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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70: 삼위일체의 성녀 엘리사벳의 영성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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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06 ㅣ No.848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70) 삼위일체의 성녀 엘리사벳의 영성 ③


손 내미셨을 때 구원의 역사는 시작됐다

 

 

- 성자 안에서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로 우리를 예정하신 하느님 아버지. 사진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에서.

 

 

삼위일체 각 위격과의 고유한 관계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앙은 엘리사벳의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드러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엘리사벳은 삼위일체를 이루는 각 위격, 즉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그 이상으로 언급하며 각 위격과의 고유한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그저 막연하게 추상적인 분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삶에 동반하는 구체적인 존재로 받아들였으며, 무엇보다도 각각의 위격과 친밀하면서도 고유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음을 반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각각의 관계는 서로 씨실과 날실처럼 긴밀하게 연결돼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삼위일체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

 

엘리사벳은 주로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성부 하느님에 대해 전하며 그분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특히 성녀는 에페소서, 로마서에 드러나는 가르침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고 그분의 충만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선택되고 예정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우선, 엘리사벳은 성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부는 본체(本體)이시고 만물이 그분에게서 유래하며 그분은 늘 일하십니다”(시 101). 

 

그러나 이런 교의신학적인 정의와 별도로, 성녀에게 하느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드러납니다. 아버지께서는 인류의 비참한 상황을 목도하고 연민을 갖고 그들을 위해 당신 아드님의 중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성자의 청원을 받아들이셨다고 합니다 “성자: 아버지, 저는 그들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아, 제가 사람이 되고 세상에 살면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일기 21). 성녀의 전망에는 이미 영원으로부터 인류를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자의 강생과 수난이 예정돼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자 안에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보았습니다.

 

 

하느님 영광의 계시인 구원 역사

 

엘리사벳에 따르면, 우리는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분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받아들이며 이로써 우리가 그 아버지에게 속할 뿐만 아니라 그분 역시 우리에게 속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느님은 무엇보다 영광의 하느님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가장 신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로, 당신이 간직한 모든 총체적인 풍요로움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게 자신의 평생 소명이라고 생각했던 엘리사벳,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인 석학 가운데 한 분인 발타사르 역시 그 성녀만큼이나 하느님의 영광에 꽂힌 분입니다. 발타사르 같은 경우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아예 하느님의 영광이 점진적으로 계시되는 역사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존재 그 자체로 영광이 충만한 분으로, 그분의 영광은 온 우주에 차고 넘칩니다. 굳이 한 줌의 재로 돌아갈 우리 인간이 그분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해서 그분의 영광이 더해지지도 않을뿐더러, 그분은 우리의 찬미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분도 아니십니다.

 

발타사르는 하느님의 영광은 특히 인류를 향한 그분의 자비하신 사랑이 드러나는 곳에서 그리고 그런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곳에서 밝게 빛난다고 합니다. 이런 그분의 사랑은 세상 창조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부르심을 비롯해 그들을 통해 이루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생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 영광의 계시가 정점에 이르는 것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인류를 위해 당신 아드님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 그 순간 결정적으로 계시됐으며 바로 그때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최고로 드러난다고 발타사르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대한 체험이 인간에게는 아름다움으로 비춰진다고 해서 그의 신학을 소위 ‘미학적 신학’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있던 발타사르는 엘리사벳이 말하는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찬미가 다름 아닌 인류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감사 가득한 응답이라고 봤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피아니스트로서 예술적 감수성을 지녔던 엘리사벳은 인류를 위해 영원으로부터, 죄로부터의 구원(救援)과 인간의 신화(神化)라는 원대한 계획을 준비하신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최고의 아름다움, 즉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자 했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30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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