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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고대 후기 수도사의 이동과 기독교 문화교류: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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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15 ㅣ No.1399

고대 후기 수도사의 이동과 기독교 문화교류

-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중심으로 -*

 

 

국문초록

 

본 글은 문화교류(cultural exchange)의 관점에서 고대 후기 동지중해 세계(the eastern Mediterranean)에서 수도사들의 이동(moving)과 이주(migration)를 연구한 것이다. 사실, 매우 이른 시기부터 금욕주의자들과 수도사들은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그 중에 어떤 이들은 사회적이고 교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강제적으로 이동과 이주를 선택하였지만, 더 많은 이들은 개인적이고, 영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들로 자발적인 이동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이주와 이동 중 일부는 당대의 수도주의 운동을 타(他)지역으로 전파하고, 중요한 기독교 유물들과 필사본들을 더 넓은 세계로 유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수도사들이 여행 중에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여행기(旅行記)와 순례기(巡禮記)는 당대와 이후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여행한 ‘다른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즉, 고대 후기 수도사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그들의 이동은 고대 기독교 문화를 전달하고 확산시키는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수도사들은 고대 교회 문명교류의 주역(主役) 중 하나로 봐야 할 것이다.

 

 

Ⅰ. 들어가는 말

 

본 글의 목적은 고대 후기 수도사들의 이동을 연구하는 것이다. 가족과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 담장 안으로 들어간 수도사들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여전히 이동이나 이주(migration)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적지 않은 학자들이 수도사들의 이동을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하였다.1) 이런 연구들 중에서 다니엘 캐너(Daniel Caner)의 연구를 눈여겨볼 만하다. 캐너는 그의 책 『방랑 수도사들: 고대 후기에서 영적 권위와 수도생활의 증가』(Wandering, Begging Monks: Spiritual Authority and the Promotion of Monasticism in Late Antiquity)에서 그 동안 간과되어온 방랑 수도사들을 살펴보았다.2) 특히, 그는 고대후기 동(東)지중해 세계에서 자발적 가난을 추구하며 방랑하는 금욕주의자들을 주목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유랑’하는 삶에서 ‘정주(定住)’의 삶으로 변해왔는지를 치밀하게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이런 수도사들은 먼저 자신들의 ‘방랑’과 ‘이동’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방랑 전통을 잇는 것으로 이해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신들의 최종 목표인 아메림니아 (ἀμεριμνίᾳ)를 획득하는 기회로 삼았다.3) 이런 ‘방랑’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으로 인해 당시 많은 금욕주의자들이 방랑하는 삶을 추구하였고, 그 결과 방랑 전통은 이미 3세기에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한 동방 로마제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4) 하지만, 이 것은 오래가지 못해서 점차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방랑자’들이 이동 중에 야기시킨 문제들-주변인들에게 양식과 식량 요구, 권위에 대한 불순종, 노동 거부 등-들로5) 인해 어려움과 불편을 호소하는 소리가 로마제국 여기저기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제로 5세기 중반 제국교회는 칼케돈 공의회(the Council of Chalcedon)에서 수도사들의 이동과 거주(居住) 문제를 교회 주교들에게 맡겨 수도사들의 불필요한 이동과 방랑을 통제하였다.6)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방랑 수도사들의 삶이 점차적으로 정주하는 삶(stabilitas)으로 변화되었다.

 

캐너가 고대 후기 동지중해 세계에서 방랑 수도사들의 기원과 그들의 이동이 함의하는 내용을 통해 수도사들의 이동을 연구했다면, 마리벨 디에츠(Maribel Dietz)는 다른 각도에서 수도사의 이동을 분석하였다. 즉, 그녀는 수도사들의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이동(monastic travel)을 “교훈을 위한 목적 중심의 종교적인 여행(goal-centered, religious travel for an efficacious purpose)”인 성지순례(pilgrimage)와 구분 시킨 후,7) 중세 초기 서로마제국에서 있었든 다양한 형태의 수도사들의 이동을 다루었다. 특히, 그녀의 책 3장에서는 초기 수도원 운동에서 중요한 수도 규칙서들(『스승의 규칙』(Regula Magistri)와 『베네딕도 수도규칙』(Regula Benedicti))에 나타난 방랑수도사들을 주목하면서,8) 그 규칙서들은 당시의 방랑수도자들을 잘못된 수도사의 표상으로 제시하고 올바른 수도사들이 취해야 할 적절한 행동양식들(behaviors)과 옷 차림새(dress)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이 뿐 아니라, 그녀는 또한 서로마 제국의 문헌들에 나타난 이베리아 반도(the Iberian Peninsula)의 기독교와 이동(혹은 여행)의 관계에 대해서도 폭넓게 연구하였다.9) 여기서 그녀는 이베리아 기독교인들에게 거룩한 곳을 여행하는 순례는 평신도 기독교인들이 주일(Sunday)에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교적인 행위인 동시에,10) 수도사로서 자신의 소명을 실천하고 수도적인 삶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였다.11)

 

디에츠의 연구는 중세 초기의 서방 그리스도교의 자료를 바탕으로 캐너가 다루지 않은 수도사들의 여행과 순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연구도, 캐너와 마찬가지로, 고대 수도원 운동과 금욕주의에 나타나는 이동/순례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그것들이 가지는 종교적이고 경제적인 의미나 기능들에만 집중하였다. 반면에 그들은 수도사들의 이동이 내포하는 또 다른 요소인 문화적인 측면을 간과하였다. 본고는 여기서부터 출발하려고 한다. 이 글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 동(東)지중해 세계에서 수도사들의 이동과 순례를 언급하는 고대 후기 문헌들을 살펴보면서 당대의 수도사들이 이동하는 원인과 유형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둘째, 고대 후기 수도사들의 이동과 문화의 교류에 대한 관계를 고찰하면서 수도사들이 당대의 문화교류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고대 후기의 수도사들은 단지 수도원 담장에만 머물러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지중해 세계에서 기독교 문화를 전달하고 확산시켜 문화교류를 촉진시키는 매개체였음을 제시할 것이다.

