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일)
(백)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강론자료

5월 2일(주일)-부활 4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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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4-05-02 ㅣ No.645

부활 제 4 주일 (다해) - 성소주일

 

        사도행전 13,14.43-52      묵시록 7,9.14ㄴ-17      요한 10,27-30

    2004. 5. 2. 퇴계원

주제 : 복음을 전하는 일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세상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일도 힘들고, 자녀를 낳아서 성장시키는 일도 역시 힘든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일들을 알려주는 일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가진 마음에 자신만을 귀중하게 여기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부활 4 주일, 성소주일입니다.

성소(聖召)라는 말을 교회에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세상에 부르는 일과 관련된 것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사용할 때 ‘성소’라는 낱말은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합니다.  좀 더 쉽게 그리고 좁은 뜻으로 ‘성소’라는 말의 뜻을 이야기한다면, 사제나 수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될 것을 권하는 낱말입니다.

 

물론 혼인을 하고 자녀를 낳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도 ‘성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경우는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아닌 ‘보편성소(vocatio universalis)’라고 부릅니다.  어떤 성소가 되었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사는 일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제와 수도자로 사는 ‘특별한 성소’ 역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분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혼인을 하여 태어나는 자녀들 가운데 특별한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일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신학교와 수도회에서는 자신들의 삶을 미래에 ‘특별한 성소’를 지원할 청소년들을 향하여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우리 본당이 속한 서울교구의 신학교에서도 특별한 체험의 하나로 ‘수단을 입고 사진을 촬영하는 특별한 행사가 열린다고(** 저녁미사 = 열렸다고**) 했습니다.  이런 특수한 일들이 그저 시간이 돼서 한번쯤 해보는 경험의 하나로 끝나고 만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이 시간을 들여서 참여한 것이라면 합당한 결과를 맺으려고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을 소비한 사람으로서 허탈해지지 않는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는 하지만, 하느님은 지금 당장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느님은 사람들이 지치고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자로 표현한다면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적당할 것입니다.  지금 땀을 흘린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순간에 당장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정해진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견뎌야 할 어려움을 모두 이겨내고 난 다음에 축복과 행복이 우리 삶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혼인을 하고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보편성소자들에게나 사제와 수도자들처럼 특수한 성소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나 사정은 같습니다.  어떤 일이나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는 특수한 성소를 사는 사람들이 겪는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지금의 ‘터키(Turkey)’ 서쪽편의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찾아가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힘을 합쳐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전파자들이 했던 말은 ‘이별선고’였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그들을 붙잡고 씨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이방인들에게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비춰 말씀드린다면, 냉담신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 그렇게 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을 돌이키려고 애쓰는 일보다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나서는 것이 더 쉬운 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당마다 ‘길 잃어버린 양’을 찾기를 전개하지만, 새로운 양들을 찾는 일보다는 훨씬 더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삶에서 실천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도 힘들뿐더러 그 뜻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힘든 일입니다.  포기하고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은 그렇습니다.  두 번째 독서 묵시록에 나오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이 듣게 될 축복의 말씀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들으신 분은 없으십니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 옛날과 같은 순교의 길을 갈 수는 없어도, 힘겨운 세상에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 것도 분명 새로운 순교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축복을 얻을 수는 없어도, 이곳에서 봉헌하는 미사를 마치면서 내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갈 수 있는 것을 없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사명을 이루어야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이사야 예언서 55장 10절과 11절의 말씀(=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을 기억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쉽사리 생각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여러분은 얼마나 새겨듣고, 그 소리에 여러분은 얼마나 합당하게 응답하고 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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