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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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발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허무한 꿈 자락을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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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03 ㅣ No.1505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허무한 꿈 자락을 지나다


 

 
- 로마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왕궁 내부. 그의 영묘였던 성 돔니우스 성당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 있다.



 
- 박해도 끝났고 황제도 세상을 떠났다. 성 돔니우스 성당 밖에서는 스플리트의 여인이 오래된 돌 유물들에 수예품을 걸쳐놓고 호객을 한다.


아드리아 해의 눈부신 도시 스플리트는 로마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태어나고 죽은 곳이었다. 로마제국을 동서로 양분하여 각각 정제와 부제가 통치하도록 한 사두정치 체제와 여러 개혁을 통해 제국의 쇠퇴를 막아보려 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가장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박해가 극심한 까닭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순교했고, 배교자 또한 많이 나온 시기였다.

- 스플리트 북문을 나서면 거대한 청동상이 위용을 드러낸다. 10세기쯤에 라틴어로 전례를 거행하려는 교황청의 정책을 거슬러 모국어 미사를 고수한 닌의 주교 그르구르의 상이다(공사전 사진).


작은 병 두 개에 담겨 나폴리 대성당에 보관된 피가 계속 액화되는 기적의 주인공 성 야누아리오(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방문하셨다.)와 용과 싸우는 기사의 이미지로 무수한 회화에 등장하는 성 제오르지오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했다.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보면 새벽이 오기 전 가장 어둠이 깊은 암흑기였다. 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공인함으로써 이 새로운 종교는 300년의 박해기를 지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스플리트의 구시가에 그가 305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만년을 보낸 왕궁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황제는 세상을 떠났고 로마제국은 멸망했다. 한때 만 명이 넘게 살던 궁은 폐허로 변해 갔고, 중세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그곳에 깃들어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묘였던 팔각형 건물은 성 돔니우스 성당이 되었다.

-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의 대성당 안벽에 새겨진 글라골 문자.


전설에 따르면 성 돔니우스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72명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살로나의 주교였던 그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박해로 순교했다고도 한다. 이젠 모든 것이 아련하고 머나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분명한 건 왕궁의 주인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무덤이 자신이 박해한 그리스도인들의 성당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젊은 여인이 커다란 돌더미에 수예품을 걸쳐놓고 호객을 하는 성당 마당을 지나며 그를 생각했다. 그저 한세상 천하를 호령하고 살았으니 여한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름이 회자되고 있으니 그만하면 충분히 성공한 삶이랄 수 있지 않을까? 누가 알겠는가. 정말 그걸 누가 알겠는가. 다만 조금 허무한 냄새가 나기는 했다. 


왕궁의 중심인 성당에서 북문으로 나가니 닌의 주교 그르구르의 상이 나타났다. ‘발칸의 로댕’이라 불리는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1883-1962년)의 작품인 높이 4.5미터의 이 청동상은, 본디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데 공사를 하느라 가림막을 해놓았다. 그래도 조각상의 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해서 오가는 이들이 다들 뭔가를 기원하며 만질 수 있도록 발가락 부분은 노출되어 있었다.

- ‘로만 피에타’라고도 하는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피에타’.


그르구르는 안내책자 등에서 10세기쯤에 모국어로 미사를 하겠노라며 로마 교황청과 맞섰던 주교라고 소개되어 있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치릴로와 메토디오 형제가 만든(것으로 알려진) 글라골 문자를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전례에도 이 문자가 쓰였는데, 이는 라틴어를 공식 언어로 쓰던 가톨릭교회의 정책과는 부합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라틴어 설교를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슬라브 출신의 주교들은 공공연히 글라골 문자를 사용했다. 

 

10세기쯤에 교황청은 이런 관행을 고쳐보고자 했지만 결국은 닌 지역의 주교인 그르구르 등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을 뿐더러 13세기쯤에는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달마티아 남부 지역에서 글라골 문자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허락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글라골 문자는 실제로 크로아티아에서 19세기까지 쓰였다.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작품은 발칸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데, 그의 화랑이 바로 스플리트에 있었다. 그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반대하다가 우스타샤(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크로아티아에 세운 괴뢰정부를 지배하면서 70여만 명의 세르비아인과 정교인을 처참하게 학살한 크로아티아의 극우 민족주의 세력)로 말미암아 투옥되고 곤욕을 겪은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럼에도 고국에 대한 사랑을 접지 못한 그가 자신의 작품을 고국으로 보내 노후를 지내고자 직접 설계한 건물에 1952년 연 화랑이었다.

부지런히 이반 메슈트로비치 화랑으로 향했다. 인터넷에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피에타’를 봤을 때부터 기다린 시간이다. 햇살이 가득한 마당을 부리나케 뛰어올라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성모님과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피에타를 만났다. 요셉은 두 여인 못지않게 예수님을 사무치게 안고 있었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지위에 있었고, 당시 예수님을 추종하는 행위의 위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참혹한 죽음의 한 순간을 함께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그 순간 그도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택했다.

- 스플리트 구시가에서 멀지 않은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화랑 앞마당. 바로 앞으로 아드리아 해가 펼쳐져 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기면서 이미 떠나간 이들을 생각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성 돔니우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이반 메슈트로비치… 그리고 절망에 빠진 욥을 비롯한 그의 작품 속 인물들. 문득 나의 미소한 삶 또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일의 선택 앞에 서있다는 생각에 숙연해졌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몫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오후 네 시, 화랑 앞마당에 젖어들던 그 푸른 아드리아 해의 물빛이, 아직 이글거리는 태양이 드리운 키프로스의 짙푸른 그림자가, 무엇보다 ‘욥과 절망’ 속의 욥이 속삭였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현세의 허무를 딛고 영원을 향하는 똑같은 순례자라고.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성지를 순례하다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5년 7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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