 

 

Ⅱ. 고대 후기 동(東)지중해에서 수도사들의 이동

 

이른 시기부터 수도규칙에서는 수도사들의 이동과 여행에 대해 비교적 엄격히 다루었다. 이집트의 파코미오스(Pachomios)의 『계명집』 (Precepts)에서는 외부 사람들이 수도원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으나(50-53), 수도사들이 수도원 밖으로 외출하거나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히 통제하였다. 파코미오스 수도사들은 오직 수도원장(만약 수도원장의 부재 시, 그 다음 위치에 있는 사람)이 허락할 때에만 수도원 밖으로 외출할 수 있었다(63).12)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수도원의 공적인 업무나 아픈 친족을 방문할 때는 여행 중에 필요한 식량을 제공해 주었다(54, 64). 이런 이동과 외출에 대한 이해는 아트리페의 셰누테(Shenute)의 수도규칙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 규칙에 따르면, 셰누테 수도원에 속한 수도사들은 수도원장의 허락이 없이는 수도원을 벗어나 주변 도시나 마을로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290), 물건을 만들거나 그 만들어진 물건을 외부인들에게 판매도 할 수 없었다(14).13)

 

수도사들의 이동과 여행에 관해서는 소아시아에서 발흥한 바실레이오스(Basileios)수도원에서도 기본적으로 이집트 수도원의 규칙들과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바실레이오스의 『소규칙』(The Shorter Rules) 120에서는 수도사가 자신을 책임지는 이에게 알리지 않고 다른 곳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루는데, 여기서 바실레이오스는 우리의 주님도 자신의 뜻대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요 7:28)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 수도사들은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수도원 출입과 관련해서) 자기자신에게 권한을 주는 이들은 교만(pride)의 질병에 걸린 것이고,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라고 하였다.14) 또한 바실레이오스는 그의 『소규칙』에서 수도사들의 이동과 외출에 대한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외출이나 이동이 수도사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가’이다. 『소규칙』 189에서 수도사들의 형제자매들이 집을 방문해주길 원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룬다. 여기서 카이사레아의 감독 바실레이오스는 가족을 방문하는 것이 수도사들의 믿음을 더욱더 견고히 하는 것이라면, 수도원 책임자의 허락을 받고서 가족이나 친지를 방문할 수 있지만, 반대로 믿음이 아니라 단지 인간적인 만족이나 연민에 의한 것이라면 더 이상 쟁기를 잡고서 뒤를 돌아보는 것(눅 9:61-2)이 수도자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6세기 문헌인 『베네딕도 수도규칙』(Regula Benedicti)은 당시의 수도사들이 여행이나 외출을 할 때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베네딕도 수도규칙』에 따르면, 모든 수도사들은 수도원장의 허락아래에서만 나갈 수 있었다. 우선 수도원장의 허락이 나면, 여행을 해야 하는 형제들은 누구든지 수도원을 나서기 전에 반드시 공동체의 기도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공동체는 항상 공동기도 시간에 여행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여 기도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수도사가 수도원을 떠나 있지만, 항상 수도원 형제들과 영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난 이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돌아온 당일 모든 기도시간에 참여하여 기도시간이 끝날 때 마다 공동체에게 기도를 청해서 그들의 기도를 받았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여행에서 돌아온 형제가 여행이나 이동 중에 보고 들으면서 저질렀든 잘못과 죄를 씻어내기 위함이었다.15) 이렇게 고대 수도원에서는 일찍부터 그들의 형제들이 여행이나 이동 중에 세속적인 유혹에 노출될 것을 염려하여 수도원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하지만, 수도사들은 다양한 이유들-가족 방문, 이단자 논박, 망명, 선교, 성지 순례 등등-로 종종 외출하고 이동하였다.16) 특히, 6세기 가자 수도원 문헌인 『바르사누피오스와 가자의 요안네스의 편지』(이하, 『편지』)17)를 보면, 적잖은 여행객들(travelers)과 손님들이 가자(Gaza)에 위치한 세리도스 수도원(monastery of Seridos)을 방문하였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물건을 팔거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세리도스 수도원을 방문하고(『편지』 594-5), 또 어떤 이들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세리도스 수도원을 찾아왔다(『편지』 548). 그런데 이런 편지 글들 가운데 『편지』588번과 589번에서는 떠돌이 수도사들(τοὺς περιάκτας)18)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시 세리도스 수도원의 책임자가 가자의 요안네스에게 떠돌이 수도사들과 관련해서 편지를 보내며, ‘그 떠돌이 수도사들을 자기의 수도원에 맞이하여야 하는지’ 와 ‘만약에 그들이 자기의 수원들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묻는다(『편지』 588-9). 『편지』에 나타난 이런 언급자체가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도 가자 지역에서는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유랑 수도사들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이뿐 아니라, 어떤 수도사들은 당대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강제적으로 이주를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어떤 이집트 수도사들은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인해 그들의 영적인 고향인 스케티스(Scetis)를 떠나야 했고,19) 또 다른 이들은 399년 오리겐 논쟁으로 이집트 사막과 가까운 가자(Gaza)를 비롯한 팔레스티나 지역으로 피신하여야만 했다.20) 또한 7세기 에뎃사의 야고보(James of Edessa)의 기록에 보면, 페르시아 지역에 있었든 주교들과 수도사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페르시아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했다는 보고가 있다.21) 그런데 이들은 아마도 604년의 페르시아의 박해 때문에 이집트로 피난을 간 칼케돈파에 속한 기독교인으로 추정된다.22) 사실, 이와 같이 종교적인 이유로 피난을 떠난 수도사 이야기 할 때, 『이베리아인 페트로스의 생애』(Vita Petri Iberi)23)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페트로스(413/7-491)는 5세기 초에 이베리아의 왕자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그는 수도사의 삶을 위해 다시 한번 더 예루살렘을 거쳐서 가자 지역으로 내려왔다.24)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그가 원하든 대로 수도생활에 집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자에 도착한 때가 약 444년경인데, 얼마 있지 않아서 자기의 뜻과 상관없이 가자와 근거리에 위치한 마이우마스(Maoumas)의 반칼게돈파 사제(445/6년)와 주교(452/3년)로 임명 되었기 때문이다.25) 당시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한 마르키아누스 황제(Marcianus, 392-457)가 칼케돈의 공의회를 지지하는 예루살렘의 유베날리오스(422-451, 452-458)를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직(patriarchate)에 임명하면서,26) 칼케돈 공의회를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팔레스티나를 떠날 것을 명하였다.27) 이 때 페트로스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였다.28) 이뿐 아니라, 그 이후에 그는 다시 한번 더 제논의 헤노티콘(Henotikon, 482)29)에 반대하여 페니키아를 시작하여 아르카(Arca), 오르토시아스(Orthosias), 트리폴리(Tripoli), 베이루트(Beirut), 티로스(Tyros), 카이사레아(Caesareia), 아스돗(Ashdod)을 거쳐서 얌네이아(Iamneia)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여정을 순례하였다(§140-171). 이것을 통해서 볼 때, 페트로스는 그의 인생의 전반기는 자신의 영적인 삶을 위해 자발적인 이동과 이주를 선택했다면, 후반기에는 자신의 신앙과 교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이동과 이주를 택하였다.

