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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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황사영과 조선후기의 사회변화: 경기 북부 지역 교회 사적의 기초적 검토 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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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9 ㅣ No.671

黃嗣永과 朝鮮後期의 社會變化


- 경기 북부 지역 敎會 史蹟의 기초적 검토 一例 -



1. 문제의 제기 

2. 黃嗣永의 삶과 天主敎
3. 黃嗣永과〈帛書〉
4. 黃嗣永을 어떻게 볼 것인가
5. 제언

 

 

1. 문제의 제기

조선후기 일부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직후부터 시작된 박해는 오히려 천주교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박해를 피해 지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에 의해 심산궁곡에까지 ‘敎友村’이 생겨나면서 천주교는 오히려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전국 어느 곳을 가더라도 천주교와 관련된 史蹟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박해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에도 한동안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을 현양시킬 사업에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5년 7월 5일 79위 福者가 탄생한 것을 계기로 순교자 현양운동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이에 힘입어 1939년 9월 8일에 라리보(A. Larribeau) 주교의 명의로 ‘조선 천주교 순교자현양회 발기인회’가 조직되었다. 그렇지만 9월 24일 서울의 계성 심상소학교에서 개최할 예정인 발기식은 조선 총독부의 불허로 좌절되면서 순교자 현양운동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46년 9월 16일 복자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조선 천주교 순교자현양회’의 발기식이 개최되었고, 순교자 현양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1)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에 힘입어 순교자 현양운동이 전 교구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수많은 천주교 관련 사적들이 확인되고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사적지 가운데 현재까지 무려 200여 곳이 이른바 ‘聖地’로 지정되거나 인식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전국에 걸쳐 수많은 교회 관련 사적지들이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확인되지 못하였거나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곳들 또한 적지 않다. 특히 경기 북부 지방이 그러하다. 필자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우선 여기에 있다. 그나마 확인된 사적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규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이곳에 묘소가 있는 순교자 황사영의 경우가 그러하다.2)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서는 그를 반역자로, 근대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는 그가 반국가적 · 반민족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반면에 천주교회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옹호하였다. 그렇지만 교회 바깥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심지어 護敎論의 입장에서 황사영의 행위를 옹호하는 교회 내부에서조차도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3)

그러나 황사영을 역적 또는 민족반역자인가 아니면 순수한 종교적 희생양인 순교자인가 하는 이분법적 접근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접근 방식보다는 교조화한 유교가 지배하던 당시의 조선 사회를 벗어나고자 ‘변화’를 갈망했던 한 젊은 신앙인이자 지식인으로서의 황사영을 당대적인 관점에서 역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필자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경기 북부 지역에 묘소가 있는 순교자 황사영과 관련된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각별히는 황사영과 〈帛書〉를 바라보는 이제까지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그를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4)


2. 黃嗣永의 삶5)과 天主敎

황사영이 1801년 12월 10일 26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陵遲處死刑으로 순교한 뒤, 그의 묘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1980년 9월 2일 황사영의 방계 후손 黃龍浩와 황인석의 제보로 최석우 신부가 179년 만에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속칭 가마골 또는 가막골) 洪福山 기슭에 위치한 昌原 黃氏 선영에서 발견하였다.

이곳을 황사영의 묘소로 확인하게 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창원 황씨 족보에 그의 묘소가 선영 아래에 있다는 기록이 족보에 실려 있다. 또한 그곳에서 15대째 창원 황씨의 묘지기로 있는 玄學鳳도 황사영의 묘소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홍복산 너머 살고 있는 창원 황씨 監司公派 후손들의 증언도 이와 일치하고 있다.6)

무덤을 발굴한 결과 청화백자 합과 돌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백자 합 속의 까맣게 응고된 결정이 견직물로 확인되었다. 이것을 황사영이 16세에 최연소로 진사과에 합격하여 正祖가 손수 황사영의 손을 어루만진 뒤 당시 풍속대로 손목에 감고 다녔던 붉은 비단으로 추정하고 있다.7) 묘소는 1987년에 공식적으로 황사영의 묘로 인정되었으며, 현재 ‘순교자 황사영’의 묘소로 단장되어 있다.

황사영은 서울 西部 阿峴坊에서 태어났다.8) 아마도 황사영의 집안은 그의 직계 11대조 黃琛 때부터 한양에 거주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사영의 조부 黃在正은 아들을 두지 못한 채 24세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촌인 黃在中의 큰아들 黃錫範을 양자로 들였다. 황석범은 25세의 나이로 1771년(영조 47)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 正字와 翰林을 역임하다가 2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進士 李東運의 딸 李允惠와 혼인한 황석범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黃嗣永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되었다. 황사영의 외조부 이동운은 李承薰과 일가였으며,9) 李家煥의 사위였던 李學逵의 조부였다. 따라서 황사영과 이학규는 內外從間이었다. 그리고 이동운의 부인은 해남 윤씨로, 尹斗緖의 증손녀였다. 이처럼 황사영은 외조모와 자신의 혼인을 매개로 정약용의 집안과도 연결되었다. 정약용에게 황사영은 堂姨母(5촌 이모)의 외손자인 동시에 조카사위[姪壻]였다. 이러한 가문적 배경을 가지고 유복자로 태어난 황사영은 1790년(정조 14) 16세의 어린 나이로 進士試에 급제하였다.10) 이후 그는 丁若鉉(정약용의 큰형)과 첫 번째 부인 李氏(李檗의 누이) 사이에 태어난 장녀와 혼인하였다.

이상에서 황사영의 가족적 배경을 살펴보았듯이 그의 천주교 입교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실제로 혼인을 한 직후인 1790년 무렵에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이승훈에게서 교리서를 얻어다보고 공부하여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丁若鍾과 洪樂敏 등과 함께 교리를 더욱 깊이 공부하고 연구하다가 1795년 周文謨 神父가 입국하자, 崔仁吉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로부터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의 교리를 접하게 된 황사영은 지배이념으로서의 위상을 잃어가고 있던 유교를 대신할 사상[救世之良藥]11)으로 여기고, 여기에 전념하기 위해 과거 응시를 포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明道會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의 집을 명도회의 하부 조직인 六會를 위한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12)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층들을 도우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교하는데 열성을 다하였다. 그가 전교한 사람들은 주변의 친인척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가까이 지내면서 전교하였고, 심지어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까지 천주교에 입교시키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13)

