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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머니의 누룩, 한국과 중국 만주 지역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1909-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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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09 ㅣ No.681

[특집 2009년도 심포지엄]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와 문화 활동


[번역문] "어머니의 누룩"

한국과 중국 만주 지역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 1909-1954년

 

 

1908년 가을, 유럽을방문 중이던 구스타프 뮈텔(G.-C.-M.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는 서울의 파리 외방전교회의 프랑스인 동료들에게 희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는 한국에서 교육 사업을 담당해 줄 수도자들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적임자들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1909년 1월 극동으로 출발하여 자체 비용으로 학교를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서신의 마지막 문장에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런데 그들은 독일인입니다.” 당시 한국 선교는 주로 프랑스인 신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 독일인들은 왜 다소 준비가 미흡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한국 선교에 뛰어들려고 했을까? 이를 설명하려면 먼저 두 가지 의문이 해소되어야 한다. 첫째, 왜 뮈텔 주교는 조력자들이 필요했을까? 둘째, 독일인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한국을 선교지로 택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1. 초기 조건들

한국 가톨릭교회사를 일별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는 다양하다. 그 중 한곳에는 19세기 종교 박해 이후의 사건들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서구에 문호를 개방한 1876년 이래 한국 정세는 변했다. 1910년에서 1945년까지의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전은 종말을 맞았다. 그럼에도 가톨릭교회의 교육, 의료, 기타 선교 사업은 계속되었다.”

백보를 양보해도 이 설명은 거의 모든 면에서 틀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첫째, 한국 정부는 1876년 일본 및 유럽 식민 세력들과 강제로 조약을 체결한 후 ‘서구’에 ‘문호’를 개방한 적이 없다. 둘째, 1910년에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주도하는 교육과 의료 사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셋째, 한국 가톨릭교회는 일제의 갖은 전횡에도 불구하고 향후 수십 년 동안 내부 상황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했다. 다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다소 더뎌졌을 뿐이다.

세기가 바뀔 즈음, 교육 분야는 사정이 매우 어려웠다. 1909년 선교잡지 《가톨릭 선교》(Die Katholischen Missionen)에 게재된 제물포 본당 관련 기사는, 향후 수년간 베네딕도회 홍보 문서에서도 거듭 인용되었다. “일본 본토의 사례들이 한국에 굉장한 교육열을 불러 일으켜 다들 학교를 세워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럼에도 파리 외방전교회의 교육 사업은 “대단히 지지부진했다.” 파리 외방전교회 차원에서는 상황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단과 여력이 없어서, 드뇌(E. Deneux, 全學俊, 1873~1947) 신부가 독자적으로 제물포에 작은 소년학교를 세웠다. “정원 50명 규모의 교실에 100명 가까이 몰려들었다.” 이 기사를 통해 학교를 위한 특별 모금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사실 2백여 년 전, 최초의 한국 가톨릭 신자들은 주로 지식인과 양반 계층이었다. 그러나 오랜 (일부 지역에서는 1890년대까지 지속된) 박해를 받으면서 가톨릭교회는 오지의 허름한 초가 성당으로 쫓겨났고,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난하고 신앙심 깊은 이들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897년 이후 가톨릭교회는 서울의 모든 건축물을 뛰어넘는 웅장한 명동 주교좌 성당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보니파시오 사우어(B. Sauer, 辛上院, 1877~1950) 신부는 한국에서 맞은 첫 번째 주일인 1909년 2월 28일에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넓어서 거의 비다시피 한 명동 성당 신자석 통로에 프와넬(V.L. Poisnel, 朴道行, 1855~1925) 본당신부가 서 있었고 “한국 신자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었다.” 선교사가 종일 걸어 다니며 허름한 초가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것에 비하면 약간의 외형적 변화는 있었다. 그러나 주교좌 성당을 가구와 예술품으로 장식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세상 앞에 떳떳이 서려면 신부와 신자들의 의식이 변해야 했다. 뮈텔 주교가 일본을 경유하여 유럽으로 간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일본 교회는 이미 20년 전에 변혁을 이루어냈다. 1888년 일본 북부 지방의 선교를 담당하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피에르-마리 오주프(P.-M. Osouf, 1829~1906) 주교는 프랑스 마리아회 회원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의 임무는 오직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들도 파리 외방전교회처럼 재속사제들이었고 주로 교사와 교수로 일하는 선교사들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1890년 일본에는 프랑스인 선교사 79명, 일본인 선교사 15명, 마리아회 회원 27명이 있었다. 그들은 도쿄, 나가사키, 오사카, 요코하마 등지에 교육 기관을 설립했고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9년 《가톨릭 선교》는 나가사키 ‘해성(海星)학교’ 사진을 게재했다. 가파른 언덕 위의 납작한 일본식 가옥 위로 우뚝 솟은 건물이었다. 이를 통해 뮈텔 주교는 프랑스 여행 중에 한국에서는 학교 설립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유럽인들에게 대략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업을 담당할 만한 마땅한 선교 단체가 없어서 난감했다. 게다가 그 사안에는 종교적 요인뿐 아니라 자유를 잃어가는 한국의 국내 정세도 개입되어 있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한일합병을 강요하면서 일본과 우호를 맺자는 견해가 한국 고위층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자녀들을 일본에 유학 보내고 싶어 하는 고관대작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만찬 초대에 응하곤 했다는 수치스러운 기록이 있다. 뮈텔 주교는 서울에 오직 한국인만을 위한 가톨릭 학교들을 세우고 싶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문서고에는 뮈텔 주교가 직접 번역한 일본의 법령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일본 법령은 한국인 학교 설립이 가능했음을 시사한다.

둘째 의문은 왜 하필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이 일을 떠맡았냐는 것이다. 25년도 채 되지 않은 이 공동체에서 고작 23명의 신부들이 5만 4천 평방킬로미터나 되는 넓은 동아프리카 신자들을 보살폈다. 독일에 새 수도원을 짓고 후배들을 양성하고 아프리카의 형제들을 후원하는 데만도 그 정도의 수도자들이 더 필요했다. 아빠스와 참사회가 실성을 해서 한국에서 또 일을 벌이기로 결정했단 말인가?

