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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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서울대교구 생명의 길: 순교에 이른 십자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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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17 ㅣ No.1510

[신앙의 땅] 서울대교구 생명의 길


“순교에 이른 십자가의 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분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인 ‘생명의 길’을 걸으며, 1년 전 8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복식 때 하신 말씀을 되새기며 나의 승리를 위해 순교자들의 ‘십자가 길’을 밟는다.

지난해 복자가 된 주문모신부, 강완숙 등이 신앙생활을 한 북촌의 중심 가회동성당에서 순례를 시작하여 석정보름 우물과 표지석만 남아있는 의금부, 전옥서, 우포도청, 경기감영을 지나 서소문성지 및 약현성당에서 마감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에서 헌법재판소를 지나 재동초등학교삼거리, 돈미약국을 지나 ‘가회동성당’에 이른다. 최근 새로 지어진 가회동성당은 북촌과 어울리게 한옥의 행랑채와 양옥의 성전이 조화를 이룬다. 이곳은 주문모 신부에 의해 1795년 4월5일 부활대축일 미사가 우리나라 최초로 봉헌된 곳이며, 집주인 최인길 마티아와 강완숙 골롬바,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등이 신앙생활한 곳이다.

주문보 야고보 신부님은 석정보름 우물물로 예비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명도회 회장, 강완숙 골롬바를 여회장으로 선임하여 적극적인 선교와 성사집행을 했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1795년 6월 27일 포졸들이 닥쳤다. 그때 집주인이었던 역관 최인길이 신부님 행세를 하며 잡혀가고, 야고보 신부님을 모셔온 윤유일, 지황 등도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과 곤장으로 순교하셨다. 야고보 신부님은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한 후 6년 동안 이 집을 거점으로 경기도 여주, 충청도 온양, 공주와 전라도 전주 등을 돌며 열심히 전교하셨다. 그러나 신부를 찾기 위해 신자들을 잡아가 고통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중국으로 피신하려고 국경근처까지 갔으나 두고 온 양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당신이 짊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의금부로 가서 천주교 신부임을 밝히고 문초를 받은 후 새남터 형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난 3월12일 바티칸을 정기 방문한 한국주교단에게 교황님께서 “한국 교회는 평신도로부터 시작됐고, 사제들은 한국 교회에 맨 마지막에 도착한 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사제는 겸손한 자세로 평신도와 교회에 봉사할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석정보름 우물물로 예비자들에게 세례 줘

가회동성당에서 동쪽으로 한 블록 들어가면 중앙고 정문으로 가는 계동길에 석정보름 우물이 있다. 이 우물에 ‘보름’이라고 붙은 것은 조선시대 한 여인이 양반댁 도령을 사모하다 여기에 투신한 뒤 물이 보름은 맑고 보름은 탁해진 때문이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주 야고보 신부님에 이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이 우물로 세례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할 때는 물맛이 나빠졌다 하니 자연도 순교를 슬퍼한 게 아닌가 한다.

다시 안국역으로 내려와 안국동 사거리에서 종각역 쪽으로 약500m 걷다보면 종각역 1번 출구 쪽에 있는 의금부터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의금부는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과 최창현 요한을 비롯하여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인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정하상 바오로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인 베르뇌 주교님, 볼리외 신부님과 전장운 요한 등이 하느님을 증거한 장소이다.

이 표지석에서 종로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종각역 6번 출구로 가면 바로 앞에 전옥서터 표지석이 있다. 전옥서는 형조의 지휘를 받아 죄인을 관장하던 곳으로, 성인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 등이 이곳에서 갖은 온갖 고초를 겪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옥서터에서 세종로 쪽으로 동아일보 사옥을 지나 시청방향으로 조금 가면 차로변 화단에 우포도청터 표지석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좌?우 포도청을 두어 서울과 경기지역의 순라(치안)를 맡게 했다. 대부분의 한양 순교자들은 이곳을 포함한 좌포도청으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은 후 형조나 의금부로 넘겨져 문초를 받고 서소문, 새남터 등에서 순교했다. 포도청에서 얼마나 가혹한 고문과 곤장을 당했던지 형장으로 가기 전에 돌아가신 순교자들만 1백 명이 넘는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성인 24분, 최인길 마티아 등 복자 다섯 분을 비롯해 아직 복자품에 오르지 못한 ‘하느님의 종’ 중 수십 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서소문성지

포도청에서 형조터로 가는 광화문 앞 세종대로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지난해 8월16일 시복식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광화문 바로 앞에 차려진 제대에서 교황님께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선언이 들리는 듯하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고결한 피가 묻어있는 포도청 의금부 형조 등이 가까이 있던 장소에서 그들에게 공식적인 승리의 월계관을 씌어졌다.

이 광화문 앞을 돌아 세종문화회관 북쪽 끝 보도에 박혀있는 형조터에 이르렀다. 왕의 직속기관인 의금부와 달리 형조는 의정부산하 행정실무 기관인 육조의 하나로 형벌을 담당했다. 강완숙 골롬바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 등 복자와 정하상의 동생인 정정혜 아가다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들이 포도청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종로를 거쳐 이 형조에서 또 다시 고통스런 심문을 받고 서소문, 새남터, 당고개 등 형장으로 끌려갔다.

다시 서대문역 4번 출구 쪽에 있는 경기감영터에 이르러 “하늘에는 두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한 복자 조용삼 베드로를 생각한다. 그를 위해 잠시 기도드린 후 7번 출구로 나와 경찰청을 거쳐 서소문공원에 다다랐다.

교황님께서 시복식 직전 참배한 서소문성지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들 낸 곳이기도 하다. 강완숙 골롬바를 비롯한 27위 복자와 기해박해 순교자 중 41위, 병인방해 순교자 중 3위가 성인이 된 곳이다. 강완숙 골롬바는 형조에서 6번의 고문을 받은 후 최후진술에서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연약하지만 바위보다 단단한 믿음은 성모님을 보는 듯하다.

서소문성지 건너 한국경제신문 건물좌측 약현성당에 들렀다. ‘서소문 순교자 기념성당’에는 ‘16위 성인’의 유해와 함께 ‘서소문 밖 순교자 44위 성인과 27위 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리 순교선열들은, 겟세마니 기도를 통해 모든 두려움을 떨치고 아버지 뜻에 따른 예수님처럼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써 십자가를 용감히 지고 그 영광을 차지했다.

갑자기 되새겨지는 교황님의 메시지 “그리스도 십자가의 힘을 믿으십시오”로 온 몸에 뜨거움이 솟구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9월호, 
박연근 아오스딩(서울S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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