이와 같은 열성적인 활동으로 황사영은 교회의 중추적인 인물로 인정받았다. 金漢彬은 그를 “聖學高明”하다고 평가하였으며,14) 姜完淑은 양반 신분의 남자 신자들 가운데 “最高者”라고 하였다.15) 심지어 황사영 자신도 推鞫에서 천주교회 내에서 표면에 드러난 사대부로는 자신과 權哲身 · 丁若鍾 등이 있고, 中人 가운데에는 崔必恭 · 崔必悌 · 玄啓溫 등이 있다고 발언하였다.16) 이처럼 〈帛書〉 사건 이후와는 달리 교회 내에서 그의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신유박해가 발발하면서 모든 상황은 급박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박해는 순조 즉위년(1800) 12월에 최필공 · 최필제 · 吳玄達 · 趙東暹 등이 체포되면서 시작되었고, 이듬해 1월 공식 박해령이 내려지면서 본격화되어 거의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이 와중에 황사영은 피신하여 金漢彬과 함께 제천의 배론(八松亭 陶店村 金貴童의 집)으로 간 다음, 그곳에 토굴을 파고 은신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들려오는 절망적인 소식에 낙담하고 있던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가 자수한 소식을 접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자신이 교회의 보존과 재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궁리한 결과 자신이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것과 김한빈을 통하여 전해들은 것에 근거하여 4월 이후 〈帛書〉의 내용을 구상하고 집필에 착수하여 완성하였다. 그리고는 북경을 왕래한 적이 있는 黃沁의 이름으로 〈백서〉를 보내기로 하고, 9월 말 이전에 황심이 와서 가져가기로 약속했다. 이 〈백서〉는 玉千禧를 통하여 10월에 출발할 冬至使 편에 북경의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1751~1808) 주교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옥천희는 1801년 6월 북경에서 돌아오다 의주에서 체포되었고, 옥천희의 심문 과정에서 이름이 드러난 황심도 체포되었다. 황심은 황사영으로 인하여 옥사가 커진 사실을 알고는 황사영의 은거지를 자백하였고, 그 결과 황사영은 9월 29일 김한빈과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었다. 이와 함께 〈백서〉도 발각되었다.

황사영의 체포와 그가 소지한 〈백서〉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백서〉를 보고받은 정순왕후 김씨는 이를 국청에 내렸고, 조정에서는 조사 결과 〈백서〉의 내용 가운데 淸의 皇帝를 통하여 朝鮮에 敎諭하여 서양인을 가까이 교제하도록 하고자 한 점, 安州에 撫按司를 열어 親王이 國生을 감시하고 敎訓을 모으도록 명하게 하여 틈을 타서 행동하려고 한 점, 그리고 西洋國에 통하여 큰 선박 수백 척에 精兵 5, 6만 명을 꾸며 보내고 大砲 등 兵器를 많이 싣고 와서 조선[東國]을 깜짝 놀라게 하여 천주교가 행해지도록 한 내용들을 들어17) 무려 여섯 차례의 국문을 실시한 후 11월 5일 大逆不道의 죄로 서소문 밖에서 陵遲處死하였다.18)


3. 黃嗣永과 〈帛書〉19)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할 때 그 속에 담긴 내용이 파급시킬 결과에 대해서 과연 예견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아래의 기록을 살펴보자.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이 행동한다면 그 실행이 쉽고 어렵고 논하지 않고서 聖敎의 表樣에 합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 만일 본국의 교우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난을 일으킨다면, 실로 表樣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서양은 곧 聖敎의 근본이 되는 땅으로, 2,000년 이래 모든 나라에 전교하여 귀화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홀로 이 조그마한 동쪽 땅은 다만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굳게 막고는 聖敎를 해치고 신부[神司]를 살육했습니다. 이는 東洋 200년 이래 없었던 일입니다. 군대를 일으켜 죄를 묻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 이는 聲勢를 크게 펼쳐 傳敎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人民은 해로운 바가 없고 재물은 빼앗기는 바가 없으므로 또한 仁義의 극치이고, 뛰어난 表樣일 것입니다. 어찌 표양이 아름답지 못할까를 근심해야 할 것입니까. 다만 힘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입니다.20)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황사영 자신도 서양의 군함과 군대, 무기 등을 동원하여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실현 가능성과 정당성 여부에 사람들이 회의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계획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직접 亂을 일으키는 것보다 서양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조선 인민들에게 이로운 방법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다만 자신의 계획에 대한 실현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내용을 굳이 〈백서〉에 담으려 했을까? 무엇보다도 당시 교회가 처한 절박한 상황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교회 자체적으로 이러한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21)

그런데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하게 된 보다 근본적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조선 사회가 처했던 상황부터 이해해야 할 것이다. 17세기 이후 禮訟 등을 명분으로 한 극심한 당쟁을 거치면서 老論이 일당 독주를 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왕실의 권위와 위상은 여지없이 실추되고 있었다. 황사영 자신도 노론의 위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本國의 士大夫들은 200년 이래 당을 나누어 각각 일어났는데, 南人 · 老論 · 少論 · 少北의 네 갈래의 이름이 있습니다. … 노론 또한 나뉘어서 둘이 되었는데, 時派라고 부르는 이들은 모두 임금의 뜻을 잘 좇아서 先王[정조]의 가장 가까운 신하가 되었습니다. 벽派라 부르는 이들은 모두 당론을 지켜 임금의 뜻에 항거하여 시파와는 원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黨의 숫자가 많고 세력이 커서 선왕이 이를 두려워했으며, 近年에는 온 나라가 그들을 따르고 있습니다.22)

황사영의 주장에 따르면, 正祖조차도 노론을 두려워할 정도로 노론의 세력이 뿌리가 깊고 강력했다는 것이다. 노론은 이미 이전부터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유지 · 강화하기 위하여 성리학적 지배 이념을 더욱 강조하는 일종의 사상 강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명의 멸망으로 중국에서는 중화의 전통이 단절되었으므로 조선에서 그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小中華意識을 확산시키는 동시에 정통론 · 명분론 · 의리론과 같은 성리학적 가치를 더욱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朱子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면 斯文亂賊으로 몰아 버리는 등 노론 중심의 지배 체제는 사상적 유연성을 상실하면서,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절망한 일부 지식인들이 사회개혁을 위한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천주교의 교리가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인계 학자들을 중심으로 補儒論的 입장에서 西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마침내 1784년 자생적인 조선 천주교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회의 상황 속에서는 天主敎와 儒敎가 공존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천주교와 유교의 우주관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우주에는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었고, 동시에 時空을 초월해 있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조물주로서의 神이 존재해야 했다. 반면에 유교의 우주는 시간적으로는 열려 있으며, 존재론적으로는 닫혀 있었다. 유학자들에게 세계는 항상 존재해 왔으며, 어느 특정 시점에 無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이들은 우주를 있게 한 요인을 우주를 초월한 곳에서 찾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유교의 전통에서는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종교가 도덕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 종교를 지배하였다. 도덕이 종교에 우선하게 되면, 사실에 대한 주장은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간에 가치문제를 배제한다. 따라서 神의 존재 유무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유교 도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긴 대다수의 유학자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서양 선교사들의 업적에 경의를 표하였지만, 천주교의 神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았던 것이다.23)