과연 이게 다일까? 사실은 이러했다. 초대 아빠스인 노르베르트 베버(N. Weber, 1870~1956)가 동아프리카 시찰에 실패한 1905년 이래, 광대한 아프리카 선교지의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선교 활동에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공동체 내 많은 수도자들은 선교 활동과 수도 생활을 지속적으로 병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가졌다.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의 주교이자 상트 오틸리엔의 설립자 안드레아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의 오랜 동료 토마스 슈프라이터(Thomas Spreiter) 주교는 동아프리카 선교지에서 어떤 형태의 수도원 설립도 거절했다. 수도원 설립은 그가 당장 본당에서 쓸 인력을 본부에 묶어놓는 일이었다. 일부 신부들은 “선교 베네딕도회”(Missionsbenediktiner)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도록 교황청에 직접적으로 간청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는 1907년 포교성성 장관 고티(Gotti) 추기경에게, 자기는 그럴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다른 베네딕도 선교회는 규칙에 따라 자신을 희생하는데, 자기들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09년 남아프리카의 마리안힐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선교 단체가 되었다.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가 한국에 진출한 바로 그해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낯선 주교의 등장은 상트 오틸리엔의 입장에서는 하늘의 뜻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굳이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올 수 있었을 것이다(몇 년 후 아프리카 선교의 실패가 위기로 닥쳐오자 무엇보다 페루에 수도원을 설립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새 출발은 상트 오틸리엔 수도자들의 행적을 미심쩍게 보던 베네딕도회 총연합에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1907년 로마에서 열린 베네딕도회 총연합 총재 아빠스 회의는 아시아에 베네딕도회 아빠스좌 수도원을 설립할 것을 요구했고 그 대상으로 대범하게도 인도와 일본을 지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요구를 선뜻 수용한 총재 아빠스는 없었다. 상트 오틸리엔은 한국에 수도자들을 파견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총연합의 요구도 충족시켰다.

그래서 당시 32세의 보니파시오 사우어 신부가 확고한 법적 정당성을 지닌 아빠스좌 수도원을 설립할 임무를 맡았다. 뮈텔 주교가 원하는 학교들은 그 아빠스좌 수도원 부지에 세워질 것이었다. 수도자들에게는 교육 사업과 수도 생활을 조화롭게 병행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것은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근본 문제 중 하나를 해결함과 동시에 한국에서 뮈텔 주교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효과를 발휘했다. 나아가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는 실업학교 설립도 제안했는데, 당시 다양한 장인 수사들을 보유하고 있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앞으로 세워질 아빠스좌 수도원들에 대한 구상은 선교 베네딕도회 회원들에게 새로운 초석을 제공했고 한국 가톨릭교회에 역사적 신기원을 마련했다.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들이 ‘본래의’ 사목 활동을 담당한 반면, 서울 백동의 베네딕도 수도원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중산층을 양성하는 일을 수행했다. 이 중산층이 마침내 가톨릭교회를 산골에서 도시로 옮겨오는 역할을 할 것이었다.

1909년 12월 초 성 베네딕도회 백동 수도원은 원장좌 독립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수도자는 한 명이었다. 12월 말에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원장 신부는 매우 엄격한 일과를 정했다. 그 일과는 1949년 5월 북한 당국이 덕원 수도원을 해체할 때까지 지켜졌다. 수도원은 빠른 시일 내에 한국 교회에 뿌리내려야 했다. 원장으로 임명된 보니파시오 사우어 신부는 유럽을 방문했다. 유럽에서 보낸 첫 편지에서 그는, “곧 첫 방인 수련자가 나오기를 희망한다”라는 뜻을 밝혔다.

여기서 오틸리아 연합회의 아프리카 선교사들과 나눈 대화를 잠시 살펴보자. 첫 아프리카인 수도자가 나오기까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데는 분명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초창기 선교 여건이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 아프리카에서는 선교 베네딕회원들이 베네딕도 회원으로서의 수도 생활을 반드시 병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1919년 다르에스살람의 토마스 슈프라이터 주교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 신부에게 오틸리아 연합회 차기 총회에서 문제가 제기될 것 같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대가 그곳(서울)에서 설립한 수도원과 같은 형태의 수도원을 이곳(다르에스살람)에 설립하는 것은 아무도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일의 진행이 매끄럽지 못했다. 1920년에 독립 선교지를 넘겨받은 몇몇 신부들은, 주교좌 원산에서 기차로 대략 한 시간 걸리는 덕원에 아빠스좌 수도원을 설립하는 안에 반대했다. 1925년에 수도원을 완공하려면 교황 사절과 오틸리아 연합회 총아빠스의 권한이 필요했다. 한때 독일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선교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영국이 모든 독일 베네딕도회 회원들을 추방하여, 남은 이들이라고는 몇몇 스위스인뿐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는 그사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탕가니카(Tanganyika)에 새 선교사들이 입국했다. 그 무렵 덕원 수도원이 완공되었고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선교사들을 내보내기 전에 아프리카에 수도원부터 짓자고 주장했다.

대목구장 갈로 슈타이거(Gallus Steiger)는 린디(Lindi) ‘가상’(fiktiv) 수도원의 아빠스직을 수락했지만 크게 기뻐하지는 않았다. 항구도시 린디에는 당시 수도원은커녕 본당조차 없었다. 그 후 갈로 슈타이거는 페라미호(Peramiho)에 자리를 잡았지만, 그곳에는 베네딕도 수도원이라기보다는 본당들을 지원하는 선교 본부가 생겨났다. 1930년대 후반에 몇몇 신부들이 이른 아침 함께 야과경을 바쳤을 때, 그가 크게 노여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먼 훗날 아프리카인들로만 구성된 항가(Hanga) 수도원의 알쿠인(Alkuin) 퇴임 아빠스는 크리소스토모 슈미트(Chrysostomus Schmid) 총아빠스가 1950년까지 아프리카인 재속사제들을 페라미호 수도원의 헌신자(Oblaten)로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했다고 귀띔해주었다. 아프리카에서 연합회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불분명했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일 수 있겠다.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는 덕원에서 추방되어 왜관에 정착한 한국인 베네딕도회 회원들을 연합회에서 제외시켜야 되지 않겠느냐고 문의한 적이 있었다. 티모테오 비털리(Timotheus Bitterli, 李聖道, 1905~1990) 신부는 서울과덕원의 전통을 고려하여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고, 총아빠스는 두 번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페라미호의 에버하르트 슈피스(Eberhard Spieß) 주교가 1954년 1월 북한에서 귀환한 덕원 수도자들이 아프리카인 수도자들의 교육을 맡아주길 바란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한국 선교는 전혀 다른 여건하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아프리카 베네딕도회 아빠스좌 수도원 설립의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했다고 보아도 대체로 무방하다.