 

또 많은 수도사들과 금욕주의자들은 순례(pilgrimage)를 위해 이동하였다. 많은 문헌들이 증명하듯이, 4세기 이후로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티나에 있는 많은 성지들을 순례하였는데, 여기에는 수도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30) 이중에 어떤 이는 프랑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보드로(Bordeaux)에서, 다른 이들은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피아첸차(Piacenza)와 골(Gaul)지방에서,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로마에서 출발해 짧게는 수개월 많게는 20개월이상 여행하여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하였다.31) 이뿐 아니라, 페르시아에 지역에 거주하였든 이들도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참여하였다. 특히, 6세기 후반에 니시비스(Nisibis) 인근에 있는 이즈라 산(Mt. Izla) 수도원을 세운 아브라함(Abraham)은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수도사의 삶에 비유하면서 순례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그를 따르는 많은 이들도 이라크 안에 있는 성지(聖地)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스케티스(Scetis)를 순례하였다.32) 이렇게 동·서방의 많은 수도사들이 순례에 집중하는 이유는, 앞에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그들에게 이동 및 방랑(ξενιτεία)33)은 단지 물리적인 이동 혹은 순회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었다. 이집트 수도사들에게 크세니테이아는 단순히 이리 저리 이동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동은 이 세상과 분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수도사들의 최고의 목표인 평정(ἀπάθεια)에 이를 수 있는 통로였다.34) 반면, 시리아 수도사들에게 이동과 방랑은 머리 둘 곳이 없어서 이리저리 방랑하는 예수의 삶을 본받는 것인 동시에, 그의 겸손함과 자발적인 가난을 따르는 기회였다.35)

 

 

Ⅲ. 고대 후기 수도사들과 기독교 문화교류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대 동지중해 문명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수도사들의 이동과 이주가 있었고, 이런 이동 중 일부는 기독교 문화와 유물들을 타(他)지역으로 전파시키고 확산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고대 후기 수도문헌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수도사들의 이동이 당시의 지중해 문명권에서 기독교 문화를 교류시키는데 일조했는지를 살펴보자.

 

1. 수도원운동의 전파

 

첫째, 수도사들의 이동은 수도원 운동을 주변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통로가 되었다. 5세기부터 팔레스티나의 남부 해안가에 위치한 가자(Gaza) 지역에서 수도주의 운동(monastic movement)이 번성하였다. 유명한 고고학자인 이즈하르 히쉬펠드(Yizhar Hirschfeld)의 연구에 따르면, 4세기부터 7세기까지 가자와 그 주변 지역에 총 19개의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 14개가 5-6세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가자와 그 주변 지역이 120헥타르(ha)인 것을 감안해 볼 때,36) 적지 않은 수의 수도원들이 가자와 그 주변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자 지역에서 번성한 수도원운동도 결국 이집트 스케티스에서 돌아온 힐라이온(Hilarion, 291/2-371)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37)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와 소조메노스에 따르면, 291/2년에 가자에서 태어난 힐라이온은 성장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수사학을 공부하다가 안토니오스를 만나 금욕적인 독수도 생활을 배웠다. 그 후 약 308년에 가자 지역에 돌아왔으나,38) 이미 그의 부모님들은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그리하여 그는 안토니오스에게 배운 대로 그가 가진 재산을 형제들과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가자의 항구인 마이우마스에서 “7마일 떨어진”39)곳에 작은 움막을 짓고서 안토니오스처럼 독수자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 이후 그는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며 가자 지역에 있는 주민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많은 주민들을 회심시켰다.40) 이렇게 스케티스에서 온 수도사 힐라리온 한 사람을 통해 이집트의 수도주의 운동이 가자 지역에도 뿌리를 내리 시작한 것이었다.41)

 