비록 18세기 후반의 15년 동안 적지 않은 양반 사대부들이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받아들였지만, 조상제사를 둘러싼 갈등이 야기되자 補儒論的 입장에 있던 대부분의 양반 신자들은 천주교를 탈퇴하였다. 그들은 아직 전통적인 유교를 포기하면서 천주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있지 못했던 것이다.24)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유교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던 성격을 벗어나 소수의 양반과 다수의 중인 · 평민들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내세지향적 성격으로 변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교적 가치를 완전히 버리고 천주교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丁若鍾 · 尹持忠 등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주교요지》에서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듯이 정약종은 이미 ‘朝鮮’이라는 국가를 벗어났으며,25) 윤지충도 孝를 표현하는 가장 유교적인 의례인 조상제사를 거부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유교적 가치관을 버렸다. 아마도 황사영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에 걸쳐 유교와는 전혀 이질적인 천주교 신앙에 몰입한 젊은이가 대대적인 박해로 교회가 풍비박산이 된 상황에서 더욱더 반유교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이전까지 두 차례 시도되었던 ‘大舶請來’가 선교사의 영입을 통하여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그러한 신앙의 자유로운 확산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던26) 타협적인 온건한 시도였다면, 황사영이 〈백서〉에서 제시한 ‘大舶請來’는 정면 돌파로 보인다.

물론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했듯이 〈帛書〉를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라는 절박한 상황에 봉착한 젊은이의 사려 깊지 못한 극단적 선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미 병자호란 이후 당쟁의 격화로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 왕실의 무능과 노론의 일당 전제화로 인하여 기존의 통치체제와 사회질서가 허물어지고 있던 조선 사회에 절망한 젊은이가 새로운 이상사회를 찾고자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하나의 대안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변화를 위해서는 낡은 것 가운데 방해가 되는 것은 버려야 했을 것이다. 이미 유교의 기본 가치를 부정한 황사영에게는 이에 근거한 양반 중심의 사회체제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유교는 버려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고, 자신과 교회 내부의 역량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판단하고 있던 차에 박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백서〉가 작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27)


4. 黃嗣永을 어떻게 볼 것인가

황사영과 그가 작성한 〈백서〉에 대한 평가는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서〉의 내용 가운데 중국의 監護策과 무력을 동원한 大舶請來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황사영은 왜 굳이 서양의 무력을 동원하고자 했을까. 아마도 황사영은 조선왕조가 계속되는 한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거나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왕조의 존립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새로운 사회를 도래시켜 줄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여긴 ‘太西諸國’에 눈길을 돌렸던 것이다.28)

이러한 〈백서〉의 내용 때문에 황사영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적인 입장으로 극명하게 대비된다. 하나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그가 반국가적 · 반민족적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護敎論的 입장에서 순교자로 옹호하는 것이다. 황사영에 대한 이제까지의 평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조선후기의 척사론자들은 〈帛書〉의 무력청원 때문에 황사영을 ‘역적’으로 평가하였다. 근대 이후 한국사학계나 북한 학계에서는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황사영과 그의 〈帛書〉에 대해서 흉서29) · 외세 의존의 반국가적 행위30) · 몽상31)으로 폄하하거나 민족 허무주의자 · 구라파에 대한 사대주의자32) · 기만적 천주교에 맹목된 광신자33) 등과 같이 부정적인 평가 일변도이다.

교회 내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교론적 입장에서 황사영의 행위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기해박해 당시 추국에서 劉進吉은 황사영의 帛書를 “만고에 없는 逆節”이라고 하였으며,34) 丁夏祥도 황사영을 역적이라고 답변하였다.35) 물론 황사영의 〈백서〉 때문에 전체 천주교인이 역적 행위자로 몰리는 것을 막고자 그렇게 답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36)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답변 속에는 당시 천주교인들의 황사영과 〈백서〉에 대한 인식의 일단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한 달레(C.H. Dallet)는 “그가 바른 의향을 가지고 있었고, 교우들의 해방과 外敎에 대한 복음의 승리와 지옥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를 특히 고려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이 생각된다”고 하면서도, “흥분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은 특히 그 시대에 있어서 비현실적이었음은 명백하다. 그것이 무모하고 위험하였다는 것을 필자[달레]는 기꺼이 인정한다”고 하였다.37) 뮈텔 주교도 달레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였다.38) 다블뤼(Daveluy) 주교가 초기의 순교자 약전을 기록하면서 황사영을 시복 추천 대상에서 제외한 이유도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39)

일본 연구자들은 벽派와 時派의 갈등 · 대립 즉, 당쟁이 신유박해를 초래하였고, 이것이 〈帛書〉를 작성하게 된 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고 보거나40) 植民主義的 韓國史觀의 바탕 위에서 황사영을 “慕華思想에 바탕한 사회혁명의 사상을 지닌 사람”41)으로 평가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황사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여전하였다.42)

1970년대 이후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비록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했지만, 황사영의 역사적 위상을 다소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연구 성과가 나오기도 했다. 조광은 〈백서〉 속의 외세의존 의식을 제국주의 침략과 동일시해서는 곤란한 “전환기적 시대상의 한 유물”로 간주함으로써 〈백서〉가 “사태 판단의 미숙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정당화 될 수 없지만”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 흐름에 역행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았다.43) 노길명 역시 “제국주의 침략 이전의 민족의식은 민족으로서의 자각 차원보다 봉건사회 질서의 청산과 근대사회에로의 이양이라는 민족사적 과제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가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서 〈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였다.44)

한편, 이원순은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 아래서 제시되었던 그의 생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요청된다”고 하면서, 당시의 상황에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역량으로는 박해를 견디기 어려웠기에 자연히 외부의 역량을 절실하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고, 황사영의 입장에서 〈백서〉의 내용을 해석하면 기존의 비판적인 견해와는 달리 신앙심에 충만하여 오로지 교회의 부흥만을 희망했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황사영이 해석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語法을 사용하였고, 다소 서툴게 썼지만 그의 의도는 조선과 조선의 백성들에게 해를 주고자 했던 것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다만 서양 세력을 너무 선한 존재로 인식했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하였다.45)