1913년 백동 원장좌 수도원의 아빠스좌 수도원 승격은 상트 오틸리엔 입장에서 볼 때 한 연합회의 탄생을 궁극적으로 공고히 하는 것을 의미했다. 1년 후 독일의 슈바이클베르크(Schweiklberg)와 뮌스터슈바르작(Munsterschwarzach) 수도원이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하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장이 총아빠스직을 갖게 된 것은 초창기 ‘베네딕도회 선교단체’가 베네딕도회 총연합 내에서 하나의 독립된 연합회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다른 관점이지만 첫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도착은 한국 교회에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것은 애초에 베네딕도회 회원들이 품었던 소박한 포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2. 백동 수도원

백동 수도원의 매력을 이 짧은 글로 어찌 다 묘사하겠는가. 백동은 서울 북쪽으로 성벽에 바짝 붙어 있다.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지금은 이 성벽도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 수도원 자리에는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있는데, 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호기심 많은 방문객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제1 세대의 수도자들은 사제 수품 혹은 장인 교육을 받자마자 거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바로 한국으로 왔지만, 즉시 이 낯선 세계와 놀라운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다. 약간의 “시적 감수성”이 있다고 스스로 밝힌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 신부도 “맑음과 색상의 깊이에서 그리스의 하늘과 비교되지 않는 한국의 푸른 하늘과 흰색 화강암”에 도취되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을 정확하게 관찰했다. 상트 오틸리엔의 사진 자료실은 20세기 초 한국사를 간직한 보고다. 안드레아 에카르트(A. Eckardt, 玉樂安, 1884~1974) 신부는 한국에 도착한 지 몇 주도 안 되어 한국어 문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인 신부들의 본당에서 베네딕도회 신부들은 한국어를 공부하여 주민들의 인성과 생활양식을 하나씩 배워 나갔다. 그들의 시선은 단순한 이국적 호기심에 머물지 않았다. 당시 흔히 그랬듯이 단순한 호기심은 표피적 현상들을 피상적으로만 밝혀줄 따름이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남기는 사진과 보고서들이 몰락해 가는 한 세계를 증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보존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보존하고자 했다. 당시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었던 노르베르트 베버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서울에서 차후에도 발간된 적이 없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물론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 서울은 한국을 소재로 한 옛 서양 문헌들이 대량으로 발간되는 곳이다.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는 “급속히 몰락해 가는 옛 문화의 흥미롭고 가치 있는 잔해들을 보존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그것들은 식민 침략자들의 손에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 백동 수도원에는 신부 9명과 수사 12명이 살게 되었다. 1919년 성령 강림 대축일부터는 오씨, 황씨, 김씨 성을 가진 젊은 한국인 청원자 셋도 목공소, 정원, 주방에서 일하며 함께 살았다. 10년도 채 안 되어 백동 수도원은 요지가 되었다. 원산 방면으로 가기 위해 동소문 쪽으로 향하면, 성문 오른쪽 가파른 언덕의 미루나무숲 위로 붉은 기와집이 도드라졌다. 간선도로가 급커브를 그리며 언덕을 휘감아 오르면, 남으로는 시내의 낮은 집들이, 북으로는 삭풍과 악귀를 막아주는 가파른 산맥이 보였다. 수도자들과 지역민들은 작은 성당에 모여 공동기도를 바쳤다. 이곳은 여느 불교 사찰이나 교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정문 뒤 오른쪽에는 실업학교(숭공학교)와 운동장이, 왼쪽에는 목공소와 제차부, 제차부 앞에는 수리를 기다리는 낯선 자동차들(수도원 소유가 아님)이 서 있었다. 수도원 10미터쯤 위쪽으로 시냇물이 흘러 정원에 물을 댔다. 정원에는 유럽종과 재래종 식물을 사이좋게 심어 집중 관리했다. 높은 곳에 개울이 흘렀는데 유럽과 자국의 식물들을 많이 재배하는 정원에 물을 공급했다. 정성스레 손질된 계단식 정원 위로 연결된 작은 둔덕에는 옛 와실의 여름 별장이 있었다. “소나무 그늘 아래 양봉장, 병아리 사육장, 제빵 공장, 푸줏간, 부화장, 양계장 등이 달린 다섯 채가 있었다.” 백동 수도원은 매우 독특했다. 한편으로는 탁월한 학문 기관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업체였다. 수도원이 운영하는 실업학교는 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했다. 뮈텔 주교가 1921년 5월 주교 서품식 축사에서 뮈텔 주교는 이 수도원을 “기도와 노동으로는 두 활동이 채워진 꿀통”이라 했다.

백동 수도원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결코 파리 외방전교회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물론 독일과 프랑스 간의 오랜 적대감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두 선교 단체가 한국에서 조화롭게 활동하는 것이 유럽에서의 감정싸움보다 중요했음은 분명하다. 1914년 여름, 문제가 심각해졌을 때 이 사실은 더욱 부각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국법에 따라 참전해야 했지만, 독일인 선교사들은 병역에서 자유로웠다. 평수사 4명만 청도(靑島) 방어전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독일의 적국인 프랑스 선교사들이 그들의 버려진 본당들을 독일 베네딕도회 회원들에게 넘길 거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였다. 베네딕도회 회원들을 이 본당 저 본당 옮겨 다니게 하지 않겠다는 뮈텔 주교와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의 결정은 평화적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독일의 적국인 일본이 백동 수도원에 문제를 일으킬 때면 항상 뮈텔 주교가 개입했다. 1915년에 그는 실업학교 교장이 되었고 1919년에는 동맹국 협정에 의거한 일본의 수탈로부터 백동 수도원을 지키기 위해 수도원의 재산을 떠맡았다.

개전 2년째 되던 1915년 3월 11일 뮈텔 주교는 명동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가 새 강론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백동의 목공소에서 보내온 선물이었다. 오늘날 그 강론대는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윗부분은 완벽하게 복원되어 명동 성당 주교좌 위에 설치되어 있고, 아랫부분은 안타깝게도 아직 왜관 수도원 구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 또한 백동 장인들의 훌륭한 작업의 산물일 뿐 아니라, 전쟁의 온갖 역경에 맞선 구체적 증거이기에 그에 맞갖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