수도사들의 이동을 통한 수도원의 확산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이쇼드나(Isho'dnah)의 『순결의 책』( )에서도 찾을 수 있다. 보통 페르시아 수도원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전통적으로는 4세기의 마르아우긴( )을 페르시아 수도원의 개척자로 언급한다.42) 마르아우긴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이쇼드나에 따르면, 아우긴은 페르시아 출신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이주하여온 수도사였다. 그는 고대 이집트의 도시인 클리스마(Clysma, 오늘날 Tell el-Qulzum) 태생으로 20대 중반에 파코미오스 수도원에 들어서 수도사가 되었다. 비록 그런 그가 어떤 이유로 70여명의 제자들과 더불어 니시비스로 이주하였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니시비스 인근에 있는 이즈라 산(Mt. Izla)에 수도원을 세워서 수도생활을 이어갔다.43) 이쇼드나에 따르면, 결국 그는 이즈라 산 지역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니시비스의 동쪽으로 보내어 티그리스 강 주변까지 수도원들을 건립하게 하였다고 한다.44) 하지만, 이런 마르 아우긴의 일화에 대해 장 피에이(J-M. Fiey)와 에드워드 매튜 주니어(Edward G. Mathews, Jr.)를 비롯한 현대학자들은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 이유는 3가지 인데, 1) 이쇼드나의 『순결의 책』은 사본에 따라 제자들의 인원 수(28명~70명)가 달라질 뿐 아니라, 2) 제자들의 명단 중에 7세기 이후 존재했든 인물들이 등장하는가 하며, 3) 마지막으로 이쇼드나와 비슷한 시기의 역사가인 마르가의 토마스(Thomas of Marga)가 그의 책 『통치자들의 책』(Book of the Governors)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도원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면서 마르 아우긴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45)

 

이런 상황에서 사무엘 H. 마페트(Samuel H. Moffett) 박사는 자료의 제한으로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페르시아의 공주수도원(coenobium)는 약 340년경 시리아 교부인 아프라핫(Aphrahat, 260/275-345년 이후)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을 것 같다고 추론하였다.46)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페르시아 경계에 살았든 아프라핫이 먼저 혼자서 육체적인 금욕과 희생을 통한 개인의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독수도자들(solitaries)에게 더 큰 기독교 사명-즉 전도와 선교-을 함께 감당하길 요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그들이 거주하는 움막들과 동굴들이 세상과 그리스도를 향한 자발적인 선교센터로 탈바꿈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활터전과 사명의 변화는, 마페트에 따르면, 독수도자들(solitaries)의 삶의 형태를 서로간에 느슨하게 함께 수도생활을 하는 라우라(laura)의 형태로, 결국에는 공주수도원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47)

 

이런 마페트의 주장이 일리는 있어 보이지만, 사실 이는 현재의 자료들을 가지고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여기서는 아프라핫과 그의 제자들을 페르시아 공주수도원의 창시자가 아니라, 단지 초창기부터 페르시아 수도주의 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들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프라핫이 생존하였든 4세기 초반부터 이미 시리아에서는 ‘계약의 자녀들(bnay qyama)’, ‘동정녀(bthule)’, ‘구별된 자들(qaddishe)’이라는 시리아 교회의 고유의 금욕주의 운동이 있었는데,48) 이런 것들이 북부 메소포타미아 기독교에서도 발견되었다.49) 여기에 더해, 아프라핫은 수도자인 동시에 교회리더로서, 당시 시리아지역의 목회자들만 아니라 셀루키아-크테시폰(Selucia-Ctesiphon)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교회 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의 『증명』(Demonstrations) XIV을 보면, 그는 페르시아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서 당시 있었든 사푸르 2세(Shapur II)에 대한 박해뿐만 아니라, 교회 목회자로서 행동방식, 선한 목자의 표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야기를 비롯해서 금식, 기도, 성경,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등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평화를 일구는 자들’(peace-maker)로 살아갈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50)

 

2. 기독교 유물(遺物)의 전달 및 확산

 

또한 수도사들은 그들의 이동이나 순례 중에 획득한 기독교 유물이나 문헌들을 전달 및 확산시켰다. 고대 후기 문헌들을 보면, 당시 수도사들이 성지순례를 가고 오는 동안 그들의 손에는 다양한 선물이나 필사본, 혹은 유물들이 들려있었다. 디에츠에 따르면, 7세기 후반부터 많은 영국의 수도사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그 중에서 베네딕트 비스콥(Benedict Biscop)은 여러 번 로마를 방문하는 동안 여러 개의 수도 규칙서들과 필사본들을 가지고 왔다. 그 이후 윌리발드(Willibald)와 그의 형제 윈너발드(Wynnerbald)도 로마에 있는 순교자 무덤과 교황을 방문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였다. 그들이 로마로 갈 때에는 교황에게 줄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가, 귀국할 때 로마에서 획득한 필사본들을 가지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 왔다.51) 만약 이렇게 영국의 로마순례자들이 로마에서 수도규칙서들을 비롯한 다양한 필사본들을 가지고 왔다면, 그것들을 매개로 분명히 로마의 기독교 문화가 영국 수도원들에 조금씩 조금씩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4세기 여행기인 『에게리아의 순례기』(Itinerarium Egeriae)에서도 수도사들이 성지순례 중에 기독교 유물을 획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에게리아의 순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먼저 저자인 에게리아가 여자 수도사인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에게리아의 종교적 신분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안봉환과 채승희는 『에게리아의 순례기』에서 저자 자신의 종교적 신분이나 출신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전제한 뒤, 다만 그가 사용하는 용어들-‘부인’(domina)과 ‘자매’(soror)-를 바탕으로 아마도 신앙심이 깊고 많은 재산을 소유한 귀부인 혹은 평신도로 추정하였다.52) 여기에 더해, 하기스 시반(Hagith Sivan)도 『에게리아의 순례기』의 저자가 어떤 수도원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 단지 거룩한 그룹의 멤버인 평신도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다음의 3가지를 제시하였다.53) 첫째는 그녀의 오랜 여행기간이다. 『에게리아의 순례기』를 보면, 그녀는 최소한 3년이상 집을 떠나 여행하였다. 당시 수도사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서양 성지순례자들은 성지(聖地)에 정착할 의도가 아닌 이상, 보통 수개월 (많아도 1년)이상의 순례를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뿐 아니라, 그녀는 그렇게 오래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 중에 재정에 구애를 받지 않고 여유롭게 순례를 하였다. 둘째, 그녀의 여유 있는 순례일정이다. 순례기에 나타난 에게리아의 모습은 서두르거나 빡빡한 일정으로 여행하기 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하고, 성지 순례 이후에도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이 없다. 이런 모습은 수도원에 소속되어 있는 자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마지막으로는, 그녀가 스스로 자신이 속한 수도원이나 자신을 ‘수도자’로 언급하는 부분이 없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안봉환, 채승희, 시반은 에게리아가 거룩한 평신도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에게리아의 종교적 배경을 논의하면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시작된 공주수도원이 서방에 소개되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4세기 중반이라,54) 에게리아가 순례의 여정을 출발했을 때(약381년경)는 다양한 형태의 수도원들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마릴린 던(Marilyn Dunn)에 따르면, 4-5세기 로마를 비롯한 서양세계에서 수도사들이 파코미우스 수도원 같은 공주수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지만, 더 많은 이들은 “하우스(혹은 빌라)-수도원”(houseor villa-monasteries)에서 소수 인원으로 수도생활을 하였고, (이보다는 드문 경우이지만) 또 어떤 이들은 바실리카(Basilica)에서 예전을 도우며 수도생활을 하였고, 또 다른 이들은 혼자 거주하는 수도생활을 이어갔다.55) 이런 이유로 최화선은 에게리아의 종교적인 배경을 이해할 때, “특정한 형식과 규율을 갖춘 후대의 회수도회 형식”의 입장에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56) 여기서 우리는 에게리아를 당시의 많은 수도사들처럼 가정 혹은 작은 공동체에 모여 함께 수도생활을 하였든 일원 중에 한 명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57)