반면에 방상근의 경우 “황사영에 대한 평가는 결코 민족적인 정서가 무시되는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제시한 방법이 반민족적 · 반국가적이었던 사실은 인정하면서, 황사영 자신이 당시 민족 구성원으로서 겪고 있던 갈등과 고뇌, 그리고 그가 의도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황사영은 천주교 박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조선 왕조나 민중이 아닌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집권 세력의 제거야말로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가지 모순의 해결책이라 판단하여 監護策과 大舶請來策을 제시했던 것으로 보았다.46)

이와는 달리 하성래는 황사영을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었다고 하면서,47) 그의 대박청래가 “결코 (조선에 대한) 침략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데에 목적이 있었다”고 호교론적 입장에서 옹호하였다. 그리고는 황사영을 “자기 소신에 조금도 굽힘없이 당당하게 말하고 순교의 길을 걸어간 훌륭한 순교자”였다고 평가하였다.48) 그렇지만 하성래 역시 황사영이 “서세동점의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서양 천주교 국가를 과신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라는 단서를 붙였다.49)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사학계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심지어 교회 내에서조차 호교론적 입장에서 황사영의 행위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민족주의적 입장에서의 황사영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평가는 ‘民族’과 ‘近代國家(nation-state)’의 틀 안에서 정치적 입장을 지나치게 개입시켰거나 當代의 역사적 조건들을 소홀히 취급한 결과론적 입장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여겨진다.50)

그렇지만 황사영을 역적 또는 민족반역자인가 아니면 순수한 종교적 희생양인 순교자인가 하는 이분법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진다. 기존의 관점을 존중하더라도 그는 역적 또는 민족반역자인가 아니면 순교자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존재가 아니라, 역적이자 민족 반역자인 동시에 순교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택일의 접근 방식보다는 황사영이 살았던 당시의 조선 사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황사영이라는 젊은 지식인을 보다 당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기득권을 버리고 고난의 가시밭길로 뛰어들어 마침내는 滅門之禍를 무릅쓰고 서양에 무력 원조를 요청했을까에 대한 역사적 답변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무력 원조 요청 등이 정당한지의 여부나 실현 가능성이 없었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관점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정두희의 견해가 주목된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조선후기 천주교의 가르침이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이념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기는 하였지만, 수백 년의 전통을 유지해 온 유교를 대체할 새로운 사유체계로서 천주교의 가르침을 확대 해석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사영은 달랐다. 그는 분명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황사영에 있어서 조선왕조와 조선의 君主는 더 이상 하늘과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거기에 더하여 그 君主가 천주의 가르침을 정면에서 어기고 또 천주교인들을 그처럼 무참하게 학살하는 행위를 저지른다면, 이것은 天主의 큰 가르침에 대적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황사영은 너무나 당당하게 조선의 왕실을 비난할 수 있었으며, 그런 조선왕조가 응징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기왕의 지배적인 이념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새로운 변화를 이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황사영은 천주교의 가르침 안에서 유교를 넘어서는 길을 찾아 과감한 반역의 길을 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신유박해 당시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당당하게 증언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누구도 공개적으로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를 거부하고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얻겠다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황사영은 달랐다. 그는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조선을 청나라의 한 지방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부당하고 참혹한 박해를 멈추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만행을 일삼는 국가라면 그 같은 국가체제에 승복할 필요가 없음을 확실히 하였다. 그러므로 황사영은 국가체제와 신앙이 정면으로 충돌하여 더 이상 공존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는 천주 신앙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국가체제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동 시대의 다른 순교자들과는 구별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의 행위가 당장에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였지만, 조선왕조의 종말을 예고하는 前兆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51)

결국, 황사영이 〈백서〉에서 제시한 내용의 실현 가능성이나 미숙성 여부를 따지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52) 그것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황사영이 ‘朝鮮’이라는 국가와 사회를 궁극적으로 새롭게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황사영 자신이 직접 王室과 王政 자체를 부정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아래의 기록을 살펴보자.

李氏[왕실]가 미약하여 끊어지지 않은 것이 실오라기와 같아서 女君(정순왕후 김씨)이 조정에 나오고 권력을 가진 신하들이 권세를 함부로 부려, 정치는 더욱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탄식하며 원망합니다. … 현재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서 반드시 오래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內服을 하게 되면, 간신들이 (권력을) 엿보는 것은 저절로 그칠 것이고, 李氏의 명성과 위세는 배나 나아질 것입니다. 어찌 다만 聖敎의 편안함 뿐이겠습니까? 또한 國家의 복입니다.53)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황사영은 노론의 위세에 눌려 유명무실해진 王室을 ‘李氏’로 표현하였지만, 왕실 자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황사영이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직접 대상은 노론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왕조를 떠받치고 있는 노론 중심의 양반지배체제와 그들의 지배 이념을 천주교에 토대를 둔 국가와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땅의 인민들을 천주교로 개종시켜 그가 꿈꾸는 새로운 이상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그의 바람은 바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조선 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마침내 교조적 유교로 무장된 조선 사회를 붕괴시키고 근대사회로 향하는 문을 여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황사영을 비롯한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해 시도했던 ‘大舶請來’는 당연히 천주교 신앙을 보다 원활하게, 보다 널리 확산시키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을 확산시키고자 했던 것은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 대한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대부분이 南人, 특히 鹿菴系 인물들이었던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은 補儒論的 입장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54)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일부는 보유론적인 입장을 벗어나서 유교 자체를 버리고 전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대표적인 인물들이 정약종과 윤지충 등이었고, 황사영은 정약종을 비롯한 이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유교의 하늘’을 벗어나 ‘그리스도교의 하늘’로 들어가고자 하였고, 따라서 이들은 ‘유교적 조선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 대하여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황사영이 언급했던 서양의 무력을 동원한 大舶請來는 그가 꿈꾸는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한 하나의 도구이자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황사영의 의식과 행동은 그 자체가 바로 당시 사회의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던 ‘변화’의 조짐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지 않나 여겨진다.