백동 수도원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상트 오틸리엔의 최초 구상은 실패했다. 원인은 일본의 식민 지배 정책이었다. 일제는 처음부터 베네딕도회 회원들의 사범학교 설립을 반대했다. 허락된 것은 실업학교뿐이었다. 일본은 한국인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숙련된 장인들을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한동안 교회 지도부는, 베네딕도회가 일본 감독관이 강조한 것과 전혀 다른 역할을 실업학교 졸업생들에게 기대한다는 사실을 용감히 무시해 버렸다. 1910년 12월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는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한국으로 갔다. 1911년에는 직접 일본 총독을 만나 사범학교 설립을 논의했다. 이를 위해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 신부는 성당을 지으려는 계획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결국 성당은 짓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는 로마에서 백동 수도원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시키고자 했다. 1913년에 상트 오틸리엔에서 열린 오틸리아 연합회 총회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 신부는 아빠스로 축복되었다. 그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총독부가 사범학교를 폐교시켜 백동 수도원은 선교 활동의 토대를 상실했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독립 선교지를 획득하기 위한 협상을 벌였다고 나중에야 고백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비밀에 부쳐졌다. 그것은 당시의 통상적 위계 구조 때문이기도 했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세계대전 중 강화된 서신 검열로 인해 유럽과의 서신 교환이 어려워졌다. 1920년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와 포교성성이 승인한 결정은 놀라운 것이었다. 백동 수도원은 신흥 항구도시 원산에서 시베리아 국경까지 1,500km에 이르는 원산 대목구를 얻었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가 1909년 한국에 파견된 것은 선교 활동과 수도 생활을 병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신부를 끝까지 백동 수도원에 묶어놓았다. 그 후 그는 거대한 소시지 모양의 선교지를 인수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 9명의 신부들을 150km 거리당 한 명씩 배치시킨다 하더라도, 미래를 위한 대담한 원칙의 필요성을 깨닫지 않는 한 이것은 희망 없는 사업이었다. 아프리카에 수도원을 짓지 않아서 보니파시오 아빠스에게 끊임없이 비난받은 토마스 슈프라이터 주교도 제반 여건이 때로는 자신의 의지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자아낸다며 비난했다. 그러나 새 대목구의 면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중국과 한국의 사회정치적 정세와 선교 베네딕도회의 내적 성장은 서로 별개의 문제였다.

19세기 후반, 선교 문헌에 ‘간도’라는 약호로 표시되는 중국 동북지역으로 많은 한국인이 이주했다. 이 지역에 한국인 이주자들만의 가톨릭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길림(吉林) 지역에는 한국말에 능통한 신부가 없었으므로 서울 대목구 신부들이 사목했다. 길림 지역에는 돈화(敦化)나 연길(延吉), 영안(寧安) 등의 지역을 수시로 돌볼 신부들이 없었다. 이미 1911년에 대구 대목구를 분리시킨 뮈텔 주교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에게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나 함경도 지역을 맡을 것을 권했다. 보니파시오 아빠스는 베네딕도회 선교 활동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함경도 지역에서 더 잘 실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계획도 지니고 있었다.

되도록 넓은 지역을 선호한 데는 1919년 이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 정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선교사들의 입국을 더는 허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천명했다. 상트 오틸리엔에서는 한때 독일 식민지였던 동아프리카 선교지를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백동 수도원의 아빠스가 한국의 동북 지역뿐 아니라 길림 지역까지 위임받고 나아가 송화강(松花江)과 아무르(Amur) 강 사이의 중국 땅 의란(依蘭) 지역까지 관할하려 했다면, 그 배후에는 선교 베네딕도회의 연합회 전체를 영구적으로 동아시아로 옮기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이 광범위한 지역에서는 베네딕도회 회원들만의 특별한 선교 방법이 개발되었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1918년 12월 30일 총아빠스에게 보낸 긴 편지에서, 자신이 10년 전 한국으로 파견될 당시의 최초 구상을 잊지 않고 광범위하게 발전시키려 했다고 밝혔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가 빵을 굽는 것을 본 경험을 예수의 비유와 연결 지어 설명했다. “어머니는 큰 함지에 밀가루를 부은 다음 적당한 크기로 구멍 셋을 내고, 그 구멍 안에 누룩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함지에 뚜껑을 덮고 한참을 놔두었다가, 밀가루 구멍 속의 누룩이 발효하기 시작하면 밀가루와 누룩이 잘 섞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베네딕도회의 선교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큰 신앙 중심지를 설립하고 여기서부터 만백성에게로 퍼져 나갑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하신 예수의 비유는 보니파시오 아빠스를 향후 수년간 그 일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는 오랜 한국 생활을 통해 이렇게 확신했다. “개개의 선교사가 도시의 분망 속에 파묻히면 거의 티도 나지 않아 사람들이 유럽인으로 봐 주지도 않습니다. 한 이교국 내 하나 혹은 여러 가톨릭 생활 중심지, 대놓고 말하면 몇몇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공식적으로 50~60명 이상의 선교사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아프리카 선교사들을 동아시아로 불러들이려는 계획은 남아프리카 줄루란드의 극심한 빈곤 속에서도 토마스 슈프라이터 주교가 새로운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23년에 포교성성을 통해 그 사업을 중단시켰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그 사업은 베네딕도회다운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룩’의 비유는 향후 수십 년간 선교의 중심 노선을 제시해 주었다. 외로운 투사로 나날을 보내던 선교사들은 30년 전 마오로 하르트만(Maurus Hartmann) 신부가 동아프리카를 염두에 두고 계획한 ‘근접 본당 시스템’에 따라 가까이 배치되어 수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과거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니안가오(Nyangao), 루쿨레디(Lukuledi), 기탄갈리(Kitangali), 페라미호가 그런 곳이었다. 한국과 만주에서는 원산과 내평(內坪), 용정(龍井)과 삼원봉과 팔도구(八道溝)와 연길, 부금과 가목사 본당이 그런 시스템에 해당했다. 거기에 더해서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인수받아 발전시킨 방법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이 아빠스좌 수도원의 수도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본당이 1년에 4주간 문을 닫아야 했다. 그 동안 선교사들은 백동 수도원으로 돌아가 피정과 정상적인 수도 생활을 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즉시 신설 원산 대목구의 인원을 늘렸다. 1923년 원산 대목구에는 신부 19명, 수사 12명, 그리고 한국인 수련자 3명이 있었다. 줄루란드 지목구에는 신부 3명과 수사 5명, 린디에는 신부 6명과 수사 6명이 있었다. 1928년까지는 원산 대목구가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관할 선교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당시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영국 식민지 탕가니카 남부 지역 린디에는 14개 본당, 남아프리카 에쇼베(Eshowe)에는 4개 본당이 있었던 반면, 원산 대목구에는 개 본당이 16 있었다. 수도자 수를 비교하면 신부가 린디 30명, 에쇼베 13명, 원산 34명이었고, 수사는 린디 27명, 에쇼베 14명, 원산 20명이었다. 방인 수도자를 배출한 선교지는 한국뿐이었다.


