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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8: 강화 심도직물 사건과 한국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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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06 ㅣ No.721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8) 강화 심도직물 사건과 한국 천주교회


천주교회, 노동자 권익 옹호 위해 일어서다!

 

 

1960년대 말 전 미카엘 신부 등 사제들이 본당 JOC팀 회원, 견직 공장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1965년 11월 23일 강화성당. 메리놀 외방 전교회 전 미카엘(Michael Bransfield) 신부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지금은 YCW로 약칭) JOC 서울대교구 회장 송옥자(마리아 고레티)씨가 강화 직물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팀 모임을 하고 있다.


열약한 노동환경 개선 위해 나서다

프랑스어로 ‘젊은 그리스도인 노동자들’(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을 뜻하는 JOC 여자 예비팀은 강화 직물업체들의 노동 환경을 관찰하고 판단하고 깨달은 것을 실천해 나갔다. 팀 모임 참가자는 송화자ㆍ강은화ㆍ이민자ㆍ박은옥ㆍ조옥희ㆍ이재옥ㆍ유상숙ㆍ정숙자ㆍ윤기순ㆍ김화숙ㆍ이옥수ㆍ문 요안나 등으로, 이들은 이듬해 8월 투사 선서를 한다.

이들은 1967년 5월 14일 메리놀 수녀회가 운영하던 그리스도 왕 의원에서 분회장에 함덕주, 부녀부장에 윤기순씨를 뽑고, ‘섬유노조 심도분회’를 결성한다. JOC와 메리놀 수녀회 수도자들의 협력, 노동자들의 노력이 삼위일체를 이뤄 한국 천주교회 사회사목 활동의 효시로 꼽히는 노동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은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노조가 결성된 지 7개월 만인 1968년 1월 심도직물 노조원들과 박부양 노조 분회장이 해고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한국 JOC는 교회와 함께 신앙과 정의에 근거해 적극적으로 이 사건에 응답한다.

강화 심도직물(주) 노동자들은 왜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운동에 나섰을까? 21개나 되는 직물회사가 들어찬 ‘섬’에서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공휴일 전날 야간 조는 24시간) 노동과 격무에 시달렸다.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도 다반사였고, 한 달에 두 번 쉬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스도 왕 의원에 드나드는 직물공장 노동자들 사이엔 결핵이 만연했고, 결핵 환자 가운데 20%는 2기 중환자였다. 이처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종업원만 1200여 명에 이르는 심도직물 노조 설립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이 본격화한 것이다.

1960년대 말 강화본당 주임 전 미카엘 신부와 사제들이 함께한 가운데 강화본당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이 팀 모임을 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노조 탄압이 시작되고

JOC 회원들을 중심으로 노조를 결성하자 심도직물 등 업체들은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노조를 해체하려 했다. 노조의 합법성을 거론하며 단체협약 체결을 거부했고, 노조원들에게는 탈퇴나 휴직을 강요했다. 당시 JOC 회지 「활동」이나 「노동청년」에 따르면, 업체 측은 근무 시간에 1명씩 불러내 노조 탈퇴원서에 도장을 찍을 것을 강요했고, 노조의 핵심이던 JOC 회원에게는 실이 잘 끊어지는 기계를 배당하거나 기계 2대를 1명에게 맡기는 식으로 불이익을 줬다. 그러던 중 함덕주 분회장을 휴직 처분해 분회장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한 뒤 자신들이 요구하는 박부양을 분회장으로 선출하게 했다.

하지만 박 분회장 역시 노조원들의 참된 대표로 일하겠다며 마음을 바꾸자 그 역시 해고했다. 1968년 1월 해고당한 박 분회장의 해명을 듣기 위한 집회가 열리자 경찰은 박 분회장과 JOC 회원들을 연행한다. 이어 심도직물 사장이던 김재기, 심도직물 간부들,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이던 김재소, 강화경찰서장, 정보계장 등은 전 미카엘 신부를 찾아가 그가 노조를 선동하고 기업운영에 간섭하며 노동자들에게 불온사상을 주입했다고 비방하면서 반공법으로 구속하겠다고 협박하고 나서 무기휴업 공고를 써 붙이고 공장을 폐쇄했다. 여타 직물업체들과는 JOC 회원 고용 거부와 함께 “전 미카엘 신부는 사상적으로 의심할 바가 있다”는 등 7개 결의안을 발표했으며, 노조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노동자 90명에게는 각서와 경위서를 받기도 했다.