말하자면 황사영 등은 근대로 향하는 길목의 들머리에서 굳게 닫혀있던 문의 열쇠를 찾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행위는 당시 사회의 주류 집단으로부터 반역으로 매도되었으며, 후대에서도 반민족적 · 반국가적 행위로 비난받았다. 그렇지만 황사영 등이 당시 조선 사회에 던진 강력한 충격파는 그렇지 않아도 무너지고 있던 조선 사회를 급속도로 붕괴시키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지식층 사회에서는 천주교의 확산에 대응하여 천주교로 상징되는 외세를 배격하기 위한 斥邪論이 강하게 대두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추구하는 開化論이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유교의 테두리 안에서 타협이 전제되지 못한 척사론과 개화론의 갈등과 대립은 조선인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면서 조선 사회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개항 이후 조선 사회에 주어진 역사적 과제인 ‘開化’와 ‘自主’ 어느 한 쪽도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한 채 조선 사회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에 기층 사회에서는 천주교에 자극받은 鄭鑑錄의 예언사상이 더욱 탄력을 받아 널리 유포되면서 민심은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왕조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또한 천주교[西學]를 배척하는, 그러나 천주교로부터 자극받은 東學이 등장하여 양반 중심의 조선 사회를 아래에서부터 붕괴시키기 시작하였다. 한편 천주교회는 계속 박해를 당하면서도 꾸준히 교세를 신장시켜 새로운 사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으며, 마침내 1886년 조불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회의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개신교회 역시 영향력을 확대시키면서,55)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한국 사회의 근대의식 성립에 밑거름이 되었다.56)

그 결과 역사의 물줄기는 마침내 王政에서 共和政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黃嗣永을 ‘近代的 人間’의 선구적인 典型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5. 제언

필자는 이제까지의 연구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황사영을 조망해 보고자 하였다. 물론 기왕의 관점과 평가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 사회의 주류적 관점에서 보면 황사영은 조선왕조를 부정한 역적일 것이고,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는 외세에 의존하고자 했던 민족 반역자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교회의 호교론적인 입장에서는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리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조선후기 교조적 유교의 세계관과 정치 · 사회체제에 부정적이었던 비주류 계열 청년 지식인의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당시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살펴보면, 그의 역사적 위상을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다. 황사영이 활동하기 이전부터 이미 교조화된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감지되고 있었다. 황사영은 그 가운데에서 가장 정면에서 직접적인 도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물론 그의 시도는 실행에 옮겨지기도 전에 실패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천주교인들은 ‘無君無父’의 반역자로 몰려 끝도 없는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그 결과 반천주교적인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는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바뀌어서도 민족주의의 틀 안에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여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사영이 던진 충격파는 그에 대한 지지나 반대와 상관없이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끼침으로써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조선 사회는 교조적 유교가 지배하는 전근대사회에서 그리스도교 정신에 바탕을 둔 근대사회를 향하여 점차 나아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는 자신의 신앙을 죽음으로 증거한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였을 뿐만 아니라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를 근대사회 즉, 王政에서 共和政으로 변화시키는 데 앞장서서 목숨을 바친 또 다른 의미에서의 순교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黃嗣永을 ‘近代的 人間’의 선구적인 典型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끝으로 순교와 관련된 한국 천주교회의 史蹟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한국 교회사의 연구를 위한 단견을 피력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순교자가 되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 죽음에 이르게 한 이유”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듯이 순교는 원래 증언을 뜻한다. 증언을 하다 보니 죽게 된 것이지, 죽기 위하여 순교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순교 영성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고, 이른바 ‘성지 개발’은 순교자 공경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바람직한 순교 영성은 순교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인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고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 하는 최고의 가치관에 대한 절대적인 정신 자세이자 그 실천을 가리킨다.

한국 교회의 경우 처음부터 박해와 함께 순교자가 나옴에 따라 최초의 영성으로 나타났고, 박해가 약 100년 동안 지속되면서 순교영성은 한국 교회의 가장 오래고 가장 이상적인 영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른바 ‘성지 개발’은 순례자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분위기에서 순교자들에게 경건하게 기도를 바치고, 필요한 것을 청하고, 순교자의 영성을 본받아 자신의 신앙을 쇄신할 수 있도록 조용한 기도의 장소와 필요한 시설을 제공하려는 데에 그 의미와 목적이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시가 특별히 나타난 팔레스티나 지방을 찾아 순례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부터 팔레스티나는 聖地(Holy land)로 불리게 되었다. 이어 팔레스티나 지역 내의 특정한 장소 즉,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의 동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타, 예수의 시신이 묻혔던 무덤[聖墓] 등이 순례지로 추가되었다. 이러한 장소들은 ‘聖地’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성지에 준하여 ‘거룩한 장소[聖域, Holy place]’로 불렸다.