3. 덕원 수도원

1921년 1월 10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안드레아 에카르트 신부와 함께 서울에서 자신의 주교좌가 될 원산까지 7시간 반 동안의 기차 여행을 떠났다. 원산에는 2만 5천여 시민 중 약 400명이 신자였음에도 4년째 본당 신부가 없었다. 가스통 프와요(G. Poyaud, 表光東, 1877~1960) 신부가 1910년부터 1921년까지 원산 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했다. 그러나 그가 1917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뮈텔 주교의 명으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일하면서, 원산 본당을 일 년에 두 차례씩 일종의 공소처럼 돌보았다. 성당은 바다 쪽으로 난 발코니까지 합쳐 약 60제곱미터였고, 벽은 투박하게 벽돌로 쌓았다. 훗날 주교관이 된 사제관은 성당 쪽으로 난 마당을 막고, 1층과 2층에 각각 작은 방이 3개씩 있었는데, 2층으로 가려면 삐걱거리는 바깥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헛간 옆에는 9제곱미터 크기의 정원이 있었고, 산허리 아래쪽에는 몇 년째 쓰지 않고 버려진 폐교가 있었다. 그곳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에 내평 본당이 있었다. 농가의 토담 뒤로 네 채의 집이 사각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두 채 가운데 하나는 경당으로, 다른 하나는 사제관으로 썼다. 나무 제대에는 제대보를 덮어 두었고 감실은 나무상자였다. 여기서 프랑스 신부들은 숭고한 가난과 박해를 겪었다. 그들은 스스로 비용을 댈 수 있는 만큼만 고쳐 가며 살았다. 주교는 사는 데 꼭 필요한 것만 제공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한국 교회의 운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대구의 드망즈 주교는 보니파시오 아빠스에게 신학교는 포기해도 본당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바로 드러났다. 1921년 1월 15일 원산에 백동 수도원의 힐라리오 수사가 도착하여 성당을 수리했다. ‘주교관’에 창문과 문을 만들었으며, 새 바닥을 깔고 그을린 부엌을 복구했다. 내평 본당에 설치할 제대는 백동의 목공소에서 급히 가져왔다. 몇 주 후 일데폰소 수사가 수 주간의 힘든 작업 끝에 학교를 수리했다. 짧은 시간에 본당은 내세울 만한 ‘얼굴’이라도 되찾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인들의 유능함 때문이 아니라 백동 수도원 작업장과 장인 수사들 덕분이었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수석 아빠스에게 보낸 1921년 2월 18일자 편지에서, 그들의 솜씨를 믿고 곧 성당 건축에 착수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성당은 가대(歌臺)를 포함해서 길이 39미터, 너비 12미터, 높이 9미터로 지을 계획입니다. 배 모양입니다. 가대에는 좌석 12개를 배치할 것이고, 주교좌도 마련될 것입니다. 성당 천장에는 격자형 판자를 사용하겠습니다. 건축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입니다. … 성당 옆에는 신부 9명과 수사 12명이 살 수 있는 작은 수도원을 세울 것입니다. 학교도 지으려 합니다. 저는 제 임무를 백동 수도원과 원산으로 나누어 아빠스 직무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대담한 계획과, 그런 식의 성당 건축은 두 번 다시 말도 꺼내지 말라는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그 계획을 관철하는 의연한 태도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에게는 우선 다른 걱정이 있었다. 그는 1921년 5월 1일 서울 대목구 보좌주교로 임명된 에밀 드브레(E.A.J. Devred, 兪世竣, 1877~1926) 주교와 함께 명동 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서품식은 조선총독부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제처럼 진행되었다. 수십 년간 박해에 시달리며 숨어 지내던 한국 가톨릭교회는 자신 있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921년 6월에는 세 명의 베네딕도회 회원들이 한만 국경을 넘어 간도 지역 용정과 팔도구의 본당들을 인수했다. 1921년 9월부터 이듬해까지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오틸리아 연합회 총회 참석차 유럽을 방문했다. 마침내 그는 당면 과제들과 장차 대두될 과제들에 대해 총아빠스와 논의하고, 중국 지역을 분할하여 원산 대목구로 귀속시키는 사안에 대해 로마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제 새 선교지를 베네딕도회다운 모습으로 어떻게 꾸려 갈지 결정하는 일만 남았다.

연대기는 신부들 간의 만남을 통해 늘 대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고 거듭 강조한다. 〈원산 연대기〉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주교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이 엿보인다. 하지만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누룩’ 역할을 할 수도원이 변덕스런 이해관계들의 집합소인 항구 도시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넓은 땅과 충분한 건축 부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수도원은 대목구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어야 마땅했다. 그래서 다른 본당들은 한동안 꼭 필요한 것들만 제공받았다. 원산은 수녀원 건축을 지원받았다. 뮈텔 주교는 백동 수도원의 매입을 도와줄 후원자를 얻자, 모든 자금을 수도원 건축에 투입했다. 1926년과 1927년에 걸쳐 덕원에 신학교와 수도원의 세 측랑이 지어졌다. 1909년의 근본 구상은 이렇게 현실화되었고, 애초에 의도한 것보다 더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신학교에서는 가톨릭 학교 교사들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발전을 기약할 방인 사제들만 양성했다. 신학교는 신부들을 넉넉히 수도원에 묶어 둠으로써 규칙적인 공동 기도에 지장을 주지 않았고, 동시에 진정한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틀도 마련해 주었다. 언젠가 선교 활동 자체가 불필요해지는 것이 선교 활동의 참된 목적이었다. 1927년 9월 수도원 참사회는 백동 수도원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덕원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상징성 있는 수도원 성당도 없었고,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가 1928년에 세계 여행에서 건립 기금을 확보해 오리라는 희망도 부질없었다. 이미 적기가 지난 1929년 여름이 되어서야 상트 오틸리엔에서 건축에 착수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수도원 건축가 카예타노 피어하우스(C. Vierhaus, 河, 1868~1936) 신부가 자신의 걸작품인 수도원 성당을 완성하였고 1931년 성탄절에 그곳에서 첫 미사가 봉헌되었다.

1926년에서 1931년 사이에 건축된 덕원 수도원을 기리는 의미에서, 동아시아에서의 베네딕도회 선교 활동을 다룬 필자의 책에서 몇 줄을 인용하고자 한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덕원 수도원을 동아시아 가톨릭교회와 베네딕도회의 모범으로 여겼다. 그는 은둔의 산사에서 마을로 내려와 영육간의 평안을 위해 활동하는 또 다른 수도원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불교 승려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끊임없이 돈을 쏟아 부어 학교와 예배당을 세우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 새로운 믿음에는 늘 살아 있는 귀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의 수도회에는 선교지에서 선교 활동과 베네딕도회다운 수도 생활을 병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홀로 선교 활동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다른 수도회 소속 선교사들은 알아야 한다. 믿음을 유지하는 데는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미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원 수도원은 믿음의 건축물이자 선교사 개인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사명에 대한 헌신을 상징한다.”

