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31: 조선 입국 탐사와 김대건의 훈춘 기행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2-27 ㅣ No.2046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31) 조선 입국 탐사와 김대건의 ‘훈춘 기행문’


맹수 득실대는 산림 뚫고 왕복 1600㎞ 대장정, 두만강 국경 탐사

 

 

해란강 전경. 중국에서는 이 강을 ‘토문하’라고 부른다. 백두산정계비에는 국경을 동으로는 토문으로 한다고 새겨져 있다. 구글 캡쳐.

 

 

신학생 김대건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1844년 2월 5일 2개월 여정으로 중국 만주 길림성 소팔가자에서 두만강 국경을 통한 조선 입국 탐사 길에 오른다. 그의 말대로라면 편도 2000리, 왕복 1600㎞의 대장정이었다. 김대건은 이 여행 보고서를 ‘훈춘 기행문’이란 제목으로 페레올 주교에게 제출했다.

 

훈춘 기행문(김대건의 아홉 번째 편지)은 김대건이 한문으로 쓴 유일한 글이다. 현존하는 김대건의 21통 편지 가운데 19통과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는 라틴어로 작성됐다. 김대건은 순교 직전 조선 신자들에게 쓴 마지막 회유문을 한글로 적었다. 김대건이 훈춘 기행문을 왜 한문으로 작성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주교님께서는 제가 떠나기 전에 제가 지나게 될 지방에 관해 정보를 수집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저 자신이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조선의 서당에서 지낸 저의 어릴 적 기억을 더듬기도 하며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훈춘 기행문 중에서)라는 보고에서 알 수 있듯, 김대건은 매일 이동하면서 수집한 정보들을 그날그날 한문으로 기록했기에 페레올 주교에게 전한 보고도 그대로 한문으로 옮기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비록 김대건의 훈춘 기행문은 한문으로 작성됐지만, 만주와 두만강 일대를 배경으로 한국인이 쓴 첫 번째 문학작품이라는 점에서 우리 민족 문학과 한국 문학사에서 재평가, 재조명돼야 한다.

 

 

엄청난 추위과 고난, 정신력으로 이겨내

 

만주 지역 2월 평균 기온은 영하 19.4℃, 최저 기온은 영하 40.5℃이다. 지금도 이런데 19세기 중반에 이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모험일 수밖에 없다. 김대건은 1842년 12월 말 거지 행색으로 압록강을 넘었을 때와 달리 이번 두만강 여행길에는 단단히 무장했을 것이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두툼한 솜옷을 입었을 것이고, 얼어 죽지 않으려면 한데서 잘 수 없으니 여행 경비도 두둑이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순교를 각오한 선교 사명이 없었다면, 교구장에 대한 순명 정신이 없었다면 이 여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대건은 무엇보다 초인적인 정신 무장이 되어 있었다.

 

김대건은 중국인 길 안내인과 함께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장춘으로 떠났다. 이후 만주 벌판을 지나 길림에 도착했고, 영고탑으로 가기 위해 성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250여㎞의 산림 지역을 통과했다. “우리는 얼마 동안 강 얼음 위를 지치며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울퉁불퉁한 땅, 군데군데 끊긴 산들, 우거진 숲, 트인 길이 없는 것 등이 여행자들에게 강 길을 택하게 합니다.…좌우로 큰 나무들로 덮인 높은 산들이 우뚝 솟아 있었고, 거기에 호랑이 표범 곰 늑대 그 밖의 맹수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습격하려고 모여듭니다. 이번 겨울에도 근 80명의 사람과 100마리 이상의 소와 말들이 이 육식 동물들에게 잡혀먹혔다고 합니다.”(훈춘 기행문 중에서)

 

김대건은 맹수들이 득실대는 산림을 뚫고 너비가 30여㎞가 되는 검은 호수를 건넌 후 음력설을 지내기 위해 한 객잔에서 2월 18일부터 일주일을 머문다. 명절에는 아무도 여행자들을 위해 맹수의 밥이 될지도 모를 숲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대건과 중국인 길 안내인은 이 객잔에 썰매를 남겨두고, 자신들이 타고 온 말에 마차를 달았다. 마차에 식량을 싣고 영고탑 인근 마련하(馬漣河)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300여㎞ 떨어진 훈춘까지는 원시림 지역으로 단독 여행은 불가능하다. 수십 명이 무리를 지어 가야만 한다. 원시림에는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 여행자들은 맹수들을 쫓기 위해 불이 꺼지지 않도록 교대로 불을 지켜야만 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태국 샴으로 가기 위해 남부 밀림 지역을 이처럼 통과했듯이 김대건도 이러한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조선에서 온 예수님의 제자들

 

드디어 김대건은 1844년 3월 초 목적지인 두만강 어귀 마을 훈춘에 도착했다. 소팔가자에서 훈춘까지 한 달이 걸렸다. 김대건은 훈춘에서 경원장이 설 때까지 8일을 기다렸다. 3월 9일 드디어 경원장이 열렸다. 2년마다 한 번, 그것도 한나절만 열리는 장이었다. 날이 밝자 김대건은 중국인 길 안내자와 함께 서둘러 경원장으로 갔다. 손에는 흰 손수건을 들고 허리띠에 붉은색 작은 차주머니를 차고 군중 가운데로 걸어 다녔다. 말에 물을 먹이러 읍내에서 300보 떨어진 개천으로 갔을 때 조선인 한 명이 김대건에게로 와서 “한(韓)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라며 말을 걸었다.

