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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향심기도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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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219

향심기도의 이해

 

 

향심기도의 방법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왔던 그리스도인 관상기도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맥락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고 교부들의 가르침과 「무지의 구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들에 바탕을 두고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의 언어로 구체적인 수련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인간의 발달과 그에 따른 영성생활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 심리학과 사회학적 통찰을 철저하게 고려하여 발전되어 왔다. 신학적, 인류학적, 정신의학적 이론과 접목시켜 이론적 배경을 발전시킨 것이다. 향심기도는 “교회는 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현대의 용어와 현대의 언어로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옛 전통을 새로운 시대 감각에 맞게 그리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발전시킨 관상기도의 방법이다.

 

 

1. 그리스도교 관상기도의 전통과 향심기도

 

교회는 초창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관상기도를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목표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문예부흥사조가 형성된 이후에 살아있는 전통으로서 이 유산이 급격하게 유실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말경부터 기도법이 복잡해지고 체계화되면서 논리적 묵상, 정감적 기도, 하느님을 향한 몰입을 지향하는 관상기도로 분화되면서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줄로 아는 풍조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16세기 초에 이르러 교회 전통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신앙생활의 자유로운 실천을 용인하지 않음으로써 관상기도 생활에 관한 기풍이 결정적으로 위축되었다. 

 

영성의 길이 봉쇄 수도회 남녀 수도자들이나 관심을 갖고 걸어가는 외롭고 험난한 수련의 여정인 줄로만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관상기도에 대해서나 영성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다 보니 자연히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은 영성이나 관상기도와는 무관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루어져 왔다. 이렇게 우리 교회가 영성적인 빈곤의 시대를 오랫동안 지내오면서 영성의 위기는 곧 교회의 위기로 나타나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불교의 선(禪)이나 인도의 요가 등 동양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 크게 늘어났고, 신흥 종교나 유사영성 운동이 대두되면서 신자들을 교회에서 빼내가는 구실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교회 안에 새로운 신학적, 영성적 쇄신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그 영향으로 영성적인 자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토머스 키팅 신부는 교회가 영적 목마름을 풀어줄 방법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 데에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고, 그 대안으로서 관상기도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르침과 더불어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문맥 안에서 “향심기도(Centering Prayer)”의 방법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향심기도의 방법은 1970년대 후반부터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피정을 통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그 후 미국 전 지역에서 향심기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향심기도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다. 1984년에 국제관상지원단이 창립되었고, 1986년에는 미국의 뉴저지와 콜로라도 스노매스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국제관상지원단 사무실을 두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2002년 6월 토머스 키팅 신부의 내한 강연을 기점으로 한국관상지원단 사무국이 개설되었는데, 이곳이 향심기도 방법을 소개하고 지원하는 영적 연락망의 역할을 하고 있다. 

 

 

2. 향심기도의 신학적 기초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도를 ‘하느님과의 만남, 대화’로 정의해 왔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토머스 키팅 신부는 “기도는 관계”라고 정의하면서, “향심기도는 거룩한 독서로 생겨난 하느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그리움을 가지고 관상으로 들어가려 할 때 관상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곧 향심기도는 거룩한 독서를 할 때 하느님과의 일치, 친밀함으로 나아가는 데 일어나는 장애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단순히 방법일 뿐만 아니라 관상기도를 시작하는 첫 계단이므로 그 자체로 관상기도이기도 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친밀한 일치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를 그러한 사랑 깊은 관계로 초대하신다. 향심기도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마르 12,30)는 하느님의 원의에 따라 그분과 맺는 친밀한 일치의 관계를 지향하며 ‘하느님 안에 쉼’이라는 관상에 이르는 길로 이끌어준다.

 

1) 향심기도의 개념

 

향심기도는 “하느님을 만나려면 자신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과 그리휘스(Bede Grifiths)에게서 시작된 말이다. 나의 참자아 안에, 곧 나의 가장 중심(center)에 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기도’라는 뜻이다. 또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내가 하느님께 동의해 드리는 기도’이며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대신해서 기도하시도록 놓아드리는 기도’이다. 향심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것인데, 우리가 간절한 마음을 하느님께 보여드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끌어당겨 주신다. 그러한 의미에서 향심기도는 주의를 집중(attention)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과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려고 지향(intention)하는 기도이며, 어떠한 행동(doing)을 하는 기도이기보다 그분 곁에 머물러 함께 존재(being)하려는 기도이다.

 

2) 향심기도의 기본 원칙

 

향심기도는 우리 존재의 중심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통한 사랑의 변형을 지향하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나타나는 세 가지 단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단계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믿음으로 자신을 여는 것으로 하느님의 현존에 끊임없이 동의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현재의 순간에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겨드리는 희망을 가지고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총과 정화의 순간들을 통해서 해주시는 변형을 그저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과정으로서 우리 안에 이미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것으로부터 해방(정화)되는 여정이다.