심도직물 사건 해결 위해 나선 교회

이처럼 강화 심도직물 노조 결성 사건이 사회에 표면화되자 JOC 회원들과 전국 지도 신부들도 이들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67년 5월 제2대 JOC 총재에 취임한 김수환(당시 마산교구장) 주교도 심도직물에 노조가 결성된 이후 강화도를 방문해 외국인 천주교 사제단과 성공회 리처드 신부, 감리교 소속으로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던 조승혁 목사, JOC 회원 등과 함께하며 좌담회를 갖고 대책을 세운다.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 또한 1968년 1월 18일 자로 발표한 특별 메시지를 통해 “모든 사람이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 임무를 이해할 때에, 또 그들이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할 때에 비로소 하느님의 뜻대로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교회가 사회에 대한 가르침을 더 잘 파악하는 기회로 삼고 하느님께 강화사건에 대해 정의로운 해결을 내려 주시도록 간청해달라고 당부한다.

한국 주교단도 그해 2월 9일 임시 주교회의를 통해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한다. 성명서가 발표되고 나서야 정부는 사태 수습에 나서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심도직물 노조 사건은 우리나라 사회정의와 노동자 인권 신장에 획기적인 계기가 된다. 이 사건은 이후 전개된 교회 노동사목은 물론 사회사목 활동, 나아가 민주화와 인권 운동, 현실 참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6일, 오세택 기자]



강화 심도직물 노조 결성에 큰 기여한 송옥자씨


“혹사당하는 노동자 외면할 수 없어”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은 교회와 사회, 언론에서 다양한 반향을 불러 일으킨 데 그치지 않고 가톨릭 교회가 사회사목에 투신하는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회고하는 송옥자씨. 오세택 기자.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은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으로서 노동 현실과 문제를 복음에 비춰 관찰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JOC 서울대교구 회장으로 활동하던 송옥자(마리아 고레티, 74)씨는 “강화의 여성 노동자들과 팀 모임을 함께하면서 노동자들이 겪는 문제에 어떻게 응답할지 성찰하는 기회가 됐다”고 말문을 뗐다.

“딸 셋만 있으면 부자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많았던 강화도에서 그는 어떻게 하면 연약한 여성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도록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이들이 일하는 직물업체들의 열악하고 가혹한 노동 환경과 조건을 보고 듣고 판단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이 이 같은 여건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돕는 데 함께 연대했고, 2년여 노력 끝에 노조를 결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는 노조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한동안 강화성당 밖으로 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도 했다.

“1965년 말만 해도 강화도는 다리가 없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는데, 참 힘들게 다니며 여성 노동자들과 팀 모임을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네요. 그때는 숱한 노동자들이 해고당하고 경찰에 연행되며 부당행위를 당했어요. 지독한 가난 때문에 먹지도 못하고 혹사당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지요. 그럼에도 교회의 관심과 배려 속에서 연약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하며 노동운동에 동반할 수 있었다는 데 지금까지도 보람과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노동 문제를 사회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으며 한국 천주교회 사회사목의 토대이자 기반이 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를 계기로 국제가톨릭형제회(AFI)에 들어간 그는 강화 여성노동자들과 팀 모임을 계속하다가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주목해 사회복지를 하게 됐다며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을 시작으로 이후 20여 년간 매 맞는 여성이나 성매매 여성, 에이즈 환우, 장애인 등 소외된 형제자매들을 돕는 사회복지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도 강화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했던 연대 덕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에서 퇴직한 뒤 카자흐스탄과 캄보디아 등지에서 선교하기도 한 그는 “지난 5월 인천교구에서 강화 심도직물 노조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과 표석을 세우는 걸 보며 교회가 그 정도로 강화사건을 중요시하고 있구나 싶어 내심 무척 기뻤다”고 덧붙였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6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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