 

이렇게 수도생활을 하였든 에게리아는 381년부터 384년까지 3년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변일대를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에게리아의 순례기』 19장에 그녀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서 시리아의 에뎃사에 도착했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에게리아가 에뎃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주교는 에게리아를 에뎃사의 아브가르 임금(Abgar Ukamma)의 궁전으로 인도하여 아브가르 임금의 초상을 보여준 후, 그 왕이 예수에게 편지를 보낸 것과 예수가 아브가르 임금에게 답장을 보낸 사실을 알려주었다(19.5-19.8). 그 이후 주교는 에게리아에게 아브가르 왕이 예수가 보낸 그 답장으로 에뎃사를 공격한 페르시아 군대까지도 물리친 이야기도 해주었다(19.9-19.13). 이 모든 일이 있은 후 그 주교는 에게리아에게 아브가르 왕이 예수와 주고 받은 서신의 필사본을 선물로 주었다. 당시의 상황을 에게리아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내가 기뻤던 것은… 아브가르 임금이 주님께 보낸 편지와 주님께서 아브가르 임금에게 보내신 편지의 필사본을 그 거룩한 주교님한테 선물로 받은 일입니다. 고향에 그 사본이 있지만 주교님한테 직접 그 편지들을 선물받은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고향에 있는 사본은 불완전한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거기에서 받은 사본은 분명 그 보다 더 긴 사본이었기 때문입니다.”58)

 

여기서 우리는 에게리아가 예루살렘을 순례하기 이전에 이미 에게리아 고향에는 시리아 기독교 전통에서 등장하는 아브가르 임금과 예수 사이에 서신을 교환한 내용이 서방으로 전해져 라틴어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얀 윌럼 드라이퍼스(Jan Willem Drijvers)는 5세기 초(402-3)에 아퀼레이아의 루피누스(Rufinus Aquileiensis)가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교회사』 안에 있었든 예수와 아브가르 임금의 서신교환내용도 번역하였고, 그것이 에게리아 고향에까지 갔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59) 하지만 안봉환이 지적하듯이, 만약 에게리아가 그녀의 순례기를 384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록했다고 가정한다면,60) 에게리아 고향에 있었든 그 아브가르 임금의 편지는 루피누스가 번역한 라틴어 사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존재했든 다른 필사본이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에게리아는 에뎃사의 주교로부터 아브가르왕과 예수의 서신 필사본을 받은 후,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킬리키아(Cilicia)를 거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여행했다. 그때 그녀는 아마도 에뎃사에서 받은 그 귀한 필사본을 함께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황실 역사가로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였든 카이사레아의 프로코피오스(Procopios)의 『전쟁사』(History of the Wars) 2권에도 아브가르 임금과 예수의 서신 교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61) 여기서 이미 6세기에 아브가르 임금과 예수의 서신교환 이야기가 콘스탄티노플에도 펴져 있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프로코피오스가 어디서 아브가르 임금 편지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코피오스가 『전쟁사』에서 활용한 아브가르 편지에 대한 기원을 논할 때, 에게리아가 콘스탄티노플에 가져간 그 필사본을 논의의 선택지에서 배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3. ‘다른 세계’에 대한 정보 전달

 

