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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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교토(京都) 천주교 성지 (3) 26성인 발상지와 이치죠 모도리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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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1 ㅣ No.1440

교토(京都)에서 분 바람 - 교토 천주교성지 ③ 26성인 발상지와 이치죠 모도리바시



1593년 일본에 도착한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를 비롯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받은 넓은 땅(묘만지<妙滿寺>라는 절이 있었던 자리)에 성 마리아성당을 건립하였고, 그 성당 옆에 성 안나병원, 성 요셉병원을 세웠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모여서 다이우스 마을(데우스 <라틴어로 신>를 믿는 사람들의 마을)이 생겨나자 뒤이어 학교, 스페인 사절관(使節館)도 세워졌다. 현재 교토(京都) 시내에 있는 시죠병원(四條病院)의 병원 벽에는 석판이 박혀 있는데 그 석판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서쪽 100미터 묘만지 마을에 1594년 프란치스코회의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에 의해 성 마리아성당, 병원, 학교, 스페인 사절관이 세워졌다. 1597년 2월 5일에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26성인은 그 신부를 비롯한 5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와 3명의 일본인 예수회 수사, 그리고 17명의 일본인 신자로서 거의 모두가 여기에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건설된 성 안나병원, 성 요셉병원은 교토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다수의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이에 26성인을 널리 알리며 구빈구병(救貧救病: 가난한 사람을 구하고 간병함)의 사회사업을 행하였음을 기념하고자 명판을 게양한다. - 1979년 재일본 스페인 대사관, 가톨릭 교토대교구”

400년 전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키리시탄(천주교인)들이 이 땅에 모여 바로 그 자리에서 헌신적인 봉사를 하였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을 간절히 원해서 인도를 찾아간 마더 데레사가 1979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부터 400년이나 전에도 교토로 온 선교사들과 키리시탄들이 그들의 손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병원을 두 곳이나 세워 아파하는 이들을 보살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키리시탄들 중에서도 특히 의사들은 치료에 헌신하여 어떤 이는 약을 짓고 또 다른 이들은 간호를 하였다. 그리고 어른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과 함께 부지런히 심부름을 했던 어린 아이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처음에는 키리시탄들에게 호의적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96년 선교사들의 조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두려움을 느껴 키리시탄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고 마침내 박해가 시작되었다. 포졸들은 성당을 둘러싸고 24명의 키리시탄들을 잡아 감옥에 가둔 뒤에 소달구지에 태워서 교토 시내를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고 한다. 다이우스 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치죠 모도리바시’라는 다리가 있다. 일본에서는 참수형(斬首刑) 이상의 죄인들을 처형하기 전에 그들의 귀를 자르고 소달구지에 태워 조리돌림을 하였는데, 교토에서는 그러한 죄인들의 조리돌림의 시작점이 바로 이치죠 모도리바시였다.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를 비롯한 24명의 키리시탄들(교토에서 체포된 키리시탄은 24명이었으나 나가사키까지 가는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오르간티노 신부에게서 부탁을 받아 이들과 함께 한 베드로 스케시로와 프란치스코회 회원을 돌보기 위해 따라간 프란치스코 기치는 가는 도중에 포졸들의 신문을 받았을 때 신앙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며 오히려 이들과 함께하는 것에 대해 기뻐하며 받아들였다고 전해져 있다. 이 두 사람이 24명의 키리시탄에 합류하게 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렇게 해서 나가사키에서 처형을 당하게 된 키리시탄이 26명으로 늘었다.)도 다른 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리돌림을 당하기 전에 예외없이 이치죠 모도리바시에서 귀를 잘리는 끔찍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양쪽 귀를 자르도록 지시하였지만 키리시탄들에게 이해심이 깊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 1596년에 교토부교<京都奉行:교토와 그 근교를 관리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곳>를 맡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신뢰를 받았던 측근 중의 한 명. 히데요시로부터 키리시탄들을 탄압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체포하는 키리시탄을 최소한 줄이려고 힘을 썼고, 히데요시의 분노를 달래어서 키리시탄들을 처형하지 않도록 힘을 쓰기도 하였다고 전해져 있다.)는 한쪽 귀를 자르게 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처럼 24명의 키리시탄들이 귀를 잘린 이 이치죠 모도리바시에서는 그 후 1619년 교토의 대순교(大殉敎) 때에도 52명의 키리시탄들이 이곳을 거쳐 조리돌림을 당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한편 이치죠 모도리바시에는 다음과 전설이 있다. 918년 미요시 키요쓰라(三善淸行: 平安時代<해이안시대>의 귀족으로 몬죠<文章> 박사)가 죽었을 때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들은 아들 죠조(淨藏)가 기슈(紀州) 쿠마노(熊野)에서 교토로 서둘러 돌아와 보니 그 장례행렬이 마침 이 다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아들 죠조는 관을 붙들고 슬피 울며 열성으로 기원하였더니 신기하게도 아버지 키요쓰라는 일시 소생하여 부자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전설에서 모도리바시(돌아오는 다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해져 온다. 이 이야기는 신약성경에 있는, 아이를 잃고 마음 아파하는 어머니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를 하시니 그 아이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그 전설 때문에 예부터 전쟁터로 향하는 이들과 그 가족들은 이곳을 찾아 무사히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집을 가기 전의 여성들과 그 가족들은 시집을 간 후 이혼해서 되돌아오지 않기 위해 이 다리 근처에 오는 것을 꺼려했다는 이야기 또한 전해오고 있다.(참고도서 : 스기노 사카에 저서 《교토의 키리스탄사적을 돌아보다》, 산가쿠출판)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10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월간빛, 2015년 3월호, 
이나오까 아끼, 쥴리아(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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