 

조선 신자 4명은 한 달째 경원에서 김대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김대건에게 조선 교회 상황을 설명하면서 “선교사 영입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두만강보다 압록강 변문쪽이 덜 위험하다”고 말했다. 폐장할 시간이 되자 김대건과 조선 신자들은 작별 인사를 하고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김대건은 죽음의 여행길을 무사히 되돌아와 페레올 주교에게 이 과정을 상세히 보고했다.

 

문제는 경원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사학계에서는 경원이 오늘날 함경북도 경원군 경흥이라고 소개해 왔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우리 민족에게 반도사관을 주입시키고자 만든 「조선사」에서 경원부 위치를 오늘날 함경북도 경흥 지역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현재 두만강으로 국경선이 확정된 것은 1909년 간도 협정에 의해서다. 역사학자들은 이 협정으로 두만강 이북의 한국사 관련 지명들이나 역사가 모두 현재 두만강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일제는 만주철도회사의 후원을 받아 1913년 출간한 「조선역사지리」에서부터 이 경계로 조선의 국경을 표시했다. 이전까지 조선의 국경은 두만강 지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에 최근 학계에서는 조선 시대 함길도 경원부가 고려 시대 공험진 자리라는 주장이 거세다. 공험진은 지금의 두만강 넘어 120여㎞ 떨어진 연변 해란강 일대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지역을 포함하는 너른 지역이다.

 

좀더 들어가 보자. 조선 시대 경원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태조실록」과 「태종실록」, 「세종실록」에 남아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자신의 근거지였던 함길도 북단 공주(孔州) 땅에 1398년 도호부를 설치하고 ‘경사의 근본이 된 땅’이라 하여 ‘경원’(慶源) 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북쪽 국경선이 되는 최북단 행정구역인 경원도호부에 관해 「세종실록지리지」는 고려 시대 윤관이 여진을 토벌하고 쌓은 9성 중에 가장 북쪽에 자리한 공험진 일대라고 밝히고 있다. 경원도호부는 두만강과 수빈강 사이에 있고, 경원부 현성은 두만강을 건너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했다. 현성을 출발점으로 서쪽 두롱이현까지 15㎞, 서북쪽으로 오음회까지 47㎞, 동북으로 선춘현까지 275㎞, 북으로 공험진까지 275㎞에 이른다 했다. 「세종실록지리지」가 경원부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이유는 세종 때에 조선과 명나라, 여진의 국경선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길림성과 흑룡강성 경계 어디쯤으로 볼 수 있다.

 

- 조선 시대 북쪽 국경과 지금의 한반도 두만강 국경은 다르다. 따라서 조선시대 경원도호부에 관한 연구가 요구된다. 지도는 대동여지도 중 경원부 지역 지도이다.

 

 

조선 신자들 만난 경원은 어디인가

 

조선 초기 경원부는 여진족으로부터 자주 침탈을 당했다. 그래서 태종은 1406년 이곳에 무역소를 설치하게 하고 여진족과 소금과 쇠를 거래하게 했다. 그리고 아버지 태조의 조부모 묘인 안릉과 덕릉을 함주로 옮기게 했다. 세종 역시 국경을 지키기 위해 경원부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도록 했다.

 

경원도호부에는 몇 개의 물줄기가 있다. 그중 오늘날 연변에 중국에서는 ‘토문하’라고 하고 조선에서는 ‘해란강’이라고 부르는 강이 있다. 조선 관리들은 토문하를 ‘두만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해란강의 한 줄기가 지금의 두만강 하구로 이어져 있다. 1712년 조선과 청이 세운 백두산정계비에도 국경을 ‘동으로는 토문으로 한다’고 분명히 쓰여 있다. 토문은 지금의 두만강과 엄연히 다르다. 복기대(인하대 융합고고학) 교수를 비롯한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두만강 유역은 험준해서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기에 옛날 여진족들이 중심 거주지역으로 두만강 유역으로 보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신학생 김대건이 조선 신자들과 만났던 경원의 위치에 관해서 다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김대건이 건넌 두만강이 지금의 두만강인지, 해란강을 일컫는 토문강인지 말이다. 그리고 무역장이 열렸던 경원이 어디인지 말이다.

 

아울러 김대건이 목숨을 걸고 여행했던 이 지역이 100년 뒤 프랑스 선교사들이 아닌 독일의 수도승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도 기억할 일이다.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과 연길수도원 수도자들이 원산대목구와 연길대목구에서 펼친 복음 선교 여정이다. 지금의 두만강 일대에서 가장 가까운 육도포성당은 원산대목구에서 처음으로 세운 성당이자 가장 먼저 사라진 성당이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후 대한독립군의 활동지인 육도포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곳 초대 주임 신부인 루치오 로트 신부는 이후 오랫동안 덕원수도원 원장으로 소임을 하다 6ㆍ25 전쟁 때 평양에서 공산군에게 총살돼 지금 시복 청원 중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2월 25일, 리길재 기자]



1,19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