마지막으로, 수도사들이 이동이나 순례를 하면서 여행 중에 보고 들은 여행지에 관한 지식과 경험을 여행기(旅行記)로 남기는데, 이런 여행기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다른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교부학자 드롭너 따르면, 4세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순례기를 남기는데, 그 주된 목적은 두 가지이다. 그 첫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알려주기 위함이고, 둘째는 이후에 혼자 순례를 떠나려는 이들에게 순례기를 남겨주기 위함이었다.62) 이런 관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에게리아의 순례기』를 다시 한번 더 보자. 『에게리아의 순례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1-23장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순례 보고서이고, 24장이후는 예루살렘교회의 기도시간, 주일 예배, 사순절과 부활절, 세례교육 등에 대한 기록물이다. 이 모든 것이 고향에서 함께 수도생활을 하였든 자매들에게 성지(聖地)에 대한 정보와 예루살렘 기독교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반대로 에게리아로부터 소식을 받는 입장에서는, 에게리아가 보내어준 순례기를 통해서 ‘다른 세계’를 듣고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살펴보아 할 또 다른 여행기가 있는데, 그것은 6세기에 중엽에 코스마스라고 불리는 수도사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록한 『기독교 지형학』(Χριστιανικὴ Τοπογραφία)이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한 이유는 프톨레마이오스(Πτολεμαῖος)의 『지리학』(Γεωγραφικὴ Ὑφἠγησις)에서 말하듯이 지구는 둥근 모양이 아니라, 모세의 성막(tabernacle)같은 직사각형임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63)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젊어서 해상무역을 하면서 여행하였든 홍해, 걸프만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인도와 타프로바네(현재, 스리랑카)까지의 여행기를 기록하였다.64) 그리고 그는 여기서는 당시 로마제국의 동쪽 지역의 환경과 지리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문화의 특성들과 각 지역에 전해진 기독교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런 코스마스의 우주관은 세비야의 이시도루스(Isidorus)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포티오스(Photios)같은 동·서방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수용되지 못했다.65) 하지만, 이것이 곧 코스마스의 『기독교 지형학』이 이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코스마스의 저작은, 스코트 존슨(Scott F. Johnson)의 말처럼, 중세시대에 비잔티움 세계뿐 아니라 서방 세계의 많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비잔티움 세계에서 『기독교 지형학』은 중세시대 동안 중요한 성경 필사본들과 더불어 다른 필사본들을 채색하고 장식하기 위한 본보기가 되는 (아마도 6세기) 채색 필사본들(illuminated manuscripts)안에 보전되어 있었다, 서방세계에서는 코스마스의 저작물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8세기에 캔터베리의 대주교좌(the Archbishop of Canteburry)의 도서관에서 소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66)

 

사실, 우리는 코스마스의 『기독교 지형학』가 이후 중세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저술된 책이 바다를 건너 서유럽세계까지 펴져서 서유럽 인들에게 동로마의 제국에 대한 소식과 정보를 널리 제공하는 역할을 감당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Ⅳ. 나가는 말

 

이제까지 우리는 고대 후기 이집트, 팔레스타인 및 시리아 지역에 있었든 수도사들의 이동에 대한 흔적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먼저 4-6세기 문헌을 중심으로 당시 수도규칙들과 제국교회에서 강력하게 수도사들의 불필요한 방랑과 이동을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유와 목적으로 이동하고 이주를 하는 수도사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사회 · 교회정치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이동과 이주가 가져다주는 더 큰 종교적, 신앙적 유익들 때문이었든 것 같다. 이런 수도사들의 장단거리 이동과 순례는 (그들이 의도하든 하지 않든 간에) 동(東)지중해에서 수도주의 운동을 전파하며, 중요한 기독교 유물이나 필사본들을 주변 지역으로 전달하여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또한 그들이 여행 중에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여행기(旅行記)는 당대와 이후 세대에게 ‘다른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후기 수도사들이 당대의 수도원과 교회 문화를 전파하고 유통시킴으로 고대 기독교 문화교류에 일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고대 혹은 중세의 수도사들이 수도원담장 안에만 머물러 조용히 개인적인 영적 유익을 추구하는 수동적인 자세에만 머물러 있었든 것이 아니라, 수도원 담장을 벗어나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세상과 교류하는 존재들이 었음을 알려준다.

 

본 글은 고대 후기 동지중해 수도사들과 기독교 문화교류에 한정해서 다루었다. 이후 연구에서는 기독교 문화에만 제한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폭 넓게 수도사들의 순례와 이동이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문명 교류에 어떤 그리고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를 연구할 것이 요청된다.

 

 

참고문헌


1. 1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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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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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선.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 순례에 관한 연구: 4~6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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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 이후 고대 후기 혹은 중세초기 수도사들의 이동에 대한 대표적인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Daniel Caner, Wandering, Begging Monks: Spiritual Authority and the Promotion of Monasticism in Late Antiquit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Maribel Dietz, Wandering Monks, Virgins, and Pilgrims: Ascetic Travel in the Mediterranean World, 300-800 (Pennsylvani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05); Brouria Bitton-Ashkelony, Encountering the Sacred: The Debate on Christian Philgrimage in Late Antiquity (Berk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pp.140-83; Brouria Bitton-Ashkelony, 「From Sacred Travel to Monastic Career: The Evidence of Late Antique Syriac Hagiography」, Adamantinus 16, 2010, pp.353-70; Mariel Dietz, 「Itinerant Spirituality and the Late Antique Origins of Christian Pilgrimage」, in Travel, Communication and Geography in Late Antiquity: Sacred and Profane, eds. Linda Ellis and Frank Kidner(London: Routledge, 2016), pp.125-34; Jan Willem Drijvers, 「Travel and Pilgrimage Literature」, in A Companion to Late Antique Literature, eds. S. McGill and E. J. Watts (Hoboken, NJ: Willey-Blackwell, 2018), pp.359-72; Li Tang, 「Monastic Movement as a Driving Force in Syriac Christian Missions along the Ancient Silk Road」, in Make Disciples of All Nation, eds. Loren T. Stuckenbruck, Beth Langstaff and Michael Tilly (Tübingen: Mohr Siebeak, 2019), pp.189-98. 국내 자료는 다음을 참고하라. 최화선, 「고대 후기그리스도교 순례에 관한 연구 : 4~6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2005, 최화선, 「<에게리아의 여행기>를 통해 본 여성 순례와 수도생활의 관계」, 『교회사연구』 27집, 2006, 143-71쪽; 채승희, 「에게리아의 인물연구 - 출생지, 사회적 지위, 종교적 배경」, 『신학과 목회』 52, 2019, 57-81쪽; 이은선, 「코스마스 『기독교 지형학』에 나타난 동서 문명 교류에 대한 이해」, 『한국교회사학회지』 54, 2019, 313-353쪽.

