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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고해성사 = 냉담성사, 고행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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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8-21 ㅣ No.122

고해성사 = 냉담성사·고행성사?


고해성사의 은총 제대로 알려야

 

 

가톨릭신문사가 지난해 창간 80주년을 맞아 조사 발표한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은 고해성사가 얼마나 신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 조사에서 냉담을 풀고 다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응답한 신자는 전체 쉬는 신자의 86%. 이들에게 교회에 어떤 사목적 도움을 바라느냐고 물었다. 제 1 순위가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 경감’(33.9%)이었다. 면담(18.8%), 신앙교육기회제공(13.5%), 후견인 연결(5.2%), 교무금 탕감(4.7%), 가정방문(2.6%), 경제적 지원(1.0%) 등은 고해성사 다음의 문제였다.

 

지난해 수원교구 복음화국의 「쉬는 교우 대상 설문분석 결과 보고서」에서도 ‘고해성사=냉담성사’‘고해성사=고행성사’의 아픈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쉬는 신자 전체 응답자의 25.3%가 냉담의 첫 원인으로 ‘고해성사’를 꼽았다. ‘전례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거나 복잡하고 싫증나서’(9.8%), ‘본당에서 활동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7.9%), ‘교무금 헌금 신축기금 등 돈 문제 때문에’(6.5%) 등의 응답은 고해성사의 절반에도 마치지 못했다.

 

쉬는 신자 스스로가 고해성사가 냉담의 원인이자 동시에 신앙 생활 재개의 걸림돌이라고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해성사 문제만 해결하면 쉬는 신자 문제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관련 인천 성 안드레아 피정의 집 김태건 원장 신부는 “그동안 교회는 쉬는 신자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를 놓친 경향이 없지 않다”며 “이제는 고해성사를 어떻게 쉬는 신자들에게 접근 시킬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수원교구 복음화국 「쉬는 교우 대상 설문분석 결과 보고서」는 “고해성사가 두려움 혹은 강요가 아닌 기쁨의 성사로 체감되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통합사목연구소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도 “쉬는 신자들이 고해성사 등이 큰 부담이 되고 있는 만큼 사제들이 직접 쉬는 신자를 찾아 나서 면담하는 등 사목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15년 냉담을 최근 풀고 신앙생활에 나선 이진선(마리안나.45)씨는 “우연한 기회에 사제를 한 사석에서 알게 됐고, 그 일주일 후에 고해성사를 받고 냉담을 풀게 됐다”고 말했다.

 

고해성사의 중계자가 사제인 만큼 사제의 노력에 따라서 고해성사가 은총성사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고해성사에 대한 사제의 책임 부분에 대한 언급도 최근 늘고 있다. 샤를 앙드레 베르나르(Charles Andre Bernard, 1923~2001) 신부는 자신의 저서 「영성신학」(Teologia Spirituale)에서 “사제는 고해성사를 위해 상당한 심리학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며 “제대로 된 영적 권고를 줄 수 있으려면 고백한 어려움 밑에 깔린 더 깊은 다른 요소들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베르나르 신부는 더 나아가 “고해성사의 본질적인 목표는 영혼들을 죄의 세계에서 더 큰 해방으로 이끌어 내고, 거기에서 진정한 영적 진보에로 이끄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해성사 문제는 신자가 아닌 사제 차원에서 먼저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밖에 고해성사 자체의 무게와 비중이 경시되는 풍조도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공동참회 예절 등 고해성사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몇몇 시도들이 오히려 신자들의 죄의식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태건 신부는 “죄를 지어도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신자들이 최근 늘고 있다”며 “고해성사에 부담을 덜어주는 사목적 노력 못지 않게 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심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은총의 고해성사가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그릇된 신앙생활의 빌미를 제공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외줄타는 광대처럼, 고해성사가 위태로워 보이는 이유다.

 

분명한 것은 고해성사의 풍요로운 은총을 만끽하고, 그 은혜로 신앙생활의 격조를 한 차원 높이는 신앙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공지영(마리아) 씨는 자신의 책 「수도원 기행」에서 18년 만의 고해성사 체험을 이렇게 적었다. “‘고백한지 18년 만입니다’ 하는데 맙소사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뜨겁고 힘차게 펑펑 나오는 것이다. 그 고해실에 무슨 이상한 요술 스프레이를 뿌려 놓은 것처럼…, 너무 울어서 고해성사가 진행이 안될 정도였다. 젊은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참 어려운 길 오셨습니다. 18년 만이라고 하셨습니까. 축하드립니다. 여기까지 오는 발걸음으로 이미 당신은 죄 사함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18년 동안 걸어온 길이 멀고 고단한 길임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선조 가상편지 통해 본 고해성사의 은총 · 의미


“언제든 성사 볼 수 있는 여러분들이 부럽네요”

 

 

초대교회보다 더 많은 자유와 풍족함, 여유가 허락되는 2008년. 우리는 수많은 유혹 속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고해성사를 성실히 이행하며 죄를 뉘우치고 있을까. 오늘, 1836년 당시의 신앙선조를 이곳에 초대한다. 신앙선조의 편지는 초기교회의 고해성사 자료 등을 찾아 가상으로 꾸몄다.