또 한 가지 생각도 내게는 중요해 보이기에 새삼 인용한다.

“중세 유럽 수도원을 모델로 하여 지어진 덕원 수도원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인들이 지은 호화로운 건물들에 비해 예술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전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작품이었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늘 독일 슈바르츠발트의 히르사우(Hirsau) 수도원에 비견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덕원 수도원은 유럽 군주들의 행세를 따라하지 않았다. 덕원 수도원 건물 자체가 그들 고유의 종교적 사상과 태도를 보여 주었다. 주변 경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으나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지 않았다. 수도원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스스로 원해서 수도원을 찾은 사람은 사회에서는 억압을 받고 있지만 수도원에서는 영적으로 드높여지는 체험을 했다. 어려운 시기에 덕원 수도원은 나름의 방식으로 한국인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4. 연길 수도원

이 발표에서 내가 전해주는 덕원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은 이쯤 해두고 더 이상 선교지역에 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한국 베네딕도회의 역사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라면 덕원 수도원에서 함흥 대목구가 분리된 배경을 밝혀야겠지만, 그것은 다른 발표에서 할 이야기이다). 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연길 대목구를 포기한 것과 같은 실책은, 오틸리엔 연합회의 역사에서 항상 반복되어 일어났으나,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실책은 덕원에서 연길 선교 활동이 실패한 것과는 다른 부분에서 연관이 있었다. 중국인들은 순교자들을 원하지 않았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 선교사들이 스스로 떠날 때까지 그들을 억압했다. 이 실책은 비오 12세 교황이 테오도르 브레허(T. Breher, 白化東, 1889~1950) 아빠스를 향해 보인 경멸감과도 연관이 있다. 병에 걸려 바티칸의 계단조차 혼자 힘으로 오르지 못할 만큼 위중했던 테오도르 브레허 아빠스 주교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 주교가 평양의 감옥에서 점잖게 숨을 거둘 때, 자신의 선교지역을 떠나야 했다. 이 사건 이후의 공식 회견에서 많은 사람들은 교황의 경멸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들이 ‘도망쳤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평생 고통을 받은 연길의 선교사들도 있었다. 연길 지역에 관한 정보가 부족했던 이유는 그곳이 중국 땅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몇 년 전 서울의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유럽의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선교 단체에 관한 문서들을 받아 갈 때, 간도에서의 한국인 선교 활동에 관한 문서는 전혀 받아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문서들이 ‘중국’ 문서함에 분류되어 있어 전혀 열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연길 이야기로 돌아오면, 1921년에 두만강을 넘은 첫 번째 선교사 세 명은 석조 교회가 세워진 선교지 세 곳과 제 기능을 발휘하는 큰 교구도 발견했지만, 대목구의 초기 사정은 원산보다도 초라했다. 거기에는 숨길 필요조차 없는 이유가 있다. 보니파시오 사우어는 1925년에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팔도구와 연길에서 북부 선교지의 선교사들과 원산대목구에서 간도 지역을 분리시키는 문제를 의논한 것을 알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 자신은 수도원을 ‘누룩’처럼 많이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수도원을 세우는 시점은 그 자신이 정하고 싶어 했다. 대목구의 분리가 이미 1925년에 진행되었다면 수도원을 짓는 데 필요한 돈은 두 사람 모두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훤히 드러나는 이기주의를 험담할 것이 아니라 그 행동에서 점차 신중함을 엿볼 수 있어야 한다. 보니파시오 사우어는 자금 조달을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수도원을 더 세우기 전에 아빠스좌 수도원을 하나 확실하게 소유하고 싶어했다.

참고로 누룩에 관한 은유는 사우어 아빠스가 덕원에 아빠스좌 수도원을 지은 이후 그의 대목구에 속한 세 번째 부분인 의란 지역을 제외시킨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1920년대 말부터는 독일 베네딕도회 회원들이 다시 동아프리카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의란과 같은 곳에는 가까운 시일에 일손이 부족하게 되리라는 것이 예상 가능했다. 1931년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가 수석아빠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저는 예전에 의란 지역을 매우 지지했고 그 지역이 더 일찍 양도되지 않은 것은 제 불찰입니다. 저는 그곳에 정식 수도원을 건설하고 농업적인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중국 의란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수도회의 사정도 2년 전만 못합니다.” 여기서부터 사우어 아빠스는 1920년에 그 커다란 지역을 인계받으면서 품었던 본래의 계획을 드러냈다. “저는 우리의 선교단체들 중 좀 더 규모가 큰 단체들이 가까운 곳에 있어 서로를 돕고 지지할 수 있다면 많은 이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베네딕도회는 선교지역이 원산, 연길, 린디(아직 분리되지 않은 동아프리카의 페라미호와 은단다), 그리고 줄루란드의 에쇼웨 등 모두 4곳이었다. 그 수도원들을 모두 누룩처럼 작용하게 하려면 힘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한 선교지역을 포기할 필요가 있었고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의란 지역을 포기할 것을, 과거에 그곳을 얻으려고 노력했을 때만큼이나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베를린에서 중국어 박사 학위를 땄던 테오도르 브레허 신부는 1921년 당시에 서울 주재 선교사로서는 유일하게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교 경험을 쌓기 위해 동아시아에 3년간 파견되었고, 그 후에 전체적인 일터를 동아시아로 옮길 계획이었던 한 연합회의 뮌헨에 있는 수도회의 책임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이 계획이 틀어짐에 따라 1925년에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움직이게 되었고, 그때에서야 연길에서 수도원 짓는 것을 브레허 신부가 감독하게 되었다. 그가 그 시점까지 감독했던 서울의 지역을 떠나 향후의 북쪽 선교지역에 관해 기록한 사실들은 수도회 역사에서 가장 모험적이고 숨 막히는(결코 반어법이 아니다)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예전에 길림에서 감독한, 지금은 버려진 옛 선교지들을 방문하기 위해 ‘하라스’(Harras)라 이름붙인 말과 함께 여름에는 통과할 수 없는 만주 길을 겨울에 달렸는데 그 거리가 수천 킬로미터나 되었다. 1922년 12월에 그는 그 기지들 중 하나에 정착하였다. 그가 하필 연길을 선택하고 여동생에게 “아마 나는 동아시아에서의 임무 수행은 여기서 거취하면서 할 것 같다”라며 편지를 쓴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연길은 그 행정지역에서는 중국의 중심지였고 토다이(Todai)라고 불리는 장관이 있었는데, 브레허 신부는 일본이 통제하는 용정에는 더 들어가지 않고 대신 중국 관리들을 가까이 했다. 브레허 신부의 첫 번째 기록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나는 1922년 12월 6일에 신고를 하긴 했지만 눈에 띄지 않게 이 중심 도시로 자리를 옮겼다. 14년 전 연길에는 프랑스 신부가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번창했다. 땅값이 저렴한 시절이었으므로 오늘날보다는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수월했을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주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때 당시의 중국 행정 관리 기구는 지금처럼 거대하지 않았다. 현재와 비교해서 당시의 프랑스 신부는 더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길림 주교의 지역은 거대하게 팽창했으므로 신부가 연길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신부는 소환되었고 삼원봉, 용정, 팔도구 등 한국 선교지 세 곳은 서울의 프랑스 신부들이 인수했다. 14년간 연길이 고립되면서 신자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많은 이들은 다른 종교로 바꾸거나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3년 또는 5년마다 남아 있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해주기 위해 길림에서 신부가 왔다. 그러나 길림에서 연길까지는 10일이 소요되는 거리이고, 부분적으로는 거리의 도적 때문에 위험한 길이었다. 결국 내가 연길에 도착했을 때는 제대로 된 신자 가족은커녕 성당 건물의 관리인조차 없었다.”