 

3) 신학적 기초 - 원천, 초점, 효과

 

향심기도의 원천은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삼위일체이시다. 우리 안에 삼위일체적 생명이 머물러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간절한 소망 속에 일차적으로 나타나있다. 향심기도는 삼위일체적 생명과 일치를 이루는 관계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길로서, 이것은 성부에게서 파견되어 오시고 성령을 보내신 분으로서 우리 생명의 원천이 되신 그리스도와 갖는 실존적인 관계에서 나온다. 

 

향심기도의 초점은 우리 가슴 속에서 나날이 부활하시고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언제나 계시는 영광된 그리스도,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깊어지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향심기도 중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관련지으며 동의해 감으로써 그리스도의 이 신비에 우리 자신을 맡겨드린다. 그리고 그 신비에 동참하는 그리스도 닮기의 여정으로 나아가며, 기도하고자 그리스도께 나아가 이러한 신비를 내면에서 재현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상처와 결함을 치유하고 거짓자아가 소멸하면서 우리의 참자아가 내면에서 부활하는 신비를 경험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곧 우리의 수난과 부활이므로, 이것을 향심기도의 초점으로 삼는 것이다.

 

향심기도의 공동체적 효과는 교회 지체들의 상호 충만과 연대감으로 드러나는데, 영적인 여정에 들어선 사람들에게서 기도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는 “인간 가족의 모든 지향과 욕구를 대신하여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으로써,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기도 속에서 모든 인간 가족과 우리가 하나라는 연대를 체험하게 된다. 

 

 

3. 향심기도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

 

토머스 키팅 신부는 “영적 여정은 결국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께 승복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해 주시는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향심기도는 자신의 거짓자아에서 초연해지는 수련이며 또 자신의 참모습을 재발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 인간조건과 자아 

 

인간조건이란 말은 전통적인 원죄 상태와 그 결과들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가 행복을 얻는 진정한 원천인 하느님 현존을 경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하느님과의 친밀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관상적 차원은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즐겁게 누리도록 해주는 도정인데, 이 관상적 차원을 잃어버린 것이 행복으로 가는 열쇠를 잃어버린 오늘날의 인간조건이다. 행복의 열쇠는 밖에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열쇠는 우리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신학에 따르면, 원죄는 세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첫째는 우리가 어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무지함이고, 둘째는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탐욕이며, 셋째는 행복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하지 못하는 나약함이다. 죄의 본질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거부하고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데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본성(2베드 1,5; 1요한 3,9 참조)인 참자아를 거부하고 자신의 거짓자아에 따라 사는 것이 죄이다. 이것이 아담이 저지른 죄이며 낙원을 잃게 한 죄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정점으로 하는 무한한 행복을 갖도록 창조되었으며, 참자아(True Self)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모습, 곧 하느님의 거룩한 생명에 참여한 자아이다. 인간의 행복은 이 참자아에서 되찾을 수 있으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 영적 여정의 목표이다.

 

토머스 머튼은 거짓자아에서 해방되어 참자아에 이르는 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의 정체성의 비밀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감추어져 있다. (…) 그러므로 나의 실존과 평화와 행복과 관련된 문제는 단 한 가지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하느님을 발견한다면 나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내가 참자아를 발견한다면 하느님을 발견할 것이다.”

 

2) 향심기도 안에서의 “신성한 치유”

 

나의 중심으로 들어가 거기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관상기도라면, 향심기도는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는 기도이다. 우리의 참자아 주변에는 지금까지 살면서 만들어진 거짓자아가 자리를 잡고 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낡은 자아, 외적 자아’가 있다. 우리가 중심으로 향하려면 이 거짓자아를 지나가야 한다. 거짓자아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 이 거짓자아 너머 참자아 안에서만 우리가 하느님을 뵐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화는 거짓자아를 발견하고 관상기도를 통하여 떠나보내는 수련을 통해 가능한데, 우리도 모르게 형성된 거짓자아는 알 수 없기에 떠나보낼 수 없다. 이러한 경우에는 관상기도를 통한 수동적 정화, 곧 성령께서 해주시는 정화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심오한 치유를 이룰 수 있다. 영적 여정은 우리 일생의 여러 단계를 파고들어가는 고고학적 발굴과 같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떤 연령에 있든지 우리의 현재 상태를 들추어내신다.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의 현재 인간관계와 자기가 만든 자아에 중독된 행동에서 가장 파괴적인 측면들을 치유하시는 것이다. 이 발굴을 통하여 우리의 중년기, 성년기, 청년기, 사춘기, 아동기, 유아기, 출생시기까지 거꾸로 파내려간다. 이러한 영성적 발굴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 속에 살았던가를 느끼며 거짓자아가 축소되어 가는 은총을 발견한다. 정서적 쓰레기의 맨 밑바닥에 가면 거기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까? 영적 여정 안에서 바닥은 정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기에서 비로소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다. 거기에는 다른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거짓자아에서 참자아로 나아가는 것을 회개(metanoia)라고 부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고백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나(거짓자아)는 점점 작아지고 그분(참자아)은 점점 커져야 한다.”고 깨닫는 것이 회개이다. 잘못된 행복 추구의 길에서 참된 행복 추구의 길로 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회개이다. 그리고 우리가 참자아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변화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신다. 인류의 죄(원죄)를 없애시고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거짓자아를 없애려면 거짓자아를 십자가 위에 못박으라고 하신다. 거짓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비로소 참자아가 우리 안에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향심기도의 방법

 

향심기도의 방법은 단순하다. 다양한 기도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관상기도로서의 향심기도를 좀 더 분명하게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고자 관상지원단에서 제시하는 방법과 지침을 따르기를 권고한다. 