 

나는 조선의 한 교우입니다. 이번에 모방 신부님이 조선을 찾아오셨는데 아니, 아직 조선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신대요. 그런데 12군데의 마을에서 자신들을 방문해 고해를 들어달라고 재촉했다지 뭐랍니까.

 

사람들은 고해를 하고 성체를 영하기도 전에 자신들이 먼저 죽거나 신부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어떻게 할까 두려워하는 모양이에요.

 

교우들 중 중국글자를 알아 제법 트인 사람들은 고해 내용을 중국글자로 적어 성사를 봅니다. 저희 같이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부러울 수밖에요. 그래도 오늘은 통역을 해주시는 분이 있어 가까스로 고해를 청할 수 있었으니 천만 다행이지 뭐에요.

 

모방 신부님은 이런 저희를 위해 ‘부활절 후에는 성찰규식을 중국어로 완성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멀리서 오신 신부님이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저희의 고해를 알아들으실 수 있다는 사실이 한량없이 기쁘기만 하지요.

 

앵베르 주교님도 저희로 인해 늘 과로에 시달리세요. 새벽 2시반에 일어나 정오까지 성세나 견진을 주시고 미사성제, 감사의 기도 등을 드리시니 몸이 남아나시겠어요. 해뜨기 전에 성사를 받은 교우 20여명이 돌아가면, 낮 동안에도 꼭 그만한 숫자가 하나씩 들어와 고해성사를 받아요. 그분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다 이튿날 새벽 성체를 영한 다음에야 일어나 나가곤 한답니다.

 

덕분에 주교님은 매번 배가 고프시데요. 2시반에 일어나셔서 정오까지 기다려야 맛도 없고 영양도 없는 식사를 하시니 추운 조선에서 견디시기가 오죽 어렵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인 1786년쯤엔 선교사들이 없어 평신도가 성직자를 대신하는 가성직제도가 있었대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 편하게 고해성사를 보는 거지요. 그때 천주님을 믿었던 조선여성들은 중한 죄에 따라서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기도 했대요. 얼마나 죄를 용서받고 싶었으면 그랬을까요. 지체 있는 부인들도 간절히 졸라 고해를 하고 매를 맞았다니 숙연해질 수밖에 없네요.

 

다블뤼 주교님은 “젖먹이가 딸린 여인들이며 노인, 처녀들이 혹심한 추위를 마다않고 눈 덮인 산을 3일, 6일, 8일 동안 걸어서 고해성사를 하러 왔다”고 하셨어요.

 

“발이 붓고 벗어지고 피가 나고 했지만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내 발 아래 엎디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양심의 평화를 도로 찾고는 기쁜 마음으로 머나면 길을 다시 떠났지….”

 

천주님은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겐 상을 주시고 죄인은 지옥에 데려가신다고 하지요? 지옥은 훨훨 타오르는 불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는 아주 무서운 장소라면서요. 지은 죄가 너무나 많아 빨리 고해성사를 드려야겠어요. 가르쳐주신 십계도 완전히 지키지 못했으니 말이에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한국 가톨릭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언제든지 원하면 고해를 할 수 있나요? 정말 그렇다면, 그보다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네요. - 1836년 조선의 한 교우가

 

 

취재후기

 

 

명동성당 지하성당에 앉았다. 조용하다. 10여명이 고해성사를 준비하고 있다.

 

사람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내고(성찰), 알아낸 것을 뉘우치고(통회),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정개), 알아낸 죄를 겸손되이 숨김없이 고백하고(고백), 죄의 사함을 위해 사제가 일러주는 보속을 한다(보속).

 

고해를 준비하는 사람만큼 행복한 이들이 또 있을까. 하느님 앞에 나와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서 풀려나는 해방감은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이 고해성사 은총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고해성사가 이토록 많은 신자들에게 짐이 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취재를 하는 동안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고백글 들을 탐색하면서, 각종 통계 자료를 뒤적이면서 고해성사가 고행성사, 냉담성사가 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성사가 오히려 구원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현실이 당혹스럽게 다가왔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두려워 하고 어려워 하느냐’고 단순히 윽박지를 문제는 아닐 듯 했다. 결단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취재 기간에 만난 쉬는 신자들은 한결같이 “고해성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고해성사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배려는 쉬는 신자에 대한 사제의 따뜻한 관심, 면담 형식의 고해성사, 쉬는 신자에게 다시 복음을 전하겠다는 끊임없는 노력 등이다.

 

성사는 성소처럼 우리 스스로 가꿔가고, 키워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조용하다. 더위를 막기 위해 켜 놓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작은 성당 안에 가득하다. 그 침묵 공간 속에 고해성사의 풍요로운 은총을 찾는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8년 8월 17일, 우광호 ·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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