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강론자료

5월 6일(목)-부활 4 주간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4-05-06 ㅣ No.648

부활 제 4 주간 목요일

 

        사도 13,13-25         요한 13,16-20

    2004. 5. 6. 퇴계원.  

주제 : 우리 삶을 돌아봄

 

우리 신앙인들은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예절을 거행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일에 동감하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미사를 거행하기에 합당한 자세를 준비하느라고 미사를 시작하는 때에 ‘가슴을 치며 세상 많은 일의 탓은 나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속으로도 진정 그렇게 하는지는 따로 판단할 일입니다.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유쾌하게 여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애초부터 약한 존재이기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는 자세가 맘에 들 수도 있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것이 사실인데, 오늘 독서에 나오는 것처럼, 다른 누군가가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내가 흘려보낸 시간의 지난 모습에서 내가 살펴보지 못한 부분을 알려주며 그것을 살펴보라고 권한다면 그것 역시도 유쾌하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대인 회당’에 들어갔던 바울로는 유대인들에게 과거의 역사를 말합니다.  조상들이기는 합니다만, 사람들이 한 일이라고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려고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과거의 이야기는 오늘 말씀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고 내일 독서의 내용에도 이어집니다만, 그 소리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삶의 길이가 길지 않은 탓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는 세상의 다양한 면을 인정하거나 확인하고 공정하게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 말대로 완벽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만들어내는 결과 역시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옛것을 연구해 새 지식이나 견해를 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를 기초로 하지 않는 생활은 없고, 기초가 없이 건물이 설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새롭게 기초를 놓거나 부시겠지만 그것이 아닌 경우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인 신앙의 처음 자세도 과거의 것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과거의 것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현실의 삶이 달라진다고 할 것입니다.



46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