 

1) 향심기도를 위한 지침

 

①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한다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한다.

 

②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잠시 동안 자리를 잡은 다음,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심과 활동하심에 동의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부드럽게 떠올린다.

 

③ 기도 중에 당신의 사고(분심과 잡념)가 개입하였으면 아주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④ 기도 시간이 끝날 때, 눈을 감은 채 2분 정도 침묵 속에 머물러있는다.

 

2) 향심기도에서의 의지와 지향

 

① 향심기도는 지향(intention)의 훈련이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의지, 곧 하느님과 함께 머물 것에 대한 우리의 선택 기능을 계발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더 깊이 응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향심기도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지향을 습관이 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인 ‘자아 포기’의 영성적 태도와 깊이를 체화할 수 있게 해준다.

 

② 거룩한 단어는 생각들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예”를 말하고자 하는 우리의 원지향을 재확인시켜 준다. 거룩한 단어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드린다는 지향을 나타내며, 의식 속에 지나가는 어떠한 생각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되돌아가야 하는 거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단지 우리의 지향을 나타내려고 사용하는 것뿐이다. 

 

③ 향심기도 중에 할 단 한 가지 행동은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하고자 하는 우리의 지향을 유지하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집중(attention)하는 기도가 아니라 지향(intention)하는 기도이다. 곧 향심기도 중에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노력은 ‘노력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기도 중에 떠오르는 여러 사고들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능력이 자라면 그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 가운데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게 된다. 

 

 

5. 향심기도의 열매 ─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형

 

향심기도의 열매는 기도 시간 중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루가 6,43)고 하셨는데, 향심기도를 하고 나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달라진 삶의 태도와 질을 통해 향심기도의 열매를 식별하게 된다. 향심기도의 가장 큰 열매 가운데 하나는 거짓자아로부터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참자아로 살아가게 되는 데 있다. 또한 향심기도는 수련을 통해 삼위의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동의하는 태도, 곧 그분의 전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자라남으로써 가족과 이웃과 세계와의 관계에서도 더욱 수용적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모든 형태의 생각과 감정과 영적인 욕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떠나보내는 수련을 통하여 나에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과 사건을 비롯하여 자신의 약점까지도, 또한 내가 겪은 슬픔과 탄식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력이 생기게 된다. 이처럼 향심기도는 자신과 이웃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담아내는 용기와 같은 구실을 하며,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나에 대한 그분의 모든 계획까지도 더 깊이 수용할 수 있는 열린 태도를 갖추게 된다. 향심기도의 수련을 통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이 하느님이시라는 확신을 가질수록 우리는 다른 모든 것, 특히 다른 사람들의 원천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고, 향심기도의 수련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한 이웃과의 연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향심기도의 가장 성숙한 열매는 우리가 처한 순간순간을 하느님의 선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향심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매 순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돌보심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아름다운 창조계의 일부라는 것을 발견하는 눈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면 할수록, 우리 주변에서 지각하는 모든 실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더 깊이 발견해 가게 될 것이다. 

 

 

6. 맺는 말

 

기도는 활동 없이 홀로 서지 못한다. 활동 없는 관상기도는 침체에 빠지게 되고 관상기도 없는 활동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한 영성과 기도에 매인 사람들은 문제를 자기 밖에서 보고 그 원인을 자기 밖에서 찾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거짓자아들의 허울층들을 지나고 지나서 하느님께 닿은, 참자아를 회복한 사람들은 다르다. 현대 유사영성 운동들이 드러내는 근본적인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를 찾으려는 노력이 기본적으로 자기나 가족에 국한된 형태의 이른바 “웰빙”에 고착될 때, 하느님께서 지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보시고자 하시며 성령께서 함께 보살피시는 인류 가족에 대한 나의 책임이 분리되고 오히려 이 책임을 간과할 수 있다. 현대 유사영성 운동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여러 영성 운동 역시 지나치게 자기 울타리에만 집착할 때, 세계와의 건강한 대화를 외면하거나 훼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향심기도만이 기도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향심기도는 하느님께 자기를 열어드리는 하나의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모든 성사와 전례,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의 기도 방식도 하느님과 참자아가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여 하느님의 현존에 자신을 맡겨드리는 데 유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도달하고자 형성해 온 풍요로운 영성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향심기도는 이러한 전통에 근거하여, 특히 거룩한 독서를 근간으로 삼아서,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활동에 우리 자신을 맡겨드리는 태도를 익힘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한다. 또한 그 안에서 우리 존재 자체가 변형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한 지평을 열어준다. 향심기도의 수련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근본 목적인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소명을 진정한 자유 안에서 실천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 향심기도에 대해서는 한국관상지원단(http://www.centeringprayer.co.kr)에서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목, 2005년 9월호, 김종순(사랑의 씨튼 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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