 

2) Caner, Wandering, Begging Monks.

 

3) Caner, Wandering, Begging Monks, pp.32-5, 159. 고대 후기 방랑수도사 (wandering monks)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Hyung Guen Choi, Between Ideals and Reality: Charity and the Letters of Barsanuphius and John of Gaza (Sydney: SCD Press, 2020), pp.165-71를 참고하라.

 

4) Caner, Wandering, Begging Monks, pp.14, 50-82.

 

5) Caner, Wandering, Begging Monks, pp.41-8, 88-9, 95-6.

 

6) Caner, Wandering, Begging Monks, chapter 6. 이것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사항은 다음을 참고하라. Richard Price and Michael Gaddis, 「Introduction」 in The Acts of the Council of Chalcedon, Vol.1, reprint (Liverpool: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7), p.48.

 

7) Dietz, Wandering Monks, Virgins, and Pilgrims, p.7에서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I distinguish monastic travel from pilgrimage?that is to say, goal-centered, religious travel for an efficacious purpose.”

 

8) Dietz, Wandering Monks, Virgins, and Pilgrims, pp.69-105.

 

9) Dietz, Wandering Monks, Virgins, and Pilgrims, pp.155-88.

 

10) Dietz, Wandering Monks, Virgins, and Pilgrims, pp.166-7.

 

11) Dietz, Wandering Monks, Virgins, and Pilgrims, pp.180, 183.

 

12) Pachomius, 「Precepts」 in Pachomian Koininia, Vol. 2, trans. Armand Veilleux (Kalamazoo, Cistercian Publications, 1981), 파코미우스 수도원 운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남성현, 『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사, 파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엠-에드, 2006).

 

13) Shenoute, Canons of Our Fathers: Monastic Rules of Shenoute, trans. Bentley Layt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14) Basil, Rule of St. Basil in Latin and English: A Revised Critical Edition, trans. Anna M. Silvas tr.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2013).

 

15) 『베네딕도 수도규칙』, 허성석 역 (왜관: 분도출판사, 2011), 67장.

 

16) 다음을 참고하라. Dietz, Wandering Monks, Virgins, and Pilgrims, pp.24-35.

 

17) 바르사누피오스와 가자의 요안네스, 그리고 그들의 편지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Choi, Between Ideals and Reality, pp.84-97.

 

18) Barsanuphus and John of Gaza, François Neyt, Paula de Angelis-Noah, and Lucien Regnault ed. and tr. Barsanuphe et Jean de Gaza: Correspondance, Sources Chrétiennes 451 (Paris: Éditions du Cerf, 2001), lettre 588.

 

19) Derwas J. Chitty, The Desert A City: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Egyptian and Palestinian Monasticism under the Christian Empire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99), pp.143-44.

 

20) 루시앵 레뇨, 『사막교부는 이렇게 살았다』(왜관: 분도출판사, 2006), 232-33쪽.

 

21) James of Edessa, 「Fragments of Charts of James of Edessa」, in The Seventh Century in the WestSyrian Chronicles, trans. Andrew Palmer (Liverpool: Liverpool University Press, 1993), p.38

 

22)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Panagiotis Thedoropoulos, 「The Migration of Syrians and Palestinian Populations in the 7th Century: Movement of Individuals and Groups in the Mediterranean」, in Migration Histories of the Medieval Afroeurasian Transition Zone, eds. Johnnes Preiser-Kapeller, Lucian Reinfandt and Yannis Stouraitis (Leiden and Boston: Brill, 2020), pp.262-3.

 

23) John Rufus, John Rufus: The Lives of Peter the Iberian, Theodosius of Jerusalem, and the Monk Romanus, intro. & trans. Cornelia Horn and Robert Phenix Jr (Leiden: Brill, 2008).

 

24) Horn and Phenix, 「Introduction」 in John Rufus: The Lives of Peter the Iberian, pp.lxxxvii.

 

25) Horn and Phenix, pp.lxxxvii-iii.

 

26) Horn and Phenix, pp.xlviii.

 

27) Rufus, John Rufus: The Lives of Peter the Iberian, 81.

 

28) Rufus, John Rufus: The Lives of Peter the Iberian, 82.

 

29) 제노의 헤노티콘(Henotikon, 482)에 대해서는 Robert Phenix and Cornelia Horn, The Chronicle of Psedo-Zachariah Rhetor (Liverpool: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11), p.198 n.121를 참고하라.

 

30) 다음을 참고하라. Jerusalem Pilgrims Before the Crusades, intro. & trans. John Wilkinson (Oxford: Aris & Philips, 2015). Egérie, Journal de Voyage, ed. & trans. Pierre Maraval, SC 296 (Le Cerf, 1983). 한글로 번역은 안봉환, 『에게리아의 순례기』 (왜관: 분도출판사, 2019).

 

31) Wilkinson, 「Introduction」 in Jerusalem Pilgrims Before the Crusades, p.35.

 

32) Philip Wood, The Chronicle of Seert: Christian Historical Imagination in Late Antique Iraq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p.153.

 

33) 크세니테이아(ξενιτεία)의 문자적 의미는 ‘방랑’, ‘망명’ or ‘외국땅으로 여행’을 의미한다. Geoffrey W.H Lampe, A Patristic Greek Lexicon (Oxford: The Clarendon Press, 1961), pp.931-32, s.v. ξενιτεία.

 

34) Bitton-Ashkelony, Encountering the Sacred, p.152.

 

35) Arther Vööbus, History of Asceticism in the Syrian Orient Ⅱ, CSCO 196 (Louvain, 1960), p.269-71.

 

36) Magen Broshi, 「The Population of Western Palestine in the Roman-Byzantine Period」,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s Research 236, 1979, p.5.

