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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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이스라엘12: 십자가의 길과 골고타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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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15 ㅣ No.1076

[이스라엘 성지 길라잡이] 십자가의 길과 골고타 언덕


우리가 막연히 성당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할 때는 경건한 십자가의 길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하면, 북적이는 소음과 거리를 가득 채운 아랍 시장(왼쪽 자료 사진), 좁은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청소차, 1달러짜리 잡상인들과 소매치기…. 이것이 바로 순례객들이 받는 첫 인상이다.

이곳에서 누가 수난을 겪은 일이 있었느냐는 듯 시끌벅적한 군중들을 헤치고 십자가의 길을 걷노라면, 일거수일투족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잡상인들의 눈길 속에 내 신앙마저 1달러짜리 싸구려가 되는 듯한 분심이 든다.

지저분한 시장 바닥이 어이없게만 보이는 순례객들은 어떻게 이런 거룩한 곳을 이 모양으로 방치하느냐 의아해하지만, 아마 2,000년 전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길도 비슷했을 것 같다. 파스카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엄청난 인파, 그 속에서 형틀을 짊어지고 골고타로 가는 죄인의 행렬은 분명히 눈길을 끄는 구경거리였고, 동물원 원숭이를 구경하듯이 손가락질을 하거나 메시아가 저럴 수는 없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었을 듯싶다.

그러다가 구경꾼 무리에 섞여있던 키레네 사람 시몬은 무작위로 끌려나와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갔다. 지금이야 시몬이 베로니카 성녀만큼 유명세를 탔지만, 형틀을 대신 지던 그때의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로마인들은 형장에 가기 전에 죄인이 죽어버리면 처형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까지 살아있을 수 있도록 도중에 그 짐을 덜어주었다.

◆ 십자가의 길은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 부른다. ‘슬픔의 길’이라는 의미로서, 본시오 빌라도 법정이 있던 안토니아 요새로부터 900미터 정도 이어지는 오르막길이다.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골고타 언덕은 히브리어로 ‘골골레트’라 불렀고, ‘해골’이라는 뜻을 가졌다. 쉽게 말해 ‘해골산’, ‘해골언덕’인데, 사람들이 묻히는 공동묘지 같은 곳이었다. 주검이 부정하다는 모세 오경 율법에 따라 예수님 시대에 골고타는 예루살렘 성 외부에 있었고, 우리가 기념하는 십자가의 길 14처 가운데 대략 일곱 번째 처소부터는 고대 예루살렘 성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 골고타에 성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비잔틴 로마 시대가 시작된 서기 4세기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어머니 헬레나의 요청으로 이곳에 무덤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원래는 지금의 무덤 성당보다 훨씬 거대하고 웅장했지만 전쟁으로 파괴되어 버렸고, 현재는 중세 십자군 시대에 재건한 모습으로 대부분 남아있다.

-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골고타 언덕 정상 제12처 : 제단 옆 유리 아래 하얀 반석이 골고타의 일부이다.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골고타 아래쪽으로 아담의 무덤이 있었고, 운명하시는 예수님의 피가 스며 내려가 아담의 뼈를 적셨다고 한다. 아담 이야기는 어느 정도 전설적인 면이 있지만, 골고타는 많은 사람들이 묻힌 무덤 지역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씻으신 사건과 상징적인 관련이 있다.


현재 무덤 성당은 골고타 언덕과 예수님 무덤으로 크게 나뉘고, 여섯 종파(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공동으로 관리한다. 성당 열쇠는 무슬림 가정에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침마다 열쇠 관리인이 문을 열어주어야 순례가 가능하다.

다양한 종파가 공존하는 현장인 만큼, 무덤 성당에서는 시간별로 여러 교회의 독특한 전례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 흥미롭다. 골고타 언덕과 무덤 중간 정도의 위치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누이고 염을 했다는 장소가 전승으로 남아있다.

◆ 죄인이 고통 받는 것을 즐겼다던 로마인들의 십자가 형, 이 형벌은 사실 고대 근동에서는 매우 뿌리 깊은 처벌 방식이었고, 구약성경에도 가끔 나오는 ‘나무에 매달아 두는 처벌’에서 유래한 듯하다.

창세기 40장 요셉 이야기에는 파라오의 생일날 제빵 시종장이 나무에 매달리는 처형을 당했고(22절),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과 세 아들들이 전사했을 때 필리스티아인들이 그 시신을 벳 산 성벽에 매달았다(1사무 31장). 에스테르기에서는 유다 민족을 몰살하려 한 하만이 에스테르의 삼촌 모르도카이를 위해 준비한 말뚝에 오히려 자신이 매달려 죽었고(7,9-10), 신명기에는 “죽을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21,22-23)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나무에 매다는 처형은 신명기에서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불명예스럽게 표현할 정도로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이미 사형 당한 죄인의 치욕을 더하게 하려고 나무에 매달고 본보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8세기 잔인함으로 악명 높았던 아시리아 사람들도 전쟁 포로들을 처형할 때 이 방식을 즐겨 사용했고, 후대 로마 시대까지 이어져 야만인(로마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처리할 때 자주 등장했었다. 특히 로마인들은 죄인을 나체로 십자가 나무에 매다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살아있는 며칠 동안 죄인이 흘리는 오물까지 노출되어 구역질나면서도 모욕적인 형벌이었다.

때로는 죄인이 오래 버티도록 고통을 경감시키려고 몰약을 섞은 포도주를 마시게도 하였다(요한 19,28-30).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대략 2-3일 정도 목숨이 붙어있지만, 마지막에는 형틀 위에서 몸이 늘어져 호흡기관을 압박하고 질식사한다. 사람의 한계를 시험하는 이 지독한 고통 때문에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는지 그 인간적인 번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떠들썩한 시장통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며 2,000년 전 예루살렘 거리를 채웠던 군중이 되어본다. 그때 나라면 어떻게 했었을까? 나는 배신하고 도망간 제자들과 다를 수 있었을까?

◆ 죄 없이 다른 이들을 위해 죗값을 치른다는 것, 이것은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생각할 때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인성을 누르고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삶을 대하는 새로운 지표를 발견한다. 인생은 나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고통을 참고 희생할 때 우리 모두가 살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제로 실천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해관계에 얽히고 얽혀 참으로 실천하기 힘든 이 계명은 사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아닌가?

인생의 숙제처럼 짊어지고 사는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나의 십자가가 힘들어질 때면, 이해인 수녀님이 쓰신 수필을 되새겨본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힘들 때, 이름 지을 수 없는 분노, 질투, 탐욕, 이기심이 마음에 그늘을 드리워 괴로울 땐, 모르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들의 위대한 사랑, 그 넓고 깊은 용기를 생각하며”(「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에서)작은 나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다.

새삼스레 스스로의 아집에 묶여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의미를 묵상해 본다.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연구원. 이스라엘에서 성지순례 안내자로 일하며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 글 · 사진 김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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