다. 이 시간전례는 ‘기도하는 교회(Ecclesia orans)’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시간전례를 거행함으로써 ‘하느님께 끝없는 찬미(laus perennis)’를 드리는 것이고, 천상에서 드릴 영원한 찬미를 앞당겨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전례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전례로서 그리스도의 행위인 만큼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공동체 전체, 곧 사제와 신도들이 함께 거행함으로써 이 기도가 지닌 공동체성을 충만하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전례의 공동거행은 그 자체로 ‘교회의 기도’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무일도가 온 교회의 행위라는 것은 지역교회가 사제들과 다른 보조 봉사자들에게 둘러싸인 주교와 함께 거행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한 거행 안에서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참으로 현존하며 활동하는 것이다”(20항).

 

이제 탁월한 전례기도인 시간전례의 거행을 통해서 그리스도 공동체 어디에서나 주님께 대한 찬미와 구원의 선포가 끊임없이 울려퍼지기 바란다. [경향잡지, 1995년 5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본지 주간, 신부)]



2,65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