성역은 나아가 성모 마리아에게도 적용되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곳인 ‘아인 카림’도 ‘성역’으로서 순례지가 되었고, 후대에 와서는 ‘루르드’ 같은 성모의 발현지도 ‘성역’으로 인정되어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와 마리아와 관련된 성지나 성역은 장소 중심이었다. 예수와 마리아의 유해가 없었고, 유물마저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역의 개념은 사도와 순교자에게로 확대 적용되었다. 예컨대 에페소의 요한 사도의 묘소, 로마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묘소 등이 새로운 성역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순교자 공경에서 묘소의 등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예수와 마리아 공경에서는 장소가 중심이었던 것이, 이제 사람(시신 또는 유해) 중심의 공경으로 이전함을 뜻한다. 이때부터 순교자 공경은 묘소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순교자의 묘소와 순교일은 순교자 공경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두 요소가 되었고, 순교자 묘소는 더욱 그러하였다. 묘소가 없으면 순교자 공경이 있을 수 없었고, 순교자의 묘소가 없는 교구에서는 이웃 교구에서 순교자 무덤 흙의 일부라도 얻어 와야만 순교자 공경이 가능하였다. 이처럼 아주 특별한 공경을 받을 만한 역사적 장소가 성지와 성역인 것이지, 교회사와 관계되는 사적지를 모두 성지나 성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 공경은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는 일과 시신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체험에서 시작되고 발전하였다.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이 일에 목숨을 걸고 종사하였다. 그들의 헌신 덕분에 한국 교회는 오늘날 꽤 많은 순교자들의 무덤과 유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처형된 형장, 즉 순교지는 박해시대의 신자들에게는 박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애초부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순교지에 대한 관심은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1946년에 발족한 한국 천주교 순교자현양회가 새남터를 매입하여 현양탑을 세운 것이 성지 개발의 효시였다. 이후 전국적으로 이른바 ‘성지 개발’의 붐이 일어났다. 그 결과 현재 전국에 걸쳐 이른바 ‘聖地’로 불리는 곳이 200군데도 넘는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성지’들은 팔레스티나와 같은 차원과 의미의 성지로 불릴 수는 없지만, 순교자들의 묘소만은 성역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순교자의 묘소가 없는 순교지까지 聖域의 개념을 확대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또한 ‘성지’로 불리는 순교자의 탄생지나 거주지, 신학교 터 등도 교회 사적지로 불릴 수는 있겠지만, 聖地나 聖域으로 보기에 어려울 것이다.57) ‘聖地’ · ‘聖域’과 ‘교회 사적지’는 엄격히 가려야 한다. 그래야 현양의 뜻이 더욱 살아나고 성지순례의 믿음도 굳세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경기 북부 지역에 위치한 황사영 묘소와 남종삼 성인 묘소 등은 전형적인 聖域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구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지역 교회의 분화와 실태를 파악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로는 무엇보다도 자료의 빈곤을 들 수 있다. 선교사 시대를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기록을 남기는 일에 무관심했다 할 정도로 문헌자료를 찾기 힘든 실정이다. 그러므로 지역 신앙 문화유산 연구는 무엇보다도 먼저 관련 자료들을 조사 · 수집 · 정리 · 연구하여 보존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을 통하여 연구 절차뿐 아니라 수집된 자료들을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정리 · 보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지역 신앙문화도 해당 지역 역사와 문화의 일부이므로 그 지역의 역사문화 연구자들과의 긴밀한 유대 속에서 교회 사적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고 규명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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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교자 현양운동’과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저들이 참고된다.
· 윤형중, 《복자수녀원과 순교자현양회와 나》, 한국순교복자수녀회, 1972.
· 송기인, 〈한국 가톨릭 교회의 순교자 현양운동〉, 《한국가톨릭문화활동과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 김진소, 《한국 천주교 전주교구사》 Ⅰ, 천주교 전주교구, 1998.
· 노용필,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의 창립과 발전〉, 《교회사연구》 27,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2) 물론 황사영 묘소 외에도 경기 북부 지역에는 많은 교회 관련 사적들이 있다. 예를 들면, ‘마재 성지’와 경기 북부 지역의 유일한 치명터인 양주 관아터, 남종삼 성인 묘소, 그리고 이 지역 최초의 본당인 행주 성당을 비롯한 수많은 초기 公所나 교우촌들의 흔적이 있다. 양주 관아의 경우 1989년 10월 양주시 주내면 유양동 507번지에 복원되었는데, 이 부근에 조선시대 범죄인들을 잡아 다스리는 ‘捕廳’과 사형수를 처형하던 ‘行刑場’이 있었다고 전한다(양주군, 《楊州의 地名 由來》, 1993, 64쪽). 그리고 옛 포청 앞에 ‘雙松나무’가 있어 이곳에서 죄수를 교수한 뒤 주내 검문소 부근 불곡산 밑 남향진 ‘식목소’라는 곳에 매장했는데, 이곳이 송장골이라 전해지기도 한다(李達鎬, 〈地名 由來〉, 《楊州郡誌》 上, 楊州文化院, 1992, 1200쪽).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아 병인박해 당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치명터를 추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앞으로 보다 구체적이고도 자세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3) 황사영과 그의 〈백서〉에 대한 이제까지의 관점과 평가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에 잘 정리되어 있다.
· 허동현, 〈근 · 현대 학계의 黃嗣永 帛書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8, 2001.

4) 그런데 지나친 護敎意識으로 포장된 글들이 한국 교회사 인식에 적지 않은 혼선을 자아내는 경우가 간혹 있다. 연구자의 학문적 미숙도 문제가 되지만, 그보다는 교회에 대한 지나친 열정과 헌신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교회의 史蹟에 대한 연구에서 그러하다. 護敎는 자기가 믿는 신앙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바로잡으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실천해야 하는 규범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교를 내세워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가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사가 하느님과 인간의 協應으로 전개되는 역사이기는 하나, 神學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서는 곤란하다. 객관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협응의 실태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사에서의 호교도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의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교회사가 학문적으로 역사학에 속하는 동시에 신학의 한 분야에 속하듯이 한국 교회사의 경우에는 한국사의 한 분야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초월하는 認知가 요구되는 분야라 할 수 있다. 신앙인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과 하느님의 役事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교회사를 연구하는 데에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호교론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엄밀한 사료 비판을 통한 보다 객관적인 사실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의 바탕 위에서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이원순, 〈연구 열의와 호교 열의〉, 《교회와 역사》 30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6, 1쪽 참조). 필자는 이러한 지적에 유념하면서 본고를 서술해 나갈 것이다.

5) 황사영의 생애에 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였다. 본고에서는 그 가운데에서 아래의 논문들을 주로 참고하였다.
· 河聲來, 〈黃嗣永의 敎會活動과 殉敎에 대한 硏究〉, 《敎會史硏究》 13,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 方相根, 〈黃嗣永 「帛書」의 분석적 이해〉, 《敎會史硏究》 13,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6) 《교회와 역사》 5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11, 4쪽 참조.

7) 달레는 진사시에 급제한 황사영을 正祖가 직접 불러 손목을 잡기까지 하였으며, 정조가 “20세가 되거든 곧 나를 만나러 오너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고 하였고, 황사영은 왕의 손이 닿은 영광을 표시하기 위하여 손목에 명주를 늘 감고 다녔다고 서술하였다(C. H. Dallet ;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557~558쪽).

그런데 달레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진사시에 합격한 황사영이 정조로부터 白紙 3권 · 붓 세 자루 · 먹 세 자루를 하사받은 사실이 민간에서 와전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하성래, 앞의 논문, 83~84쪽).

어쨌든 황사영의 토시로 추정되는 유품이 담겼던 청화백자 합은 출토 직후부터 창원 황씨 판윤공파 종중에서 보존해 왔는데, 2004년 4월 6일 종손 황세환이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영구 기증했다.

8) 황사영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 주장이 있다. 하나는 서울 阿峴坊이고, 다른 하나는 강화도의 大廟洞이다. 전자를 주장한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하성래와 차기진을 들 수 있고, 후자를 주장한 연구자로는 황용호와 한종오를 들 수 있다. 이들의 논쟁에 관해서는 아래의 논고들이 참고된다.
· 河聲來, 앞의 논문.
· 〈황사영의 탄생지에 관한 지상 토론〉, 《교회와 역사》 279,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8.

9) 동시에 이승훈의 부인은 황사영의 처고모(정약용의 누이)이기도 했다.

10) 달레는 황사영이 17세 때 급제했다고 기록했으나(C. H. Dallet ; 安應烈 · 崔奭祐 譯註, 앞의 책, 557쪽), 16세에 급제한 것이 분명하다(河聲來, 앞의 논문, 82~83쪽 주36) 참조).

11) 《邪學罪人嗣永等推案》 1801년 10월 9일 〈黃嗣永供招〉 참조.

12) 明道會와 六會에 대해서는 方相根, 〈初期 敎會에 있어서 明道會의 구성과 성격〉, 《敎會史硏究》 1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참고.