성당 건물의 상태 또한 불행하게도 선교지역의 상태를 보여 주는 은유가 되었다.

“방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지저분했다. 조각칼로 벽돌바닥에 몇 년 동안 쌓인 먼지를 긁어냈다. 12월 11일에는 당장 필요한 방을 정리해서 그곳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식탁과 의자와 책상은 이교인들이 빌려주었다. 뼛속까지 시린 추위에서 나는 솔질을 하고 청소를 했지만 아직 깨끗하지는 않다. 경당 또한 버려져서 어둡고 지저분했으며 초가지붕도 오래되고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제의와 성작만 잘 정돈되어 있었다.”

1928년에 연길 지목구장으로 임명된 후 테오도르 신부가 직접 만들고 조립하고 긁고 칠한 것을 제외하면 연길의 상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제까지 그의 장상이었던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1927년 도쿄 주재 교황 사절인 마리오 자르디니(M. Giardini, 1877~1947) 대주교에게 편지를 보냈다. “원산 대목구의 새 수도원 공사가 끝나는 대로 수도자성과 포교성성에서 승인한 규정에 따라 연길 지역의 분할을 요구할 수 있도록 연길에 새 수도원 설립을 준비해야 합니다.” 1927년 7월 28일에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그가 흥분하면 커지고 위로 올라가는 특유의 글씨체로 절규하듯 수석아빠스에게 편지를 썼다. “연길에 원장좌 자립 수도원이 적어도 한 곳은 있어야 이 분리를 단행할 수 있습니다. 명의 원장좌 독립 수도원이나 명의 아빠스좌 수도원이 아니라 공동 기도를 바치는 수도원이 아닌 실질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에 필요한 . 상주 수도자들이 없다면 저는 이 일을 돕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이 이외에도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짓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구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건물 없이는 베네딕도회 가족이 결코 형성될 수 없습니다.” 밑줄을 많이 그은 그의 편지는 연길에서 일어나지 않은 모든 사항들을 언급한 것이다.

새 지목구가 독립하자 브레허 아빠스는 자신의 처지를 부질없이 복음의 라자로와 비교했다. 1929년과 1930년에 뮌스터슈바르작의 플라치도 아빠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의 문장들이 적혀 있다. “제 생각에 연길에 두 번째 기지는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저 황량할 뿐입니다.” 또는 “선교지에 재산이 없습니다. 시기와 장소에서 수입은 부족하고 기부 또한 적게 들어옵니다.…수도자 세 명 이상이 사람답게 살 만한 집조차 없습니다” 또는 “연길은 물질적으로도 인적으로 아무런 준비없이 분리되었습니다” 등이다. 1930년에 그나마 돈을 마련할 수 있었던 우즈나흐(Uznach)의 아달리히 뮐레바흐(A. Muhlebach)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연길 선교지에 “반쯤 무너져 내린 방 세 개 딸린 석조 건물과 엄청난 무리의 빈대”만 있을 뿐이라고 언급하며 새 건물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16명의 신부들이 모여 잠잘 곳은 ‘이 초라한 집’ 밖에 없었다. 침대가 세 개 있었고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선교지에는 ‘낡은 톱’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재기하려는 중국과 그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정치적인 상황은 모든 것을 불안정하고 비싸게 만드는 시기였다.

만약 연길이 이후 10년간 - 이미 예술 도시였던 만주국에는 일제 치하의 후기에 접어들면서 뭔가를 꾸밀 만한 장소가 부족했다 - 정치적인 싸움으로 인한 잔인한 보복에도 불구하고 활기찬 선교지역이 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지목구장에서 수도원장, 아빠스좌 수도원장이 될 테오도르 브레허 수사의 공일 것이었다. 불안정하기로 소문난 이 사람은 선교 활동의 조용한 중심이었다. 실력자로서 그는 모든 일을 속도감 있게 수행하면서 한편에서는 가장 복잡한 언어를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에서 주변 사람들의 견해를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도 신경 쓰도록 모두에게 가르쳤다. 혼자 어떤 일을 수행했을 때 더 능률적이라 생각하고 모든 일들을 독단으로 해결한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조용한 기도에서 떨어져 나갔다. 공포가 만연했던 설립 시기 이후에 아빠스가 되고 나서 사실 그는 자신의 기력을 모두 상실했다. 하지만 그는 기력이 그 자신의 체력에서만 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의사의 관리를 오랫동안 받아왔지만 지금은 멀쩡하다.” 이 고백은 그의 많은 활동에 대한 적절한 은유이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달리면서도 오직 한 가지만을 소원했다. “하느님과의 개인적이고 진실한 삶”이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너는 정신보다는 신앙이 강하다”라고 한 것에는 그 자신도 동의했다. 그는 “항상 인내심을 잃을 것 같았다”라고 고백하면서도 갓 새로 온 젊은이들에게는 놀라운 인내심과 침착함을 가지고 낯선 곳에서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동료들의 약점이나 그들이 저지르는 실수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참을성이 없었고, 종종 불공평하기도 했지만 그가 직접 돌보지 않은 병자들은 없었다. 모든 이들이 이런 대조적인 모습을 이해하지는 못했고, 그의 호통이나 지나친 몸짓, 다른 모든 것들을 잊게 만드는 인내심을 모두가 견디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자신이 모범이 됨으로써 보여 준 결과물을 보고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덕분에 연길에서 이루기 어려웠던 것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부, 수사와 수녀를 포함한 교회 전체가 무조건적인 단결을 보여 주었다.