 

37) 힐라리온(St. Hilarion)의 일생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Choi, Between Ideals and Reality, pp.72-75.

 

38) John Binns, Ascetics and Ambassadors of Christ: The Monasteries of Palestine 314-631 (Oxford: Clarendon Press, 1996), pp.154-55.

 

39) Jerome, Life of Hilarion, 3 in Early Christian Lives, ed. and trans. Carolinne White (Penguin Books, 1998).

 

40) Jerome, Life of Hilarion, 13-24.

 

41) 좀 더 자세한 4-5세기 가자 수도원운동과 이집트 수도원운동사이의 관계성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Choi, Between Ideals and Reality, pp.72-84.

 

42) 다음을 참고하라. Ian Gillman and Hans-Joachim Klimkeit, Christians in Asia before 1500 (Richmond, Surrey, Curzon, 1999), p.148; Samuel Moffet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Vol. 1(New York: Orbis Books, 2006), p.123; Philip Jenkins, The Lost History of Christianity: The Thousand-Year Golden Age of the Church in the Middle East, Africa, and Asia-and How It died (HarperCollins e-books, 2008), p.72.

 

43) Isho'dnah, Le livre de la Chasteté, ed. & trans. J-B. Chabot (Rome, 1896), 1.

 

44) Isho'dnah, Le livre de la Chasteté, 1-2. J-M Fiey, Saints Syriaques (Princeton: Darwin Press, 2004), pp.40-41.

 

45) Fiey, Saints Syriaques, pp.40-41; Edward G. Mathews, Jr., 「Awgen, Mar」, in Gorgias Encyclopedic Dictionary of the Syriac Heritage: Electronic Edition, edited by Sebastian P. Brock, Aaron M. Butts, George A. Kiraz and Lucas Van Rompay (Gorgias Press, 2011; online ed. Beth Mardutho, 2018), https://gedsh.bethmardutho.org/Awgen-Mar.

 

46) Moffet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Vol. 1, p.124.

 

47) Moffet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Vol. 1, p.124.

 

48) Sebastian P. Brock, A Brief Outline of Syriac Literature (Kerala: St. Ephrem Ecumenical Research Institute, 2008), p.15.

 

49) Moffet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Vol. 1, p.126.

 

50) Aphrahat, Demonstrations II, trans. Kuriakose Valavanolickal (Kerala: St. Ephrem Ecumenical Research Institute, 2005), XIV.

 

51) Dietz, Wandering Monks, Virgins, and Pilgrims, pp.210-211

 

52) 안봉환, 『에게리아의 순례기』, 134쪽; 채승희, 「에게리아의 인물연구-출생지, 사회적 지위, 종교적 배경」, 67-70쪽.

 

53) Hagith Sivan, 「Who was Egeria?” Piety and Pilgrimage in the Age of Gratian」, Harvard Theological Review 81-1 (1988), pp.70-1.

 

54) 마릴린 던(Marilyn Dunn)은 서양에서 공주수도원이 시작을 AD 340년까지 추측한다. Marilyn Dunn, 「Asceticism and Monasticism, II: Western」, Cambridge History of Christianity, Vol. 2, eds. Augustine Casiday and Frederick Norris (2008), p.669, p.676.

 

55) Dunn, 「Asceticism and Monasticism, II: Western」, pp.676-78.

 

56) 최화선, 「<에게리아의 여행기>를 통해 본 여성 순례와 수도생활의 관계」, 152-3쪽.

 

57) 최화선도 소아시아의 마크리나(Macrina)와 히에로니무스의 편지에 나오는 “각자의 가정에 머물러 따로 살면서도 일종의 느슨한 공동체를 형성하며 수도자의 삶을”사는 이들을 언급하면서, “에게리아를 ‘수도자’가 아니라고 분류”할 것이 아니라, 아직 공식화 되지 않은 수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일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화선, 「<에게리아의 여행기>를 통해 본 여성 순례와 수도생활의 관계」, 152-53쪽.

 

58) 『에게리아의 순례기』, 19.19.

 

59) Jan. W Drijvers, 「The Abgar Legend」, in New Testament Apocrypha, ed. W. Schneemelcher, trans. R. McL. Wils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1), p.493.

 

60) 『에게리아의 순례기』, 135쪽.

 

61) Procopius, History of Wars, Loeb Classical Library 48, trans. H.B. Dewing (Harvard University Press, 1962), II.12.24-26. 이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하라. J. Gregory Given, 「Utility and Variance in Late Antique Witnesses to the Abgar-Jesus Correspondence", Archiv für Religionsgeschichte, Vol.17:1, 2016, pp.198-201.

 

62) 드롭너, 『교부학』 (왜관: 분도출판사, 201), 510-11쪽.

 

63) 코스마스의 『기독교 지형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이은선, 「코스마스 『기독교 지형학』에 나타난 동서 문명 교류에 대한 이해」, 313-353쪽; Maja Kominko, The World of Kosmas: Illustrated Byzantine Codices of the Christian Topograph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pp.13-16.

 

64) 이은선, 「코스마스 『기독교 지형학』에 나타난 동서 문명 교류에 대한 이해」, 314쪽.

 

65) David Lindberg, The Beginnings of Western Science, 600 B.C. to A.D. 1450, 2n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8), p.161; 이은선, 「코스마스 『기독교 지형학』에 나타난 동서 문명 교류에 대한 이해」, 314쪽 각주2.

 

66) Scott Fitzerald Johnson, Literary Territories: Cartographical Thinking in Late Antiqu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p.14. 존슨은 같은 책 58쪽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자 도서관에서 『기독교 지형학』의 사본을 “거의 확실히(almost certainly)”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다.

 

* 이 논문 또는 저서는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HK+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9S1A6A3A03058791).

 

[학술지 교회사학 vol 18, 2021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최형근(안양대 HK+연구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92981&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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