13) 황사영과 관계를 맺었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는 河聲來, 앞의 논문, 86~88쪽 참조.
14) 《邪學懲義》, 金世貴供招 참조.
15) 《邪學懲義》, 韓新愛供招 참조.
16) 黃嗣永供招(1801년 10월 10일) 참조.
17) 《純祖實錄》 3, 純祖 1년 10월 무신.
18) 《純祖實錄》 3, 純祖 1년 11월 경진.

19) 〈백서〉에 대한 書誌學的 연구과 내용 분석에 대해서는 이미 선행 업적들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구태여 이러한 내용들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백서〉에 대한 서지학적 연구에 대해서는 특히 아래의 저서가 참고된다.
· 呂珍千, 《황사영 〈백서〉 연구 -原本과 異本 비교 검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20) 或言如此擧動 無論行之之難易 恐不合於聖敎表樣 罪人則曰不然…若本國敎友 鼓?爲亂 則實是壞表樣 泰西則乃聖敎根本之地 二千年來 傳敎萬國 莫不歸化 而獨此彈丸東土 不但不卽順命 反來梗化 殘害聖敎 戮殺神司 爲此東洋二百年來所無之事 興師問罪 有何不可…此不過大張聲勢以納傳敎而已 人民無所害 財物無所取 則又仁義之極 而卓異之表也 何患表樣之不美 但恐力不及此耳(黃嗣永, 〈帛書〉).

21)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하게 된 배경에 대해 山口正之는 조선후기의 정신적 생활을 지배한 회의적 · 고립적 運命觀, 대륙 의존의 慕華思想, 西學 전래에 따른 세계 지식의 확대와 그로부터 유도된 서방 의존의 오류를 지적하였다(《黃嗣永帛書の硏究》, 全國書房, 1946, 大阪, 94쪽). 반면에 趙珖은 조선 교회의 信徒共同體라는 특수한 사회집단이 가지고 있던 ‘大舶’ 請願의 내적 경험과 당시 사회에서 유포되어 있던 ‘時運不久’의 유언비어와 ‘海島’ 등과 같은 理想鄕에 대한 동경이라는 외적 경험이 서로 결합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 帛書가 작성되었다고 보았다(〈黃嗣永 帛書의 社會思想的 背景〉, 《史叢》 21 · 22, 고려대 사학회, 1977, 349~356쪽).

方相根은 조광이 주장한 이러한 배경과 함께 백서 작성의 내적 동기인 황사영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召命意識 즉,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교회를 유지하려는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고 교회의 재건에 강한 사명을 느껴서 백서를 작성하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앞의 논문, 148쪽)

河聲來도 황사영이 천주교를 다시 일으키라는 소명의식 속에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신부 영입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계획을 북경 주교에 피력하고 도움을 호소한 것이라고 하였다(앞의 논문, 114쪽).

22) 本國士大夫 二百年來分黨各立 有南人老論少論少北四色之目…老論又分而爲二 曰時派 皆承順上意 爲先王心腹之臣 曰?派皆力守黨論 抗拒上意 與時派如仇讐 而黨衆勢大 先王畏之 近年擧國而聽之(黃嗣永, 〈帛書〉).

23) 이상의 천주교와 유교의 우주관에 대해서는 Baker, Donald, Confucianism confronts catholicism in the late Choson Dynasty ; 金世潤 역, 《朝鮮後期 儒敎와 天主敎의 대립》, 一潮閣, 1997, Ⅱ장 〈新儒學者의 天主敎 이해〉 및 Ⅲ장 〈儒敎와 天主敎의 대립〉 참조.

24) 이러한 상황은 당시 북경 주교였던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가 카라드랭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에 다음과 같이 잘 묘사되어 있다.

“1790년 조선 교회에서 본인에게 보낸 질의와 질문 중에 조상들의 신주를 세우거나 또는 이미 세운 신주를 보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본인은 베네딕도(교황)의 칙서 〈엑스 쿠오〉(Ex quo)와 글레멘스(교황)의 칙서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를 통한 성청의 아주 명백한 결정에 의거해 부정적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조선의 많은 양반들이 배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신주와 또 그 밖의 미신적 행위에 관한 성청에서 서언한 질의에 대해 본인이 사목서한에서 한 명확한 대답을 발견하고는 그들 나라의 습관이나 그릇된 풍습을 끊어버리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이미 그 참됨을 깨달은 종교를 버리려 하였습니다.”(崔奭祐 譯, 〈李承薰 관계 書翰 자료〉, 《敎會史硏究》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192~193쪽).

25) 정약종은 《주교요지》에서 모든 인간을 비롯하여 세상 만물은 천주의 피조물임을 너무나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주교요지》에서는 조선왕조에 대해서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약종은 이미 유교적인 세계를 떠났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유교적인 세계를 떠났다는 것은 조선왕조의 국가적 체제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정두희, 〈황사영 백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앙의 역사를 찾아서》, 바오로딸, 1999, 88~89쪽).

26) 李家煥 · 洪樂敏 · 李承薰 등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된 첫 번째 대박 청원의 근본적인 목적은 선교사의 영입을 통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데 있었다. 반면에 두 번째 대박 청원에서는 첫 번째와는 달리 大舶을 단순히 宣敎師와 동일시하는 데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대박을 통한 서양 문물의 향유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수립에 대한 기대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개혁의 원동력인 천주교의 사상은 어떠한 권위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국왕의 권위보다도 새로운 이념인 천주교의 권위가 더욱 앞서야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趙珖, 앞의 논문, 357~363쪽).

27) 물론 〈백서〉는 황사영이 고립무원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거의 혼자만의 판단과 생각으로 작성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백서〉의 내용 속에는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의 일정 부분이 담겼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28) 趙珖, 앞의 논문, 367~369쪽.
29) 李能和, 《朝鮮基督敎及外交史》, 朝鮮基督敎彰文社, 1928, 150쪽.

30) 邊太燮, 《韓國史通論》, 三英社, 1986, 368쪽 및 徐仲錫, 〈민족의식의 형성과 전개〉, 《한국사특강》, 서울대 출판부, 1990, 306쪽.

31) 김태웅, 〈서구 자본주의의 침투와 위기의식 고양〉, 《한국사》 10, 한길사, 1994, 160~161쪽.
32)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전사》 11, 백과사전출판사, 1980, 213~215쪽.
33) 사회과학연구원 력사연구소, 《조선통사》 상, 사회과학출판사, 1977, 504~505쪽.
34) 《추안》 邪學謀叛罪人洋漢進吉等案, 1839년 8월 13일 劉進吉供招.
35) 《추안》 邪學謀叛罪人洋漢進吉等案, 1839년 8월 13일 劉進吉 · 丁夏祥 供招.
36) 河聲來, 앞의 논문, 76쪽.
37) C.H. Dallet ; 安應烈?崔奭祐 譯註, 앞의 책, 574쪽.