연길 아빠스좌 수도원의 생활은 브레허 아빠스가 유럽에서 오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언어를 직접 가르치고 그런 후 함께 성무일과를 수정함으로써 안정되었다. 아빠스좌 수도원의 건설과 북쪽으로 조금씩 옮긴 선교지들에 대한 자금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발두인 아펠만(B. Appelmann, 裵) 신부는 그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브레허 아빠스가 1930년 막바지의 어느 날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나서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놀이판을 뒤엎고 돈이 필요하다고 절규했다고 밝혔다 돈이 필요했던 . 이유는, 원래 그가 가지고 있었지만 급히 필요로 하는 300엔을 극빈한 가족을 데리고 사는 자기 본당의 회장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발두인 신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대답했지요. ‘플라치도 아빠스(발뒤노 수사의 본 수도원인 뮌스터슈바르작의 장상)처럼 똑같이 해보시지 그래요. 그가 지난번에 했던 말을 들어보면 뮌스터슈바르작의 모든 것은 이 소시민들 덕분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우리의 수도원은 대부분 이 소시민들의 잔돈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들을 찬양하라’,라면서. ‘그리고는 그가 뭘 하던가요?’ ‘편지를 보내서 구걸을 하지 않았습니까. 계속해서. 여러분도 기부하세요라고 하면서’, ‘그래, 기부할 생각이 있나요?’ ‘물론이죠, 기분 전환을 하든 구걸편지에 응하든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는 숨을 크게 내쉬더니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좋습니다!’라고 했었죠.”

앞으로 개최할 축제와 같은 큰 잔치에서 잊혀지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다시 한 번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덕원과 연길에서 생겨난 선교지들은 모두 ‘소시민들’ 덕분이었다. 선교사들의 영웅적인 용기와 굳건한 신앙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베네딕도회에 허락된, 한국과 중국의 교회들을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사업은 고향인 독일을 포함해서 스위스(업무를 대리하는 우즈나흐), 미국(업무를 대리하는 쉴러)과 다른 여러 곳의 작은 마을 어딘가에 뿌리를 내렸다. 한국에서 생겨난 것은 이런 많은 ‘소시민’들의 희생과 그에 따르는 기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성공의 보이지 않는 요인이다. 그리고 본인은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들 덕분에 선교 활동이 실패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살아남은 선교 활동에 대해서는 제시한 주제를 갖고 몇 마디 더 하고자 한다.


5. 한국 베네딕도회 수도사들의 역할

사실은 지금까지 주목할 만한 정보는 공개하지 않고 계속 변두리 이야기만 하면서 성공적인 기록을 과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선 사과를 해야겠다. 특히 대구 사수동(泗水洞)과 부산의 베네딕도회 회원들에게도 그들의 교회인 덕원과 연길의 선교 활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사과한다. 그 역할은 총체적인 설명을 할 때 자세하게 묘사할 것을 약속한다. 어쩌면 내 발표의 마지막 부분이 내가 말하려는 핵심을 전달할지도 모르겠다. 1946년과 1949년에 한국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연길을 시작으로 덕원과 원산의 선교사들을 체포해 오랫동안 고문하자, 유럽의 많은 이들은 동아시아 선교 활동이 끝났다고 믿었다.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베네딕도회 회원이 된 한국의 많은 젊은 남녀가 자신들의 소명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선교 활동에 관한 독일의 기록에서는 1950년대에 티모테오 비테를리가 덕원의 형제들을, 오트마라 암만(Othmara Ammann) 수녀가 투칭의 베네딕도회 수녀들을 ‘모았다’는 구절을 자주 반복한다. 하지만 이 문장은 잘못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위험한 남한에서 일을 어떻게 진행시켜야 할지 누구도 몰랐기 때문에, 선교 본부의 지원이 희박하고 미적지근하고 어려운 것에 대해 스스로를 위로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한국 베네딕도회 회원들이 외부에서 도움을 받기 전에 스스로 뭉쳤다는 것이다. 연길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은 이미 알로이지아 수녀가 마련한, 후에 한국 전쟁에 말려든 작은 집을 소사에 갖고 있었고(스위스 자금을 지원받았는데 나머지 두 선교회는 그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부산에서는 니콜라스 페슬러 수녀가 교회를 지도하게 되자 병원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원산 수녀원에 있는 투칭 수녀들을 위해서는 골롬바 수녀가 이미 광주의 사도직 자리를 받아들였었다. 또한 오트마라 암만 수녀가 갑작스럽게 한국에 도착하여 지연되기 전까지는 부산에 남은 수녀들을 대구로 이동시킬 준비까지 해주었다. 본인은 최근 몇 주간 투칭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기록 보관소에서 대구에 머물던 오트마라 수녀의 편지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수녀들이 내린 이해하기 어렵고 자의적인 결정에 놀라고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들과 오래 지낼수록 그 젊은 여성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티모테오 비테를리 신부가 도착했을 때 연길의 요세프 수사가 합류한 덕원의 수도사들은 이미 김 베다 수사의 지도 아래 의지했다. 이런 말들로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에 건너가 궁핍함을 한국인들과 나눈 유럽 베네딕도회 사람들의 공적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도움,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더라면 한국 교회를 1960년대에 드러난 것처럼 일으켜 세우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언급하고 있는 덕원과 원산, 그리고 연길의 베네딕도회는 그 지역 한국 신자들에게 교회가 전쟁으로 무너져도 버틸 만큼의 힘과 용기를 전해준 모양이었다. 그들이 얻은 정신적인 유산은 그들로서는 낯선 환경에 새로이 적응하는 데에 충분했다. 나는 이러한 양상이 옛 수도원을 바라볼 때 잊혀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원산에 있는 아빠스좌 수도원은 베네딕도회 회원들이 한국에 온 지 100년이 지난 후 대참사가 지나간 다음에 다시 새롭게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새로운 시작의 기본 구상을 설명하고 싶다. 이 구상은 백동 아빠스좌 수도원의 계획이 실패한 후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가 자기 입장을 해명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불명확한 낯선 환경에서 베네딕도회 아빠스좌 수도원이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누룩의 예를 든다. 조심스럽게, 적당한 곳에 밀가루를 풀어 발효하도록 놔두면 눈에 띄지 않지만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발효가 잘 된다.

[교회사 연구 제33집, 200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Wie meine Mutter den Sauerteig benutzt hat” Benediktiner als Missionare in Korea und Nordostchina 1909~1954, Johannes Mahr(University of Wurz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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