38) 뮈텔 주교는 “이러한 계획은 공상적이고, 위험하고, 경솔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가 올바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평가하였다(G.-C.-M. Mutel, Lettre d'Alexandre Hoang a Mgr de Gouvea Eveque de Pekin(1801), Hongkong, 1925).

39) 차기진, 〈황사영〉, 《한국가톨릭대사전》 1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9814쪽.
40) 小田省吾, 〈李朝の朋黨を略述して天主敎迫害に及ぶ〉, 《靑丘學叢》 1, 1930.

41) 石井壽夫, 〈黃嗣永の帛書に就いて - 朝鮮天主敎徒の洋舶請來の思想 -〉, 《歷史學硏究》 10-1 · 2, 1940.

42) 이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허동현, 앞의 논문 참조.
43) 趙珖, 앞의 논문.

44) 盧吉明, 〈朝鮮後期 韓國 가톨릭 敎會의 民族意識〉, 《誠農崔奭祐神父古稀紀念 韓國가톨릭文化活動과 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45) 李元淳, 〈黃嗣永 帛書의 諸問題〉, 《교회와 역사》 182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0. 7, 15~17쪽.
46) 方相根, 앞의 논문, 174쪽.
47) 河聲來, 앞의 논문, 73쪽.
48) 河聲來, 앞의 논문, 142~143쪽.

49) 이전에도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황사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연구가 없지는 않았다. 柳洪烈은 황사영의 “교회의 발전상을 꾀하였던” “원대한 계획”으로 높이 평가하였고(《朝鮮天主敎會史》, 朝鮮天主敎殉敎者顯揚委員會, 1949 182~189쪽 참조), 朱在用 神父는 〈백서〉의 사료적 가치를 “순혈(殉血)로 기록된 진귀한 보배의 하나이다. … 한국 근대화의 첫 발걸음으로서 한국 천주교 초기 지도자들의 새문화 · 새사상으로 조국 근대화를 획책하던 그 의욕적 호흡을 느낄 수 있으며, 천주교 전래에 따른 세계 지식의 확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韓國 가톨릭史의 擁衛》,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 113쪽 참조).

이들과는 달리 崔奭祐 神父는 〈백서〉에 보이는 몰민족성 내지 외세의존성을 “종교와 국가를 혼동한 잘못”을 범한 것이자 “서구제국에 대한 사대성”의 발로라고 비판하였다가(〈朝鮮後期社會와 天主敎〉, 《崇田大學校 論文集》 5, 1974 ; 〈天主敎勢力의 擴大〉, 《韓國史》 15, 국사편찬위원회, 1975), 1970년대 후반부터는 〈백서〉의 순교사적 가치를 강조하거나 〈백서〉 사건이 종교를 국가와 대등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던 노론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을 내세워 〈백서〉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司牧》 34, 1979 ;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국가관과 신앙관〉, 《敎會史硏究》 1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50) 이상에서 언급한 연구들과는 달리 元載淵은 黃嗣永의 〈帛書〉를 “조선시대 人權宣言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현대적 인권의 관점에서 평가하였다(〈황사영 백서의 인권론적 고찰〉, 《법사학연구》 25, 2002).

그렇지만 원재연 역시 황사영을 죽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 정도로 “굳건한 순교신심을 지니고 있었던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회적 통념에도 구애되지 않고 철저히 실천하고자 했던 一世의 奇人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앞의 논문, 14쪽), 다른 한편으로는 “19세기 초라는 조선시대적 상황논리에서 황사영의 방법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고 비난받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었다거나(앞의 논문, 31쪽), “황사영 백서의 저항논리는 ‘인권보장’이라는 그 이념적인 측면에서의 정당성과는 별도로 방법론적 측면에서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용납되기 어려운 부분이 다소간 포함되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앞의 논문, 31쪽). 뿐만 아니라 황사영의 내복감호책을 약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독립과 주권을 부인하거나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21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부정적인 의견으로 평가된다고 하였다(앞의 논문, 32쪽).

한편, ‘폭력적인 국가에 대한 저항’의 관점에서 접근한 논문으로는 이영춘, 〈황사영백서 사건의 역사신학적 성찰〉,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도 들 수 있다.

51) 이상은 정두희, 앞의 논문, 87~90쪽 참조. 한편 최완기는 황사영을 성리학적 질서가 현실세계와 괴리되어 가고 있을 때 이를 극복하고자 “사회혁명 · 사상혁명을 시도한 선구자”로 보았다(〈황사영백서 작성의 사상적 배경〉,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 사건》,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 102쪽 참조).

52)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황사영 자신도 실현 가능성 여부를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당위성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53) 李氏微弱 不絶如縷 女君臨朝 强臣弄權 政事乘亂 民情嗟怨…現今國勢危? 決難久支 若爲內服 則奸臣之??自息 李氏之聲勢倍勝 奚但聖敎之安 亦是國家之福(黃嗣永, 〈帛書〉).

54) 李元淳, 〈星湖 李瀷의 西學世界〉, 《敎會史硏究》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8 및 車基眞, 〈천주교의 수용과 鹿菴系의 西學思想〉,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참조.

55) 천주교 신앙의 자유 획득과 개신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저들이 참고된다.
· 류대영,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제국주의 침략, 개화자강, 그리고 미국 선교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
· 이진구, 〈조불조약이 초기 개신교의 선교활동에 미친 영향〉, 《교회사연구》 27,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56) 허동현은 “황사영이 꿈꾼 세상은 오늘의 현재적 입장에서 볼 때 자유 · 평등 · 박애의 근대정신이 실현되는 오늘날 우리가 소망하는 이상적 사회에 가깝다는 점에서 선각적이다. 따라서 그가 강구한 수단과 방법이 현명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초래된 결과가 더욱 참담하였다 하더라도 … 황사영 백서는 지구촌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민족주의를 넘어선 다원적 시민사회 구현운동의 이정표로서의 역사적 의의가 부여된다(〈근 · 현대 학계의 黃嗣永 帛書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8, 2001, 26쪽)”고 평가하였다.

57) 이상의 순교 영성과 성지에 관해서는 최석우, 〈순교 영성과 성지 개발의 의미〉, 《교회와 역사》 340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9, 3~6쪽 참조.

[교회사 연구 제31집, 200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장우(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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